|
진실을 보는 눈 (막28)
찬송 : 약한 나로 강하게
본문 : 막6:30-35절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다. 어떤 기분이든, 어떤 모습이든 그 어떤 것으로 살 수 없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것은 없건만 근자에 많은 분들이 생명을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어제도 한 정치인의 자살 소식이 있었다. 누구도 모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목사로서 이 사회의 이런 안타까움에 많은 책임감을 느끼며 하나님앞에 죄송하다. 거룩한 빛과 소금으로 이들에게 희망과 보루가 되어드렸어야 하는데 ... 주님, 이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이 종을 지도해 주실까?
본문에는 전도의 일을 마친 제자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쉼을 주시려고 하시는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예수님께로 달려와 쉼을 방해하고 또 다시 사역케 하신 사건이 나온다. 31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리더는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며, 사람을 키우려면 제자들의 삶의 아픔과 내일을 알아주고 책임을 지며 이끌어 주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사랑으로 이끄시는 참 리더이시다. 그는 전도의 일을 마치고 보고한 제자들을 향해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시며 친히 그들을 이끌고 가신다. 지금으로 말하면 휴가를 주신 것이다.
다만 짧은 공생애기간 제자들을 세우고 하늘로 가셔야 하기에 제자들과 떨어지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시는 모습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와 한적한 곳이 아니라 그 어느 곳보다 붐비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 잠시 제자들과 한적한 빈들에서 쉼을 가지려 했지만 이런 생각이 완전히 무산되었다. 33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제자들도 세워야 할 영혼들이다. 이들에게는 지금 무엇보다 쉼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판단도 아니고 예수님의 판단으로 결정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겨났다. 바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이들이 휴가를 방해하며 나타난 것이다.
이 순간 예수님은 리더로서 자신의 제자들을 향한 휴식과 사모하며 빈들까지 달려온 무리 사이에 무엇이 좋은지를 선택하셔야 하였다. 무리를 돌려보내고 제자들에게 휴가를 주시는 것과 그 휴가의 시간을 더 소중한 삶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을 보여줄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 것이다.
인생은 결국 선택이다.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하는 이 결단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여주심으로 선택이란 삶의 자리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예수님은 이곳에서 가르치신다.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여기 예수님의 선택을 결정시킨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목자 없는 양’이란 무엇인가? 양은 그 어떤 공격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도망할 뛰어난 다리도 가지고 있지 않고 더구나 자신을 방어할 보호색조차 없는 목자 없는 양은 그야말로 모두의 밥이 되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을 빈들까지 사모하여 찾아온 그러나 제자들의 소중한 휴가를 방해한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이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다. 제자들의 쉼과 이들의 목자 없는 양 같음 사이에서 예수님은 선택의 기준으로 더 약함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신다.
평생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제자들을 위해 휴식을 보장해 주는 모습이 예수님 입장에서는 더 소중하게 보이는 순간이다. 반면 이들은 또 훗날 자신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그런 무리에 불과허건만 예수님은 이 선택의 순간 팔이 안으로 굽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시며 오직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선택하신다.
사람은 눈은 정확하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는 무리를 보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음’이 보이지 않고 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보이기 쉽다. 나도 가끔 쉼을 가지고 있을 때 급한 전화를 받곤 한다. 그러면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들려지지 않고 내 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생각할 때가 있었다. 아니 그런 순간이 많았다. 아마도 제자들 중 대부분은 이들이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만져주시며 가르치시되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시고 여러 가지로 날이 어두워지도록 이들을 가르치셨다. 이런 순간에 형식적으로 대하기가 쉬운 때인데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셨기에 형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느라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며 날이 저물어가는 줄도 모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다. 사랑!
오늘 내게 들려주시는 묵상의 재료이다. 인생은 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이 내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듣느냐에 있다. 그런데 사람의 눈과 귀는 온전하지 못해 선입관에 빠져 진실과 내면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여기에 선택을 해야 하는 인간의 안타까움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리더도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에서 ‘목자 없는 양 같음’이 보여지는 리더가 얼마나 될까? 목사이기에, 또 자리 때문에, 체면 때문에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형식적이 되어버린 모습은 아닌지 ...
오늘 제자들에게 최고의 레슨을 주시는 예수님의 삶이 내게 큰 울림을 가지고 들려지는 아침이다.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수많은 소리를 듣고 본다. 그런데 바쁨과 밀린 일들로 인해 그리고 나의 계획들로 인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형식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주님은 내 가슴을 두드리며 물으신다. 오늘 ‘목자 없는 양 같음’을 가진 이웃이 보이느냐고 ...
소중한 이웃들이 내 삶의 방해꾼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냐고 주님은 물으신다. 아니 심지어 가족조차도 내 쉼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보여지는 현실이 되고 있지 않느냐고 주님은 내 마음을 겸손히 두드리시며 물으신다.
목자 없는 양 같은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 또 들어야 예수님처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어제 자살한 정치인 그 전날 방송에 출연하여 아주 활동적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아무도 그 사람이 자살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그가 목자 없는 양 같은 영혼임을 봐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죽었던 것이다. 오늘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선입관, 내가 가진 일정, 관성의 법칙처럼 앞을 향하기만 하는 시선들이 이렇게 오늘도 사모함으로 예수님을 찾는 영혼들에게 있는 ‘목자 없는 양 같음’의 아픔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임을 자백하게 된다.
오늘이란 시간, 내 바쁨과 일정을 넘어 하나님께서 붙여준 소중한 영혼들을 주님의 시선으로 봐줄 수 있고, 손잡아 드릴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분명 나는 예수님처럼 잘 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주님을 붙들고 내게 보내주신 분들을 내 일을 핑계하지 않으며 겸손히 최선을 다해 주님처럼 보기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하루가 되련다.
주님, 이 종의 눈을 열어주소서. 목자 없는 양처럼 오늘도 방황하며 나를 붙들어 달라고 외치는 이들의 소리와 저들의 피곤을 듣고 볼 수 있게 하소서. 주님 진정한 신문지 한 장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