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신산리 441-1번지(신산중앙로32번길5)
현해남의 본명은 현방담이며 1917년 신산리에서 태어났다. 현방담은 찢어질 듯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11살 어렸을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방공사장 등에서 고된 막노동을 했고 “말랑말랑한 현미 빵 사려!” 하고 외치며 다니는 행상을 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본소(本所)실업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초 동경의 겨울밤거리를 배회하던 빵 장수 현방담은 우연히 ‘가’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복싱을 테마로 한 영화로 스크린과 링의 대 스타 아카야 마사유키(赤屋正行)가 특별출연하고 있었다. 아카야는 ‘일본 복싱의 어머니’로 불리는 유명인으로 ‘일본 복싱의 아버지’인 와타나베 유지로(渡辺勇次郎)와 쌍벽을 이루는 선구자다. 요즈음의 쿵푸 영화같이 청소년들의 인기를 끌던 복싱영화의 하나인 ‘가’를 본 현방담은 그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후 두 주먹만으로 입신출세한다는 스토리에 감명을 받고 스스로 복싱 입문을 결행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아카야의 체육관이었다. 현방담은 단순히 복싱선수가 되겠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제2의 아카야’를 꿈꿨다. 현방담 자신도 막노동을 하며 거칠게 자란 불우 소년답지 않게 얼굴이 고운 미소년이었다. 적당한 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하며 갸름한 얼굴 등 어느 모로 봐도 대 스타 아카야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복싱만 배워 챔피언이 된다면 스크린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복싱배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아카야 사범의 지도로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현방담은 가히 천재적인 재질을 발휘했다. 10살이 넘자마자 제 몸통만한 바위 덩어리를 나르는 사방공사에서 땀을 흘렸고, 밤이 되면 매일 수십릿 길을 헤매는 행상을 했으니 강인한 체력은 이미 저절로 길러놓은 셈이었다. 현방담은 머리가 영특했고 몸이 빠르고 유연했다. 신장에 비해 리치가 긴 것도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1935년 일본 권투회(拳闘會)에 입회했다. 복싱 선수로 데뷔하면서 해남이라는 링네임을 붙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사나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복싱 입문 약 반년만인 1935년 11월 제2회 전일본복싱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현해남의 데뷔무대였다. 약 보름간 계속된 예선에서 현해남은 승승장구, 놀라운 신인탄생의 선풍을 일으켰다. 첫 경기에서 장남명남을 3회 KO로 물리치더니 증촌설일, 목야맹, 야기진홍, 관재 등 일본의 중견 선수들을 파죽지세로 연파, 대망의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중앙일보 1982.05.12.) 이듬해인 1936년 1월 5일 전일본권투선수권대회(이 대회는 1935년에서부터 1936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라이트급에서는 김은성이 우승했다.) 밴텀급에서 우승했는데 그 때 현해남은 수상식에서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이 순간은 스포츠 오락을 넘어 ‘조권’(朝拳=조선의 주먹)의 혼을 드러내는 절정이었다. ‘조권’은 일제강점기 민족혼·애국심과 동의어였다.(한겨레21 2016.05.13.)
1937년 3월 6일 일본인 오이케(小池實勝)를 꺾고 페더급 참피언을 차지하였고 1938년 동양 페더급 선수권대회에서 선수권을 획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수련을 쌓았는데 3체급을 석권한 헨리 암스토롱과 빅 이벤트를 추진할 정도로 세계 강호대열에 우뚝 섰다. 1939년 일본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해 6월 29일 일본 복싱의 ‘권성’(拳聖) 이라 불리며 63승 1패 6무를 기록한 피스톤 호리구치(掘口)와 빅 매치를 펼친다. 이 대결은 관객의 혼을 빼앗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할 정도로 대단한 타격전이었다. 결국 현해남은 12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일본이 떠들썩하였고 ‘복싱 명인’이란 찬사( https://www.thecolumnist.kr/news/articleView.html?idxno=2675)를 듣는가 하면 ‘동경의 태풍’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이로써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크게 높여 주었다.(2005, 성산읍지)
조선중앙일보(1936.06.09.)에 마닐라發로 “현해남 선수 판정승” 기사(한국근대사료DB)가 있고, 부산일보(1940-04-25 석간)에 “권투선수 현해남(玄海男)이 오다 ; 오늘 아침 입항한 연락선으로”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ChatGPT)
당시 한국인은 피압박 민족으로서 일본인들에게 핍박을 받던 때(“피를 흘리면서도 싸우고 다운돼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권투정신은 우리 청년들이 의당 본받아야 할 훌륭한 정신이다. 남성답게 씩씩하게 싸우라. 비겁하지 않게 정정당당히 스포츠맨십으로 싸우라.” 몽양 여운형의 어록이다. 몽양 여운형은 한국 체육의 선구자로 “권투 해서 일본인 맘껏 패라”며 조선청년들을 자극했다. 여운형이 권투에 빗대 조선청년들을 자극한 대로 일본선수와 벌인 권투 경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다. 권투선수들은 울분의 주먹을 날렸고 조선인들은 조선선수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쌓인 한을 녹였다. 일본인 킬러의 대표적인 조선 권투선수는 황을수, 이규환, 서정권 등이다. 이들은 일본 선수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황을수는 1929년 전 일본아마추어선수권대회 라이트급 최강자로 올라선 후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마니아타임스 2020.11.02.))라 현해남의 일본 권투계 석권(현해남보다 앞서 주먹으로 일본을 평정한 대표적인 복서는 서정권이다. 조선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황을수에게 권투를 배우기도 했던 서정권은 아마추어 최강자로 1930년 전일본대회 결승에서 일본 최고의 주먹이었던 고토히로를 1회 KO로 끝냈고 일본의 우상이라고 했던 후리구치마저 4회 KO로 보내 ‘복싱의 신’으로 불렸다. 그의 주먹은 일본선수를 만나면 더욱 불을 뿜었다. 호남 부호의 아들로 모자람이 없었던 그가 권투를 배우게 된 것도 얄미운 일본인을 마음껏 패주고 싶어서였다. 아마추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었던 서정권은 1931년 4월 프로로 전향했다. 일본 권투계는 조선 신인선수의 기를 꺾기 위해 그의 데뷔전에 경량급 최강자인 가시와무라 고로를 내세웠다. 그러나 고로는 싸울 새도 없이 1회 1분만에 나가떨어졌다. 서정권은 1년간 일본선수 상대로 27전 27전승 11KO를 기록, 일본 권투계를 완전히 평정했다.(마니아타임스 2020.11.02.))은 대단한 것이었다. 1938년 당시 일본에서 집결해 활약하고 있던 조선 출신 선수들은 전일본 복싱계를 완전히 제압하였다. 주요 선수로는 김정섭, 심상욱, 현해남, 박용진, 김은성, 노진찬 등이었으며 아마추어에서는 김인태(플라이급), 김명석(밴텀급), 정복수(페더급), 강인석(라이트급), 최용덕(웰터급)등이 일본선수권을 쟁취, 마닐라의 극동대회에 참가하였다. 1939년 1월 아마추어선수들이 필리핀에서 개선하고 조선인 출신 프로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https://blog.naver.com/sekaijin/100015629640)
우리나라에서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安昌男), 굴렀다 보아라 엄복동(嚴福童), 달렸다 보아라 손기정(孫基顧), 쳤다 보아라 현해남. 만세! 만세! 만만세!”라는 유행어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안창남은 비행기 조종사로, 엄복동은 자전거로, 손기정은 마라톤으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다.(2005, 성산읍지)
2021년에는 KBS가 ‘우리가 몰랐던 제주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복싱계를 주름잡은 ‘조선의 주먹 현해남’을 방송하기도 했다. 1994년에 돌아가셨다. 현해남 선수의 생가 터에는 건물이 없다.
《작성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