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강론>
(2024. 3. 18. 월)(요한 8,1-11)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요한 8,3-8).”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라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이야기이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앞의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서 인간들이 마음대로 죄인을
단죄하고 처벌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신명기 17장에 있는 율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 반드시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그를 죽일 수 있다. 증인 한 사람의 증언으로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증인들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신명 17,6-7ㄱ).”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에 ‘죄 없는 자’ 라는 말을 추가하셨는데,
이 말은, “혹시라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있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도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할 죄인이고,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실상 “돌을 던지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1-3)”
그런데 우리는 이 가르침을,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더라도, 또는 죄 속에서 사는 것을 보더라도
못 본 척 하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선’을 실현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의 실현을 위해서
죄와 악을 막고 물리쳐야 합니다.
특히 ‘사회악’에 대해서는, 선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심판과 처벌이 아닙니다.
회개하도록 타이르고 인도하는 것이
선을 실현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또 남을 회개시키려면 우선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일은,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17장 13절,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에 연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땅에 죄인들의 명단을, 또는 죄인들이
지은 죄목들을 쓰셨다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쓰셨느냐가 아니라, 침묵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9-11)”
사람들이 모두 말없이 떠나갔다는 것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도 죄가
있다는 뜻은 아니고, 당신은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가거라.”는 “가서 ‘새 인생’을 살아라.”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일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 라는 것을 나타내고,
즉 완전히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처벌을 잠시 보류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돌아가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살았을까?
그 뒷이야기를 우리는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미완성이고,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만일에 여자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또 죄를 짓는다면,
집행이 유예되었던 처벌까지 합해져서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산다면
완전히 용서받고, ‘무죄 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가거라.”는 “가서 ‘새 인생’을 살아라.”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일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 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