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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은 쿠데타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군부가 물리력으로 合憲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점에서 쿠데타이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 세력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은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趙甲濟
인사 청문회 때 자주 등장하는 질문은 '5‧16을 쿠데타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이다. 쿠데타든 혁명이든 물리력에 의한 憲政 중단임에는 같지만 한국인들은 혁명이란 말을 좋아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이런 것이 아닐까? '5‧16은 군부가 물리력으로 合憲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점에서 쿠데타이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 세력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은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지속적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前者는 법률적 평가, 後者는 前者를 포괄한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그런 뒤 아래 자료를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도 과거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南美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낫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낫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 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 2800달러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 기준 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이다.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60년대에 한국은 후진국을 벗어났고, 1970년대 말에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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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박정희는 5‧16을 어떻게 보았나?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守舊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盲信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4‧19와 5‧16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 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守舊的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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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丁 2015-03-19 오후 9:32 |
쿠테타든 혁명이든 民草들은 이름에는 관심 없다. 어서 빨리 또 한번 일어났으면 하고 鶴首苦待 할 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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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 2015-03-19 오후 6:25 |
5.16은 쿠데타인가? 라는 질문과 정확히 동격으로 5.18은 폭동인가? 라는 질문이 있다. 둘 다 사건의 형식에 관한 질문이지 그 사건의 정치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5.16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은 민족국가의 팔자를 뒤바꾼 혁명이었음을 국민 모두가 눈으로, 귀로, 또 삶으로 수십년 내내 느끼고 있지만, 5.18 폭동은 그 역사적 의미가 무엇일까?
일제시대, 4.3, 5.18 등등 역사가 된 사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얘기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문제는 정치권력이 그걸 제멋대로 의미부여해 버린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전혀 문명국가, 민주국가 답지 않는 정치인들의 작태가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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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enee 2015-03-19 오전 1:01 |
쿠테타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군변, 무신의 난 쯤 되는건가요 5.16은그냥 혁명으로 가죠 그것도 성공한 이런 글도 있네요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cacomfort&logId=65164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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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날개 2015-03-18 오후 9:17 |
다 말장난 입니다. 쿠테타는 쿠테타,,,,군사정변일 뿐이고, 공산주의자들은 특히나 이 용어 보다는 혁명(revolution) 이란 말을 즐겨쓰더군요. 큐바의 카스트로도 혁명, 스탈린도 혁명, 모택동도 혁명, 김일성도 혁명,,,특히나 북조선은 혁명이 아직도 덜 끝났는지 무슨 사업 할 때마다 혁명 이란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 우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란 단어 쓰지말자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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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1518 2015-03-18 오후 8:55 |
조갑제 대표의 이같은 주장은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께서도 하셨던 주장이다. 두 최고 언론인들의 주장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5.16, 시작 or 수단은 '쿠데타'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분명 '혁명'이다." 종북공산좌익세력은 시작 or 수단만 보려고한다. 그리고 말한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라고. 이 쯤 돼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결과는 혁명이었고, 지금의 자유대한이란 사실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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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보다가 2015-03-18 오후 3:56 |
덧붙인다면, 나라를 변화시키고자했던 516 거사는 시작은 전체국민/민중의 지지가 없었고 소수 주도세력인점을 감안하면.. 시작은 굳이 '혁명'이 아닌 '경장' 정도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지만...무력을 동원하다보니 쿠테타였고 , 당연히, 결론은/치적은 '근대화혁명'으로 귀결되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듯...
대다수의 국민/민중의 지지로 인한 거사로서, 혁명이라고 칭해도 무방한 것은 , 419 이며, 다소 과장되게 나아가서 혁명에 가까운것은 , 부마향쟁/87년 직선제쟁취 정도이고, 다소 역사적으로 확대하면 일제에 맞선 삼일운동/조선의 탐관오리에 대항했던 동학란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대한민국의 마지막혁명은...김씨왕조에 대항한 이북동포들의 궐기가 되어 자유대한민국으로의 남북통일이 되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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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보다가 2015-03-18 오후 3:39 |
조갑제 대표로서는 박정희대통령의 공을 역사적영웅으로 만든 일등공신임이 틀림없고... 이와 같이 결론내리는데 대해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보수의 대표주자인 김동길/류근일 선생을 포함한 이미 이러한 결론에 공감해 왔음에도 거의 혼자서 ( 일부 보수논객포함 ) 516 을...시작부터 쿠테타가 아닌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사실 억지)을 해 왔다.
이는 박정희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하여 김문수/서경석등 보수우파들의 수없는 언급의 영향도 있었음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촌철살인의 군더더기 없는 논거전개에서도 , 조갑제 대표의 한가지 약점은 공과를 구분하여 평가하지 않고 개인에 대한 조건을 따지지 않는 숭상/지지 경향이 있어 왔는데... 오늘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서, 결코 대한민국의 경제 초석을 닦은 박정희대통령의 영웅적 사실이 전혀 손상됨이 없다는 것. ( 신격화가 아닌 영웅화로 충분 )
진작 이런식의 논거제시를 했더라면 어쩌면 극우보수로 낙인(오해)받지 않고 오늘날 조갑제대표의 한마디한마디 언급이 전 언론에 인용되는 상황이 오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 본다.
수년간의 논거를 보면 참으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 김대중에 협력한 김종필/박태준/정주영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송이 많이 줄었고) 이적행위라는 율곡비리/쿠테타/부정부패 등, 오로지 '3저 현상'으로 경제성장의 치적( 운?) 외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공적이 없는 전두환에 대한 무한애정만 없어진다면, 그야말로 보수의 보루로서 ,종북주의를 소탕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자하는 보수애국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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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 2015-03-18 오후 3:31 |
쿠데타는 혁명의 부분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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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과오답 2015-03-18 오전 11:16 |
결국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에대한 답변은 양쪽 다란건대 이런 답변은 하나 마니다
왜냐면 문의한자도 그걸 몷라서 물어 본것은 어니고 어느것이 정답인가에 관한 문의 라는거
헌대 이런 답변을 한다는것은 결국 답변을 하지 않은것이나 같다 논리에는 결과가 있어야 하는대 이건 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