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이라고 공장식구들끼리 삼계탕을 먹으러 갔어요. 바로 옆집이 삼계탕집이고 만,
'예약'을 길 건너 자장면 집으로 해놔서 왜? 하면서 갔는데 웬걸, 중 닭이 통째로
나왔으니 운수대통입니다. 저는 닭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데 안성 내려오고부터
가끔 치킨이나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초복 땐 수박 한통 먹고 때웠는데 그래도 중복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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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을 먹네요. 사모님, 고마워요. 간헐적으로 뜨는 볕 때문에 햇빛차단에 펑크가
나서 보물 비주얼이 상당부분 상했을 것 같습니다. 제 마지막 보루를 이렇듯 막 관리
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1년 반 동안 안성 8경을 하나씩 접수해가고 있어요. 오늘은
‘석남사‘를 가기 위해 칼 퇴근을 했습니다. 안성 8경은 미리네 성지, 칠 장사, 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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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고삼호수, 서운 산, 비봉 산 일출, 금강호수, 석남사인데 시에서 안성맞춤
랜드와 팜 랜드를 새로 개발해 안성 10경으로 만든 모양입니다. 그동안 틈틈이 발품을
팔았고 만 석남사, 미리네, 팜 랜드 3곳은 아직도 포스 팅을 하지 못했습니다.
미리네 나 팜 랜드는 단풍 때 가려고 아껴둘 참입니다. 주말에 '서운 산'을 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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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로 가는 능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운 산'이 입장에 있을까요? 안성에
있을까요? 두 지역 간 입장 차가 있겠으나 그렇다고 너무 자기네 입장만 주장하면 입장이
곤란한 입장입니다. 아시다시피 서운 산이 입장에도 있고 안성에도 있거든요. 입장 분들은
안성 인들 입장 난처하게 너무 자기 입장만 생각하지 마시라. 혼자서 5시간 완주가 엄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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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 않아서 이번엔 안성 마둔 저수지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나비가 12분 거리입니다.
농협마트에서 500원짜리 물 한 통을 사고 고고 싱! 여름이라 호수 외에 볼 것이 없었어요.
마둔 저수지방향 국도 길을 달리다가 석남사와 아무개 절 비석 푯말이 보이면 우측
길로 들어서1km를 가야 ‘석남사‘가 나오는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다리 건너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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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나하고 가보았어요. 열무국수, 해장국 파는 곳이 있었고 한500m정도 길 따라 올라
갔더니 민가가 군데군데 계속 이어지더이다. 흡사 리틀 '평창 동' 길 같았습니다.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는데 주지승이 합장을 하면서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합디다.
속으로 나는 불자가 아니라서 그냥 간다며 도망치듯 절간을 빠져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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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아마도 비 메이커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급빌라가 빠르게 군락을 만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석남사'는 메이커라 민가를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로컬 유원지가 그렇지만 '석남사'도 평일 오후에 산행을 올 일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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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세끼 한 마리도 못 봤습니다. 소피가 마려워서 내린 짐에 텐트치고 야영하기 좋겠다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주차장에는 공사장 인부들이 타고 왔을 것 같은 차량들 서너 대와
포크레인이 널 부러져 있을 뿐 인간들을 볼 수가 없는 것이 도깨비 산이 맞나 봅니다.
여기도 대웅전이 공사 중입니다. ’청룡사’도 공사 중 ’죽주산성’도 공사 중, 온통 공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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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말 모양입니다. 그래도 왔으니 인증 샷은 해야겠지요. 공유 나오는 도깨비 촬영을
이곳에서도 몇 컷을 찍었는지 기왓장하고 도깨비 방망이 프로메이드를 전시해놓았어요.
어느 유식한 양반이 그러는데 한강과 금강이라는 큰 강을 좇아 제 이름 길을 내딛는 곳.
한남정맥은 곧 수원 광교 산, 김포 문수 산으로 줄달음치고 금북정맥은 안성 서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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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광덕 산으로 굼틀거리며 청양 일월산, 예산 덕숭 산을 넘어 그 몸을 서해로
떨어뜨린답니다. 지도를 펼 때 한강 아래 중부권을 남북으로 나누는 산줄기, 즉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름하는 산들이 바로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의 높은 산들입니다. 오래 전
‘사회과부도’에서 보았던 이름 ‘차령산맥’은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금북정맥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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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가 바로 차령이니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지만 실제로 걸음을 디뎌
보면 속리산을 거치지 않고 백두대간의 한 마루 금에서 그려져 나온 차령산맥의 산과
산들이 강을 건너 어떻게 닿아 있는지 도무지 좇을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답니다.
지도를 따라가든 직접 그 산 아래서든 어느 것이 실제로 우리의 몸과 맘에 더욱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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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는지 명확해진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차령산맥이 100년 전 일본인 지질학자가 그려
놓은 것이라 수백 년 쌓이고 쌓여 새겨진 이름 금북정맥이 더욱 소중한 까닭입니다.
경기도와 충청남북도가 머리를 맞대고 앉은 산, 지리·덕 유처럼 크고 높지 않되 대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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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삼도에 그 몸을 허락한 산. 그래서 토성을 쌓을 만큼 백제시대 군사요충지로
주목을 받아온 산이 서운 산이라네. 이제는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음성군 서북쪽 백운산
(460m)의 옛 이름 또한 서운 산이라 하였다 하니 서운 산의 사이즈가 드넓음을 알 만
합니다. 서운 산 석남사는 신라 문무 왕 20년(680) 담화 덕사 또는 석선 스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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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안성군지’에는 석남사의 고승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절의 창건에 관하여 밝히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하루아침에 먼 곳으로부터
이상한 기운이 남쪽에 결집되어 어리어서 흩어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바라던 마음가짐으로
그곳을 찾아 이른 즉 이때 백제의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공중에 어리고 흰 무지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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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둘러 있으며 금빛이 땅 위에 솟아나고 옥석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데 인하여
역사를 시작한 지 삼년 만에 절을 완성하니, 때는 신라 문무 왕 27년이라. 도인과 속인
들이 모두 모이고 국왕과 대신들이 흠모하고 공경하며 불도에 귀의하고 절의 액 호를 써서
내려 주며 백성 군 금광 면 서운 산 석남사라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673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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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가 서역의 고승 담화 덕사에 의해 창건되고 당시 상서로운 기운과 옥석이 흩어져
있음에 ‘서운 산 석남사’라 이름하고 687년 절을 완성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소 골치가
아플 것 같긴 한데 숫자가 나오면 역사성 입증이 되지 않나요? 석남사의 풍광 속, 절 뒤로
솟아 오른 큼직한 바위며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돌들이 눈길을 사로잡더니 그 옛날 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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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이름이 여기서 비롯된 것일 줄이야. 이후 857년에 이르러 수원 용주사의 옛 절인
갈 양사를 창건하고 머물던 염 거 화상이 꿈과 호랑이의 인도로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고
954년에는 혜거 국사가 다시금 절을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최근 ‘석남사 사적 명’에는
고려 원종 6년(1265) 태 원 선사의 중창 후 조선 태종 7년(1407) 자복사원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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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수 사찰이 되고, 세조 임금 때(1457) 교지를 받고 석남사 스님들의 부역이
면케 되어 수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선조 13년(1580)에는
금 40근을 넣어 만든 200근의 무게의 금동범종이 하사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
되었습니다. 다른 기록에서도 보이는 이 같은 사실은 '억불숭유'로 알려진 조선시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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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가 안성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거대 사찰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앞의 사적 명에는 또 인조 27년(1649)부터 십여 년간에 걸쳐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영조 11년(1735)에 화덕 화상이, 철 종 8년(1857)에
원명선사가 중창을 거듭했음을 적고 있습니다. 서운 산에 포근하게 안긴 석남사는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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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영산 전, 중심 당, 요사, 해우 소 그리고 단청을 앞둔 금광 루의 단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경내 이곳저곳에 지어져 있던 가건물을 정무 큰스님이 오면서
절답게 정리해놓은 것이랍니다. 투명한 계곡물을 따라가면 마애불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옵니다. 모르긴 해도 이 능선이 서운 산 ‘청룡사’로 이어지는 코스가 아닐까?
2019.7.22.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