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의 얼굴 외 2편 *2023년 시와시학 신인상 당선작
이은우
핑그르르, 동공이 마음을 흔들 때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공중으로 동전 하나 튕기는 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려는 몸짓 같은 것
바닥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고
회전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표정이 생겨나고
갈채 속 발레리나
위태로운 발끝으로 몰려드는 그림자
돌고 도는 춤이 멈추는 순간
덥석 집어 들거나
끝내 손을 열지 않거나
누군가는 내 꿈을 엿보려 하지
쓰러진 발목을 추스를 때까지
웃음을 지그시 밟고 선
녹슨 시간의 냄새
오래 어두웠던 것들은 스스로가 빛이야
부풀어 오는 그림자 위로
불쑥 안겨드는 목소리
등 뒤로 쏟아지는 달빛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은은히 녹아들고 싶은 밤
손바닥 아래 동전을 돌려 세우면
동그라미 안으로 모여드는 중심
빛이다가 어둠이다가
핑그르르
지구본을 돌리는 밤
라라의 창
불 꺼진 방, 딸깍
내가 믿거나 의지하는 건
사라졌다 나타났다 흩어지는 빛
창에 걸린 앙상한 겨울을 봐
풍선이 부풀다 가지 끝에 찔렸는데도
저 멀쩡한 날씨 좀 봐
살면서 이런 탄력은 처음이야
뜨거운 물을 부었어
컵은 검은색인데 꼭 노란색 말을 하는 것 같아
따뜻한 색으로 컵을 꼭 감쌌지
가슴을 꾹 누르면
마음을 보여주는 인형을 봤어
인형 뽑기에 한 달 용돈을 다 써 버리고
물결 같은 눈, 단단한 맥박, 목소리의 진동이
라라, 부르면 라라
동그랗게 목소리가 생기는 밤이 오고
갖고 싶다는 말과 되고 싶다는 말이 섞여
어지러운 살갗이 돋아
나뭇가지에 혀가 찔려도
눈 하나 깜빡 않는 너를 보았지
네 팔꿈치에 붙어 꿈속까지 따라가는 상상을 해
알고 싶은 비밀, 지키고 싶은 비밀 모두
꿀꺽 삼키고 꾹 다물면 그만
말할 수 없는 슬픔은
발바닥에 간직하면 되지
자꾸만 흐려지는 창
반짝이는 걸 잡으려 난 아직 손이 자라고 있어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라라,
뒤꿈치를 살짝 들어 봐
맨발로 창밖을 걸어 봐
벚꽃 신청서
벚꽃이 만발해, 가는 길이 연옥처럼 낯섭니다
코로나 확진자 지원금 신청하러 가는 길
가족이 모두 걸려 신청서가 두둑합니다
다행히 자전거가 길을 잃지 않고 주민 센터에 잘 도착했습니다
의자가 삐걱 삐거덕, 멀미라 날 것 같은데요
―이은우 씨!
―예, 제가 이은웁니다
―어제부터 제출 서류가 모두 바뀌었어요
끌고 온 자전거가 혀를 끌끌 찹니다
종일 대기 중이던 마음이 터덜터덜 돌아옵니다
이은웁니다 이은웁니다
평소에 자주 물을 엎지르는 편인데요
젖은 이름으 닦아낼 때마다 종이가 웁니다
그래도 창가는 따뜻하고요
갓 태어난 나비 같아요 벚꽃이 흩날립니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날아보는 거겠지요
쓸모없는 서류로 비행기를 접어 날립니다
쓰다만 시들도 함께
꽃잎을 업고 꽃잎 속으로 날아갑니다
흰 눈 위로 달리는 백마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래요, 나는
우― 우―
눈꽃처럼 나는, 이은우입니다
―계간 《시와시학》 (2023 / 여름호)
이은우
본명 이진희. 경북 상주 출생.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다락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