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매일 지중해에서 물장구를 치는지
그는 검은 멸치 같았다
흙바닥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그를 따라 걸었다 허름한 그의 집은
문틈으로 빛이 샛노랗게 새어 들어왔다
문맹인 할머니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책가방에서
오늘 학교에서 받아쓴
편지라며 꺼내 읽는다
"나는 길에서 『섬』을 열어 몇 줄 읽다가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나의 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돌아가고 싶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 들어가
지중해의 햇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박제가 되어 버린
알베르 카뮈의 실존으로 샤워하는 오후
마지막 이름
할미! 갓 돌 지난 손녀가 부른다 최초의 여자가 마지막 여자를 부른다
물고기 무덤에 대하여
나무도 물고기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무도 물고기의 적막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걸
구채구九寨溝에 가서 호수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네
호수 속에 천 년을 누운 아름드리 전나무가
젊음이 무심히 빠져나간 그립고 아득한 한때와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들랑거리던 어린 물고기들과
안단테 꽃 벙그는 속도로 이야기했다지
멀리서도 보였던 곧고 높았던 직립의 시간들이
흰 차도르를 두른 꽃잎처럼 무심히 떨어져 내려
호수를 환하게 만드는 것은
칸타빌레 달빛이 아닌 콘트라바순 꽃빛이었다지
호수 속에 깊이 잠긴 로망스의 쓸쓸함과
가을비에 살점 뜯긴 채 적멸을 뒤적이던 바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조랑말을 타고 사라지자
텅텅 울며 전나무는 물고기 무덤이 되어 갔다지
무관심을 잃은 채 천년 화석이 되어 갔다지
나무도 물고기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걸
구채구에 가서 호수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네
관상 Zone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표정이 등 뒤로만 읽히는 극장에는
어디서 왔는지
여우상 · 호랑이상 · 족제비상 · 너구리상 · 살쾡이상 · 늑대상
바리데기상 · 영등할미상 · 처용상 · 도깨비상 · 부처상
관상 보러 온 사람들은 모두 성형 코에 안경을 썼다
각각 다른 태도를 지닌
뿔테 안경 · 로이드 안경 · 티어드롭 안경 · 웰링턴 안경
은테 안경 · 금테 안경 · 무테 안경 · 3D 안경 · 4D 안경
어둠의 뒷다리를 지그시 누른 추억의 해골들은
허옇게 드러난 스크린의 괄약근까지 추적하다가
한숨을 내뱉은 제 얼굴에 길들여진 안심을 붙이고
의자 등받이에 부풀어 오른 제 꼬리를 걸쳐놓은 채
어두컴컴한 복도를 빠져나와
집 없는 짐승들같이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
* 백석 시 「석양」 패러디
시간을 오리다
세 살배기 어린 손자가
가위질을 한다
어미 꿈에서 제 꿈으로 날아 든
오리처럼 앉아 색종이를 오린다
싹둑싹둑싹둑싹둑싹
가는 발목으로 그리움을 헤치며
팔만대장경을 자르는 저 삼매경
어미를 기다리다 지친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서 달그림자를 자른다
등 돌리고 앉아
감기는 졸린 눈을 치켜뜨며
일루미네이션처럼 어미를 자른다
미움을 삭이느라 어미를 자르던 아이
쿵,
옆으로 쓰러져
세상의 미움 다 내려놓았다는 듯
잘린 시간을 베고 잠이 든다
산수유 목도리를 감아 줄게
순장당한 수리취떡을 꺼냈다
냉동실에서 지리산의 세잔歲殘을 꺼내 쫙 펼쳤다
빙하에서 피어오르는 어린 마음들이 몰랑몰랑하다
수미산에 남편을 보내 놓고 무생곡無生曲을 부르는 동안
수리취 향기는 계속해서 주위를 맴돌며 말을 건다
힘들면 언제든지 달려와, 산수유 목도리를 감아 줄게
세석평전에 내려앉은 별빛으로 너의 이름을 새겨 줄게
단출하게라도 아침 밥상은 꼭 챙기고
지리산에서 뜯기고 다듬어지고 씻기고 쪄져서
땀을 몇 바가지나 쏟아 내고야 복닥거리는 삶에 배달된
따스한 일갈을 한입 베어 문다
한 광주리의 평화
베란다에 펑퍼짐하게 앉아 고구마줄기 껍질을 벗긴다
흐릿한 연애 감정처럼 불투명한 오후가 똑! 부러진다
길게 이어진 겉껍질이 사라지기 싫은 기억처럼 또르르 말린다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욕망의 속살이 내게도 있었던가
하늘의 제비와 땅 위의 꽃뱀을 과장 없이 바라보고
눈부신 청춘들을 부러움 없이 아름답다 말한 적은 있었던가
며칠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을 진액 물든
손톱은 무엇을 위해 무수히 나를 벗기는가
막연한 감정으로부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조금은 쓸쓸하고 무시로 외로운 날들이 간다
모든 것 물들이고 많은 것 털어 내고 겨울 입구에 들어선 나무야
넌 알몸인 채로 평화 속으로 입적하는구나
떠나거라 진분홍인지 진감청인지 모를 보잘 것 없는 욕망아!
난 한 광주리의 뻣뻣한 평화처럼 겨울을 견디련다
사랑을 떠나보내는 검정 칼새
이구아수폭포에 사는 검정 칼새는
노랑 구두를 신고 무지개다리를 툭 차며
눈부신 하늘로 솟아오른다
이구아수폭포 속으로 검정 칼새들이 뛰어든다
굽이굽이 접은 날개를 칼날처럼 푸르게 벼려
쏟아지는 비명 속으로 거침없이 자신을 던진다
내가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저와 같았다
늦여름, 와불
이른 아침, 방충망 바깥은
타고 남은 진신사리 화장터
푸드득! 푸드득!
도주할 전도도 탈출구도 없이
죽음을 향해 비행 포스로 돌진한
열혈 사내의 최후는 차갑고 단단하다
무모하게 암술을 탐하느라
짧은 행성의 하루를
눈부신 불꽃에 후회 없이 던졌다
그는 한 생애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일까
서쪽을 향한 아미蛾眉의 남쪽은
어디일까
불에 탄 날개로 무릎 꿇은 불나방
말복 지나
추운 몸뚱이 하나가 와불로 누워 있다
예산 가는 길
용산역,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기차
장항선이 아닌 익산행 새마을호가 낯설다
꼭 남인도 빈민가에서 만난 사람 같다
거무룩한 피부
웅덩이처럼 푹 꺼진 벨벳 엉덩이
그르렁 쿨럭 질룩 쩔룩 시원찮은 관절로
무수히 기멸起滅하며 달리는
설청雪晴*의 문장들을 더듬더듬 펼쳐 읽는다
오디 댕겨오신대유 참말이지 반갑구먼유
이장님은 많이 쾌차하셨다남유
서산댁은 이달에 세 번째 손주를 봤다면서유
그려, 방앗간집 막내딸도 혼사가 정해졌댜
저어기 아직도 사과가 매달려 있는 것 좀 봐유
무한천 달빛 두레 밥상 위 민달팽이들
칸칸이 밝은 서로의 내력이
친근한 종교처럼 한집안 식솔들처럼
구김 없이 흘러간다
* 윤정구의 「설청雪晴」에서.
첫댓글 세상에나~~~ 바쁘신 와중에도 이리 챙겨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윤향기. 절!
정답고아름다운이야기들을보고있습니다.
윤시인님의웅숭깊은작품속으로안내해준이철시인께도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