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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 동아 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름의 돌
이근석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이근석
-1994년 충남 논산 출생
-2012년 고등검정고시 합격
[당선소감]
시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
각자의 시가 있다는 말이 좋았다. 기미였다 두드러질 때 좋았다. 환경이 변하고 이런저런 사건의 여파가 시를 바꾸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이전의 시와 다음 시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도 좋았다. 그대로 그 시가 있고 어느 날 돌아볼 때 이렇게도 보이고 또 저렇게도 보이는 게 좋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침착하고 치열한 사람들이 좋았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시에 자주 의지해왔다.
살아가면서 쓰지 않는 삶을 배워야 했다. 읽지 않는 삶도 덤으로. 그런 건 배움과 삶이 한 몸이어서 그저 산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것도 시를 쓰는 과정이라고 혹자는 말하였지만 그건 그냥 시가 없는 세상이던데. 그럴 땐 시 쓰는 당위에 대해 생각하면 그저 이런 생각만 들었다. ‘세상엔 이미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있고 나는 좋은 시를 쓸 재능도 자신도 없다.’
나이가 차갔다. 구직하려 하였으나 어느 사업체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은 구직 요망의 시일는지 모른다. 내가 아니라 내 정황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나의 자질은 참혹했던 현실이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을 함께 살아준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받게 된 것에 따라올 이유와 책임이 있다면 전자는 그들의 까닭으로, 후자는 내가 지었으면 한다. 모두가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슬프지 않았으면 한다. 잘 지내었으면 한다. 예심 본심에서 심사해주신 분들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자연스러운 리듬감으로 과장없이 표현해
11명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이 됐다. 우선 드는 생각은 다양성이 아쉽다는 것이다. 질적으로 고르지만 단정한 묘사와 소소한 토로가 주를 이뤘다. 예년보다 표준형에 수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은 모험과 담론이 활성화되지 않는 시단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해 슬쩍 미안해지기도 했다.
‘구조’ 외 5편은 시적 묘사의 특이성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태를 목전에 놓고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힘을 보여준다. 한 대목 한 대목 인상적인 묘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묘사가 구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근사하게 그려 보이는 능력은 사태를 전체적으로 헤아리는 사유 없이는 왕왕 심부름꾼의 성실함에 그치기 마련이다.
‘수변’ 외 5편은 우선 문장 단위에서 매력을 발한다. 문장의 힘과 이미지의 리듬이 조화를 이뤄 마지막까지 검토 대상이었다. 산문 투의 진술에 대한 아쉬움, 절제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조금 더 기다려봄 직하다는 의견과 부합해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여름의 돌’ 외 5편이 당선작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리듬감 때문이다. 과장이나 과잉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러운 리듬에 실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범상해 보이나 드문 기량이다. 일종의 빼어난 ‘예사로움’에 달한 기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름의 돌’은 청년의 불안과 기대를 수일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순조롭게 표현해 당선에 값한다. 과감함이 숙제라면 숙제인데 안정 없는 기획보다 신뢰할 만한 시적 진술이 올해의 선택이 된 것은 당선자에게 영광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심사위원 : 문정희 시인 · 조강석 문학평론가
2,
<2021 한경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유실수(有實樹)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당선소감]
"내가 머물렀던 자리 돌아봐…주변에 귀 기울일 것"
12월의 당선 소식은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던 날이 있다. 그 사람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심으로 떨리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담담하게 내가 쓴 시를 읽어주었고 그때의 그 벅찬 순간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줬다. 어디에나 쓸쓸한 소식이 번지던 한 해가 지났다. 이겨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은 흘러 새해가 밝았고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1년을 더 보낸 내가 조금 더 성장했음을 느낀다. 무언가를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시를 써나가고 싶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담아나갈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기회를 준 한국경제신문과 내 시에서 가능성을 봐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나를 헤아려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혼란스러운 날에 그들이 있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변함없이 써내려 갈 수 있었다.
[심사평]
이미지가 눈에 생생…기교와 비약 참신
본심에서는 네 분의 시를 다뤘다. ‘전래동화’ 외 네 편은 직설적인 언어로 기성세대와 맞서는 자세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와 깊이 부대껴서 얻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좁고 다소 막연해 보였다. ‘가장 내밀한 스펙트럼’ 외 네 편은 흡입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흐름을 끊는 직접 발화를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둠’ 외 네 편은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반복 등 난숙한 화법으로 이목을 끌었다. 다만 논리가 시를 압도하는 지점이 가끔 눈에 띄었고, 최근 시의 스타일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윤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도 받았다. ‘유실수’ 외 네 편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 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를 당선자로 정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장이지 시인·제주대 국문과 교수.
3,
<2021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이즈 캔슬링
윤혜지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4,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단순하지 않은 마음
강우근
별일 아니야, 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 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에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가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의 소독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주저앉은 채로 숨을 고르는 상대편을 생각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밤의 비행기는 푸른 바다에서 해수면 위로 몸을 뒤집는
돌고래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매일 다른 색의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고 있다.
버스에서 승객들은 함께 손잡이를 잡으면서 덜컹거리고,
승용차를 모는 운전자는 차장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편의점에서 검은 봉투를 쥔 손님들이 줄지어 나오지.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없는, 돌아보면 옆의 사람이 생겨나는.
어느새 나는 10년 후에 상상한 하늘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쥐었다가 펴는 손에 빛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아도 그랬다.
내가 지나온 모든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
5,
<2021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독사가 고독에게
박소미
나는 자궁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태동을 알아채는 침묵 이전의 기억 밑으로 밑으로, 웅크리고 있다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재생에 몰두한다 어느 애도가 부재를 지나 탯줄로 돌아올 때까지, 타자의 몸속을 오가는 이 반복은 고고학에 가깝다 생환의 뒷면은 그저 칠흑 덩어리일까 벽과 벽 사이 미세한 빗살로 존재할 것 같은 한숨이 어둠 안쪽 냉기를 만진다 사금파리 녹여 옹기 만들 듯 이 슬픔을 별자리로 완성케 하는 일, 아슴푸레 떨어지는 눈물도 통로가 될까 북녘으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창문 안으로 울컥, 쏟아져 내린다 살갗에 도착한 바람은 몇 만 년 전 말라버린 강의 퇴적, 불을 켜지 않아도 여기는 발굴되지 않는 유적이다 잊기 위해 다시, 죽은 자의 생애를 읊조려본다 그래 다시, 귀를 웅크리지 태아처럼, 점점 화석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떠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방 안이 점점 어두워진다
[당선소감]
아버지가 남기신 격려 글쓰기 원천
퇴직은 나를 회복하는 소중한 여정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만난 시가 나를 잣고 있습니다. 꿈에서 시실을 뽑아 명주달빛에 묶어두었습니다. 오른손으로 직관을 거머쥐고 미로를 돌면 더 깊은 미궁 속이었습니다. 그러면 왼손으로 잡은 펜이 향이 동하는 분칠을 요구합니다. 이나마 놓치면 영영 포기할 것 같아 조급해지기 일쑤였습니다. 꽃들이 화사를 빼고 가벼워지는 가을부터 어깨를 겯던 도반이 하나 둘 불려나갈 때, 비어가는 정원은 제게 욕심이었을까요. 사모하는 마음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 갈망은 월반 중입니다. 먼저 동행한다고 고집한 시는 지난해야 지속 가능한 애인입니다. 짙은 은유와 주렁주렁 매달린 형용사가 나의 허식(虛飾) 이란 걸, 기척도 없는 파지가 증명합니다. 여전히 미궁은 나를 가둡니다. 그 안에서 시가, 나를 복구하는 원본이 되게 합니다. 망연한 제게 동아줄을 내려주신 강은교, 안상학, 김참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실낱으로 수직 상승하는 사다리가 아닌 멍석 귀 삼겠습니다. 병상에서 목소리 뽑는 아버지가 또박또박, 힘주시던 여한 없이 쏟으라던 마지막 숙제, 제출합니다. 누런 삼베 거친 적삼이지만 너무 춥진 않으시죠. 시를 앓게 해주신 유종인, 정병근, 김이듬 시인님, 김포문예대학의 나란한 걸음이 있어 든든합니다. 함께 공부해주신 윤성택 시인님 감사합니다. 힘들 때 마다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준 시품 그리고 김부회 시인님과 달詩 동인들, 나보다 나를 더 잘 지탱해 준 내편 쭌, 그리고 첫 독자가 되어준 도담, 모두의 응원 덕분입니다. 화장을 지우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민낯의 나를 받아들이는 그 여백이 시가 되는 풍경(風磬)을 잣겠습니다.
박소미
-1966년 전남 목포출생. 김포문예대학 수료. 시품, 달詩 동인.
[심사평]
언어 다루는 솜씨·주제 전달 방식 참신
올해 응모작들의 수준은 예년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있었지만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보여주는 시들, 사회문제를 다룬 시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많았다. 참신하지만 너무 긴 시들, 언어를 다루는 솜씨와 이야기를 엮는 솜씨는 좋은데 너무 긴 시들은 읽기가 다소 어려웠다. 시가 반드시 길어야 할 필요는 없다. 시를 사람의 몸매에 비유하자면 군살 없는 날씬한 몸매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말만 남기는 것이 시다. 심사위원들은 응모작 중 십여 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윤상호 씨의 ‘변기는 가능합니다’, 박신우 씨의 ‘이인용 밥솥’, 박소미 씨의 ‘고독사가 고독에게’ 세 편의 시를 놓고 마지막 논의에 들어갔다. ‘변기는 가능합니다’는 사회문제를 표현하는 방식이 뛰어났으나 같이 보내온 다른 응모작의 살을 빼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인용 밥솥’은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시였지만, 같은 소재를 다룬 기성 시인의 특정 작품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박소미 씨의 ‘고독사가 고독에게’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박소미 씨의 당선작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무척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달리는 숲’ 역시 당선작 못지않은 사유와 작품성을 담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점을 높이 사 박소미 씨의 ‘고독사가 고독에게’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의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도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강은교 · 안상학 · 김참 시인
6,
<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변성기
김수원
접시는 바꿔요
어제 같은 식탁은 맞지 않아요
초승달을 키우느라 뒷면이었죠
숨기고 싶은 오늘의 숲이 자라요 깊어지는 동굴이 있죠
전신거울 앞에서 말을 터요
알몸과 알몸이 서로에게
내 몸에서 나를 꺼내면
서로 모르는 사람
우리는 우리로부터 낯설어지기 위해 자라나요
엄마는 앞치마를 풀지 않죠
지난 앨범 속에서 웃어야지 하나, 둘, 셋, 셔터만 누
르고 있죠
식탁을 벗어나요
눈 덮인 국경을 넘어
광장에서의 악수와 뒤집힌 스노우볼의 노래, 흔들리
는 횡단열차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사람 이야기, 말을
건너오는 눈빛들과 기울어지는 종탑과 나무에서 나무와 나무까지 밝아지는
모르는 색으로 달을 채워요
접시에 한가득
마트료시카는 처음 맛본 나의 목소리
달 아래, 내가 나를 낳고 나는 다시 나를 낳고 나를 낳고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모르게
당선소감
나는 너무 반듯하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다. 그런 나를 버리기 위해 지금껏 시를 썼다. 구겨버린 가족사진처럼, 기형적으로 구겨진 사진 속 미소처럼 나는 나로부터 낯설어지고 싶었다. 오빠가 죽었을 때, 내 시는 울음 속에서 질척거렸고 아버지가 오빠를 뒤쫓아 갔을 때는 딸꾹질만 해댔다. 죽음은 쉬운 거네, 몇 해 휘갈기는 동안 딸꾹질도 그치고 울음도 그치고, 시가 '곁'이라는 걸 그때 느꼈다. 그로부터 나는 나를 죽이는 일에 몰두한다. 내가 곁이 될 때까지. 시의 곁에 작은 자리를 마련해 준 부산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 8년, 서두르는 마음을 눌러 준 정봉석 교수님을 비롯한 동아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놓지 않도록 독려해 준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인사드린다. 유병근 선생님이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기원드린다. 함께 문학을 찢어발겨 준 벗들과 동아대 글패고갱이들, 그리고 시 앞에서 독해지자던 진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가족은 나의 무한 동지다. 지금껏 시는 내 편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내 편이 아니길 바란다.
약력: 1971년 경남 고성 출생, 본명 김경숙, 동아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수료, 동아대 강사.
[심사평]
호흡·이미지, 얽매임 없고 자유로워
올해 응모작들은 폭넓은 시적 탐색을 담고 있었다. 생활의 감정을 담은 시편들은 진정성은 있으되 대체로 상식적이거나 평이했고, 현란한 언어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편들은 수사(修辭)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들은 삶의 내면과 그 너머를 응시하는 눈길이 매혹적이었으나 미학적 형상화가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은 작품들은 ‘위시본’ ‘흑백극장’ ‘물사람’ ‘그후’ ‘변성기’였다. 심사자들의 기대가 높았던 탓이었을까? 꽤 오랜 시간 숙의를 해야 했다. ‘위시본’은 흥미로운 제재를 입체적으로 펼쳐 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다소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었다. ‘흑백극장’은 간명한 언어와 이미지의 전개가 장점이었는데, 입체적 확산의 힘이 모자랐다. ‘물사람’은 차분하되 정서적 흡인력이 강했다. 잘 익은 서정의 세계를 보여주었으나 소품으로 그친 게 아쉬웠다. ‘그후‘는 남다른 시적 깊이와 인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지막 2행- 결말이 아쉬웠다. ‘변성기’는 일견 조금 서툴고 추상적인 시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가 있다. 호흡과 이미지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고, 상상력의 폭이 크다. 심사자들은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잘 다듬어진 시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선정하기로 했다. 시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보다 힘찬 모험을 통해 유니크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태일 전동균
7,
<202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초의 충돌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김민식
1994년 인천 출생, 수원 거주.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졸업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전공 석사 과정 휴학 중
8,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아, 이상해.
신이인
1994년 서울에서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개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성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각자의 고유성을 얼마간은 지니고 있으며 생활과 사유 곳곳에서 그 고유함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숨기려 해도 얼핏 내비치는 사투리처럼, 감추려 해도 별안간 나타나는 표정처럼. 시는 나도 모르게 드러나는 개성을 서랍장 곳곳에 잘 수납하고 연과 행에 맞춰 잘 구획하는 관리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가끔 얼굴을 비추는 고유성을 극대화해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난동꾼일 수도 있다.
심사에서는 완벽한 관리자와 특별한 난동꾼 중 하나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길 바라게 된다. 관리자이면서 난동꾼이 될 수 있는 시인이 등장하길 차마 바랄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잘 없으니까. 그 어려운 일이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일어났다.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은 정돈되면서 어질러진 시였다. 익숙한 지명을 동원하고 친숙한 어투로 말을 건네어 귀를 붙잡아 두면서도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리된 채 구성된 이미지 속에서도 곳곳에 돌출하는 의외성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지금의 시만큼 앞으로의 시 또한 기대된다. 기대하는 자의 설렘을 담아,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마지막까지 이야기한 작품은 '새, 하고 열린 옷장', '언젠가 부하들은 반란의 내색을 비춘 적 있다', '한국어 감정' 등이다. '새, 하고 열린 옷장'은 사소한 장면을 일시정지 상태로 만들어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하는 미덕이 있었다. '언젠가 부하들은…'은 유머러스하고 의의성 있는 진행이 돋보였다. '한국어 감정'은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생기는 감각과 진폭을 그리는 주제 의식이 담백했다. 모두 당선되지 않을 이유보다 당선될 이유가 더 많았으나, 약간의 행운이 부족했던 것으로 오늘의 아쉬움을 갈음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건넨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세계 어딘가에서 역시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을 껴안으며 써나가 주실 것이라 믿는다. 관리자가 될 것인가, 난동꾼이 될 것인가? 그런 생각할 겨를 없이 시는 당신을 끌고 어딘가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면 좋겠다.
서효인 시인
심사위원 서효인 장석주 김소연
9,
2021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작 2편
언더독 / 변혜지
돌고래 기르기 / 한준석
언더독
변혜지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당선소감
“기나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응원·채찍·사랑”
빗장뼈 안쪽에 양을 기르는 친구가 있었다. 그 이야기가 아름다워서 나는 언덕을 갖고 싶었다. 언덕 위에 양을 풀어 놓으면 양은 언덕 너머로 넘어가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시를 써서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너를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해주었다. 누군가 그 사람들을 몰고 언덕 너머로 떠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미워할 사람들이 없어서 나의 미운 구석들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주인공인 시들을 자꾸자꾸 보여주었다. 아무도 나를 데리고 떠나지 않았다. 종종 언덕 너머에서 메에-메에-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너희들을 사랑해.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이 서툰 발걸음을 응원해주신 세계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긴 시간 동안, 마음 놓고 비빌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신 박형준 선생님, 오랜 시간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주신 김춘식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집 센 학생을 놓지 않고, 응원과 채찍을 아끼지 않으시던 이원 선생님, 박판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십 대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신 어딘, 정우영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내 대신 잠을 설친 엄마에게 사랑을 전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열거할 수가 없다. 같이 쓰고 같이 떠들고 같이 고함치던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변혜지
-1991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돌고래 기르기
한준석
미소는 돌고래로 기르기 좋습니다
돌고래의 주파수를 라디오로 들어요
나는 무심하게 시작되어집니다
축축하게 연필심이 밤새 헐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에 좋습니다
나는 웅크리기 좋은 무게로 태어났어요
돌고래의 고도는 새떼의 무게 같아요
새들이 흩어지는 사이로 연필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가는 새를
잃어버렸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에 없는 새들을 세어보는 일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고
두 팔로는 충분한 일입니다
돌고래를 기르기에는 남해에 사는 당신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남해로 가는 버스 창밖
길러 본 적도 없는데
둥글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웃음을 빌려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은 잔기침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안정은 멀리 있습니까
나는 이런 예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버스의 흔들림만 남겨집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닙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줄 압니다
잘 가, 돌고래는 휘어지는 몸짓으로 수평선을 밀어내고 있어
끝에서 끝이 부드럽게 멀어져야 좋은 미소
나는 돌고래로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돌고래는 미소를 기르기에 좋습니다 슬픔을 조심합니다
세계는 서로를 미끄럽게 기를 줄 알고
나는 입김에서 햇빛으로 조용하게 옮겨집니다
나는 한 종류의 돌고래가 됩니다
당선소감
“바르셀로나에서 마음먹은 꿈 이뤄… 앞으로 더 정진할 것”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한국의 가을쯤 되는 때에 사람들이 반팔을 입고 돌아다닙니다. 시차를 생각하지도 않고 한국으로 연락을 걸었던 사람은 지금까지도 소설가의 마음을 지닌 채 의자에 기대 있습니다. 귀국 후 시를 쓰겠다고 홀연히 들어간 양평의 산골 집 옆에는, 기면증 걸린 수학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가끔씩 제 시를 보고서는 재미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해 허우적대던 나의 손가락에, 시차가 달랐던 그 형이 같은 학교를 다니며 연필을 쥐여줬습니다. 그렇게 올해까지 시를 썼습니다. 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 제 옆에는 이름만 종이에 썼다 지워도 오랫동안 머무를 사람이 있습니다. 은별아, 너무 고맙다. 모두 감사합니다.
나의 애칭 꾸르끼, 바르셀로나의 지영 누나와 토미 형! 보고 싶어요. 제 은사님이신 권혁목 선생님, 중요한 순간마다 해주셨던 말씀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아, 너희 덕분에 내 많은 순간들이 아름다웠어! 지금까지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움 주신 선생님들, 앞으로도 헤매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나, 매형 항상 응원해 줘서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저의 가능성을 너그럽게 높이 사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시가 너무 좋습니다.
-한준석
-1990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작품마다 상처 치유코자 대변… 과장되지 않은 비유·상징어 눈길”
저마다 고립된 외딴섬처럼 단절과 멈춤이 뼈저렸고, 과연 우리가 우리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까, 물음만으로도 버겁고 지난했던 시기. 예심을 거친 스물다섯 분의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시절의 무력감에 대응하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코자 대변하고 있었으니, 왜 문학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기며 시대의 가늠자 역할을 자임하는지 여실히 실감케 했다.
최종 논의로 하연, 김성백, 홍진영, 변혜지, 한준석 씨의 작품을 주목했다.
하연의 작품은 익숙한 표현과 소재들이란 점이 아쉬웠다. 김성백의 경우 팬데믹 시대를 겪고 있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지만 감정과 표현이 곰삭을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겨졌다. 홍진영에게서는 시어와 이미지를 다룰 줄 아는 기본적인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몇 개의 서툰 문장들이 심사자의 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장래를 위해서 올해의 보류가 본인들에게 더 큰 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긴 시간 변혜지의 ‘언더독’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를 놓고 토론을 벌였으나 아쉽지만 당선에 준하는 가작 2편을 뽑기로 합의했다.
변혜지의 ‘언더독’은 남다른 사유의 깊이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장되지 않은 비유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고, 절제된 수사의 미덕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모자람을 찾기 어려웠다. 막힌 혈로를 뚫듯 날카롭고 예민하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아우르는 너끈한 묘사력을 겸비했으니, 이만한 사유의 세계라면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메우고도 남으리란 믿음에 선작(選作)으로 민다. 언제까지 무거운 짐을 걸치고 거침없이 나아갈지 모두가 기대를 걸고서 지켜보리라.
한준석의 ‘돌고래 기르기’는 ‘돌고래’라는 상징어를 넣어 이미지가 보일 듯 말 듯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미소는 돌고래를 기르기에 좋습니다”의 표현이 말하듯 시가 기본적으로 비유의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돌고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불분명하지만 시 내용으로 보아 사랑, 꿈, 슬픔, 기쁨까지 다 아우르게 한다. 돌고래 자리에 이 단어들을 집어넣고 읽어보면 금세 느껴질 것이다.
두 분을 축하하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도 조만간 지면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위로의 말씀을 얹는다.
심사위원
본심:김영남 이학성, 예심:천수호 김종태
10,
광주일보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 / 이서영 시인
고유의 방식으로 꿈은 형태를 지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다르게 아무데서나 지우고 싶은 것부터 지운다 깨끗하게는 아니고 주변을 쓱쓱 뭉텅뭉텅 어떤 부분은 둥근 빵덩어리로 보이다 만지려 하면 밀가루처럼 아늑해져서 모양이 참 막연해져서 무엇이었더라 말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수업을 들었는데 어떤 칭찬을 받았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뭐였더라 그것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희미함 무게도 감촉도 없지만 분명 거기 있는 알갱이들 나는 안개로 건물을 짓고 지붕을 뚫은 철근을 보고 낙서가 적힌 흑판을 본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과 일을 하다 싸움이 나고 또 금방 화해한다 맥락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과 내기를 하고 나는 지략을 세워 크게 승리한다 다만 칭찬이 무엇의 결과였는지 명확치 않다
<심사평>
“일상의 감각 잡아채려는 의지 돋보여”
한 해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 해 동안 내면으로부터 쉼 없이 길어 올린 언어들을 대면하는 일은 축제 같았다.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삶의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시는 삶의 어떤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 형식 안에는 삶의 여러 단면들을 통해 즐겁거나 기쁘고, 아름답거나 시린 우리네 조용한 비명들이 녹음되어 있었다.
이번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된 시들 중에는 ‘사람과 언어가 만나 전류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숨이 찼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현이령은 조근조근하고 잔잔해서 뭔가 있을 듯하여 아주 여러 번을 읽지만 결국 분위기만 읽혔다. 김완두는 발랄함과 특이한 시선이 개성이 무기인 듯하지만 의외성과 유아적인 밑그림을 받치고 있는 것은 허무함이었다. 김영숙의 시는 일상적이며 사변적인 틀에 걸려 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홍여니는 읽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지막까지 내 손을 떠나지 않은 건 이서영과 엄경은의 시. 이서영의 ‘뭉클’과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뭉클’은 선명해서 맑게 다가온다. ‘잊다…’는 숨기면서, 드러내면서, 은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또한 특유의 건조함이 세련된 미학을 만들고 있다. 엄경은의 ‘기본과 기분’은 무엇이 시로 탄생되는지를 잘 아는 숙련된 예비 시인의 작품이라 감탄했다. 하지만 ‘기본’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다가 ‘기분’을 언급하면서 맺는 한 줄이 시 전체를 단번에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이서영의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자칫 흘러버리기 쉬운 일상의 감각을 잡아채려는 의지와 선명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환대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화법이 아름다웠다. 당선을 축하하며 칙칙하기만 한 세상에 더 많은 울림들을 차려놓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당선소감>
자기 전에 발바닥에 바셀린을 발라두었는데 밤새 신발도 없이 어디를 헤맨 것처럼 발바닥이 아팠다. 깨어나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었던 건 아니겠지. 내가 헤맸을 골목들 어둠들…. 오랫동안 만진 생각이 있었다. 조금씩 수정하면서 눕거나 앉거나 습관에 기대어 조금씩 변경하면서. 대부분 좋지 않거나 쓸모없어서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밖의 용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 용도보다 훨씬 앞선 것, 거기 있을 뿐이라는 듯. 커튼이 항상 묶여 있는 것처럼,
시를 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주문을 언제부터 받았던가. 나를 넘어서기 위해 조금만 더 해야 한다는데 난 그 조금만 더를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손도 못대고. 어쩌면 조금만 더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일지도 몰라. 죽을 때까지 조금만 더 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 어쩌나, 나는 정말 어쩌나, 이 가여운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누가 와야 이 습관의 나는 대체되는 것일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나의 밤들이 말들이 그것인 채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래, 시를 더 써보겠느냐고, 마치 꿈처럼 연락이 왔다. 다른 호흡 다른 표정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영 같은 불확실감에 휩싸여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내 여물지 못한 아픔을 선별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시로 이어져 긴 시간의 터널을 함께 걸어온 ‘생오지문예창작촌’,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문우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다. 늘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셨던 박순원 교수님, 김성철 교수님, 유홍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엄마, 어머님, 이 기쁨은 온전히 두 분 것입니다.
이서영: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생오지문예창작촌 시동인 활동,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에서 창작수업.
11,
매일신문
야간산행 / 여한솔 시인
공룡처럼 죽고 싶어
왜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여한솔: 1994년 대전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총 2천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
'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장옥관 시인, 김경주 시인.
예심: 김욱진 시인, 박미영 시인.
12,
경남신문
냄비의 귀 / 장이소 시인
뜨거운 냄비의 귀를 잡다가 내 귀를 잡았다
순간이 순간에 닿는다
귀 하나 떨어진 양은냄비를 안고 골목을 지난다 삼삼오오, 얼룩이를 가리킨다 얼룩이는 번쩍번쩍 얼룩덜룩하다
고흐는 왼쪽 귀를 자르고 왼쪽으로 들었을까, 어떻게 오른쪽을 들었을까
당신은 떨어진 귀를 버리지 못한 사람 뚜껑을 마저 잃고 배가 된 사람
이마는 당신이 키우던 물고기 떨어진 귀는 물고기의 어디쯤일까
귀를 기울인다 귀는 기울기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자른다 어디나 그런 귀 하나쯤 있다 절반이 절반에 매달려 가운데를 안고 돌면 떨어진 한쪽을 위해 두 배속 태엽을 감는다 꼬리에 풀리는 물무늬 아가미로 쏟아지는 물살 삼킨 것들이 중심을 세운다
멱을 잡고 중심을 도는 것은 붙잡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
밖이 안을 떠받는다
쓸모를 잡는 동안 바닥에는 차고 오르는 온도가 있었다
끓어 넘치던 냄비 뒤집어 보여주지 못한 뚜껑을
버리면 더 가까워서 가볍다
기억을 잃고 바닥을 태우던 사람이 있었다
붕대를 푼다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은빛 물고기를 그린다
지느러미가 키를 잡는다
풍등이다
붙잡지 못한 것들이 손잡이를 흔든다 떨어진 귀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는지를
장이소: 1968년 부산 출생.
<심사평>
“현대인의 소외와 고립감 잘 표현”
올해 시 부문 투고된 1300여 편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임승환의 ‘계절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김석범의 ‘허공의 크레바스’, 홍담휘의 ‘향기의 증거’, 김난의 ‘발화의 경계’, 장이소의 ‘냄비의 귀’ 등이다. 매우 작품성이 높고 사회의식도 있어 그 어느 것이라도 당선작이 될 만했다.
우선 ‘계절이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어요’는 삶의 무상함에 대해 매우 탐미적으로 잘 묘파해내고 있지만 그 삶의 무상함이 자칫 지나친 감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허공의 크레바스’는 당대 사회현실의 문제의식을 매우 감각적 형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으나 일부 구절들에서 너무 교훈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점이 한계로 언급되었다.
‘향기의 증거’는 ‘커피향’을 두고 매우 참신한 발상과 표현을 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그 주제가 커피를 둘러싼 노동력 착취라는 경직된 내용으로 수렴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발화의 경계’는 일상 속의 자아가 갖는 허위의식에 대한 반성을 참신하게 잘 표현하고 있으나 너무 기교적이라는 점, 그리고 시제가 달라지는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냄비의 귀’는 현대인의 소외의식과 고립감을 ‘귀’라는 제재를 중심으로 심미적으로 잘 표현해내고 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갖는 문제의식을 당대의 사회성과 결부지어 의미화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장이소의 ‘냄비의 귀’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당선자는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큰 별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성선경·김경복
13,
문화일보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 남수우 시인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
따갑게 몸 안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뒷모습뿐인 액자를 돌려세운다
거울 속에는
하얀 입김으로 떠오른 민낯들이 너무 많았다
남수우: 1991년생,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동물생명학을,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심사평>
‘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 좋은 시인으로 살 것이란 믿음 들어
올해부터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게 돼 심사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나 경향을 파악하면서 좋은 작품을 선별해갈 수 있었다. 725명의 투고작 3625편을 읽는다는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내면을 읽어내는 일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예년보다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가 강해졌고 상상력도 다소 위축된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고립, 관계의 단절 등을 뚫고 희미한 빛을 찾아 나가려는 고투가 시편마다 절실하게 담겨 있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품고 수많은 기록과 증언, 고백과 발언, 노래와 기원들을 공감하며 읽었다. 심사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은 ‘가드닝’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 ‘인공호수’ ‘에그조프쉬시즘’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등이었다. 이 여섯 분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남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엇을 당선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가드닝’은 간결하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시적 재능과 섬세하고 투명한 감각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 식물적 언어의 세계는 다소 수동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은 현실의 남루함을 환상으로 감싸며 따뜻하고 환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인상적인 문장이 많지만 세부에 들이는 공력에 비해 전체적 구조나 결말이 약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인공호수’는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솜씨가 노련하고 관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듯이 묘사 위주로 전개하다 보니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에그조프쉬시즘’은 원룸에서 일어난 고독사와 애완견을 중심으로 사회적 비극이 어떻게 봉합되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도시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있는데, 작품 간의 편차가 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은 운문성과 산문성을 적절히 조율하며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묘사와 진술의 연결이 좀 더 자연스럽고 뒷심이 있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는 뒷모습과 거울을 둘러싼 사유의 변주가 거울의 안과 밖, 문의 안과 밖, 지구와 태양 등으로 확장되며 몇 겹의 비유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산문적 언어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이 모호함은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미세한 균열의 기억과 무수한 틈을 내장하고 있다. 이 ‘틈’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가 그를 좋은 시인으로 살게 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당선을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뒷모습” “그 먼 곳을 안으러” 매 순간 떠나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시인
14,
경상일보
블루 / 변영현 시인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당신은 호수인 줄 알고 뛰어들어요
팔랑팔랑 헤엄쳐요
바다처럼 넓고 깊어요 파란 동그라미
속의 당신이 파랗게 물들고
나를 찾아봐, 하는 목소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요
안 보여요 안 보인다니까요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숨이 헉헉 차오르네요
파란 동그라미 위에 파란색을 더해요
내게는 다른 색이 없거든요
조금 다른 파란색이면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몰랐어요 더 깊어질 뿐이라는 걸
바닥을 찾지 못할 거예요
하늘을 찾지 못할 거예요
파란 지구별에서 나갈 수 없듯
당신은 거기서 허우적거리겠죠
파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블루칩 같기도 하고 버튼 같기도 해요
속는 셈 치고 한번 눌러 볼까요?
잭팟이 터질까요, 당신이 튀어 오를까요?
하나, 둘, 셋!
아, 물감이 덜 말랐네요
파랗게 질린 손바닥 좀 보세요
당신이 묻어 있는 건 아니겠지요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요
파랑이 파르르 떨고 있어요
<심사평>
“말놀이의 능수능란함 뚜렷해”
신춘문예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응모작들이 대부분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가지는 비대면의 우울과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의 고통스러운 그늘일지도 모른다. 또는 점점 더 팍팍하게 조여드는 삶과 환경의 압박감 때문일까? 심한 자기류의 언어 방기나 과도한 언어굴절이라는 한동안 유행해온 젊은 세대들의 언어 구사 특징이 많이 가신 가운데, 과거와는 다른 삶의 그늘들이 젊은 문학도들을 사로잡고 있는 게 너무 무거운 듯 여겨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20명의 100편 가량. 그 중 마지막까지 남아서 겨뤘던 작품들은 ‘손’ ‘본색’ ‘부초들의 잠’ ‘중심, 중심들’ ‘블루’ 다섯 편. 모두 나름의 독특한 빛깔들을 띠면서 개성적인 언어구사를 능숙한 솜씨로 보여, 그 중 한 편을 뽑는 게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어차피 한 사람 만의 손을 들어줘야 할 수 밖에 없는 것. 마지막으로 집어든 게 ‘블루’였다.
‘블루’는 푸른색의 인식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언어의 반복과 리듬, 그리고 유머감각을 통해 사랑과 자기 인식의 우울과 명랑을 경쾌한 어조로 꿰어나가는 말놀이의 능수능란함이 돋보인다. 구성도 무난하고 주제를 끌고나가는 언어구사의 힘도 예사롭지 않다. 무거운 주제들이 많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이 작품이 의외의 경쾌함으로 시선을 끌었다고 여겨진다.
새롭게 출발하는 수상자의 경쾌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하석 시인
15,
강원일보
설원雪原 / 김겸 시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김겸(김정남): 51세, 소설가.
<심사평>
“근래에 보기 드문 유장미와 순정미 갖춰 눈길”
어렵고 힘든 시기에 더욱 풍성해진 응모작들을 보면서 '과연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됐다. 실존에 대한 깊은 질문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질문과 해답의 진폭은 크고 넓었다. 최종적으로 조미희의 '귀뚜라미에 대하여' 외 4편, 서이나의 'CU편의점' 외 4편, 김겸의 '설원'외 4편 등을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조미희의 작품들은 시를 직조해 나가는 힘이 뛰어났으나 응모작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서이나의 작품들은 젊고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나 마무리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겸의 작품들은 산문적이고 현학적으로 빠지는 위험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이를 뛰어넘는 유장미와 순정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이는 최근 우리 시단에 부족한 부분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설원'은 응모작들 중 이러한 장점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어서 당선작으로 올리게 되었다. 아쉽게 탈락한 두분에게는 다음 기회를, 당선자에게는 신인다운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영춘・이홍섭 시인
16,
전북도민일보
책등의 내재율 / 엄세원 시인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꽂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아진 책을 주워 천천히 넘겨본다
벽은 참 출출한 비결(祕訣)이다
엄세원: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文淵) 학술.문학 통합 대상, 강원문학 시 부문 신인상, 한국소비자연합 문화예술부 시문회 사임당문학상, 홍성군 문화관광 디카시 대상
<심사평>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 작품들 중에는 우수 작품이 많았다. 경향각지에서 모인 문재(文才)들의 재주가 예리하게 빛났다. 특히 「물다리기」「손말」「고수동굴에서」「멀티플렉스 상영관」「풍욕」「대장간 온도계」「코스모스」「마트료시카」등이 시의 품격을 높였다.
여러 편 중에서 「책등의 내재율」을 최종심에서 제일 좋은 작품으로 뽑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발상부터가 참신했다. 그리고 구사하는 시어들이 신선했으며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적절한 알레고리를 설정한 점이 좋았다.
‘책등’은 책의 제목이 새겨진 책의 모서리 표상인데, 이를 ‘내재율’이란 어휘로 묶어 놓아 어휘 상호간 절묘한 아이러니를 품는다.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의 외연과 책의 안 섶에 꽂힌 섬세한 율성(律性)을 결부시키는 조합은 시의 상징화에 기여한다. 책들은 상호 연대하여 어둠을 빚고 다시 어둔 벽과 암유된 정서를 공유한다. 미명(未明)의 책 갈피갈피는 시적 자아의 생(生)으로 융합을 꾀한다. 감춰진 책 속의 비의는 자아의 잠재의식과도 연계된다. 자아의 감성과 지성의 영혼은 책 속에 압화(押花)로 묻혀 있다가 서서히 빛에게로 나아간다. 출출한 비결(秘訣)이다.
심사위원: 소재호(시인, 문학평론가)
17,
경인일보
핑고 / 황정현 시인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이 자리에 제가 앉아도 괜찮은가요?"/미안해요 여기/당신이 앉았던 자리인가요//접혀 있는 페이지는/당신이 읽던 페이지였고//아무렴 어떤 가요 슬픈 페이지를 넘기면/또 다른 슬픔이 펼쳐지는 걸요//유리창은 햇빛을 쏟아내더니/이내 비구름을 몰고 오네요//책 귀퉁이가 닳도록/당신이 읽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바라보는 일 밖에 할 줄 몰라서/다가가는 일도 제겐 큰 용기가 필요했지요//당신은 잠시 자리를 비운 걸요/이 자리엔 누구나 앉아도 괜찮습니다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있었습니다. 삐걱삐걱 의자가 소리를 내면 제 뼈들도 뚜둑뚜둑 화답을 합니다. 그렇게 저도, 의자도 함께 낡아가겠지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출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겠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이신 김윤배,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제게 피와 살을 주신 황의열·강신해님, 정숙광·선정선, 늘 저와 함께하는 김영형·김수민, 문전성시 최지온·서미숙·금희숙·김혜숙·염형기·박양미님, 문장강화 김산 선생님, 조재일님,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파피루스 김혜정·김율관·이해민님, 시와 찻잔 김희광 선생님과 문우님들, 용산도서관 이승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 확장된 미학 눈길”
이번 응모작들은 일상성에 노출된 실업, 가족, 반려, 생태 등을 소재로 한 사회적 문제에서부터 코로나19를 반영하듯 감염과 질병 등에 주목하며 삶의 보편적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는 다채로운 경향의 시편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층위를 건드리는 시편들을 통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의 자리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모던한 시적 상상력으로 고유한 사물을 새롭게 견인하면서 긴장감 있게 구현하고 있는, 1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또한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은유의 한계를 유연하고 감각적인 발상으로 작동시키면서 시어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의 특질을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평균화된 시작에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심 작품들 중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묘사들과 관념어들이 오히려 번뜩이는 상상력에 균열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황정현씨의 '핑고'와 강현주씨의 '고양이' 등 두 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려놓았다.
이 두 작품 모두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존재의 모순을 해체하여 시적 언어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와 확장된 미학을 끝까지 선보인 '핑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연하지 않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핑고'는 담담한 어조로 '빙산'의 푸른 내부를 응시하면서 '무덤 속 얼음'이 '흙을 밀어 올리는' 생명의 신생과 사멸에의 '언어적 밀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신예로서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끝까지 입을 모았던 후보작 역시 공교롭게도 '빙하'의 '너울거리는' 생명에의 내부조직을 '강렬한 축문'으로 읽어내는 냉담한 시선과 사물을 여과하는 치열한 시적 안목을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최종심에서 거쳤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 권성훈 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18,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저녁의 집 -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19,
광남일보 신춘문예
길찾기
김진환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 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심사평
양보할 수 없는 시의 미학적 규범의 하나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어디서 한번은 본 듯한 기계적인 언어의 조합이나 문장,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해빠진 생각과 당연시해온 사회적 통념과의 치열한 대결이 개성적인 작품 탄생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지 않는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힘들여 개척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그러나 결국엔 모방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 아류작亞流作에 불과하다. 무한히 사본을 뽑아낼 수 있는 사진의 음화陰畵를 의미하는 ‘클리세’ 내지 복사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한 우울하고 답답한 시대상황 탓일까? 막연한 불안과 절망 의식, 실업과 빈곤 등의 주제나 소재가 다수를 차지하는 응모작들을 보면서 소감 중의 하나가 그렇다. 각자 절실하고 소중한 주제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미 공유된 명백한 사실들이나 타성화된 담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그 표현방식이 이미 한국시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기성 시인들의 어법을 닮아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경향 각지의 응모자가 보내온 1129편의 시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심사자는 김재언의 ‘물 저울’ 외 4편, 정두섭의 ‘가족의 탄생’ 외 5편, 황명희의 ‘황금냄비’ 외 4편, 장윤덕 ‘그늘의 역사’ 외 4편, 김진환의 ‘길찾기’ 외 5편 등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응모작들 모두 다행히 그런 상투성의 혐의(?)를 슬기롭게 피해가고 있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언어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하거나 당대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도덕을 의심 없이 추종하는 데서 오는 감상적인 휴머니즘 차원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심사자가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장윤덕과 김진환의 시들이었다. 그리고 장윤덕의 경우, 유장한 리듬과 활달한 문장 전개 속에서 펼쳐 보이는 시대정신과 민중의식이 여느 기성 시인 못지않은 시력(詩歷)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심사자는 결국 섬세한 관찰력과 그에 바탕한 정치(精緻)한 시적 패턴 읽기에 기반하고 있는 김진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일견 소박하게 보이나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시적 영향이나 생각의 통속성을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바로 자신만의 세상읽기와 사유를 정직하게 펼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당선작으로 뽑은 김진환의 ‘길찾기’는 길 찾기 맵과 실재, 인터넷 지도와 실제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화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필요 이상 시적 장식이나 세련된 수사의 남용보다 자신의 체험과 그 영향에 대한 성실한 반성 및 성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의 감각과 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비둘기 낙서’와 더불어 당선작은 이미 진부해진 기존의 생각이나 문체들을 자기 것 인양 포장하기보다 그것들을 시대적이고 문화사적인 맥락 속에서 저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확보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5명의 응모작들은 여느 문학매체들에 응모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작들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아쉽게 당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예비시인들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특별히 당선자에겐 늘 정진하는 시인의 한 명으로 오래 한국시단에 기억되길 바라면서 축하의 꽃다발을 건넨다.
20,
농민신문
국수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네 명의 자리에 세 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 번의 겹이
한 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 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21,
무등일보
붕어빵 안에는 배고픈 고래가 산다
조효복
아이의 웃음에선 생밀가루 냄새가 났다
접시 위에 수북이 담긴 고기를 자랑하는 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조그마한 얼굴이 웃는다
콧등을 타고 오른 비음이 아동센터를 울린다
해를 등지고 앉은 언니는 아빠를 닮았다
그늘진 탁자에는 표류 중이던 목조선 냄새가 비릿하게 스친다
구운 생선을 쌓아두고 살을 발라낸다
분리된 가시가 외로움을 부추긴 친구들 같아 목안이 따끔거린다
흰 밥 위에 간장을 붓고 또 붓는다
짜디짠 바람이 입 안에 흥건하다
훔쳐 먹다 만 문어다리가 납작 엎드린 오후
건너편 집 아이가 회초리를 견딘다
튀어나온 등뼈가 쓰리지만 엄마는 버려지지 않는다
매일 다른 가족이 일기 속에 산다
레이스치마를 입은 아이가 돈다
까만 유치幼齒를 드러낸 아이가 수틀을 벗어난 실처럼 돌고 있다
귀퉁이를 벗어난 아이들이 둘레를 갖고 색색으로 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뱃구레 속에 고래가 산다
골목은 높낮이가 다른 파동들이 그려놓은 바다 놀이터
제자리가 두려워 아래로만 내달리는 모난 고래들
풍덩 골목 아래로 제 몸을 던진다
가라앉은 먼지위로 고래가 헤엄친다
팥물 묻은 고래 비탈을 구른다
천막 아래 등이 굽은 엄마가 붕어빵을 굽는다
22,
불교신문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23,
전남매일
개미들의 천국
현이령
아버지가 아침 일찍 공원 숲으로 간다. 노란 조끼를 입고서, 숲이 아닌 것들은 모두 줍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 쓰레기를 줍다가 잘못 건드린 개미집에서 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를 물고 개미는 개미를 물고 이끼처럼 들러붙어 저녁을 먹는 우리 집.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집들이 많아. 나는 개미처럼 더듬이가 자라고 발로 툭 치면 무너져 내리는 불안들.
바닥을 잘 더듬는 내력이 우리의 유전자에 있지만 나는 한낮에도 까만 개미가 무섭다. 땅바닥을 쳐다보다 땅이 되는 게 꿈인 아버지가 떵떵거리지 못하는 건 기우뚱한 어깨 때문.
개미는 개미에게 의지하고 의지는 의지에 기대고 아버지의 몸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개미 떼. 아버지는 밤마다 방을 쓸어내지만 개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었다 허물었다 오롯이 사라지는 비밀의 집.
새집을 달아 주러 온 나는 새 운동화로 개미를 밟는다. 거대한 발자국 아래 무너진 한 뼘 그늘. 머루 열매 같은 눈알을 꼭꼭 숨긴 아버지.
나는 울먹이며 신발을 턴다. 자꾸만 들러붙는 개미들의 그림자. 숲이 사라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심사평 / 나희덕 시인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공감 시인의 중요 덕목
700여 편의 응모작들을 읽었다. 코로나 시대의 어둡고 우울한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고향이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생활 시편들이나 자연 친화적인 서정시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보니 너무 직설적이거나 감상적인 경우가 많았고, 타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언어적 모색이 아쉬웠다. 그런 중에 발견한 <커튼콜>, <긴장의 재구성>, <개미들의 천국> 등은 참신한 발상과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수작이었다.
<커튼콜> 외 4편은 경쾌하고 발랄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고 독특한 소재와 형식을 통해 다채로운 시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인식이 충분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재치에 머무르거나 낭만적 우화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긴장의 재구성> 외 4편은 사유의 폭이 넓으면서도 집중도가 있고 시적 대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돋보였다. 현실의 문제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유는 독창적이지만, 전달력이 떨어지거나 거칠고 어색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개미들의 천국> 외 4편은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간결하고 섬세한 언어로 삶의 비애와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어떤 간절함을 지니고 있으나 감정을 함부로 발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다. 당선작인 <개미들의 천국>에서 공원 청소부인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슬픔은 절제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먹먹하게 읽힌다. 힘이 없고 고통 받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시인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에서 당선자의 시선과 마음에 신뢰가 갔다. 그 마음의 힘으로 앞으로도 아름다운 시의 길을 열어가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