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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학교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학원으로 달려왔다. 이제 겨우 십대 중반에 이른 중학생들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지쳐 보였다. 학원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빡빡한 학원의 계획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사불란한 움직임들. 아이들의 어깨는 언제나 축 늘어져 있었다. 중간에는 15분 정도의 간식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얼마만큼의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그 때서야 나도 ‘아, 이 아이들이 십대구나!’라는 생각을 퍼뜩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 섬광과도 같은 15분의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건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공부해!”라는 학원장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간식 시간 전에 보았던 참고서와 문제집을 다시 펼쳐들었다. 불과 몇분 전에 넘쳐나던 활기는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본격적으로 중간고사 기간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더욱 분주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도 점점 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조용히 다가가 왜 조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하나같은 대답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 밤샘을 했다는 것이다. 안쓰럽다는 생각에, 나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책상에 자꾸만 이마를 찧어대는 아이들의 뒤로 가서 어깨를 토닥여주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상황을 어색하게 받아들였다. 그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졸음의 대가란 항상 호된 꾸지람이었으니, 어색해 할 만도 했다. 언제나 그렇게 학원의 밤은 여유 없이 깊어갔다. 밤 10시가 되면 벨소리가 울렸고, 아이들은 썰물처럼 학원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 아이에게 귀동냥한 바에 의하면,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서도 또 몇시간씩 공부를 해야 할 ‘임무’가 주어져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나가고 없는 빈 강의실에 있으면, 나는 마치 잔혹한 전쟁의 광풍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고는 했다. 그러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강의실에 어지러이 널린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다가 문득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서울의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뿌옇기만 했다. 몇개의 별이 총기 없이 반짝일 뿐이었다. 그럴 때면 ‘별빛이 초롱초롱하다’라는 말은 그저 옛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부모’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너무 쉽게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집과 학교와 학원을 아무런 감동 없이 오가고 있을 대한민국 아이들의 핏기 없는 얼굴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몇년 전에 비디오로 보았던 앨런 파커 감독의 영화 〈핑크 플로이드의 벽〉의 한 장면이 자연스레 연상되고는 한다. 컨베이어벨트에 실린 학생들이 차례차례 거대한 믹서기 안으로 떨어진 후 벌건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오는 끔찍한 장면. 그 끔찍한 영화 속 장면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는 게 나는 더욱 ‘끔찍’하다.
이휘현 자유기고가·대학원생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서 공부해!”라는 학원장의 단호한 음성에 “아이들은 간식 시간 전에 보았던 참고서와 문제집을 다시 펼쳐 들었다”라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학습이 학습이 아니라 거의 군사훈련을 방불한다는 것이다. 참고서와 문제지는 군인의 총과 무기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강제적인 학습을 매일 반복하는 아이들은 그러나 대학입학 후에는 그 많은 지식과 암기사항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 강의에 참석하는 대학생들은 그들이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플라톤의 말이 맞았다. 강제로, 억지로 배운 지식은 머리에(영혼에) 남아 있지가 않다.
플라톤이 말하는 강제적인, 노예적인 배움은 영혼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이는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이는 신체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체에 붙어 있는 학습이란 결국 동물적 학습인 조건반사 혹은 자극‐반응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극(Stimulus)‐반응(Response)이론 수준의 학습은 인간의 신적(神的) 능력인 창조, 발견 혹은 도덕적 양심적 결단과 같은 고차원적인 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강제적 학습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실험실의 동물처럼 점점 조건에 대한 반응이 빨라진다. 다시 말해 이들 노예적 학습을 반복한 인간들은 눈치가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노예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분석, 종합, 비교, 개념, 판단 그리고 추론 같은 고차적인 사유능력은 결코 생성될 수가 없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1‐3. 자본주의 노동의 4가지 소외
맑스는 「경제 철학 수고」에서 사적 소유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을 소외된 노동으로 간주하며 그 구체적인 양상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분류한다 :
ⓐ노동의 대상으로부터의 소외 ⓑ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유적(類的)존재로부터의 소외 ⓓ.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
우리의 연구가 맑스의 소외된 노동이 아니지만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므로 위의 4가지 형태의 소외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보자.
ⓐ 노동의 대상으로부터의 소외 ‐ 이는 달리 말해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소외이다. 즉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즉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서, 생산자로부터 하나의 독립적인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비싼 옷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경우, 그는 열심히 일하여 좋은 옷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 옷은 결코 그의 것이 아니라 기업주나 회사의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봉급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큼의 비싼 옷을 만드는 여공의 경우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해서 소외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가 그의 에너지를 투입하여 상품을 만들어도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는 것을 맑스는 노동의 대상으로부터의 소외라고 부른다.
ⓑ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 이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기쁨이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맑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멋있게 표현한다 :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노동이다!”
이런 노동의 소외를 맑스는 다시 자기소외(Selbstentfremdnung)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일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괴롭다는 것이다. 이런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할 때, 특히 임금노동을 할 때, 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앞으로 우리가 다룰 소외된 교육에서 많은 공명을 받을 것이다.
ⓒ유적(類的)존재로부터의 소외 ‐ 유적존재(Gattungswesen)이란 독일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고 그 개념의 발전사는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공동존재, 사회적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즉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우리라는 의식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맑스 역시 이런 독일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유적(類的)존재를 인간 존재의 중요한 양식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정신이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존재, 즉 생산과의 관련에서 이를 추출한다.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 하에서만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육체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이 생산하며, 그러한 욕구로부터의 자유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으로 생산한다. (…) 인간은 또한 미(美)의 법칙들에 의거해서 꼴을 만든다. 이처럼 인간은 다름아닌 대상적 세계의 가공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존재로서 증명한다”.
이처럼 맑스가 말하는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는 인간의 문화 생활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생존의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임금노동자의 경우 예술과 문화를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 주위에서 돌아봐도 힘든 일을 하는 경우 고차적인 예술이나 문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인간의 인간으로부터 소외 – 맑스는 위의 세 가지의 소외로부터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개념을 도출해 낸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산 활동,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립할 때에는, 그는 다른 인간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는 좁게 보면, 직장 동료들 간의 불신이나 증오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더 넓게는 소외된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 밖의 모든 사람과 화해하지 못하고 대립, 불화(不和)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할 때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점점 소원해지고 또 스스로 혐오스럽게 변할 수 있다.
1‐4. 맑스의 소외 개념 비판
대략 이런 것이 맑스의 소외론의 내용이다. 그런데 필자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을 소외로 보는 맑스의 관점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맑스가 제시하는 노동 혹은 일이 전체적인 노동이나 일 개념에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가 말하는 노동의 대상화 혹은 노동의 현실화란 개념이다. ‘대상화(對象化) (Vergegenständlichung)’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 혹은 의식을 보이는 물체로 만들어 내는 행동이다.
이 개념은 원래 헤겔(G.W.F. Hegel)이 그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언급하는 사상(思想)으로서, 이는 인간의 내면, 곧 의식 혹은 마음 등이 밖으로, 곧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되는 사건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예술가가 자신의 생각을 돌이나 흙으로 형상화하는 경우가 바로 의식의 대상화이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의 생산물은 사물화(事物化)된 노동”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재화나 상품은 모두 인간의 노동력이 대상화, 사물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맑스가 말하는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라는 명제는 모든 노동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노동에, 즉 생산적, 장인적 노동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노동을 통해 대상을 만들지 않는 비산출적(比産出的) 노동, 예를 들어 서비스업, 즉 청소라든지 운반 혹은 교사, 의사 같은 경우 노동의 현실화가 노동의 대상화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적 소유나 노동과 자본의 분리 등 자본주의의 특징이 필연적으로 소외된 노동을 야기한다는 맑스의 주장 역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영세 상인, 소규모의 기업인 등은 경우 등은 자본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으나 그렇다고 꼭 그들이 노동자 보다 더 행복하거나 노동의 소외를 덜 느끼지 않는다. 즉 자기 일을 하나 남의 일을 해주고 임금을 받으나 노동의 소외 문제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소외된 노동이란 달리 말해 만족이 없는 노동 혹은 그 노동의 대가가 적은 노동을 말한다.
요는 현금의 상황에서 보면 자기사업을 하나 고용되어 직장 일을 하나 소외 문제에 관한한 큰 차이 없는 게 현실이다. 즉 맑스가 말하는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임금노동은 자본주의 초기에는 대단히 적합한 이론이었으나 현대처럼 고도 산업자본주의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상징하는 정보 사회 혹은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시대에 동떨어진 이론일지 모른다.
그리고 맑스가 말하는 노동의 소외는 비단 자본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요는 인간의 본질이 노동 혹은 일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소외되면 인간의 본질이 소외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결국 자영업을 하든 임금노동을 하든 사람이 자기 일에 충실할 수 있다면 맑스가 말하는 4가지 소외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1-5. 학습의 대상으로부터의 소외
위에서 설명한 맑스의 노동의 소외 개념을 근거로 하여 한국의 교육, 즉 소외된 교육의 제 양상을 분석해 보자. 맑스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은 노동자가 그가 생산한 대상으로부터 소외된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보통은 학습과 교육을 분리하지만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기 교육이기 때문에 교육과 학습은 서로 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교육과 학습을 분리한다면 교육이 수단이고 학습이 목적이 된다, 즉 교육은 학습을 위한 것이다.
학습의 대상, 즉 학습의 생산물에 대한 학생, 즉 학습노동자의 태도를 한번 살펴 보자.
노동자는 일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노동의 대상, 가령 자동차를 만들어 낸다.
학생 역시 그의 학습과정을 통해 지식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지식을 스스로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측면에서 학습을 지식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전문적인 용어로 "자기화, 사유화, 습득(Aneignung)" 이라고 한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하나의 객관적인 지식(Wissen, knowledge)이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인 지식은 반드시 학습자의 의식을 통해서 습득되어야 한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지식은 영혼의 대상 혹은 목적물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추구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 기능을 잘 수행할 때 행복하다고 가르쳤다.
김태길 선생님의 저서『윤리학』에 의하면 “Aristoteles는 오직 理性과 사유만을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참된 기능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思惟를 본질로 삼는 理性의 기능을 유감없이 잘 발휘함이 人間으로서의 좋은 삶이요, 그것이 곧 人間의 행복이며 궁극목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기존 지식의 자기화 과정에서 반드시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나 발명이 첨가된다. 그런데 이 나라의 학(습)생들은 기존 지식의 자기화에 실패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공부가 오직 대학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중되고 있으며 대학생들이나 혹은 다른 학(습)생들 역시 시험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험위주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암기식이며, 이는 이해나 소화 그리고 내면화라는 과정은 거의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지식은 겉으로만 맴돌다가 시험치고 난 후에는 깡그리 망각의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진다.
그리고 학습의 동기가 자발적인 흥미나 관심이 아니라 타율적인 강제이기 때문이다. 즉 교육의 관계자들, 즉 부모나 담임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내적 강제를 행사한다 : ‘너희들 잘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엄마 아빠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 못하면 생존 경쟁에서 낙오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가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공부 못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고생이 심하다’. 등등.
학생들 역시 이런 기성 세대의 논리에 반대할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들의 신념을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으로 수긍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기성세대 아니 사랑하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강요하는 논리는 자세히 뜯어보면 공부의 목적이 사회적 성공 혹은 물질적 안락이라는 것이다. 혹은 자식에게는 자신이 당한 고통과 가난, 그리고 사회적 무시를 자녀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간절한 꿈이 서려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 보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1-6. 염려
그런데 문제는 학생 자신, 자녀 자신이다. 그들 역시 나이가 먹으면 그런 정도의 생각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들보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인가?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이들 스스로가 그런 간단한 사실을 모른다는 말인가? 아이들도 나이 먹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인생 걱정, 앞날에 대한 염려를 충분히, 아니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이 자녀의 앞길을 그토록 염려하는가?
물론 가정에서 좋은 생활 습관과 사회생활의 기초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녀와의 충분한 인격적 교류와 사랑을 통한 정서 함양은 너무나 소중한 가정 교육의 과제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부모들은 바빠서 이런 사랑의 상호작용 혹은 공동 생활을 통한 사회성, 도덕성 함양은 소홀히 하면서 반대로 자녀의 지식과 취미생활에는 많은 투자를 한다. 즉 부부가 맞벌이하여 애들은 종일 학원에 살다시피 한다.
잘사는 지역에도 애들은 학원 때문에 가정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이런 지식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자녀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질을 염려(Sorge)라고 했다. 불교에서도 인생을 백팔번뇌(百八煩惱)로 보지 않았던가? 이런 염려와 근심 그리고 번뇌는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다, 즉 자신의 미래와 내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의 염려만 책임지자. 그 외에 성급하고 주제넘게 남의 염려까지 하지 말자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염려는 간섭이고 개입이다.
아이들 역시 크면 클수록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계획하고 준비한다.
또 인간의 본질은 자유로운 결단과 자기 책임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요 주체성이다. 타인이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설령 부모라고 할 지라도 아이의 자유로운 결정과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너무 어릴 때는 부모가 전적으로 아이를 대신해서 결정하고 책임지지만 성장에 따라 점점 아이는 그간 부모에게 위임한 결정과 판단을 회수하고 독립을 선포한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와 양육은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너무 자녀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자녀 대신 걱정하고 고민한다. 결국 그들은 아이의 성장과 (잠재적)독립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때로 영원히 자녀를 아기 취급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성숙되고 독립이 안되고 평생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큰 아이도 아기라고 부른다. 이는 사랑의 표현일수도 있으나 실은 잘못된 것이다. 아이에게 그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합당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올바른 자세는 아이들의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면서 아이들이 성숙의 각 단계에서 제대로 활동하고 즐기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발육의 한 단계 한 단계는 그 때 마다 모두 중요하다, 즉 커서 출세하고 잘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 잘 노는 것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그 부모는 그 때 그 때 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신체와 영혼의 성장과 발육이 결핍되거나 방해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서 혹은 어울려 잘 놀지 못하고 늘 우울하거나 불만이 있는 애들은 장래의 사회생활, 개인 생활에서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어릴 때의 학습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고” 풀이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여건은 다 알다시피 유치원부터 대학시험준비에 돌입하는 전면적인 입시전투 체제이다. 선행 학습이나 조기 교육 등은 어린이의 어린이 다움, 즉 아동성(兒童性)을 파괴한다. 그리고 인생의 각 순간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아무리 미래를 준비하는 성장기라고 하더라도 이 역시 그 자체로서 행복하고 만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아이들은 (부모들이나 교사들이 말하는) 소위 밝은 미래 때문에 현재가 파괴된다. 즉 그들의 신체와 영혼에 깊숙이 상처가 생기고 있다. 입시 지옥에 직접 노출된 중고등학생들은 차치하고라도 새벽 6시에 벌써 학원가는 버스를 타고 있는 초등학생들, 혹은 조기 영어학습으로 생긴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의 치료를 받는 부자동네 꼬마들이나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에게 공부란 무엇일까? 학원이란? 영어란? 논술 지도란?
이는 맑스가 본 바로 소외된 노동 아니 소외된 교육이다. 즉 학습의 대상 , 즉 지식이나 공부는 학습자에게 큰 짐으로 다가올 뿐이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대한 공포감으로 심한 불면증과 정신장애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한 때 돌본 한 알코올 중독자는 예전 대학 시험에 낙방한 것이 그 병의 원인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귀중한 인생을 망가뜨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기어들어갔다.
이런 경우 지식은 영혼으로부터 소외된다. 지식은 입시공부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아이들은 시험이 끝나자 말자 공부한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참다운 학습 혹은 교육은 영혼의 기쁨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너무 오래 공부하는 것을 보고 “재오, 공부 지겹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남들처럼 적당히 공부 마치고 취업은 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하고, 또 더 공부하기 위해 외국에 까지 가서 9년간 공부하는 40이 넘은 외손주의 고생과 자기 딸(나의 어머니)에 대한 염려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게 공부해서 부모님 호강도 못시켜 드리고 아직도 시간강사 처지인 필자는 불효 막심한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필자는 아직까지 학문의 열정과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식지를 않는다. 필자에게 돈과 시간만 주어지면 무한히 더 공부하고 싶다, 즉 연구해보고 싶은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지금도 희랍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정말 인간은 죽을 때 까지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
1-7. 지식과 숙련
학습은 지식 습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무엇이지 하는 물음은 철학의 심오한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지식은 사물의 시초(beginning),원인(cause) 그리고 원리(principle)을 추구하는 것’ 이라고 정의한다. 이를 희랍의 자연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아르케(Arche) 라고 불렀다. 이런 희랍의 아르케는 요즘은 법칙이나 본질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지식(Knowledge), 즉 사물의 아르케(Arche)는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에 의해 포착되어진다. 즉 사람의 영혼이 사물의 아르케(Arche)를 보는 것이 지식의 생성이다. 그리고 지식의 탐구를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희랍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여유(leisure)가 학문하기 위한 조건임을 밝혔다. 즉 인간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이 학문이나 지식 탐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여유의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루겠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극도의 시간적 압박과 심적 강박 상태에서 학문과 지식을 추구한다. 이러니 그들은 전혀 지식의 탐구와 학문의 영역에서 발전할 수가 없다. 지식과 지혜란 충분한 시간적 여유 가운데 즐거움을 가지고 연구하는 데서 비로소 열매 맺는 농산물과도 같다. 빨리 결심을 보려고 식물에 비료를 마구 뿌리거나 줄기를 잡아당긴다면 그 식물은 열매를 맺기는커녕 병들거나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경작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농부가 인내를 가지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교육자나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결실을 맺기를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현금의 한국의 주입식, 암기식, 강제적 교육은 이처럼 아이들의 자연적인 발전을 왜곡하고 병들게 하는 부작용을 가진다.
그리고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그 기본은 같다. 양자 모두 아르케(Arche) 곧 사물의 시초, 원인, 원리, 법칙 등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단지 대학의 지식이 어렵고 초등학교의 지식은 쉬울 뿐이다. 그런데 학습이 이런 사물의 내적 원리나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시험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이는 지식 탐구가 아니라 숙련(skill) 이나 훈련(training)에 해당한다.
지식이 사물의 원인과 원리에 이론적인 학습인데 비해 익숙한 솜씨의 획득하기 위한 숙련이나 기술, 기능 등은 물론 그 자체로서 삶의 가장 소중한 능력 중의 하나가 된다. 가령 청소하는 요령이나 요리하는 방법이 숙련에 해당한다. 혹은 피아노 연습이나 달리기 연습은 그런 실력을 일취월장(日就月將) 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숙련(skill)과 지식(knowledge)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곧 지식은 진리를 추구하고 숙련은 완벽, 완성을 추구한다.
지식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이고 숙련은 유용성(有用性)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의 연마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똑같이 귀중한 것이고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극히 필요한 것들이다.
숙련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는 하나의 기능적인 훈련이다, 예를 들면 각종 연장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나 혹은 음악의 경우 리듬과 박자 감각을 익히거나 악보를 보고 악기를 연주하는 훈련이 이에 속한다. 숙련은 이처럼 연습(training)이나 훈련(drill) 등을 말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어떤 기술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가 불을 끈 어두운 방안에서 떡을 가지런히 썰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숙련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 손재주 혹은 솜씨라고도 한다. 이처럼 한 가지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그 일을 완벽히 할 수 있을 때 이를 숙련 내지 기능이라고 한다. 이처럼 숙련은 완벽, 완성을 추구한다.
학교에서 하는 물리, 화학의 실험, 실습 역시 숙련을 요구한다. 가령 교과서에서 설명되는 화학의 실험도 학생이 실험실에서 직접 해보면 제대로 되지 않음을 흔히 경험한다. 물질의 양(量)(quantity)과 질(質)(quality)을 알기 위해서 직접 경험, 실험, 조작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학교에서는 학습(learning) 외에도 이처럼 아이들에게 숙련과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영역, 즉 지식과 숙련을 구분하여 각각 따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숙련은 학교교육에서 흔히 실기나 실습 혹은 연주, 연습 그리고 만들기 등의 형태를 취한다.
이런 능숙한 솜씨로서의 숙련에 반해 지식은 사물의 원인(cause)과 원리(principle)에 대한 탐구로서 흔히 이론(Theory)이라고 불리어진다. 위에서 말한 아르케(arche)에 대한 지식을 다르게 말하면 이론(Theory)이다.
그런데 한국의 초ㆍ중ㆍ고등학교에서 실습 혹은 실기 교육은 대단히 소홀히 취급된다. 왜냐하면 입학시험과 관련이 없는 실기와 실습 과목은 흔히 무시되고 형식적으로 학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련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미술대학의 실기시험 역시 암기식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한 홍익대 학생으로부터 들었다, 즉 수험생들이 석고상을 스케치할 때, 어떤 이들은 아예 석고상을 보지도 않고 학원에서 배운 공식대로 스케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 만들어진 각종 디자인들이 거의 서로 비슷하고 독창성이나 합목적성 등이 없는 베끼기가 유달리 많다. 가령 88 서울올림픽 공식포스터가 일본인의 그것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각종 신문, 잡지 구성이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사실들이 이런 암기식 교육 때문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예능계 학생들의 독창성과 재능을 짓밟고 더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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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삽화는 한국의 88올림픽 공식 포스터와 일본인 작가들의 유사한 작품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의 암기식, 모방식 교육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상단 왼쪽의 그림이 서울대 교수 조영제가 제작한 한국의 88올림픽 공식포스터이며 상단 오른쪽의 그림은 1970년 오사카 일본세계박람회를 위해 가메쿠라가 디자인한 'EXPO포스터'이다. 전 서울대 교수 김민수의 주장에 의하면 양자는 근본적인 발상이 같다고 한다. 그리고 하단의 그림은 1980년 일본 디자이너 겐다 에수오(源田悅夫)가 타이어회사 브릿지스톤(Bridgestone)사를 위해 디자인한 홍보물이다. 여기서 이미 EXPO포스터와 88올림픽 포스터와 '같은 빛의 무늬'를 발하고 있다.
그런 반면 한국의 지식 교육, 즉 이론 교육 역시 제대로 취급되지 않고 이를 숙련의 방식으로 아동들에게 주입한다. 즉 이론적, 지식적 내용을 숙련적, 기능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가령 수학 시험문제 풀이의 요령을 학원에서 가르치는 경우. 이 때 학생은 수학 이론의 원리(아르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도 이를 이용하여 응용문제 풀기는 잘한다. 즉 공식을 이용하여 문제 풀이하는 것을 학교 교육의 대강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풀이는 역시 하나의 숙련이고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숙련 간의 차이의 하나는 후자는 열심히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할수록 여기에 비례해서 효과가 나오지만 전자는 무리하게 열심히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은 철저히 정신의 자발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숙련이나 훈련은 고통스럽게 열심으로 한다면 가시적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지식이나 이론 학문 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문연구를 장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 학문 연구의 흥미를 못 느끼다가도 후일 늦게 학문탐구의 열정이 점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나 국가는 개인들의 그런 학문적 열정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항상 교육 기회를 열어 놓고 있어야 한다.
이런 영역간의 혼동이 한국 교육의 핵심 문제이다. 즉 개념적, 이론적 지식을 기능적, 숙련적으로 가르치고 기능과 숙련을 요하는 과목들을 이론적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예술적 영역 역시 암기식, 기능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니 한국에서 교육 받은 학생들은 이론이나 숙련(기능) 혹은 창작 가운데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졸업장만 따 가지고 세상에 나가게 되고, 그러니 자연히 그들의 생존능력은 극히 미약해 지는 것이다.
이런 학습 영역의 혼동은 결국 학벌주의, 입시위주의 교육과 학습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는 개인의 재능개발을 방해하고 나아가 인력 개발을 저해하며 종국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된 원인이다. 아래의 그림들을 보면 한국의 그림들이 얼마나 일본이나 다른 나라 그림들의 모방인지를 알 수가 있다.
포돌이의 이상한 눈은 김민수에 의하면 일본 만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전후 일본 만화가 요코하마 미쓰데루 원작의 '요술공주 새리'와 '밍키'에서 유래한 만화가 이현세의 서울경찰청 캐릭터 '포돌이'와 '포순이'의 이상한 눈알 등등. 이 모두가 두 눈뜨고 보고 싶지 않은 일제잔재의 황사들이다”
이처럼 극도의 암기와 모방 만을 일삼는 한국의 실기 교육은 결국 독창성을 키우지 못하고 남의 것을 베끼기에 급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산업)디자인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대단히 큰데 우리나라처럼 주체적인 사고와 감성을 무시하고 철저히 모방과 암기에만 의존하는 미술 교육과 학습은 국가적 경쟁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때 국가 고시(考試)를 3과목이나 합격하여 천재로 칭송받던 박찬종씨는 “고시는 기술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요즘도 이런 종류의 문장들이 수험생의 세계에는 자주 눈에 띤다. 박찬종이 말하는 고시 과목들은 다 나름대로 학문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헌법학이나 형법이니 모두 이론적 지식의 영역이다. 그런데 사법 고시라는 학습에서는 이런 학문들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서 별로 주목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 내용을 요점별로 잘 정리해서 시험장에서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답안지에 옮기기만 한다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고시는 기술이다”라는 문장은 그러므로 지식과 기능, 특히 암기력을 혼동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박찬종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소위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소위 엘리트이고 지도자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학교교육은 지식도 숙련도 모두 암기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암기식의 학습이 바로 소외된 학습이다. 이는 지식이나 이론을 배우지도 못하고 숙련이나 솜씨를 함양하지도 못한다.
소외된 학습은 이처럼 지식을 내면화 시키지 못한다. 그러니 죽자고 공부하지만 아이가 현명해 지거나 사리분별이 생기지 않는다.
대학 입시라는 심적 강박 상태 하에서의 학문과 지식의 탐구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 필요한 하는 온갖 종류의 시험들 역시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고시 공부, 입시공부는 이처럼 학문과도 관련이 없고 지식과도 관련이 없다. 이는 지식을 기계적, 물리적으로 암기하여 필요한 곳에 적절히 쏟아 붓는 기술을 말한다.
1-8. 학습의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지식과 도덕과 아름다운 감정은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내면성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강요된 지식이나 규칙 혹은 정서는 인간의 내면성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이런 지식의 폭력을 느끼고 자란 아이들이 창조적인 지성인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공부는 하나의 정신적 작용이다. 앞에서 플라톤의 『국가』에서 ‘억지로 학습한 것은 결코 영혼에 남아있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또 철학자 헤겔(G.W.F. Hegel)은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한다. 헤겔은 자유가 정신의 한 속성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라고 한다. 그는 또 인류 역사의 발전이 풍요한 물질 생활의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확대로 보았다. 여기서 정신이란 의식 혹은 주체성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이런 정신적, 의식적, 주체적 활동으로서의 학습 내지 교육에 강제가 개입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인간에게 자유는 때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큰 결점이 그 학벌주의에 있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런 학벌주의를 파괴하지 않으면 강제 학습, 스트레스 학습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이 주제는 뒤에 다시 토론하기로 하자.
앞에서 우리는 맑스가 소외된 노동의 두 번째 특징을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라고 규정한 것을 공부했다. 이에 대응하는 ‘학습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해서 이미 위에서 많이 언급하였다. 이는 집단이기주의 교육의 문제로 규정된다.
입시지옥이라고 불리는 한국과 일본의 교육 환경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지식의 탐구를 곧바로 사회적 부와 권력의 획득으로 간주하는 것은 시장주의 내지 자본주의 교육의 본질이다. 이 경우 학습은 사회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된다. 이런 지식과 출세의 동일시는 또한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유산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역시 현금의 수능시험 못지않게 수험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한다.
학문과 지식을 탐구하고 획득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사물의 이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실무적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 하에서는 교육 = 돈 이라는 공식이 통용된다. 즉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 돈을 번다는 논리이다.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나 기타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재화가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명문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귀족층이 형성이 되고 이들이 사회적 가치를 독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부조리에서 소위 빈익빈 부익부 라는 계층간의 위화감과 소외감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값비싼 교육을 시킴으로 해서 자녀들 역시 그들의 시대에 사회적인 가치를 되찾도록 적극 투자한다. 가령 같은 서울의 초등학교 A 와 B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두 학교 모두 축구부가 있다. 초등학교 A에는 축구부 회비가 월 1만원밖에 안 되는데 인근에 있는 좀 잘 사는 지역의 초등학교 B에는 축구부 회비가 월 24만원이란 것. B학교의 경우 그 축구 감독선생이 프로축구 선수 출신이고 A학교는 그냥 교사가 가르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돈 = 실력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지식권력의 사회에서 학습자들은 엄청난 공부의 압력을 받는다. 오늘 날 한국의 가정의 경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오직 ‘밥 먹어라, 학원 가라’라는 두 문장만을 말한다고 한다.
위에서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본질은 자유라고 밝혀 졌다. 학습 역시 정신의 활동인데, 이를 강제하면 정신은 자기 모순을 일으킨다. 현대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고통은 맑스가 말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 및 투쟁이 아니라 학습자(학생)의 자기 분열이다.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소외된 학습이 우리 시대의 비극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진정한 비극이다. 이는 진정 6.25 보다 더 큰 비극이요, 모순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현금의 한국사회의 부조리, 무능력, 실업, 신용불량자 , 자살, 지하철 참사, 정치 비리, 공직 부패 등등의 모든 사회악이 굴러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맑스의 문장을 패로디(풍자)하여 아래와 같이 만들어 보면 학습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학습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따라서 학습자는 그의 학습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학습자는 학습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학습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학습자는 자신이 학습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학습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그의 학습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학습이다!”
이렇게 소외된 공부, 학습을 하는 것이 오늘 날 한국의 학생들이다.
1-9. 친구로부터의 소외
이는 성적 경쟁, 업적 경쟁을 강요하는 학교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들의 친구들과 불화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교육의 목적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식의 습득, 기능의 숙련, 예술의 창조를 통한 자기 개발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교육은 이런 자기 개발, 능력 배양과는 무관하게 오직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입학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삼는 입시위주의 경쟁 교육을 시행한다. 이러다 보니 일생에 있어 소중한 시절인 학창시절이 즐겁지 않고 고통과 스트레스로 점철된 시절로 각인된다. 따라서 그 시절의 교우 관계 역시 왜곡된다. 학우는 친구 라기 보다는 경쟁자 내지 적으로까지 간주된다.
특히 고교에는 내신이라는 상대평가에 의한 성적 서열이 있어서 나의 좋은 성적은 친구의 나쁜 성적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학급, 교실이라는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배움터가 삭막하고 차가운 배타적 경쟁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내가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하여 극히 친한 친구를 속이는 일까지 생겨난다. 즉 입시정보, 예를 들면 홍익대 미대 입학시험 전에 그 학교 근처에 있는 입시전문 학원에 들어가면 대학시험에 유리한 정보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한ㅇㅇ 이란 학생은 그런 문제로 결국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게 되는 쓰라린 상처를 입게 된다.
“(…) 가장 소중하고 친한 친구를 꼽으라 하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단연 고등학교시절 친구들을 꼽으리라.. 그러나 입시라는 것이 아름다운 내 친구를 앗아갔다. 참으로 같이 고생하며 정으로 사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같이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친구였는데 내가 미술을 뒤늦게 시작한 터라 그 친구는 많은 의지가 되고 또 도움을 주었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미술학원을 다니기가 참 벅찼지만 그래도 꿈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어 나는 그 어려움들을 잘 감당해내던 차였다. 그러나 수능을 치르고 나서 나는 친구를 잃었다. 다시 생각을 하려니 참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 친구와 나는 목표가 같았다. 둘 다 서울에 있는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과는 그야말로 모든 미대 인들의 최고점이라고도 불리 울 만큼 높은 성적과 실기를 요하는 과였다. 전국의 그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 30명만이 그 학과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30명... 참 좁고도 잔인한 구멍이었다. 그 30명이란 구멍이 내 친구가 나를 버린 이유가 되었으니,,(…)”.
한ㅇㅇ씨가 그녀의 친구와 불화하게 된 이유는 그 친구가 입시 학원정보를 숨기고 또 거짓된 정보를 그녀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친구는 전국에서 오직 30명만 뽑는 산업디자인 학과에 입학하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친한 친구인 한ㅇㅇ씨를 속이고 따돌린 것이었다. 필자는 제자가 쓴 이 글을 보고 울었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한국교육은 절대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기 잘되기 위해 절친한 친구마저 속이고 따돌려야 하는 학창생활! 거기서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느낀다는 말인가?
거기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 신뢰가 아니라 불신, 신뢰가 아니라 배신, 평화가 아니라 폭력 그리고 화합이 아니라 불화(不和)라는 불미스러운 덕목(德目)들이다.
물론 현재 학교 학생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요는 입시위주 그리고 수능(修能) 과 내신(內申)의 경쟁이 커질수록 거기 비례하여 이런 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깊어 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참으로 불우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강압적 학습으로 다 보내고 우정과 사랑을 통해 인간성을 폭 넓게 키워 가는 대신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경험하도록 운명 지워진다. 무엇보다 이들이 자유와 여가를 다 빼앗겼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그림 설명 안녕하세요.~~ 저는 홍익대학교 조형대 99학번 심재웅입니다...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자면... 아직도 뿌리뽑지 못한 미술교육의 폐단을 주제로 한 이 그림은 미술 본연의 개념을 교육하기 보다는 입시 위주의 암기식 교육, 강제 교육등에 의해 발생한 미대 입시 시험에서 일어나고 있는 헤프닝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서로 정해진 자리에 앉아서 시험을 보기 보다는 그리기 쉬운 자리, 표현하기 쉬운 자리에 앉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런 그림 속에 담겨져 있는 일들이 해마다 심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학교의 소외
위에서 분석한 교육 소외는 실제 학습 현장인 학교와 학원 그리고 가정 등에서 많은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 중요한 소외 현상을 소개하고 그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자리를 물색해 본다. 여기서 다룰 현상은 요즘 흔히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학교(교실) 붕괴, 자퇴, 폭력, 자살 그리고 대안학교 등의 문제들이다.
2‐1. 학교 교육 부적응자, 탈학교주의자
위에서 언급한 교육의 소외는 현실적으로 볼 때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초ᆞ중ᆞ고교 학생들이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하거나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고 있다. 한겨레 신문 2003년 1월 3일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학교 떠나는 청소년 는다 한 해 평균 6만 여명의 초중고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3일 교육인적자원부의 집계를 보면 질병, 사망, 유학, 이민 등을 제외한 순수 학업중단 청소년이 지난 2001년 한 해에만 약 5만5000명으로 전체 학생의 약 1.5%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육개발원 통계에 따르면, 중고교 학생들 가운데 제적 및 중퇴 등으로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 수는 중학생의 경우 지난 2000년 1만7338명, 2001년 1만9097명, 2002년 1만9842명 등으로 계속 늘어났다. 또 인문계 고등학교도 2000년 1만6520명, 2001년 1만8921명으로 늘어난 뒤 지난해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2만166명) 교육전문가들은 이처럼 공교육 울타리를 벗어난 청소년들의 수가 현재 약 20만 명 이상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처럼 자퇴생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과거처럼 경제사정이나 탈선 때문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적성이나 삶의 가치, 관심분야 등이 다양해지면서 학교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 2000년 3월 서울 ㅅ여상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신경주(18·가명)양은 입학 1주일 만에 자퇴서를 냈다. 신양은 “입학 때부터 ‘인사는 몇 도로 하고, 책상은 어떻게 정리한다’는 것부터 가르치는 학교가 너무 답답했다”고 자퇴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청소년상담원이 지난해 4월 학교를 떠난 학생 221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전체의 45.8%가 자신의 진로나 진학 등의 문제로 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지난 1995년 2만9천여 명이던 자퇴생 규모가 2001년 3만3천여명으로 늘어나 학생수 대비 자퇴생 비율이 3.2%에서 5.1%로 급증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인 서울 ㅁ고 최아무개(34) 교사는 “지난해 정원 40명인 1학년 한 반에서 학교를 떠난 학생이 7명이었다”며 “학교에서 개설한 전공이 아이들의 진로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교사도 학생도 모두 알고 있다”고 털어 놨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유로운 학습과 자기 개발을 경험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격과 개성이 무시당하며 자유가 유린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 원인에서 학생들은 이제 학교를 떠나 혼자 검정고시를 공부하거나 대안학교를 찾는 수가 많다. 이제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예전처럼 부끄럽거나 치욕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소신 있게 자퇴하는 탈학교(脫學校) 운동이 한국 교육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한겨레 신문 “왜냐면” 이란 독자 칼럼 난에(2002.9.11) 고교 자퇴자인 이태우씨는 “나의 자퇴선언서”라는 글을 써 이 나라 학교 교육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교육계와 전체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었다. 이 글을 보면 지금 학교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부각이 된다.
“나의 자퇴선언서”
“2002년 9월 5일, 저는 만년고등학교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학생회와 학교에 반납하며, 4개월간의 짧은 학교 생활을 마감합니다. 학교는 내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라는 물음으로 저의 선언서를 시작합니다. 과연 학교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이 물음은 학교의 기본 목적인 "교육"에 대해서 학교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충실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려 말할 수 있습니다.
(…) 즉, 이런 "입시학습"은 동네의 어느 학원에서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굳이 ”학교"라는 틀 안에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는 한 문제의 본질을 가르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을 지도해 나가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게 그런 것을 가르칠 여유와 교육에 대한 이해는 없는 듯 합니다. 오직 입시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라는 학교의 방침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와 같은 "양심적 자퇴"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양산될 것입니다.
(…) 하지만, 학교는 나에게 몇 가지를 빼앗아 갈 뿐, 해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매도해 버리는 교사진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원리를 배우고 실험하며 학습을 확인하는 것이 학교의 목적이지만, 이미 학교와 교사들은 "책의 노예"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책"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교는 나의 개성을 앗아갔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군복(교복의 유래는 군복입니다)을 입혀 아이들을 단지 "통제 대상"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고, "머리 기를 자유"를 앗아가 신체의 자유권조차 뺏어갔습니다. 불법적 수업에 대항하는 나에게 "반동분자"라는 탈을 씌웠습니다. "준법"이라는 가치가 "반동"이라는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학교는 원칙을 저버렸습니다. 원칙에 기준해 학생들을 교육해 학생의 모범이 되어야 할 학교에서, 원칙은 없었습니다. 학교는 이렇게 썩어 들어갔습니다. "상위권 6 개반 만 모의고사를 보자"라는 편법까지 동원해가면서 성적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있었고, "대입"을 위해서 개인의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
이태우씨가 위에서 말하는 대로 현재 학교를 탈퇴하는 학생들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서울시내 중.고등학생의 절반 이상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자퇴하는 고등학생이 2001년 2.3%에 이른다는 통계가 나왔었다. 이런 “양심적 자퇴생”들의 수는 점점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태우씨는 교육의 목적을 “원리를 배우고 실험하며 학습을 확인하는 것이 학교의 목적이지만”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현금의 학교는 그런 기능을 상실하고, “이미 학교와 교사들은 "책의 노예"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책"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지나친 교과서주의, 정답주의가 한국 학교 교육의 병폐인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교육의 대상이 아르케(Arche),즉 사물의 원인과 원리이며, 이를 인간의 주체, 즉 영혼이 획득하는 것이 학습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그러므로 책이나 교사 등은 이를 위한 보조원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항상 자기는 아는 것이 없다 라고 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가운데서 훌륭한 자신들의 지식과 이론을 생산해낸 것이었다.
이처럼 서구의 교육철학은 학습자가 수동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스스로 인식하도록 요구했다. 학생들이 진리의 산모(産母)이고 스승은 학생들이 힘들게 진리를 창조해 낼 때 이를 받아주는 산파(産婆)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책이나 쓰여진 문서를 진리의 보고(寶庫)로 보는 동양적, 중국적 전통과는 다른 것이다.
책이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 혹은 정신이 진리의 모태요, 산실이라는 것이다. 좀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이성 혹은 의식이 곧 지식과 진리의 장소라는 것이다.
교과서나 각종 교재는 아르케, 즉 진리가 표현되어 있는 매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글자와 문장은 내가 그것을 보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통나무 같은 물체가 아니라 나의 영혼, 나의 의식을 통해 다시금 재창조되어야 하는 정신적 내용인 것이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문장은 그런 진리와 지식에 대한 하나의 서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수업은 반드시 교과서에 문자적으로 얽매일 필요가 없다. 개별 학생들의 학습과정이 다양한 것처럼 교수방법 역시 무한히 다양할 수 있다. 그러니 설령 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습 환경에 따른 다양한 강의 방법, 교수 테크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교에는 강의 노트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교수가 많다.
방ㅇㅇ 이라는 한 대학생은 변화 없는 대학강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
“(...) 어려운 학문을 이번 학기에는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학생들에게 좀 더 모티베이션을 유발시킬지 연구하는 교수님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저 번 학기와 이번학기 가르치는 방식이 변함이 없습니다. 어려운 학문을 어렵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에게 넌 마라톤 선수니까..달리는 훈련만 하라는 것과 똑같습니다..마라톤 선수에게 다양한 산악훈련, 웨이트 트레이닝,,스피드 훈련등등의 다양한 훈련을 접목시키고 어떻게 훈련을 하니깐,,효과가 크게 증가하더라..이런 연구를 해야 마라톤 선수는 월계관을 착용하는 것입니다.. (...) 학생들을 탓하는 교수님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 분명 교수님들도 문제는 있습니다..강의에 변화가 없습니다. 저 번 학기에 가르쳤던 방식 그대로 전공과목 강의를 하며, 강의 그 자체가 그저 책 읽는 연습으로 대체하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이공식을 쉽게 이해 시킬까 하는 연구가 없습니다..다음학기에 그 수업을 들으면 재방송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자료를 저희들에게 보여주시고 또한 저희들이 다양한 자료를 탐구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대학, 그런 교수님이 있어야지만 저희는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교수는 원칙적으로 자기가 쓴 저서나 하다못해 강의 원고를 가지고 가르쳐야 하지만 대부분 남의 책을 원서라는 이름으로 강의교재로 삼고 있다. 그 만큼 실력이 안되면 타인의 저서라도 가르쳐야 하지만 위에서 방ㅇㅇ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강의 방법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매 학기 마다 재방송을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대개 본인의 저서를 강의 교재로 한다. 그런데 설령 자신의 저서로 가르치더라도 매 학기 수업시간 전에는 항상 예습을 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강의 방법과 새로운 자료를 첨부해야 하고 또 교재 중에서 생략할 것과 집중적으로 가르칠 것을 연구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말하는 생각들도 경청하여 자신의 지식의 창고에 입력시켜야 한다. 이래서 홍익대에서는 ‘우수 강사’로 인정도 받았지만 어이 없게도 본인의 과목이 모두 폐강되는 불운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교과서적 지식과 진리 역시 불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문과 지식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는 항상 비판과 부정 그리고 창조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지식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늘 요구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성현의 말씀은 항상 옳다는 지식의 권위주의, 상고주의(尙古主義) 가 자리잡고 있다. 교사 역시 이런 지식 획득을 위한 안내자, 인도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은 교사가 진리와 지식의 주입자라는 역할을 맡는다. 학습의 주체가 학생의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교사이며 학생은 수동적으로 지식을 받아 먹는 자로 치부된다.
위에서도 누차 말했지만 지식이란 마치 빵을 먹는 것처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영혼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획득의 과정은 모두 개인적이고 창조적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마치 어머니가 아픈 아이에게 알약 먹이듯이, 교사가 지식을 학생들에게 먹일 수는 없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교육을 타율적으로 수동적으로 파악하고 그런 의미에서 학습 역시 타율적, 수동적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모순이 숨어 있는 것이다.
교육(敎育) (Bildung)은 근본적으로 자기교육(自己敎育) (Selbstbildung)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사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일깨워 아이가 자발적을 재미있게 그 학습 내용을 추적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지식을 시정해 주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대학 강의의 경우 출석 체크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듣는 것은 학생이 스스로 공부하는데 필요한 안내를 받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은 강제적, 수동적, 타율적 교육의 잔재가 남아있어서 대학생들의 강의시간에까지 출석을 부른다, 그리고 출석 점수를 부여하고 출석 미달이면 학점을 펑크낸다. 이는 명백히 자율적 학습의 위반이다. 초ᆞ중ᆞ고교에서 출석을 부르고 모두 수업에 참석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직 학생들이 자립적으로 공부할 역량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획일적인 출석을 강요 당한다. 그러나 대학생은 이미 성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학은 성인을 어린아이 취급한다. 인간의 교육은 어릴 때의 타율교육에서 시간이 지나고 개인이 점점 독립함에 따라서 자율교육, 자기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다시 한국의 입시위주의 교육의 문제로 돌아가자. 입시위주의 교육의 폐단은 학습자의 영혼과 정신과 그리고 이성에 대한 무관심과 그 남용(濫用)에 있다. 학교는 젊은이의 정신을 학대하고 영혼을 짓밟고 이성을 악용(惡用)하고 있다. 이러니 학습자의 영혼, 정신 그리고 이성, 사고가 제대로 발육이 안 된다. 마치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평생 정신적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며 항상 이로 인해 육체적, 심리적 장애와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인간성을 무시하는 학교교육은 인생의 전 기간에 걸쳐 개인들의 지적, 정신적 장애를 안겨준다.
한국 교육은 이처럼 자기교육(自己敎育)과 자기 개발이 아니다.
한국의 학교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정신적 폭행에 가깝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랑과 관심 속에서 성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학교에서 아이들의 인격과 개성의 발전이라는 고유의 교육 목표는 상실되고, 아이들은 오직 대학입시라는 단색조(單色調) 의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리게 하는 학교와 수업과 교사를 미워하게 되어 학교 밖으로 뛰쳐나오는 이런바 탈학교(脫學校) 현상이 우리 시대의 문화 코드로 급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시험 점수 올리기를 위한 교육은 교육의 현장에서 우열반(優劣班)을 가르는 비교육적 반편성을 통해 더욱 교육의 소외를 부추긴다. 그래서 위에서 이태우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상위권 6개 반만 모의고사를 보자는 편법”이 학교에 횡행하는 것이다. 이는 획일적 평준화 정책이 가져온 부산물이다. 이 문제는 학교제도를 현금의 단선제(單線制)에서 독일식의 복선제(複線制)로 변화시키고 기능교육, 실업 교육을 활성화시키면 해결이 된다.
2‐2. 교육 소외에서 인생 소외로 – 학생 자살
해마다 수능시험과 대학 입학 시기를 전후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슬픈 소식이 고등학생 성적 비관 자살이라는 기사이다. 2003년 수능시험 때문에 자살한 고 3 수험생이 벌써 둘이나 된다. 5일 1교시 대학수학능력고사를 치르던 전북 남원의 한 여학생이 시험장 부근 아파트에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사건이 일어났다. 수능을 친 다음 날 서울에서도 한 여학생이 "수능성적이 낮게 나와 대학도 못 가게 생겼다"며 아파트 25층에서 떨어져 숨졌다고 한다.
해마다 공부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의 수가 전국적으로 200명을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조선일보 2003년 11월 5일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수능보던 여고생 1교시 후 투신자살
"엄마·아빠 행복" 수능시험지에 유서 남겨
대입 수능시험을 치르던 여고생이 1교시를 마친 뒤 고사장을 빠져나와 인근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자살했다. 5일 오전 10시35분쯤 전북 남원시 노암동의 한 아파트 18층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창문에서 남원 모여고 3년 송모(18)양이 40여m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투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송양은 대입 수능시험 고사장인 남원여자정보고에서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마친 뒤 교문에서 100m쯤 떨어진 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 것으로 밝혀졌다. 아파트 옥상 계단에는 송양의 가방과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송양은 이날 1교시 언어영역 60개 문제 중에서 3개만 푼 뒤 시험지 여백에 “엄마, 언니, 아빠 행복하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 이모부도”라는 메모를 남겼다. 또 그 옆에는 자신의 생일인 ‘1985년 8월 22일’과 수능일이자 생애 마지막 날이 된 ‘2003년 11월 5일’도 적어 놨다. 송양의 담임교사인 최모씨는 “송양은 말수가 많지 않은 평범하고 원만한 학생으로 평소 성적 때문에 크게 고민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송양의 아버지는 “아침에 ‘시험 잘 보고
오겠다’며 인사하고 나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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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11> 촛불제 5일 저녁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수능 반대 페스티벌에서 행사에 참가한 학생과 시민들이 대입수능시험 도중 성적비관으로 투신자살한 송모양을 추모하는 촛불제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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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년생인 언니에 이은 둘째 딸인 송양은 중위권 성적으로,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수업료를 면제 받았다고 학교측은 말했다
경찰은 일단 첫 시간 시험을 잘못 치러 비관 자살한 것으로 보고, 가족 등 주변을 대상으로 정확한 동기를 조사 중이다.
전교조는 성명을 내 “이는 치열해지는 학벌주의와 살인적 입시 경쟁이 낳은 필연적 결과”라며 “죽음을 부르는 입시 지옥을 방치한다면 우리 청소년의 미래는 절망뿐”이라고 말했다.
위의 기사에 의하면 송양은 수능시험을 치다가 갑자기 시험장을 탈출하여 인근의 아파트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신문기사처럼 그녀는 “1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