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성경 : 고후 8:9/시 84:11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은혜'라는 말을 자주 쓰고 듣는데, 과연 은혜란 무엇일까요?
통속적으로 은혜란 어떤 큰 신세를 졌을 경우에 느끼는 '고마움'을 뜻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결초 보은(結草報恩)하겠다고 하며 은혜를 모르는 자를 배은 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세속적인 은혜의 의미에는 보은성(報恩性) 즉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의 논리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란 하나님의 관대하신 사랑에 의하여 주권적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시 84:11). 그러므로 성경적인 은혜에는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 통행만 있을 뿐이지, 보은성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세속적 은혜와 성경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와 관련해서, 부지불식 간에 흔히들 은사와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은 시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은혜(혹은 은총)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구원에 대해서만 사용해야 할 용어이며, 은사란 용어는 부, 재능, 지식, 직업, 예인 등을 준 것(창 32:10;마 25:14-25)에 대하여 사용해야 할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에 관한 위대한 원리의 장(章)인 본장을 쓰면서 은혜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혜란 어떠한 은혜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은혜의 원천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12)라고 하였으며, 바울도 은혜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그의 서신서들(롬 15:15 등)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인 하나님의 선물 내지는 그 관대하신 사랑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지상의 임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의 원천이 됩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지는 이 은혜는 영원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충만하심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은혜와 진리는 구약에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히 나타났습니다(요 1:14,16,17).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참된 은혜입니다(벧전 5:12).
2. 풍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신 은혜
'풍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셨다'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으로서 부요하셨지만(시 104:24), 그의 희생을 통하여 세상을 보요케 하시려고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실 때에는 부요하셨지만(고전 8:6),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시고 낮은 인간 상태에 들어오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심(Incarnation)은 인간과 하나가 되어 사랑과 선으로 인간을 악의 세력에서 구하여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은혜는 곧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없이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으며, 이웃과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우리는 이 사랑을 예수님으로부터 빚진 자들로서 그 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빚을 형제들에게 갚으라고 하셨습니다(마 25:40). 바로 이 한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원하여 연보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았으며,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빚을 갚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형제의 부요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가난함으로 부요케 하신 은혜
부요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넉넉한 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가난함으로 부요케 하셨다'함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케 하시어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말 구유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태어나셨지만,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완악한 우리를 변화시켜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의 '심령이 가난한 자'도 마음이 넉넉한 자를 말하며 바로 이 같은 사람이 남을 용서하고 도울 수 있으며, 복을 받아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마케도냐 교인들이 삼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한 것은 그들이 이 '넉넉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넉넉한 마음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8:1)라고 하였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연보를 하는데 인색하지 않고 관용을 보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통은 기쁨의 샘이 되었으며, 이 기쁨속에서 그들은 형제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가난이 오히려 그들을 부요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흔히 부자가 인색하고 빈자가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빈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어려움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곤고한 자를 도울 줄 압니다. 이처럼 참된 부요는 소유에 있지 않고 베풂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난한 마케도냐의 교인들이 실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실정은 어떻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산의 3%만 구제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색해도 너무 인색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은 대오 각성(大五覺醒)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철저히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새로운 축복과 약속, 그리고 구원의 소망을 부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