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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산청/단성면] 성철 대종사의 생가를 가다. 지리산 겁외사(智異山 劫外寺)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137 13.01.16 10:0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당췌 이해안되는 큰 스님, 성철스님을 찾아서,

'지리산 겁외사(智異山 劫外寺)'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  /  055-973-1615

 

대한민국 선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수행승,

무소유의 삶을 청빈으로 몸소 실천한 수도승,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알듯 말듯 한 법어로 범인들을 혼란케 만드는 스님,

성철스님의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마삼근(麻三斤)'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 동산수초(洞山守初)선사가 삼서근을 인용해서 부처님은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벽암록(碧岩錄)> 12칙에 있다. 1천7백여 가지 화두가 있는데, 이 삼서근은 기념관을 방문하는 분들에게 내리는 성철스님의 화두이다."

 

 

겁외사 내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삼서근입니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당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마삼근'은 뭐고 '삼서근'은 또 뭔가요?

'화두(話頭)'가 이야기의 시작이라면, '공안(公案)'은 수행자들에게 재제시하는 일종의 과제입니다. 즉 , '선문답(禪問答)'입니다. 그런데 선문답은 묻는 것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음과 답이 모두 엉뚱합니다. 즉, 선문답은 문답 자체가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벽암록을 읽으면 알음알이가 딱 끊어진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중, '마삼근(麻三斤)'이라는 화두는 당대 대선사인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선사가 던진 화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山是山水是水)" 성철스님의 가장 많이 알려진 이 화두 역시 선문답입니다. 물음도 아니고 답도 아닙니다. 듣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결국, 길손의 우매한 머리통으로는 '당체 이해불가(當體 理解不可)'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쩝.

 

'지리산 겁외사(智異山 劫外寺)',

2001년 3월, 철저한 무소유의 삶으로 존경받는 성철스님의 열반8주기를 맞이하면서 복원 된 생가에 자리한 절집입니다.

뒤로 엄혜산을 두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르고 있는 아늑한 분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4천여평에 가까운 터에 안채와 사랑채 유물전시관의 생가터와 대웅전, 심검당, 정오당과 요사. 그리고 스님의 동상이 자리하며 2층 누각 벽해루로 이루어진 겁외사터를 이루고, 주차장과 부대시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의 생가는 큰 아들인 성철스님이 출가하자 부친이 대 저택을 부수어 버리고 인근의 대나무숲에 집을 다시 지었고, 스님 역시도 출가 이 후에는 고향땅을 한번도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행적으로 본다면 지금의 자리에 겁외사 내지 생가의 복원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벽해루로 들어서면서 만나는 규모있는 성철스님의 동상 자체도 길손을 머뭇거리게 하였는데, 그 마저도 푸른빛으로 만들어 놓으니 영 보기 불편합니다. 그 앞의 복전함도 걸거칩니다. 겁외사 대웅전 역시 '무소유'를 실천했던 스님과는 달리 금박을 입혀 찬란합니다. 이 역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스님이 열반하신 '가야산 백련암(伽倻山 白蓮庵)'도 그 모습은 거의 같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요사 한채를 지으려 하셨습니다. 지금의 '고심원(古心院)'입니다. 이 요사를 지으실 때 당신의 돌아가실 날을 알고 있었다고도 하지요. "스님, 내일이면 요사의 마지막 문을 답니다."하니, "이제 내 할일 다 했다." 하시며 '염화당'으로 향하셨고, 이내 열반에 드셨지요.

그런데 고삼원의 원래의 목적은 도서관이었습니다.

스님은 책을 좋아하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세계 각국의 고서들을 선물을 받고, 직접 지으신 저서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책 들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고삼원에는 스님의 동상과 복전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철스님에 대하여 절을 하고 공양을 할수도 있겠습니다만, 스님의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 영 불편하지요.

스님의 서적들은 백련암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1년에 한번 10일정도 햇볕을 보게 됩니다. 속세의 딸이었던 '불필(不必)스님'이 스님탄생 10일전에 백련암을 찾아 스님의 서적들을 햇볕에 건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겁외사와 백련암의 풍경은 선문답이려니 합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우매한 길손의 생각 보다 더 깊고 큰 뜻이 있겠지요. 

 

 

겁외사 '벽해루(壁海樓)'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에 즐겨 하던 말씀으로 '붉은 아침해가 푸른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는 뜻의 '홍하천벽해(紅霞穿壁海)'에서 따온 것입니다.

벽해루의 주련에는 '심신명(心身銘)'의 첫 구절을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성철(性徹, 1912~1993)큰 스님',

1912년 4월 6일(음2월19일), 경남 산청에서 부친 '율은 이상언(栗隱 李尙彦)', 어머니 '강상봉(姜相鳳)'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 났습니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아호는 '퇴옹(退翁)'입니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이어져 온 지주의 집안으로 부족함 없이 살던 집입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부터 병약하여 잦은 병치레를 합니다. 그리고 단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입시를 치루는 날, 갑자기 쓰러져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어 스님의 최종학력은 보통학교에 머물게 됩니다. 친구들과 뛰어 놀기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동안 주로 독서를 하게 됩니다. 둥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면서 서당과 독서를 대신합니다. 병치레를 하는 자식이었으나 집안의 장남이기에 집안에서는 서둘러 아들의 혼사를 치룹니다. 22세의 나이로 부인 이득명여사와 혼례를 올렸고, 딸 '이수경(李壽卿 現, 불필不必스님)'을 얻게 됩니다.

 

스님은 많은 독서를 하면서 늘 궁금해 합니다.

"사람은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는가?, 왜 꼭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가?"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몸 상태로 인하여 생노병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가현각(永嘉玄覺)스님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게 됩니다. 증도가를 읽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길로 곧장 산청 대원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대원사에서는 스님을 거부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스님의 집안이 산청지역의 지주인데다가 그 집안의 장남이며 이미 결혼을 하였고, 아이까지 가진 사내라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고집과 의지가 대단했던 스님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해인사에도 스님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 갑니다. 그러자 '하동산대종사(河東山大宗師, 1890~1965)'는 그를 보기를 청했고, 스님과 대면 한 후 1936년, 25살의 나이로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됩니다. 이듬해 3월 범어사에서 보살계, 비구계를 수지합니다.

이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답게 살자."며 청담(靑潭)스님등과 함께 선풍(禪風)을 높이게 됩니다.

 

그러나, 스님의 집안은 발칵 뒤짚힙니다.

 

 

성철스님 동상

 

 

 

 

성철 스님을 이야기 하면서 스님의 부친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바로 성철 스님의 꺽이지 않는 고집과 강한 의지, 당당한 체구는 스님의 아버지를 꼭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스님이 되었다 하나 속세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큰스님도 존재 할 수 없었습니다.

 

성철 스님의 아버지 '율은 이상언(栗隱 李尙彦)'선생은,

조선 말, 산청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자리에서 지내신 분입니다. 강상봉(姜相鳳) 여사를 아내로 맞이하여 4남3녀를 두었고, 그 중 성철스님이 장남입니다. 

율은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훤칠한 키에 시원한 이목구비의 호남형인데다가 성격이 당당하고 직설적이었습니다. 성철스님에게는 무서운 아버지였으나 때로는 자상한 면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부친의 호에서 알수 있듯이 집안에는 밤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몰래 밤을 따러 오기도 하였답니다. 그런데 밤나무에 있는 아이들을 그냥 보고만 있다가 밤나무에서 내려오면 그 때 호통을 쳤다고 하지요. 나무위에 있을때 야단을 치면 혹시 아이들이 떨어질까봐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집도 황소고집인지라, 창씨개명 당시에 일본경찰들이 협박을 일삼아도 꿈적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전쟁물자에 동원하기 위하여 집안의 살림들을 가져가려 할때마저도 끝내 거부, 수저 하나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부친의 완고한 성격은 해방이후에도 면모를 드러 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집안의 장남이 중 노릇을 하겠다고 출가를 하니 부친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더욱이 산청이라는 땅은 '남명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의 학풍이 전해져 온 곳으로 유교적인 사상이 짙은 땅이었으며,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 중은 '천민(賤民)'의 취급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남의 출가 사건은 집안은 물론이고, 마을을 뒤짚어 놓는 일이었지요.  부친의 동료 유학자들 마저 중을 가진 가문과는 친교를 맺을 수 없다 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고집세고 당당했던 부친의 낙담은 말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부친은 경호강에 그물을 치고 고기들을 잡으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즉, 부처가 자신의 자식을 데리고 간것에 대한 복수인 것입니다. 불가에서 금기시 하는 살생을 버젓이 대 놓고 하면서 매 끼니를 매운탕으로 해결을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모든 물고기를 살생한 것은 아닙니다.

스님의 모친은 잡아온 물고기를 대야에 담아 다시 강물에 풀어 놓았던 것입니다. 장남의 출가는 아버지의 낙담과 함께 자식과 남편사이에서 눈치 보며 사는 어머니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손주딸의 출가와 며느리의 출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임종 전 삭발을 하고는 스님과 같은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성철스님 동상앞에 세워진 염주와 목탁

 

 

 

 

그리고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 준 딸의 이름 '수경(壽卿)'이 있습니다.

진주사범대를 잘 다니고 교사 발령까지 받은 20살의 젊은 처녀가 "부임하지 않겠다."며 절에 들어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집안은 다시 발칵 뒤짚혔습니다.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절로 들어 갔으며, 당시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갑니다. 딸의 출가 소식을 들은 성철 스님은 그녀에게 '불필(不必 : 아무것도 필요 없음=무소유)'이라는 법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딸을 절로 따나 보낸 성철스님의 부인이자 불필스님의 어머니 역시 57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일휴스님이 되었고, 성철스님의 어머니는 임종 직전 삭발을 하고 스님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같은 우매한 머리통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것입니다. 중이란?, 수도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가족을 등져 가면서까지 산속에 머물며 수행을 하는 것일까요?

분명 성철스님의 가족사는 애절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행복하겠지요? 길손은 생각해 봅니다. 스스로 자연인이 되기 위하여 과연 주위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괜찮은 것인지 말입니다.

암튼, 길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확실히 저는 돌.대.가.리.입니다.

 

 

혜근문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여행객

 

 

 

 

그러한 성철스님은 1955년, 당시 '비구(比丘)'와 '대처(帶妻)'들간의 분쟁이 있었던 때에 해인사 초대주지로 임명 됩니다.

그러나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68년 해인사 초대방장에 취임하여 100일동안의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합니다. 이 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7, 8대에 취임 되었으나 취임식에는 불참합니다. "중이 세상일에 왜 간섭하는 가?"라는 이유였습니다. 취임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떠밀리다시피 성철스님은 조계종의 종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던 1981년, 그러니까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조계종 7대 종정으로 추대 되었던 그 해 12월,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출간하면서 '돈오돈수(頓梧頓修)'를 설파합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 (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동안의 한국 선불교에서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돈오점수(頓梧漸修)'를 전통 수행으로 여겨 온 것에 반한 것입니다.

즉, 돈오점수는 '이론적인 앎을 수행하는 것으로 참된 앎이 아니라는 것'이며, 돈오돈수는 '이론적인 앎과 행동이 일치되어야만 진정한 앎'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로 지금도 불가에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냥 쉽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즉, 보조국사는 일반인을 상대로 인생의 가르침을 설하였다면, 성철스님은 수행자의 가르침에 대한 입장이었다고 말이지요. 

 

그러던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열반에 드셨습니다.

   

 

겁외사 혜근문(惠根門)

겁외사 경내와 성철스님 생가 경내가 나뉘어 지는 곳으로 혜근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성철스님의 생가입니다.

 

 

 

 

그러한 성철스님의 세속 생가에 자리한 절집이 '겁외사(劫外寺)'입니다.

'시,공간의 밖에 절'이라는 뜻으로 겁외사라는 이름은 성철스님이 말년에 요양하였던 부산의 거처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겁외사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뉩니다.

겁외사의 공간과 스님의 생가 공간입니다.

일주문이 자리하지 않은 겁외사는 1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육중한 2층 누각의 '벽해루(壁海樓)'가 그 시작입니다. 벽해루라는 이름은 스님이 평소에 즐겨 하던 말씀으로 '붉은 아침해가 푸른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는 뜻의 '홍하천벽해(紅霞穿壁海)'에서 따온 것입니다.

벽해루의 주련에는 '심신명(心身銘)'의 첫 구절을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至道無難唯嫌揀擇(지도무난유혐간택), 但莫憎愛洞然明白(단막증애동연명백).

毫釐有差天地懸隔(호리유차천지현격), 欲得現前莫存順逆(욕득현전막득순역).

違順相爭是爲心病(위순상쟁시위심병), 不識玄旨徒勞念靜(부식현지도노념정).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며 하늘과 땅사이로 벌어지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말라.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벽해루를 들어서면 중앙에 성철스님의 입상이 자리합니다.

좌측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우측으로 정오당과 쌍검당, 그리고 공양간으로 사용 되는 요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의 입상의 뒤로 솟을 삼문인 '혜근문(惠根門)'이 자리하며 그 너머의 공간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재현 한 것입니다. 

정면에 '율은고거(栗隱故居)'라고 이름한 안채가 자리하며, 우측으로 '율은재(栗隱齋)', 좌측으로 '포영당(泡影堂)'이 자리합니다.  율은고거에는 성철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할때 사용한 염화실의 모습이 재현 되어 있으며, 포영당은 유물전시관으로 성철스님이 단성초등학교 재학당시의 학적부와 메모지등과 함께 백련암에서 보관중이던 누더기 가사와 장삼, 지팡이, 덧버선, 고무신과 '마삼근(麻三斤)'라 쓴 성철스님의 친필 화두등의 30여점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멀고 먼 이해의 길입니다.

성철스님의 법어는 아무리 기를 써도 이해가 되질 않는 길손입니다. 더욱이 스님의 출가와 함께 애절한(?) 가족사는 길손에게 가슴깊이 남습니다.

한국 불교사에 큰 획이셨던 성철 큰스님,

그러한 스님의 청빈한 삶을 느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겁외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스님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뭐, 당시 지주의 집을 재현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할말 없겠지만, 육중한 몸뚱아리의 벽해루와 노랑 금빛의 대웅전 치장은 성철스님의 삶과는 너무 먼거리감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도 성철스님의 생가를 다녀 온 것만으로도 스님의 모습을 어느정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의 추구, 스님으로서의 수행자적인 의지, 그러함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큰 스님으로 말입니다.

 

 

'포영당(포影堂)'

유물전시관으로 사용 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성철스님의 단성초등학교 재학 당시의 학적부와 젊은 시절에 메모해 두었던 메모들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백련암에서 보관중이던 성철스님의 40년 누더기 가사와 장삼, 치팡이, 덧버선과 고무신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채 '율은고거(栗隱故居)'

성철스님이 백련암에 게실 때 사용한 방을 재현해 놓은 공간입니다.

부친 이상언과 모친 강상봉여사가 사용하던 방을 재현 해 놓은 공간입니다.

 

 

율은재(栗隱齋)

부친 율은 이상언 선생과 모친 강상봉여사가 사용하던 방을 재현 해 놓은 공간입니다.

 

 

율은고거 옆에 핀 뜬금없는 동백

 

 

 

 

겁외사 '대웅전(劫外寺 大雄殿)'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였으며, 수묵화의 대가 김호석(金鎬?) 화백이 그려 낸 성철스님의 진영이 걸려있습니다. 외벽에는 성철 스님의 출가와 수행, 설법, 다비식의 모습등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의 정면에는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바로 성철스님의 '오도송(梧道訟)'입니다. 

 

黃河西流崑崙頂(황하서류곤륜정), 日月無光大地沈(일월무광대지침).

遽然一笑回首立(거연일소회수립), 靑山依舊白雲中(청산의구백운중).

황하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곤륜산 정상으로 오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으로 꺼지는 도다.

문득 한번 웃고 돌아 서보니, 청산은 옛 그대로 횐구름속에 있더라.

 

 

 

정오당(正悟堂)과 쌍검당(雙劒堂)

 

 

 

 

 

 

 

by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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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16 14:13

    첫댓글 성철스님에 대한좋은이야기와 지내온생가등을 다시금 생각하고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새해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신 새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 13.01.16 15:16

    길손님
    좋은 유적 여행 정보 감사합니다.

  • 13.01.17 09:19

    좋은글 감사 합니다....

  • 13.01.20 14:37

    얼마전에 우연히 성철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겁외사를 보고~성철스님의 사진을 보면서 ~~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훌륭하신성철스님의 이야기를 올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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