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소시)'가 아닌 문약(文弱)파로 일컬어지는 이들 세 사람마저 이러한 논의를 할 정도였으므로 일본인 사이에서는 관민(官民)을 불문(不問)하고 거기에 공공연한 화제가 되어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참가한 타케타 노리유키(武田範之)의 전기(傳記)에는 '삼국간섭'을 계기로 한 명성황후의 재등장과 일본의 후퇴로
"서울에 재류(在留)하는 일본 민간 지사 등은 이 상황을 목도(目睹)하자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붙이며 내밀(內密)히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가슴이 후련한 대사를 기획하게 되었"으므로 일시 토오쿄오에 돌아가 있던 타케타는 9월에 시바 시로오(柴四朗)와 급히 서울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때는 미우라의 부임과 같은 시기이다.(<興亞風雲譚-武田範之傳-> 井上右 平凡社 1942. pp. 158~159)
또한,
" 동아(東亞)를 구하고 조선을 구할 눈앞에 있는 단 하나의 간단한 방법은 민비(閔妃)를 매장하는 데에 있다. 민비를 죽여라! 민비를 매장하라! 이러한 것이 당시 서울에 재류하고 있는 지사의 외침이었다"라고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에 기록되어 있다.(<東亞先覺志士記傳> 葛生能久. 上卷 黑龍會出版部 1934. p. 522) 미우라 고오로가 부임했을 무렵에는 대체로 대원군을 일으켜 구국(救國)의 일을 맡기려고 한다는 소리가 고조(高潮)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인의 이러한 동향은 이제 막 미우라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스기무라는 일본인 고문관들이 누차 공사관에 와서 궁중의 횡포 때문에 개혁사업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려는 사정을 호소하고 미우라 공사의 구호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오씨 등에 대하여 오늘 날 같은 형세가 되어서는 이미 입과 혀로는 구원할 수 없고 실로 무엇인가 결심해야 할 궁경(窮境)에 도달했다.고 <재한 고심록(在韓 苦心錄)>에서는 말하고 있었다.(p. 171)
또한, 미우라의 임명 자체에도 또한 착임 후의 동향에도 의혹이 가득 차 있었다. '삼국간섭' 후의 주조공사(駐朝公使)로서는 러시아의 공사 웨베르(K. I. Waeber)에 대항할 수 있는 숙달된 외교관을 기용하는 것이 정석(定石)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미 앞에 말한 미우라가 제출한 의견서는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의견서에 정부가 명확한 방침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사퇴하기는 하였지만 어쩐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 의견서는 형식적인 것이고 정부와 미우라 사이에서 오간 문제의 초점은 명성황후에 대한 대책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일본의 대 조선정책을 저해(沮害)하는 외적(外的)인 요인(要因)인 러시아에 대해서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임할 것이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에 거류하는 일본인은 명성황후에 대한 대책을 포함하여 대 조선 강경책을 이노우에게 공작하고 있었지만 효과가 없자 여러 경로를 통해 정부에도 공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 일본 국내에서도 유지들 사이에는 조선의 정세를 걱정하고 정부로 하여금 이노우에 공사를 귀환시키고 보다 강의과감(剛毅果敢)한 인물을 공사로 파견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하며 내밀히 정부관계자에게 헌책(獻策)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마침내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이노우에를 대신하여 미우라를 채용했다"고 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권파(國權派)는 이노우에뿐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조선에 대한 연약외교(軟弱外交)를 공격하였고, 여기에는 조선에 주재하는 일본인의 의향을 반영시키고 있었다. 미우라는 본래 국권파(國權派)였기 때문에 이러한 '소시'들과 인맥적(人脈的)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들의 명성황후 살해 계획에 관하여 잘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미우라는 취임에 즈음하여 타니 칸죠오(谷干城), 토리오 코야타(鳥尾山彌太), 소가 스케노리(曾我祐準), 시바 시로오(柴四朗) 등과 만나 협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大山巖> 兒島襄 第4卷 文藝春秋社 1978. p. 224)
이 면면들이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장주벌(長州閥)의 토리오는 평양회전(平壤會戰) 후의 1894년 10월, 그리고 시바 시로오는 1895년의 '삼국간섭' 후에 각각 조선에 와서 '소시'들과 획책(劃策)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본다면 미우라의 사퇴는 명성황후 대책을 둘러싼 의견의 차이였다고 보인다. 결국 미우라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방침도 받지 않은 채로 조선에 건너온 이상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자신이 스스로 자유로이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 하고 부임했다고 한다.(<觀樹將軍 回顧錄> p. 320) 아마 명성황후 제거에 대해서는 이토오, 야마카타, 이노우에 등은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달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히로시마의 요시오카 판사는
" 미우라 공사는 공사로 부임하였을 때부터 이미 그와 같은 수단의 계획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라고 지적하고 있었고, 스기무라 또한 미우라가 "받아들인 결심은 다름 아닌 일신을 희생시킬 결심"(<秘書類纂 朝鮮交涉始末> 伊藤博文 中卷 p. 483. p. 530)을 하고 " 토오쿄오 출발 때에 조만간(早晩間)에 사변 발생을 예기했지만 내년-1896년- 12월 경 까지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在韓苦心錄> p. 172)라고 기술하고 있듯 , 미우라는 독단적으로 계획을 숨기고 부임하였다.
넷째, 미우라의 '부임에 즈음해서는 시바 시로오, 쓰키나리 이사오(月成 勳)같은 민간 지사가 막료(幕僚)라 할만한 관계로 동반하였다'(<동아선각지사기전> 상권 p. 517)고 한다. 타케타 노리유키도 함께였다. 이들 시바, 쓰키나리 등은 바로 사건을 위한 동반자였으며 사건에는 '시바 시로오는 미우라 공사의 수족이 되어 모든 계획에 참여하는 한 편 장사들의 조종에 종사하였다.'고 우치다는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일본외교문서> 28-1 p. 559) 미우라는 부임에 즈음하여 국서(國書)를 국왕에게 봉정(奉呈)한 뒤,
" 폐하의 부르심이 있지 않으면 1년 내내 앉아서 서울의 풍월(風月)을 즐길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신(外臣)은 부처를 믿고 몸소 경문(經文)을 베껴쓰면서 세상의 안태(安泰)를 기원합니다. 바라옵건대 관음경(觀音經) 일부를 청사(淸寫)하여 왕후 폐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상주(上奏)하고 정치적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 왕비로 하여금 '꾸밈이 없고 말이 없는 한 무사로서의 안도(安堵)' 시키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 음모를 위한 연막전(煙幕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미우라는 착임(着任)하자마자
" 부득이한 경우에는 부득이한 수단을 취하기로 재빨리 마음 속으로 결정한 것 같다. 다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숙고(熟考)가 필요하므로"
비밀로 하고 있었다고 사건 관계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말하고 있다.(<閔后 落事件>)
다섯째, 이러한 시기에 훈련대의 해산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훈련대는 1895년 2월 교도중대(敎導中隊)를 모체(母體)로 하여 오위(五衛)의 병사에서 선발하여 편성되고 일본장교가 배속되어 이는 친일적인 군대로 개화정권의 무력적 기반이 되고 있었다. 이 해산은 일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미우라는 시기의 도래(到來)를 결의했을 것이다.
아다치 켄죠오(安達謙藏)는 9월 21일 경 미우라 공사의 대한(對韓) 결의가 어느 정도인가 확인하려 미우라를 방문하였다. 그때 미우라는
" 어차피 '여우사냥'을 해야 하는데 자네 곁에 젊은 사람이 얼마 정도 있는가?"
고 묻는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뇌리(腦裏)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비밀이오'라고 미우라는 내게 말하였던 것이다.(<민후조락사건>)
아다치 켄죠오는 이노우에 카오루의 후원으로 일본어와 조선어로 된 '한성신보(漢城新報)'를 서울에서 간행하고 있었고, 미우라와는 조약 개정운동 이래 알고 있던 사이였기 때문에 '결의'를 숨김 없이 털어놓는다. 아다치 켄죠오는 '여우사냥은 비밀'로 하여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미우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오매불망(寤寐不望) 기다리고 있었다. (<安達謙藏 自敍傳> 新樹社 1960. pp. 55~59)
이상과 같이 미우라는 조선 왕비 배제의 방침을 감추고 부임하여 9월 하순경부터 계획의 구체화에 착수하였다. 부임하자마자 착수했던 것은 정세가 급박하고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인 관민(官民)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로, 대원군의 추대 공작이다.
먼저 호리구치가 9월 하순 호출을 받아 공사의 서재에 가보니 미우라는 스기무라를 참모로 하여 계획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리구치는 대원군저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 2일 경 미우라와 스기무라는 협의하여 그때까지 11월에 예정되어 있던 사건의 결행을 10월 10일로 앞당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대원군 추대는 전년(前年)의 왕궁점령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에 의한 쿠데타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호리구치를 대원군저에 파견했을 때, 스기무라는 대원군저의 유폐를 담당하고 있는 조선의 순검이나 병사에게는 또한 약삭빠른 이면이 있으므로 말이 쉽게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하였다. 정말이지 그 방면의 숙달자(熟達者)이다.
호리구치는 들은 대로 문지기나 순검이나 이궁(離宮) 경호 병대(兵隊)의 우두머리로부터 대원군의 시종에 이르기까지 쥐어줄 것을 쥐어주고 약삭빠르게 교섭한 결과 대원군을 배알(拜謁)할 수 있었다.
대원군을 추대하기 전에 대원군의 변화 무쌍한 행동을 막기 위하여 미우라 등은 오카모토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약조(約條)를 맺게 하였다고 한다.
1) 대원군은 궁중의 업무에 전념하고 일체의 정무(政務)에 간여(干與)하지 않을 것.
2) 김굉집(金宏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세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고 기타 개혁파의 인물을 요로(要路)에 배치하여 정무를 오로지 하게 하고 고문관의 의견을 들어 개혁을 결행할 것.
3) 이재면(李載冕)을 궁내대신(宮內大臣), 김종한(김宗漢)을 협판(協辦)으로 할 것.
4) 이준용(李埈鎔)을 일본에 유학시킬 것.
10월 5일 미우라와 스기무라는 오카모토를 대원군저에 파견하여 궐기(蹶起)가 급박(急迫)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이 '약조'의 승낙을 요구하였더니 대원군은 자못 유쾌한 듯 즉시 양해하고 조금도 반대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는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쓰고 있다.(<민후 조락사건>) 그러나 오카모토의 진술은 그것과 다소 달라 대원군은 '나도 노경에 접어들어 도저히 끈기 있게 계속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대로 죽을 때라고 체념하고 있다.'며 사퇴하였지만 이재면, 이준용도 동석(同席)하여 몇 번이고 권유하였으므로 마침내 승낙하게 되었다고 요시오카 판사에게 대답하고 있었다.(<비서유찬 조선교섭시말> 중권. p. 472. p. 415. '내전보고(內田報告)'에 의하면 이 '약조'는 호리구치가 대원군을 방문하기 이전에 오카모토가 대원군저를 방문하여 의향을 타진하였더니, "미우라 공사에게 나(대원군)의 뜻을 전하면 어떠한 조건으로도 승낙할 것이므로.....공사는 오카모토로 하여금 대원군은 입궐 후 결코 정사에 참견하지 못하게 할 것과....중요한 조건을 인정한 서약서를 대원군으로부터 받아두게 하였다.=<일본외교문서>28-1 p. 55 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호리구치, 스기무라, 오카모토 등이 말하는 것과 모순된다. 분명 어느 쪽이 숨기는 말을 하고 잇는 것이다.)
먼저 대원군이 스기무라가 초안(草案)한 '약조'를 한 글자 한 구절도 고치질 않고 기꺼이 수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전년의 입궐 요청을 보아도 명백한 일이다.
<권재형 보고서(權在衡 報告書)>에는 왕비 살해 직후 미우라, 스기무라 등이 피비린내로 수라장이 된 왕궁에 들어가 공포에 떨고 있는 국왕을 2. 3시간에 걸쳐 알현(謁見)했을 때, 그곳에는 막 입궐한 대원군도 같은 장소에서 참례하여 그 석상(席上)에서 3통의 문서를 인정하고 이를 폐하에게 봉정(奉呈)하여 그 기명(記名)을 앙청(仰請)하였다.
그 가운데 1통은 앞으로 일체의 국무(國務)는 내각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취지를 인정하고, 다른 1통에는 대원군을 따라 왕성(王城)에 들어온 이재면을 궁내대신에 임용할 것을 인정하며 나머지 1통에는 궁내 협판의 임명을 기재(記載)하였다. r,리고 폐하는 모두 이들 문서에 기명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미우라의 요구에 의해 그 취지를 "凡百政皆先議于內閣大臣"이라고 궁중(宮中), 부중(府中)의 분리에 의해 내각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다는 조칙을 발표하지만(<日省錄> 고종 31년 8월 20일 조) 이는 '약조'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고종에게 내민 이 3통의 문서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약조'와 공통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필자는 '약조'에 대해서는 대원군을 추대할 때에 전년과 같은 임기응변적(臨機應變的)인 술책으로 강제로 서명케 하고 국왕에게도 같은 취지의 철저화를 꾀하였던가, 혹은 대원군을 추대해낼 때에는 '약조'까지 들고나올 여유가 없어 미우라 등이 왕궁에 들어가 국왕, 대원군에게 '약조'를 드리밀었던가의 두 가지 가능성을 들 수 있지만 생각하는바, 후자의 쪽이 진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미우라는 이 알현에 대해 '대원군은 금후 궁내사무에 참여할 때까지 정무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에 협정하고 그 취지는 조칙으로 공포할 예정'이라고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大山巖關係文書> 日本國立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所藏)
이 '약조'라는 것은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대원군에 의한 쿠데타로 가장하고 그 후의 일본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잔꾀였다. ,
둘째로 왕궁 점령 및 왕비 살해를 꾀한 실력으로 일본 군대를 동원한다.
담당자는 공사관 소속 무관이며 군부 고문관도 겸하고 있던 쿠스노세유키 히코 중좌와, 제18대대대장이자 서울 수비대장인 바야바라 츠토모토 소좌였다. 쿠스노세는 10월 2일 경 공사관에서 미우라, 스기무라 등돠 군대 동원에 관해 협의하고 바야바라와도 구체적인 동원 계획을 다듬었다. 그리고 계획을 은폐하여 왕실을 방심(放心)케 하고 일부러 다수 관민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을 떠나 위장 귀국 길에 올라 인천에 도달하였다.
바야바라는 10월 6일 공사관에서 미우라의 지시를 받아 각 중대장에게 '내일(7일) 임시회의를 개최하니 오전 8시에 출두' 할 것을 전달하고 이튿 날, 7일 오전 8시 중대장 이시모리 요시나오(石森吉猶), 무라이 타카무네(村井右宗), 마키 마사스케(馬采政輔), 후지토 요조오(藤戶與三)를 대대본부에서 만나 공사의 뜻을 전하고 제1중대는 대원군을 맞기 위해 공덕리로 향해 출발하고, 제2중대는 궁성 배후의 여러 문들을 수비하며, 제3중대는 그 일부를 공사의 호위에 내놓고 나머지는 광화문 및 그 양측의 문을 경비하고, 이시모리 대위 및 타가마츠(高松) 대위는 제2훈련대에 부속되어 그 움직임을 감시하고 코이토(鯉登) 대위는 광화문에서 훈련대와 시위대 사이에서 이들을 진무(鎭撫)하고 또 동문(同門)의 수비를 맡고 또한 모두 대원군의 입궐은 막는 일이 없도록 하며 궁성의 제문(諸門)은 외국인을 제외......조선안은 알체 출입을 금지시키며 특히 왕비를 놓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게다가 제1훈련대도 동원하여 '궁성 북문의 수비를 맡게 하고 나아가 무라이 대위에게 중대의 지휘는 고참 소대장에게 맡기고 제1훈련대에 부속시켜 그 움직임을 감시할 것을 명하고 기타 공사의 촉탁을 받아 수비대 제2중대로 하여 사다리를 준비' 하게 하여 준비 완료한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을 인용하면, 이 관계를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 왕성 제문의 경비를 맡은 중대장에게 바야바라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왕비가 나가는 것을 규제하라고 훈령" (1896년 군법회의 판결문 가운데에서 발췌한 기사.-1896. 1. 18,19-)
셋째로, 일본의 외교관과 영사 경찰을 동원한다. 이것은 미우라와 스기무라가 직접 지시하고 있고, 하기하라 히데지로오(荻原秀次郞) 경부(警部)가 현장 지휘를 담당한다.
넷째로, 일본 민간인을 동원한다. 이것은 아다치 겐죠오(安達謙藏)가 담당하여 7일부터 긴급 동원을 개시하였다.
스기무라는 6일, 동향을 탐색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와 요인들의 집을 방문하였다. 조희연(趙羲淵), 권영진(權榮鎭), 훈련데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 등은 훈련대 해산 등에 분개하여 궁중의 간섭에 대항할 조치를 강구할 것을 역설하고 있었다고 한다.(<在韓苦心錄> pp. 176~177) 그러나 조선인에게는 왕비 살해 계획은 일체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인이라도 오카모토, 호리구치, 하기하라, 아다치, 쿠스노세, 바야바라에게는 사전에 이야기하였지만 중대장들에게는 7일이 되어서야 전달하게하고 그 이외의 사람에게는 극비로 해두었다. 호시 토오루, 사이토 슈우이치로오 등의 고문관과 우치다 영사 등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다.
10월 7일 공사관에서, 미우라, 스기무라, 바야바라의 세 사람은 음모의 계획에 관한 막판 협의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우범선이 뛰어들어와 훈련대 해산에 대한 국왕의 내지(內旨)가 나온 것을 전달하고 일본의 압력에 의한 해산의 저지를 요청하였다. 이때 스기무라는 일부러 별실로 우범선을 초대하여 대응하고 있었다. 종래 대둰군이나 훈련대 간부도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는데 우범선에게도 계획을 알려주고 있었더라면 새로운 긴급사태에 대하여 동석(同席) 시켜 공동모의를 하는 편이 보다 유효했을 것이다. 따라서 동석시키지 않았던 것은 우범산에게 대해서 비밀이 샐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기무라는 '사세(事勢)가 매우 급박하여 10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 내일 출발했으면 한다. 당신의 사정에 지장이 없느냐?'고 사건의 중핵(中核)이 된 일본군의 동원태세를 바야바라에게 재다짐하여 '좋다.'는 해답을 받고 미우라와 세 사람으로 8일 미명(未明)으로 결정한다.(<在韓苦心錄> pp. 180~181)
미우라, 스기무라는 경찰, 민간인 책임자들을 급거 공사관에 소집하여 7일 오후 3시부터 하기하라, 아다치, 등과 동원태세와 행동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
이렇게 보았듯이 사건을 주모한 것은 대원군이 아니라 미우라이며 대원군과 미우라의 공모(共謀)도 아니다. 대원군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리고 참모는 스기무라이다. 우치다는 미우라와 가담자 사이에 서서 알선의 수고를 한 사람은 스기무라 서기관이라고 지적하고 있고(<일본외교문서>28-1 .p. 558)스기무라 또한 '나는....계획자의 중심인 형상'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재한고심록(在韓苦心錄) .p. 183)
미우라, 스기무라는 실행계획의 방략서(方略書)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에 따르는 실행의 과정을 보면, 첫째, 사건의 주동력인 일본군의 출동은 바야바라의 지시에 따른다. 각 부대의 움직임을 열거(列擧)하면, 제1중대 중대장 후지토 요조오는 오전 2시 용산방면으로 행군하여 한성부 부근에서 대원군 일행을 만나 1소대를 나누어 그 전위(前衛)로 삼게 하고 잔여(殘餘) 소대는 제2훈련대의 후위(後衛)가 되어 대원군을 호위하여 입장하고 각 소대를 나누어 성내의 일부를 경계하였다. 제2중대 중대장 무라이 타카무네는 사다리를 휴대하여 시라키(白木) 중위, 타케나가(武永) 소위로 하여금 궁성 북방의 제문(諸門)을 경비하도록 하고, 무라이는 스스로 통역을 따라 제1훈련대 영(營)으로 가서 대대장 이두황(李斗璜)과 협의하여 대병(隊兵)을 대생문(隊生門) 및 그 근방에 배치하였지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이 막게되자, 동소(同所)의 경비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이두황과 함께 수비대 영에 맞서고 나아가 대대장의 명령을 받아 제2중대의 수지(守地)에 이르러 제문을 경비하는 데에 종사하였다. 베3중대 중대장 마키 마사스케는 광화문 및 그 양측의 경비를 맡아 시종 동처(同處)의 경비에 종사하고 일부 병력은 미우라 고오로의 입궐을 호위하는 동시에 왕궁에 돌입할 때에 사용하기 위한 사다리를 병졸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였다.(<아사히신문-朝日新聞-> 1896년 1월 19일 자)
둘째, 호리구치와 하기하라는 공사의 명에 따라 와다나베(渡邊), 사카이(境), 요코오(橫尾), 오다(小田), 키와키(木脇), 나라이(成相)의 여섯 순사를 이끌고 평복차림으로 가는데 7일 저녁 무렵 당지를 출발하여 용산(龍山)으로 가 그곳에 있는 본국인 쇼오지 아키라(莊司章)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민간인 행동대와 합류한다.(<일본외교문서> 28-1. p. 556) 거기에 7일 밤 10시경에 돌연 쿠스노세 고문이 인천에서 돌아와 고문 부원 12명을 소집하여 총과 탄환 30발을 교부받아 쿠스노세의 인솔 하에 사건에 가담한다.( <居留民之昔物語> p. 59)
셋째, 서울에 주재하는 민간인을 동원하여 이들을 2개조로 나누었다. 하나는 한성신보사조(漢城新報社組)로 대장에 아다치, 부장에 사사 마사유키(佐佐正之), 객장(客將)에 타나카 요시미치(田中賢道)였다. 이들은 저녁에 한성신보사에 집합하여 공덕리로 가 대원군을 옹립하여 왕궁에 돌입한다. 다른 1조는 시바시로오의 우소(寓所) 파성관(巴城館)에 집합하고 대장에 쿠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부장에 야마다 레츠세이(山田列聖)였다. 이들은 왕궁으로 직행하여 대원군의 입궐에 합류하게 된다. 저녁때부터 각자의 담당 부서에 들었다.
한성신보사조의 사사 마사유키,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 마츠무라 타츠요시(松村辰喜)는 간부회를 열고 밤 10시에 신문사를 출발하여 용산으로 가 키타니(木谷) 선박회사 및 쇼오지(莊司) 선박회사의 2층 또는 일본경찰서에서 합류하고 밤 12시 경 오카모토도 가담하여 일행 30여 명은 대원군 저에 갔다. 파성관조의 쿠니토모 시게아키, 츠키나리 이사오, 사세 쿠마테츠(佐瀨態鐵) 세 사람은 광화문 앞에 숨어 왕성 내의 동정을 시찰하는 최후의 역을 맡는다. 그 외의 사람은 저녁 무렵부터 12시경까지 파성관에서 기생을 불러놓고 장행회(壯行會)의 주연(酒宴)을 연 뒤 바로 광화문으로 직행하였다.
하기하라는 일본 순사와 민간인 등을 지휘하여 대원군 저를 습격하여 호위하고 있던 조선 순경 10 여명을 강제로 창고에 밀어 넣고 외부에서 굳게 이를 봉쇄하고 그들이 착용하고 있던 제복, 제모(制帽)를 벗겨 이를 일본 순사에게 착용시켰다.(<일본외교문서> 28-1. p. 556) 조선인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면 일본군민이 대원군 저의 순경에 대하여 강제적인 실력행사를 하기보다는 대원군에게 사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원군을 떠받든 일본의 군대, 경찰, 민간인은 왕성을 점령하고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만다.
이하에서 그 실행과정에 관한 몇 가지의 문제점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첫째, 대원군 추대의 경위이다. 히로시마의 '예심종결결정서'에서는 "일동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를 총지휘자로 하여 공덕리로 가서 이주회의 일행과 함께 이튿날 8일 오전 3시 경 대원군의 교여(轎輿)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가담자인 기쿠지 켐죠오(菊池謙讓)는 대원군 저를 향한 일본군민을 대원군으로부터 " 사자(使者) 세 사람이 와 맞이하였다. 이주회, 이진호(李軫鎬), 구연수(具然壽) 세 사람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태공(太公)이 제군(諸君)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우리들로 하여금 안내하게 하였다고 하며 세 사람이 선도(先導)하고....대원군은 일동이 온 것을 기쁘게 맞으며.....말하기를 제군이 모여든 것을 감사한다. 때는 바야흐로 새벽녘에 가까워 졌으니 지금부터 출발하여 왕궁으로 진입하라."는 대원군을 옹립(擁立)하여 이주회, 구연수 등을 선두로 하여 왕궁으로 향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近代 朝鮮史> 下卷 菊池謙讓. pp. 406~412) 이것도 분명히 거짓말이다. 이주회 등은 출영(出迎)하지 않았으며 입궐을 선도한 사실도 없다.
이 이주회 등을 연락원으로 하여 일본인이 오기를 기다려 흔쾌(欣快)히 맞아 들였다고 하는 대원군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체 평상(平常)과 다름없이 취침 중이었다. 그것은 역시 가해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오의 기술(記述)이 증명하고 있는 터이다.
" 이날 밤 대원군이 침대에서 풍운을 꿈꾸면서 자고" 있다가 "밤중에 갑자기 지사(志士)가 들어온 것을 몽롱(朦朧)한 잠자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던가, 혹은 " 물론 이 날 밤은 아무런 통지도 미리 하지는 않았다. 밤중에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가 느닷없이 '자 이제부터 왕궁으로 들어가십시오,' 라고 하는 식으로 " 행동을 재촉하였다고 쓰고 있듯 대원군에게는 전혀 사태를 예지(豫智)한 바가 없다. 대원군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논외(論外)로 하더라도 만약에 오카모토 등과의 사이에 입궐이 약속이 되어 있었다면, " 대원군과의 교섭은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는 아다치 군 등의 간부(幹部)들도 그 방에 들어가 이야기하였는데, 두 세 시간이나 걸릴 리가 없다. 여기에서 예정 이상으로 소요된 시간은 일본의 작전을 크게 뒤틀리게 하는 요인(要因)이 되고 만다. 살해는 미명(未明)의 어둠 가운데 행해야 했으므로 일본 군민은 대원군을 강제로 떠받들었다. 이에 대하여 우치다 영사는 "대원군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꾸물꾸물하고 있는 사이에 날이 새기 시작했으므로 다수의 일본인 '소시'들도 함께 억지로 대원군을 끌어내어 맨 앞에 지키고 서서 왕성으로 향하였다. (<在勤各地에 있어서의 主要事件의 回顧> [일본외교문서] 28-1. p. 556) 고 지적하고 있다. 전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원군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오카모토 등은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조선의 장래는 어떻게 될지 보증할 수 없다고 협박하였을 것이다.
대원군이 입궐했을 때에 대원군 명의의 고시문(告示文)이 궁성 근방 및 기타 각 소(各所) 각 문(各門)에 게시(揭示) 되었다. 내용은 대원군이 "지금 궁궐에 들어가 대 군주를 보익(輔翼)하고 사악(邪惡)한 무리들을 몰아내어 유신(維新)의 대업(大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만약 그대들 백성, 병사 가운데 우리의 행동을 막는 사람이 있으면 필연코 대죄(大罪)가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895년 10월 16일 자) 이것은 시위대 등의 저항을 억제시키고 동시에 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조(僞造)하기 위한 얕은 꾀였다. 이 고시문의 내용은 물론이고 그 고시문 자체에도 대원군은 전연 모르는 것이다. 고바야카와 히데오에 의하면 하기하라가 출동할 때에 스기무라 서기관이 기초한 대원군 입궐 취지서인 고시문을 휴대한 것이라고 한다.
둘째로, 훈련대와 이 사건과의 관계이다. 전술(前述)한 훈련대 주동설(主動說)은 미우라 등이 대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날조(捏造)한 것이다. 그것은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미우라와 쿠스노세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훈련대 주동설을 취하고 있었던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의 경위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미우라 등이 훈련대를 동원시킨 사정은 일본 군민을 동원한 경우와 완전히 다르다. 훈련대는 간부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여우(閔妃)사냥'의 일은 물론이고 대원군 호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훈련대는 7일 밤 1소대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야간(夜間)에 야외연습을 한다면 실탄(實彈)을 병사에게 공급하고 병영(兵營)을 나왔다. 이 야간연습은 종래에도 반년에 한번 정도의 비율로 행해지고 매번 일본 교사의 지휘에 따라 군부(軍府)의 앞 또는 추성문(秋成門) 앞, 동소문(東小門) 밖, 훈련원 등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7일 밤, 훈련 명령은 이두황, 이범래(李範來), 남만리(南萬里)가 낸 것인가 아니면 일본 교사의 지휘에 의한 것이냐는 김기조(金基肇) 검사(檢事)의 심문(審問)에 대하여 훈련대 소대장 윤석우(尹錫禹)는 일본 교사 무라이의 명령에 의해 이두황 대대장에게 전하고 이범래, 남만리 중대장으로 하여금 이를 실행하게 하였다고 답변하고 있다. 이것은 윤석우의 공초문(供草文)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미우라의 지시에 의한 훈련대의 지휘분담에 따른 것이다. 이 야간연습을 구실로 한 훈련대의 입궐에 즈음해서는 훈련대 간부에게 지휘를 하게 하지 않고 일본군의 중대장이 훈련대 교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제반의 지휘를 직접 행하고 있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896년 1월 19일 자) 야간 연습의 명목으로 동원된 훈련대는 얼마 안 있어 대원군 입궐 때 합류하여 일본군을 따라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셋째로, 일본의 군대, 외교관, 순사, 민간인에 의한 왕궁 돌입의 경위에 대해서도 잘못된 설이 유포(流布)되어 있다. 60 명의 순사, 민간인으로 이루어지는 대원군 조는 오전 4시전에 대원군을 떠받들어 미우라의 '방략서'에 따라 남대문에서 서울로 들어가 곧장 왕궁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오전 4시에 왕성에 진입할 예정은 완전히 뒤틀어져 시간이 매우 늦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대원군을 추대하는 시간이 늦어짐과 동시에 그에 따른 연락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이 예정한 방략을 변경하여 서대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방략서'에서는 남대문에 가까운 '작은 고개'에서 일본 군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밖의 대로(大路)가 의주(義州)가도의 네거리로 되어있는 한성부청(漢城府廳) 앞에 도착하자 우범선이 이Rm는 훈련대 제2대대의 장사가 도로의 좌측에 정렬하여 대원군을 맞이하였다. 일본 수비대의 사관 몇 명도 또한 그 가운데에서 이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는 일본군과는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약 1시간 정도 기다리게 된다. 그 사이에 하늘은 밝아오고, 다수의 조선인들이 모여들어 괴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시간을 허비하여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하고 모두 몹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군이 도착하여 서울 침입 태세를 갖추었다. 대원군의 가마를 중앙에 두고 일본 수비대가 맨 앞을 나아가고 훈련대는 가마 앞뒤를 지키고 맨 뒤에 일본 수비대가 따랐다.
이 태세는 왕궁을 수비하는 시위대의 반항을 배제하는 동시에 대원군과 훈련대의 탈주(脫走)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 민간인 그룹은 대원군의 가마 곁에 있었다. 구보(驅步)로 서대문에서 서울 시가로 들어가 정동(貞洞) 거리의 서로(西路)를 달려 회상전(會祥殿) 앞을 지나 왕궁 앞의 큰길로 나왔다. 그 사이는 약 6, 7정보(町步) 정도의 거리이고 사람들은 모두 숨이 가빠해 하면서 달리기 시작하여 오전 5시 반에 광화문 앞에 도착하였다. 광화문 앞의 큰길에 이르자 파성관 부대도 이미 와서 만나고 쿠스노세 중좌는 기마(騎馬)로 와 있었다. 왕궁의 주위에는 15척 내지 35척의 성벽이 둘러져 잇고 광화문 양측에서부터 둘러쳐진 석벽(石壁)은 높이가 5칸 여에 달하며 야간에는 튼튼한 문짝으로 폐쇄되어 있다. 따라서 왕궁을 침입하는 데에는 높이 7칸 여의 문을 넘어 들어가 안으로부터 열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여러 명의 일본 경관을 파견하여 전날 밤이래 준비해두었던 긴 사다리로 석벽을 넘어 들어가 정문의 내부로 들어가 보니 경위(警衛)의 총순(總巡), 순검(巡檢), 병사들은 불의의 일에 놀라 안쪽으로 달아낫다. 성벽의 안 쪽에 내려간 일본 순사는 내부에서 견고(堅固)한 광화문의 철문을 열고 대원군의 가마는 수비대, 훈련대 및 일행과 함께 광화문을 엉겁결에 환성을 지르며 돌진하였다. 가마가 광화문을 지나 약 30 칸 바로 제2의 소문(小門)을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후방에서 일진의 총성(銃聲)이 일어나 전투는 먼저 광화문 밖에서 개시되었다. 일행은 문밖의 전투를 뒤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궁중으로 돌진하였다. 광화문을 들어가도 왕궁 안은 몇 개의 궁전으로 나누어져 잇고 각 궁전의 주위에는 역시 담이 둘러쳐져 있다. 광화문으로 들어간 일본군은 제2의 중문(中門)을 빠져나가 근정전(勤政殿)의 북측에 잇는 강녕전(康寧殿) 옆에 대원군의 가마를 내렸다. 대원군은 여기서 대기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원군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국왕의 윤허(允許)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침입대는 대원군의 요구를 들어주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오궁(奧宮: 건청궁-乾淸宮-)에서 조선 왕비 살해가 종료(終了)되기를 기다린다는 책략(策略)이었다.
농상공부 협판(農商工部 協辦) 정병하(鄭秉夏)는 우치다의 심문에 대하여,
" 10월 7일 오전 10시 경 미우라 공사의 초대에 의하여 공사관에 갔는데 공사가 말하기를, '이곳에 있는 우리 병력은 모두 후비병(後備兵)이므로 상비병(常備兵)과 교체시켜야 할 터인데 아직 그 결정이 없으니 오늘 입궐하여 이 일을 대 군주에게 주상(奏上)해 주시오,'라는 말을 듣고 정오 무렵 입궐하여 그대로 숙직(宿直)으로 왕궁에 있다가 8일 오전 2시 경 국왕을 배알(拜謁)하였다. 대 군주, 왕비, 왕세자 세 분 모두 장안당(長安堂)의 북연(北椽)에 계셨는데, 무감(武監) 등의 보고에 의거하면 폐하로부터 지금 병정 밀 일본인 등이 궁궐 밖을 배회한다는 설이 있는데 무슨 일인가 하는 하문(下問)이 있었으므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오늘(7일) 일본 공사관에 갔을 때 후비 병과 상비 병 교체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 뒤 안경수 군부대신과 미우라 공사가 지난 날 순검을 살해한 병정을 조사하는 일을 상담하고 있는 이유도 있으니 아마도 병정이 배회하는 것은 그들의 송사(訟事)가 있어서 안경수 군부대신의 집에 가는 것일 것이며 일본인은 이를 단속하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 배회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물러 나왔다.
이때 폐하는 곤녕합(坤寧閤)애 들어가 있었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 뒤에 계속하여 잠깐 후에 정병하가 다시 불려갔을 때 이미 건청궁 방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으므로 바로 뛰어가 곤녕합 앞문으로 되돌아 국왕의 곁에 달려가니 왕비 폐하는 궁녀에게 호위를 받으며 동전(同殿)의 안뜰로 물러났다. 고 말하고 있다. (<證人 鄭秉夏訊問調査書>) 이 정병하의 주상은 사건의 추이(推移)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권재형보고서(權在衡報告書)>에서는 광화문 밖에 일본군이 집합한 사실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대하여 정병하는 '일본병이 곧 입성하여 폐하를 호위하여 모실 것이므로 결코 심려를 끼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상' 했기 때문에 왕비는 이 설명을 듣고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여 결국 학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며 정병하는 실은 미우라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고, 사전협의에 의한 이 주상은 왕비가 도망가지 않도록 조처하기 위한 책략이었다고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권재형보고서'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저작이 보이므로 그대로 신용할 수는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결과에서부터 보면 정병하는 미우라에게 이용당하여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우라는 정병하에게도 음모를 비밀로 하고 있다. 미우라는 정병하에 대하여 일본 병의 교체와 민일 훈련대가 반란을 일으켜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할 것 들을 국왕에게 전해주도록 요청했는데 이것은 국왕, 왕비 등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음모이고 정병하는 이 미우라의 책략에 속아넘어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병하는 미우라로부터 음모를 사전에 통지 받고 미우라와 결탁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다. 미우라는 같은 무렵 군부대신 안경수와 회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경수에게는 말하지 않고 정병하 에게만 말한 것은 정병하가 당시 국왕과 왕비의 측근이어서 그날 밤은 당직(堂直)이었던 점에 착안하여 이 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잎서 말한 쿠스노세, 오카모토가 위장 귀국했다고 하며, 국왕과 왕비를 방심케 하기 위한 다양한 책략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이 건청궁에 돌입할 때의 전후 상황을 현흥택(玄興澤) 시위대 연대장은 우치다의 심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 7일 밤은 당직이었는데, 8일 오전 2시 경 궐 밖에서 별군관(別軍官)이 와서 바로 지금 일본군 100여 명이 삼군부(三軍府)에 들어왔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4시경이 되어 훈련대의 병정 등이 모두 춘생문(春生門=왕궁의 뒤 쪽)에 왔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조금 뒤 또한 추성문(秋成門=왕궁의 북서쪽)에 일본 병이 왔다....잠깐 사이에 일본병만 추성문 주위에서 담을 넘어 후원으로 들어왔다. 즉, 신무문(神武門=북쪽) 밖이다."
고 대답하였다. 이 답변에 의하면 일본군은 왕궁의 남쪽에 있는 광화문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북쪽으로부터도 성벽을 넘어 침입하고 있었다. 국왕의 침소(寢所)는 북쪽에 가깝고, 왕비 살해는 긴급을 요했으므로 전원 이곳으로 돌입하였던 것이다.(<증인 현흥택심문조서(證人 玄興澤訊問調書)>)
이 부분에 대해 미국인 시위대를 교습한 맥이 다이는 이런 우치다의 심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 맥이 다이는 우치다의 심문에 대해서, "8일 오전 3시 반경에 이르러 왕성의 동북문 밖에 수많은 한 병(韓兵)이 모여 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바로 나가 문밖을 살펴보니 과연 그 말대로 수백 명의 한 병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그들은 모두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발걸음을 돌려서 북문으로 가서 그 밖을 살펴보니 그 곳에도 역시 수십 명의 일본 병이 무기를 들고 군집(群集)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나는 사령부로 달려가 한 병 장교와 상의하여 동북문 밖에 모여있는 한 병 등을 해산시키려고 하였지만 그 곳에는 1명의 사관도 없었다.
나는 그 뒤 곧 바로 제문(諸門)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문마다 2명 내지 3명의 보초병을 붙이고 더욱이 그 나머지의 문마다 무감(武監) 1, 2명을 배치하여 문밖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지만 수많은 병사가 성벽을 넘어 침입하였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자 말자 여러 수병(守兵)은 모두 지키는 일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그리고 시위대의 사관 중에는 필성문(弼成門) 중에서 건청궁으로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왕비살해" 諸 第 64號>)
왠 일인지 맥이 다이는 일본의 범행에 대하여 애매한 것 밖에 말하고 있지 않다. 다이는 건청궁에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사건의 전모를 잘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더구나 현흥택은 우치다에 진술한 것과 같은 취지를 서울 주재 미국 대리공사 알렌에게도 보고하고 있다.(< Korea's Fight for Freedom> F. A, Mckenzie. London: Simpkin, Marshal and co.1920)
시위대가 광화문의 보초병으로부터 일본군 습격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지 않았던 것은 야간 당직 병이 소수였기 때문에 광화문, 영추문(迎秋門), 춘성문(春成門) 등 광활한 범위를 수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왕의 침전인 건청궁의 제문을 수비하는 데 전념하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위대를 2개조로 나누어 대궐의 동서 수비에 배치한다.
현흥택은 대궐의 서쪽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맥이 다이가 지휘하는 동쪽을 지키기로 하였다. 이때에 어느 쪽인가에 총성이 들리고 이윽고 현흥택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도 공격해 왔으므로 여기에 항전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대 군주로부터 발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있어 여기에 따랐다고 현흥택은 말하고 있다.
다섯째로, 오궁(奧宮)에 들이닥친 일본군의 행동과 왕비 살해의 범인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미우라의 당초 예정은 일본군의 출동에 의해 시위대를 위압(危壓)하여 시위대원들이 도망, 무장해제를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저항을 억제하고 한 편으로는 훈련대의 도망, 배반을 방지하여 일본군과 함께 왕궁의 제문과 요소(要所)의 방비-를 단단히 한 다음 120 여명의 민간인의 손으로 왕비를 살해한다는 계획이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의 지체로 건청궁에서의 작전도 뒤틀리게 되었다. 건청궁에는 오아비가 상주하던 곤녕합(坤寧閤), 옥호루(玉壺樓), 그리고 장안당(長安堂) 등이 있다. 이 건청궁에 있어서 일본 침입자의 동향을 현흥택의 답변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현흥택은 발포 정지 명령 직후 일본 복장을 한 한 일본인이 칼을 들고 와서 자신을 붙잡아 묶어 놓고 왕비는 어디에 있느냐고 힐문(詰問)하여 현흥택은 이곳에서 항전하고 있었으므로 왕비가 있는 곳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끌어 곤녕합으로 가서 이곳에 있느냐고 말했으므로 모른다고 대답하자 다시 그를 끌고 각감청(閣監廳) 앞으로 가 계속하여 구타하면서 여전히 왕비의 소재를 수색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이 불렀으므로 곤녕청(坤寧廳) 쪽으로 가고 말았다고 한다. 일본인은 시위대의 연대장에게 폭행을 가하면서 왕비의 소재를 추궁하는 황급한 모습이었다.
국왕의 거실에 돌입한 일본인 가운데 여러 명은 군복을 입은 일본인 사관이고, 국왕 고종은 누차 불경스러운 일을 당하였다. 1명의 일본인은 고종의 어깨를 잡아끌고 다니고 또 그 옆방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자도 있었다. 왕태자도 붙잡아 관을 찢고 머리털을 쥐고 끌고 다니는 등 기타 갖가지의 불경스러운 일을 하면서 왕비의 소재를 자백하도록 고문하고 칼을 뽑아 협박하였다.(<권재형보고서>)
건청궁의 내전에서는 '왕비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며 120 여명의 일본 민간인과 일본 군대를 합하면 약 1천명이 종횡(縱橫)으로 뛰어다니고 있고 모두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사방에 늘어선 수많은 빈방을 찾아다녔다. 툇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다. 모두 혈안이 되어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다.(<小早川秀雄 "閔后阻落事件" , 菊池謙讓 "朝鮮雜記" 第1卷 p. 82)
이처럼 왕비 살해는 일각을 다투는 사태가 되고 제문(諸門) 수비역 이외의 대부분의 일본군인은 민간인과 뒤섞여 왕비를 수색하는 데에 광분(狂奔)했다. 이처럼 허둥대는 모습에 대하여 일본인이 조선의 궁녀를 붙잡아다 놓고 목덜미의 머리채를 쥐고 시퍼런 칼날을 흉부(胸部)에 들이대고 '왕비는 어디 있느냐?'며 일본어로 노호(怒號)하고 있었지만 일본어를 알아 들을 길 없는 궁녀는 오로지 큰 소리로 울부짖는 등(<日本外交文書> 28-1. p. 557)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 왕비살해 범인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조선인 박선(朴銑)이 범인이라는 설은 너무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며 이것을 제외하면 일본인이 범인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진범이 누구라고 특별히 지정하고 있지 않다.
첫째, 잡화상(雜貨商) 나카무라 타테오(中村楯雄)가 곤녕합 깊숙이 피난해 있던 왕비를 찾아내어 쓰러뜨리고 첫 칼을 휘두르고 그 곳으로 달려 온 후지 카츠아키(藤勝顯)가 두 번째 칼로 숨을 그치게 하였다 한다.(<한국경성주차군역사(韓國京城駐箚軍歷史): 문정창(文定昌). -근세 일본의 조선침략사- 백문당(柏文堂). 1966년. p. 500. <민족(民族)의 섬광(閃光)> : 이선근(李瑄根) 저. 김정한(金定漢) 역. 시사통신사(時事通信社) 1969년. p. 321)
둘째, 육군성(陸軍省) 법관부(法官部) 이사(理事) 이노우에 요시유키(井上義行)의 보고에는,
" 왕비 살해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데라자키(寺崎) 모(某), 즉 태길(泰吉)인데. 별명은 타카하시 겐지(高橋源次) 카나가와(神奈川) 출신, 업종은 약장사라고 되어 있다.(<乙未의 變에 대하여> 야마베 켄타로오(渡邊健太郞) "日韓關係의 展開"에 수록. p. 74) 이 테라자키는 스즈키 시게모토(鈴木重元)에게 보낸 편지에 <원수를 죽이지 못하고 미인을 베는 데 그쳤다.(不斬讐敵斬美人)>라는 시문(詩文)을 짓고 이 '미인'은 "어떤 친구의 이야기에 의하면 혹시 왕비일지 모른다고는 하나 의심스럽다." 고 기술하고 있다.(<王妃殺害> 別紙 第4號) 데라자키는 이 살해에 대하여 훗날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나카무라 다테오, 후지 카츠아키, 데라자키의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왕비의 방에 들어가자, 궁녀 2, 30 명이 모여 있었으므로 궁녀를 한 사람 한 사람 냅다 밀치고 이불 밑을 보니 옷차림은 이들 궁녀와 같으나 종자(從者)의 얼굴로는 조급해 하지 않고 귀인(貴人)의 풍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왕비라고 생각하였다. 머리채를 쥐고 끌어내었지만 그 태도는 정말이지 조금도 흐트러지는 바가 없었다. .....나는 단칼로 내리쳤다. 나카무라가 머리채를 잡고 있었으므로 그의 손을 조금 잘랐다. 머리를 내리쳤으므로 일격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테라자키는 난폭하다. 왕비라고 판명도 하지 않고 베고 말았다며 비난하였지만 나중에 역시 왕비였다는 것을 알고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왕비를 벤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국권당(國權黨)의 사람 따위는 한 사람도 그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 자신이 하수인이라고 주장하며 법석을 부렸다. 어쨋 든 이것으로 자유당(自由黨) 측이 특별히 공을 거두었다.(<政界回顧錄> pp. 442~443)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초점은 개인적인 입장보다는 국권당 계와 자유당 계의 선두다툼이다.
셋째, 쿠마모토(熊本)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타나카 요시미치(田中賢道)야 말로 그 하수인이다는 설도 있고, 또한 오다(小田) 순사가 사변 당일 오른 손에 부상을 입고 있었던 것은 우치다가 몸소 목격하였으며 나카무라도 부상했고, 또한 순사 사카이 타로오(境太郞) 및 요코오 유우타로오(橫尾勇太郞) 2명은...그 의복에 핏자국이 있는 것이 확인되고 요코오는 1명의 부인을 살해한 사실은 그 자신이 스스로 우치다에게 털어놓았다고 우치다는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 (<王妃殺害> 諸第 57號)
넷째. 이름은 특별히 지정되고 있지 않지만 일본군인이 하수인이라는 설이 있다. 우치다는 11월 5일 왕비는 우리 육군사관의 손에 참살(斬殺)되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지적하고 나아가 9일에는 왕비는 처음에 우리 육군사관이 베고 다음에 나카무라도 손을 댔지만 그때 나카무라는 잘못하여 이 사관의 칼끝에 닿아 오른 손에 부상을 입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치다의 보고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건에 참가한 하기하라 등의 순사와 호리구치 등의 외교관 등은 우치다의 직속 부하였기 때문에 우치다의 심문에 대하여 진상에 가까운 말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이 당시에는 이 때문에 히로시마 감옥에 들어가게 되리라고는 미쳐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궁내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한 것도 일본의 민간인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것도 일본의 사관이라고 추측된다. 그것은 군인과 민간인이 국왕의 거실에서 왕비의 거실로 달려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이경직은 그들을 저지하려고 하였지만 이내 살해되었는데 그 범인은 대위로 보이는...육군 사관에게 권총 사격을 받아 일단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민간인 한 사람이 오른 쪽 어깨를 찍어 죽였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비 살해도 이것과 관련하여 필요가 있다.
또한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는 궁내대신에게 최초로 공격을 가한 것은 소위이고 그 후에 벤 것은 '나'라고 자백하였다. 그 외 사람들의 진술에 의해서도 미야모토 타케타로오(宮木竹太郞) 소위가 가장 의심이 간다고 하루타(春田) 헌병사령관은 코다마(兒玉) 육군 차관에게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의 쿠사노(草野) 검사도 '궁내대신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일본 사관이 총격을 가하였다'고 요시카와(芳川) 사법대신(司法大臣)에게 보고하고 있다.(<大山巖> 第4卷 pp. 238~242. 야마베 켄타로오(山邊健太郞) "日本의 韓國倂合" 太平出版社 1966년. p. 221)
왕비 살해의 하수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선 우치다가 보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진범이 일본의 장교라고 하게 되면 대외적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이 중대하게 된다. 이 사실만큼은 일본 정부로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숨겨야 하였다. 그 때문에 '소시'풍의 민간인이 공을 자랑하는 이야기로서 남에게 말을 퍼뜨리게 되었다. 살해 당시 이상한 흥분상태였다고는 하나 하수인이 몇 사람이나 있을 리가 없다. 하수인인 군인을 숨겨두어야 했으므로 보조역이랄까 조력을 한 사람이 그 일을 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종의 '공명 다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미우라 등도 대외적인 관점에서 민간인 하수인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있다.
왕비는 일본인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왕비의 얼굴을 몰랐으므로 확실히 왕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궁녀와 왕태자 이척(李 )을 연행하여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살해한 후 사사 마사유키는 왕비의 몸에 달려있는 향(香)주머니와 기타 귀중한 물품을 빼앗아 가고 다른 난입자(亂入者)도 또한 왕비 방에서 각종 물품을 빼앗아 갔다. (<王妃殺害> 諸第 57號)고 우치다는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왕비를 끌어내어 2, 3 군데 인상(刃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 可笑又可怒-原注)를 했다고 까지 전해지고 있다.(<日本의 韓國倂合> 야마베 켄타로오(山邊健太郞) 太平出版社 1966년. pp. 51~52) 그때 미우라는 입궐하여 국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범인들은 사후 처리의 지시를 긴급히 요구했으므로 미우라는 알현 도중에 자리를 떠나 왕비의 사체(死體)를 확인하고 하기하라에게 급히 치우라고 명령하고 다시 알현실로 되돌아가고 있다.(<太山巖> 第4卷. p. 432) 그래서 하기하라는 왕비를 옥호루 동쪽 정원에 장작을 쌓아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것은 죄악의 증적(證迹)을 인멸(湮滅)하기 위해서(<王妃殺害> 公信 第 98號)였다.
왕비는 향년 45세, 이경직도 45세이고, 홍계훈은 54세였다. 그 외에 시위대원과 궁녀도 몇 사람 살해되었다.
조선 왕비 살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 외무성의 최초의 반응은 "오늘아침 훈련대를 인솔하여 왕궁에 다다랐다. 왕비는 아마 살해되었으리라는 그 곳 공사관의 무관으로부터 참모본부로 전보가 있었다." (<일본외교문서> 28-1 p. 491)라는 사이온지 킴모치(西園寺公望) 임시 대리외무대신이 미우라에게 보낸 긴급 타전(打電)이다. 이미 쿠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는 8일 오전 8시 50분에 "대원군은 고종 군측(君側)의 간악한 무리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훈련대 2대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가 약간의 저항 후 왕의 곁에 이르렀다....훈련대장 홍계훈은 전사했다. 라고 참모본부에 타전했다. (<대산암관계문서-大山巖關係文書->에는 10월 8일 미우라 공사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없는 상태에서 공사관 내의 무관으로부터 참모본부로 한 보고서가 왔다. 그러자 외무대신 임시대리 사이온지 후작(侯爵)은 곧 공사에게 보고를 요구했다고 적혀 있다. (<大阪日日新聞> 1896년 3월 4일 자)
이 보고의 요점은 장차 미우라의 처리 책 방침에 따르고 있다. 단 사이온지가 말하는 왕비 살해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30분 후인 오전 9시 20분,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가 이토오 유우코오(伊東祐亨) 해군 중장에게 타전한 '국왕 무사, 왕비 살해되었다 함'이라는 보고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정부는 당황하여 미우라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처리를 그르치면 제2의 '삼국간섭'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조급히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사이온지의 전보와 엇갈리며 미우라의 보고가 온다. 이 보고문은 미우라의 왕비살해사건에 대한 처리 책의 원형을 이루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미우라의 보고문 요약은 첫째, 해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훈련대가 대원군을 추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 둘째, 일본군이 출동하여 왕궁을 호위하여 진압에 힘썼다. 이 때문에 훈련대와 시위대의 충돌은 매우 가볍게 진정되었다는 것, 셋째, 왕비의 소재는 아직 상세하지 않다는 것 등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미우라의 보고를 믿지 못하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로 하여금 부하였던 스기무라(杉村)에게 6개항을 들어 진상을 문의케 하였다. 스기무라의 반전(返電)에 의하면, 오카모토(岡本)는 대원군과 다소 관계는 갖고 있으나 기타 일본인은 사건에 관계하고 있지 않다는 것, 미우라는 대원군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는 것, 국왕으로부터 바야흐로 진무(鎭撫)를 의뢰 받았다는 것, 왕비는 아마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것 등이다.(<日本外交文書> 28-1. pp. 491-492) 이것은 미우라의 교책(嬌策) 원형의 첫째와 둘째는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으나 세 번 째 점은 그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그것은 니이로(新納)의 보고에 의해 일본 정부에 알려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우라는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침을 취한다.
첫째, 일본 정부에 허위보고를 제출할 뿐 아니라 우치다 영사의 정부 보고까지 저지한다.
둘째, 구미 외교관에게는 일본인의 무관함을 주장한다.
셋째. 조선정부에게도 앞으로 써먹을 미우라 책(策)의 원형을 강요하여 보조를 맞추도록 한다.
넷째, 일본인 관계자에게는 사건 직후 일본인, 특히 공사관원, 영사관원 및 수비대의 사람들이 이 일에 관계한 사실이 공공연해지면 매우 귀찮게 될 테니 어디까지나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사건 관계자를 일본 영사관에 불러모아 관계한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도록 약속했다고 우치다는 보고하고 있다.(<일본외교문서> 28-1. p. 555) 마찬가지로 바야바라(馬屋原) 소좌는 사변 후 각 중대에 내린 '일본군은 한발도 사격하지 않았음을 알릴 것, 일본군인이듯, 아니든 일본도로 베어 죽였다고 하지 말 것'이란 명령을 부하에게 내리고 있다.(<大山巖關係文書>) 그리고 관계자 상호간 대화에서조차도 입에 올리기를 경계하며, 고국의 교우(交友), 친척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절대 이 일을 쓰지 않기로 약속하여 전적으로 비밀을 지키게 하였다. (<閔后阻落事件>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게다가 관리가 관계한 사실에 대해서는....설령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경우라도 결코 이를 입밖에 내지 않도록 미우라는 명했다.(<日本外交文書> 28-1. p. 560)
다섯 째, 신문, 통신의 보도를 통제했다. 미우라의 지시로 일본의 신문 특파원은 사건 후, 파성관(巴城館)에서 회합하여 미우라 책에 따라 기사를 타전하기로 약속했다. 이는 일본의 신문들을 살펴보면 역력히 알 수 있다. 또 한성신보(漢城新報)는 10월 9일 한,일 2개국어로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역시 미우라 책에 따른 것이었다. (<在勤 各地에서의 主要事件 回顧>) 구미의 통신에도 압력을 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 코로넬 콕크릴은 맥이 다이의 목격담 등에 의한 일본인의 범죄를 폭로한 기사를 타전하려고 했으나 송신을 중지 당했다. 이것은 일본이 서울의 전신국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건 발발 5일 후 콕크릴의 보도기사는 '뉴욕 헤럴드'에 게재되었다. 구라파를 경유한 이 기사는 그래서 늦게나마 보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일본 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이 전문을 읽고 사건의 진상을 보다 정확히 아는 동시에, 열강도 이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음이 확인되어 일본 정부의 열강 대책을 서두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각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이토오 미요지(伊東已代治)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재한(在韓) 각국 사신이 각기 본국 정부에 타전한 요점을 들으니 모두 사실이 명백하여 은폐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지금의 형세는 오직 민첩한 처분으로써 우리 정부의 공명정대를 표명하고 혐의자를 현지에서 체포할 것"을 건의했다.
마침내 이 송신 저지사건이 미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飛火)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는 동시에 콕크릴 등의 매수공작에 착수하였다. 이토오(伊東)는 10월 18일, 콕크릴이 귀국할 듯 하나, 잠시 동안 그를 경성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으니 지금부터 그에게 타협해두고 싶다고 정황을 보고하고 중단한 전보료의 반환을 명목으로 기밀비에서 335원(圓) 80전(錢)을 지불하고 나아가 내각에서 3000원, 외무성에서 3000원 합계 6000원을 지출하여 매수할 것도 건의했다.(<伊藤博文關係文書> 第2卷. pp. 327-331. 사이온지는 코무라에게 콕크릴은 우리 정부와 이토오 미요지(伊東已代治)를 통해 은밀히 통신하고 있다고 통지하고 있다.(<日本外交文書> 281-1. p. 512)
범행 현장에는 조선인은 물론, 맥이 다이와 러시아 기사인 사바틴이 함께 있었으므로, 일본인의 범행을 자국(自國)의 영사(領事)들에게 속히 보고했다. 이들의 보고로 진상은 곧 퍼져갔으며 미우라의 처리방책은 파탄을 본다. 그래서 사건 당일 오후 미우라는 약간 어조를 바구어 사이온지에게 보고하였다. 사건은 표면 상 조선인의 일이나 이면(裏面)에서 다소의 일본인이 가담하였기 때문에 실은 본관(本官)이 묵시(默視)했던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 왕비의 결탁이 일본의 정책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대항하는 대원군의 결기(決起)에 일부 일본인이 가담한 것이다. 단 우리 군대는 진정코 진무(鎭撫)를 위해 출병했을 따름이며 결코 그들을 방조(傍助)하지 않았다. 또 일본 민간인도 역시 난폭한 짓을 한 사실은 없지만 장래 이 때문에 외교상의 곤란을 야기(惹起)할 염려가 있다면, 본관은 처벌을 받아도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미우라 책의 원형의 첫째, 둘째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지만 파탄(破綻)을 보이기 시작한 곳은 일부의 일본 민간인이 대원군의 요청으로 호위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게재되어 있다.
사건 직후 구미 각국 공사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그 길로 미우라를 방문하여 일문(一問)한다. 미우라는 앞서 말한 원형을 고집하여 궤변을 늘어놓았으나, 러시아 공사 웨버 등은 입궐하는 길에, 칼을 빼어 들고 왕궁에서 물러 나오는 일본 군민의 다수와 만났다는 것, 게다가 맥이 다이와 사바틴 등이 왕궁에서 일일이 목격한 바가 있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하고 추궁하였다. 이에 대해 미우라는 대원군을 호위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다. 일본 군대는 질서유지를 위해 출동한 것이며 부인을 학살한 사실은 보고에 없으며 인부 등의 약간의 일본 민간인은 혼잡을 틈타 섞여 든 자일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열강 공사들은 일본 군민의 참가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 사변은 자못 중대한 일이니 이대로 간과(看過)할 수 없다고 항의하여 미우라의 궤변은 통용되지 않았다.(<日本外交文書> 28-1 pp. 493-494)
맥이 다이 등이 목격한 것이 일본에게는 치명상이 되었다. 그것을 내부고문(內部顧問) 이시즈카 에이조오(石塚英藏, 1866-1942)는 공교롭게 어떤 미국인이 현장을 목격한 것을 보통 일반 조선인의 증언처럼 말살해버릴 수는 없다....살인의 일이므로 다소 빈 구석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나,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스에마츠 법제국장관(末松法制局長官) 완(宛) 이시즈카 에이조오(石塚英藏) 서간(書簡) >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國立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소장. <헌정사편찬회수집문서(憲政史編纂會收集文書)> 所收)
이것은 일본이 조선과 열강에 대해 취한 이중적인 자세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 날, 10월 9일. 미우라는 사이온지에게, "경성수비대 소환을 급히 명령해주기 바람. 이번 사변에 관해 정략 상 득책(得策)이라고 생각" 한다며 이유도 명사하지 않은 요청을 하였다.
일본 정부는 제반 사정으로 보아 그 나름의 판단은 갖고 있었던 것 같지만 열강의 간섭을 막기 위해 사건 진상의 정확한 파악과 이에 기초한 긴급한 대응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므로 사이온지는 " 위의 정략이란 어더한 것인가....이번 사건은 정부로서 가장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일의 상세한 사항을 명확하게 급히 전보할 것."이라는 전보를 쳤다. 이에 대해 미우라는 "우리 수비대는 원래부터 소요 진무를 위해 출장했으나 훈련대를 원조하게 되어버렸으므로 대외적인 관점에서 사실 취조를 명분으로 소환하는 것이 정략 상 득책이라고 답하였다. 동시에 일본인이 관계한 것은 내외인에 대해 엄중히 비밀에 붙여두었지만 현장에 조선인이 있었으므로 누설을 방지할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日本外交文書> 28-1. pp. 495-499) 전신(電信)으로는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없으므로 사건에 가담치 않았던 법부 고문 호시 토오루(星亨)를 귀국시키기로 한다.(<王妃殺害> 第1066號) 이 보고에서도 미우라는 여전히 당초의 대책을 고집하고 있으나, 일부 일본인의 가담 등 미우라의 방책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미우라 자신이 주모자였던 점, 일본군이 사건의 중책이었던 점은 굳게 은폐하고 있다.
미우라는 사태가 용이(容易)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10월 10일에는 쿠스노세를 통해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六)에게 일본군은 밖에서 보면 비난할 점이 없지 않으므로 다른 나라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취조를 명목으로 귀국시키도록 요청하게 하였다. 그런데 카와카미는 왜 이러한 요구가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하여 보다 상세한 보고를 하라고 전보로 명령했다. 그러나 쿠스노세는 "소관의 지위에서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도 있으므로 공사의 보고를 받아보시기 바란다."고 반전(返電)하였다.
이와 같이 10일 우치다는 미우라의 통제를 무시하고 "사변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가담해 있었음이 이미 공공연한 비밀로 되었다. 그 처리 방법은 외교 상 중대한 관계를 가질 것으로 생각되므로 만사를 미우라 공사의 의견에 따라 처리하기 어려우니 빠른 전훈(電訓)을 기다림"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다.(<王妃殺害> 第1069號>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본 정부는 당장 응급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첫째는 열강 대책이다. 이미 10월 9일 사이온지는 주로 공사(駐露公使) 니시 토쿠지로오(西德二郞)로 하여금 일본 정부가 진상 조사를 개시하여 그 조사 결과에 따라 관계자를 처벌할 방침을 러시아에 전달하겠끔 하였고(<日本外交文書> 28-1. pp. 497-498), 다음 10일에는 주일 러시아 공사와 만나는 등 열강의 의향 타진과 더불어 간섭 방지에 나섰다. 이들의 회견과 동경에 주재하는 외국공사로부터의 조회(照會)는 사태가 더욱 용이하지 않음을 알게 했으며 미우라 공사의 보고가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은 더욱 명확해졌다.
당시 오오이소(大磯)에서 요양 중이던 무츠는 첫째로 주의해야 할 점은 러시아, 기타 각국이 어떠한 방침을 취하는가를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 등의 거동(擧動)이 분명하지 않은 한은 우리는 우선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시 형세를 살핀 후 얼마 간의 방책을 시행하는 편이 좋다.고 사이온지에게 요청하고 있다.(<日本外交文書> 28-1, p. 496)
그 무렵 러시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서울에 수병(水兵)을 침입시켜 읿 hs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였다. 일본정부는 미우라, 우치다에 대해 만일 일본인과 러시아군 사이에 충돌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일이 어디까지 확대될지도 모르니 문무관민(文武官民)을 불문하고 엄중하게 단속해야 한다.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 어떠한 구실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충돌해서는 안된다라며 '장사배(壯士輩)'의 단속과 일본군을 부질 없이 영외(營外)로 내보내지 말 것을 엄명하였다.(<王妃殺害> 電送 第701號)
둘째로, 일본 정부 자신이 진상 조사와 사건 처리에 착수한다. 10월 10일 외무성 정무국장(外務省 政務局長) 코무라 쥬타로오(小村壽太郞)을 비롯하여 요코하마 지재 검사정(地裁 檢事正) 안도오 켄스케(安藤謙介), 인천영사관 보(仁川領事館 補) 야마자 에지로오(山座円次郞), 해군 대좌 이쥬우인 고로오(伊集院五郞), 육군 중좌 타무라 이요조오(田村怡與造), 해군 소좌 야스하라 킨지(安原金次), 육군 소좌 와타나베 테츠타로오(渡邊鐵太郞: 전 공사관 무관), 육군 소좌 하라다 키타로오(原田輝太郞) 등의 서울특파를 결정한다. 이 조사단에 군관계자가 많은 것은 군대가 사건의 중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코무라 등을 파견한 것은 진상조사도 그러하지만 일본 정부의 방침에 기초한 처리를 이 이상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필요에서이다. 더욱이 13일'도한금지(渡韓禁止)'의 긴급 칙령(勅令)을 발령하여 '소시'들의 진입을 저지한다.(<王妃殺害> 電送 第729號)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선 것을 전달받은 10월 14일, 당황한 미우라 고오로는 이토오에게 직접 의견을 상신하여 사건의 합리화에 노력한다. 즉, 이번 사건은 조선의 20년 래의 화근을 끊어 친일정부를 강화시킨 것이며 설령 그 행동은 과격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외교상의 곤란만 잘 벗어나면 우리의 대한(對韓) 정략은 이로써 확립할 것이므로 이미 얻은 과실은 어디까지나 잃지 않도록 하고 싶으므로 외교상의 형편에서 본인을 비롯하여 주요 공관원을 교체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조선의 현 정부에 대한 방침까지 바꾸는 것은 자못 득책(得策)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었다.(<日本外交文書> 28-1. pp. 513~514) 여기에서 그의 처리방책은 가장 형해 화(形骸化)되어 있으며, 사건에서 얻은 성과의 역설이 주제로 되어 있다.
틀림없이 미우라 등의 일본 군국주의자는 조선에서의 일본 침략정책이 부진한 원인을 왕비, 등 몇 사람의 반일 정치가의 소행으로 돌려 그들을 제거하기만 하면 무난히 진행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우치다가 미우라에게 '대단한 소동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미우라는 '아니, 이것으로 조선도 더 한층 일본의 것이 되었다. 이제 안심이다.'라고 했다 한다. (<在勤各地에 있어서의 주요사건, 회고> 우치다)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일 의병운동을 발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 사람의 반일자(反日者)를 살해한 것이 반일 봉기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사건에 관계한 사실이 공공연해졌으므로 미우라도 대외적인 관점에서 언제까지나 결백을 주장할 수 없어 '신문(訊問)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 영사관에서 '신문에 착수하지 않으면 외국인에 대해서도 체면이 서지 않으니 10월 12일 까지....관계자의 진술을 받기로 했다.'
그것이 또한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짜고 하는 연극이었다. 우선 취조관은 사건 지휘자의 한 사람이었던 오기와라 히데지로오(荻原秀次郞) 경부였고, 그 내용은 허위로 가득 찬 것이었다. 게다가 미우라는 만일 불가피하다면 그 중 몇 명을 중형(重刑)에 처하고 20명 정도는 퇴한(退韓) 처분을 내린다. 처분 대상으로는 후지카츠 아키라(藤勝顯)와 츠키나리 미츠루(月成光) 등을 선정하고 있다. (<日本外交文書> 28-1. pp. 560~561) 스기무라의 지시로 경찰의 취조를 받아야 할 자의 성명을 선정했다. 선출된 민간인은 신문을 받는 이상은 퇴한 또는 다소의 형벌에 처해질 각오는 하고 있다. 치바 시로오(柴四朗)가 이번 일을 꾀함으로써 대원군으로부터 보수로 받은 돈 6천엔(円)의 분배에 참여할 약속 아래 이를 승낙했다.(<日本外交文書> 28-1. p. 561) 한다. 이 대원군의 6천엔 운운은 대원군 수모설(首謀說)을 날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약조' '고시문'과 거의 공통되고 있으며 미우라의 기밀비에서 지출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 이유는 우선 억지로 업힌 대원군이 거금을 낼 리가 없다. 이 돈의 액수와 분배된 통로도 확실하지 않다. 우치다는 앞의 6천엔 운운의 보고를 한 후인 11월 11일,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쿠사노 검사정(檢査正)에게 ' 피고인 등은 대원군으로부터 합계 1만 9천엔을 받았다. 그중 3천엔은 사변 후 얼마 안 되어 대원군으로부터 오카모도에게 건네주었다. 그 후 다시 3천엔 씩을 오카모토와 스즈키 쥰켄(鈴本順見)에게 건네주고, 1만엔을 미우라에게 건네 주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王妃殺害> 제3권 1)
또 7만 엔이라는 설도 있다.(菊池謙讓 <朝鮮雜記> 제1권, p. 83) 아다치 겐죠오(安達謙藏)에 의하면 ' 퇴한자에 대해서는 여비(旅費)가 지급되었다. 한 사람 당 2백엔 씩 분배하기로 하고 스기무라 서기관으로부터 나에게 수교(手交)되어 나부터 해서 전원에게 분배되었다.'(安達謙藏 <安達謙藏 自敍傳> p. 63)고는 하지만 출처가 대원군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아디치가 스기무라에게 받았다는 것은 미우라가 스기무라에게 건네준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쿠니토모 시케아키(國友重章)는 오카모토가 취급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秘書類纂 朝鮮交涉始末> 中卷. p. 497)
첫댓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통한의 역사입니다..일본이 어떤 나라인지..시국이 혼란한 작금의 상황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글입니다..dantong95 선생님 직접 정리하신 귀한 자료 올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