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감 / 김정섭
육감은 인간의 여섯 번째의 감각으로 무의식 속 직관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다.
아침 샤워 때 면도기를 집어 드는 순간 그만 바닥에 떨어뜨렸다. 찰나 같은 시간에 떨어진 면도칼이 다시 튀어 올라 정강이를 베였다. 동시에 두 개의 예리한 칼자국에선 선홍빛 핏방울이 솟구쳤다. 소스라칠 이 기묘한 사건은 홀연히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를 일으켰다.
“아! 끝난 게 아니구나. 아직 두 번 더 남은 건가?”
어젯밤이 떠올랐다. 1심 승소 판결을 받고 기쁜 마음에 지인 변호사와 축하주를 했다. 피고인 내가 패소할 확률이 높다고 애초에 수임을 거절했던 사건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에게 법률 자문을 받아 답변서를 꾸미고, 판사 앞에서 특유의 승부욕으로 먼저 1심을 따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재판은 삼세판이며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정확히 삼 일 후 원고 측으로부터 항소장이 날아왔고, 더 치밀한 답변서를 준비해 증거자료와 함께 제출했다. 재판 과정에서 벌어지는 신경전과 지루한 다툼에 적극 대응한 결과 항소심에서 또 승소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다. 추가 소장은 날아오진 않았다. 그대로 끝나기를 기대했지만, 열흘째 되던 날 원고 측이 보낸 대법원 항고장을 받았다. 또다시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최종 결과,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어 다시 재판을 받고 결국 피고 패소로 확정 판결을 받았다. 1심에서 승소 후 재판은 두 번 더 치렀으며, 내게 나타났던 어떤 예언 같은 면도칼의 상처는 나의 육감대로 흉조였다.
징조는 우연히 어떤 일이 생길 기미를 미리 보여주듯, 우리 인생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로 계속 변화해 나간다. 시시각각 순간의 낌새를 알아챌 육감이 필요하다.
아들이 고3 대학 수험생일 때, 나는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 중이었다. 아내는 한 집에 수험생이 둘이 있으면 안 된다며, 은근히 내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합격자 발표를 앞둔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마치 장원급제라도 한 듯, 내가 높은 갓을 쓰고 꽃가마 위에 앉아 있는 희한한 꿈을 꿨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예사스럽지 않은 꿈 때문인지 결국 공인중개사가 되었고 아들은 재수를 하게 되었다. 당시 아들보다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한 것을 아내는 인정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언제나 여자의 육감은 실질적 목표를 향해 작동한다.
그로부터 팔 년 후 나는 또다시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듯한 꿈을 꾸었다.
“어젯밤 꿈에 비바람 속 안개 자욱한 성문 위에서 불을 뿜어대는 용을 봤어. 내 평생 용꿈을 꾼 게 처음인데, 무슨 좋은 일이 생기려나?”
아침을 먹으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할 때 아내는 불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꿈 나한테 팔아.”
순간 길몽인데 왜 팔아 하며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계속해서 공모전에 떨어지고 있던 터라, 이번엔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아들은 취직 시험 발표를 앞둔 절체절명한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도 같은 직장을 연속 응시했고 그만큼 아내는 절박했다. 아내는 용꿈의 주인은 기필코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내게는 다음 기회도 있지 않느냐는 설득에 꿈을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용꿈을 산 아들은 합격했고, 판 나는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팔 년 전 아들의 대학 합격이 더 절실했던 아내에겐 그 끔찍했던 결과를 지금까지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역시 여자 특히 엄마의 육감은 예리하고 집요했다.
선몽은 조상이나 영적 존재가 계시를 전하는 꿈으로, 나 자신만의 경험이나 염원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복잡한 인과관계로 맺어져 있다.
절박함이 기적을 만드는 걸까? 칼 융은《꿈 분석》에서 꿈은 ‘창작이 불가능한 수동적이며, 개인의 바람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객관적 개념’이라고 했다.
사업가들은 육감이 강하다고 한다. 그들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라는 햄릿처럼 순간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선택 앞에서 현재를 직시하며 주어진 운명에 맡겼다.
항상 흔들리는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감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점점 넘쳐나는 정보의 일상에서 감각은 점점 더 무뎌지고 마비되어 간다. 아무런 준비나 예상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징조나 선몽은 우리에게 나름의 방향을 제시한다.
나는 살면서 높은 벽에 부딪칠 때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누군가 도와줄 거라는 믿는 구석 같은 확신이 든다. 마치 어떤 사명을 내려받은 것처럼.
태초 이래 나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경험과 역사적 기록이 녹아 밴, 무의식 속 자아가 지닌 내 힘의 원천이다. 마음속에서 보내오는 순간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다시 거듭나려 한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