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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으면
레 26:23-39
23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4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26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29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30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서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31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하지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4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35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36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38 너희가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의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39 너희 남은 자가 너희의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쇠잔하며 그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그 조상 같이 쇠잔하리라
레 26:23-39 / 이런 일을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네게서 자꾸 멀어져 가면 24) 나는 그보다 일곱 배나 더한 벌로 너희를 내리치리라. 25) 칼로 너희를 내리치리라. 전쟁을 일으켜 너희를 쓰러뜨리리라. 너희가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너희를 원수 대하듯 하리라. 너희가 성읍으로 도망할지라도 나는 너희에게 염병을 보내리라. 또한 너희가 모여 있는 성읍을 너희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리라. 26) 너희가 의지하는 먹을 것을 하나 남겨 놓지 않고 너희 밥줄을 끊어 버릴 것이다. 여인 열 명이 한 가마에서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나누어 줄 것이며 그것마저도 다 먹어 치우고 나면 너희는 주린 배를 움켜 쥘 수밖에 없을 것이다. 27) 그래도 여전히 너희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내게 등을 돌리면 28) 나 역시 너희에게 분통을 터뜨려 일곱 배나 더 가혹한 벌을 내리리라. 29) 먹을 것 하나 찾아볼 수 없어 너희가 낳은 자식들을 너희가 잡아먹을 그런 날도 오고야 말리라. 30) 너희가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던 산당을 부숴 버리고 향불을 피워 올리던 제단을 깨뜨려 버려서 동강 난 그 우상 위에 너희 시체가 즐비하게 쌓이게 하리라. 31) 너희가 사는 성읍마다 폐허로 만들리라. 너희 성소를 허물어 버리고 너희가 바치는 제물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다고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를 역겨워하리라. 320 너희가 사는 땅을, 그 땅을 점령할 너희 원수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짓밟으리라. 33) 나는 너희를 뭇 나라로 흩어버리고 칼을 빼들고 너희를 뒤쫓아가리라. 너희가 살던 땅은 황폐해지고 성읍마다 잿더미만 수북히 쌓이리라. 34) [너희가 쫓겨나야 땅이 쉬리라] 너희가 그토록 보기 싫어하는 원수들의 땅에 끌려가 살 동안 너희 땅이 비로소 편안히 쉬리라. 35) 너희에게 그토록 시달리던 땅이 쑥대밭처럼 팽개쳐 있을 그 동안에 한시름 놓고 푹 쉬리라. 36) 너희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원수들의 땅에 끌려가 마음 졸이며 살아가야 하리라.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 당황하며 안절부절하리라. 마치 칼에 맞아 죽을 듯이 무서워 떨며 뒤쫓아가는 이 하나 없는데도 도망 치다가 고꾸라지리라. 37) 뒤쫓는 이 아무도 없는데 칼날 앞에서 허둥대듯 제 형제들끼리 치고받다가 고꾸라지리라. 원수들 앞에서 들고 일어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리라. 38) 그러다가 원수들 땅에서 아예 망하고 말리라.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집어삼키리라. 39) 너희 가운데 살아 남은 자도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또한 그 조상들의 잘못 때문에 쓰러져 죽으리라.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쟁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도 황폐하게 할 뿐 아니라 성소들조차 무너지게 합니다.
염병과 기근(23-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전쟁으로 인한 염병과 기근으로 징벌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언약을 깨뜨린 그의 백성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복수의 칼”입니다(삿 2:1-15; 왕하 17:7-18; 삿 10:5-19; 눅 19:42-44). 그래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칼과 염병’을 하늘에서 오는 심판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겔 4:16; 5:16; 14:13).
전쟁의 결과(27-33)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밭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며 극한 가뭄으로 하늘이 철판처럼, 땅이 놋 판처럼 되어 파종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16, 19). 식량 부족으로 열 명의 여인이 하나의 화덕에서 구운 떡을 저울로 달아 나눠 먹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자녀를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26, 29).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와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멸망당할 때 이 일을 겪었습니다(왕하 6:28-29; 애 2:20).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배를 거부하고 사악한 제단들을 부수며 심지어 성소에서 드려지는 예배조차 거부하십니다(30-31).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읍까지 황폐하게 하심으로 그 땅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러 민족 중에 흩어지게 됩니다(32-33).
땅의 황폐함과 안식(34-39)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으로 쫓겨 흩어지게 됨으로 그 땅은 버려져 황무지가 됩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를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땅은 안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백성들이 열방으로 흩어지게 되고 포로생활 7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강제적으로 실행되는 시간이었습니다(레 25:2-7; 대하 36:21). 이처럼 백성들이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지 않아 땅이 안식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되돌리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에도 놀라고 쫓는 자가 없어도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적용: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모든 환난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다는 임재의 증거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이런 경험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인생에서 어려움을 직면했을 때 생각나는 분이 있다면 가장 먼저 부모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며 내게 가장 적절한 길을 안내해 줄 사람. 그러면서도 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먼저 죄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의뢰하는 양식
레위기 26:25-26, 마태복음 6:31-34 / 이성희 목사
자연재해든 인적재해든 큰 재해 때마다 TV 화면에서 보는 것이 있습니다. 폭동과 약탈입니다.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이 떨어지게 되면 양심이고 법이고 다 버리고 훔칩니다. 특히 식량이 고갈되어 보세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아귀다툼을 합니다. ‘아귀’가 뭔지 아시지요? 굶주린 귀신이란 말입니다. 오래 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한국인의 상점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최근의 아이티 지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마구 탈취합니다. 세탁기까지 훔쳐서 업고 가는 사람이 있습디다. 인간에게 먹거리가 없어지면 가장 심각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1882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아시지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하여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에게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배급하려다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도와선이 되었습니다.
먹는 시합이 간혹 있습니다. 핫도그 빨리 먹기 대회가 있습니다. 핫도그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미 한국인 교포인 이선경씨인데 키가 165센티이고 몸무게가 47킬로그램이고 허리사이즈가 23인치인 가냘픈 여성인데 핫도그 빨리 먹기 대회에 80회 출전하여 50회 우승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토마토 먹기, 빙어 빨리 먹기, 물 빨리 마시기, 금붕어 먹기, 자장면 빨리 먹기, 야쿠르트 50개 빨리 먹기, 타조 알 먹기, 송편 먹기 대회 등 먹기 대회가 있습니다. 정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혐오대회’일 것입니다.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대식가 하면 홍일동이라는 사람을 칩니다. 조선조 세조때 사람인데 이렇게 많이 먹었답니다. 북한산 진관사에서 떡 한 그릇을 먹고, 국수 세 주발을 먹고, 밥 세 바릿대를 먹고,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고 다 먹고 산 아래에 내려와서 다시 찐 닭 두 마리를 먹고, 물고기국 세 주발을 먹고, 생선회 한 쟁반을 먹고, 술 아홉 바가지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대식가가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역사 기록에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먹지만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먹지만 먹을 양식을 의뢰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먹는 것을 의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할 때에 먹을 양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에 식량위기가 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곡물생산은 연간 18억2690톤에 불과하지만 소비는 19억 3210만 톤입니다. 생산이 소비에 비해 매년 1억 톤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인구 가운데 8억5000만 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하는 대로 전 세계 인구의 20%가 절대빈곤자라고 합니다. 절대빈곤자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최첨단과학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요한복음 6:27에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합니다. 썩을 양식이란 우리가 의지할 양식이 아닙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신 기적 후의 설명은 떡만 있으면 사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 양식을 땅의 양식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양식을 하나님은 끊으시겠다고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양식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는 “현명한 사람은 75%는 자신의 내적 판단에 의지하고 25%만 외부의 의견을 참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자신의 내적 판단이 얼마나 믿을 만합니까? 우리 자신에 대한 절대적 의존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러나 양식을 의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양식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의뢰하는 양식은 하나님이 끊으십니다.
26절에는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얻을 자가 없습니다. 광야에서의 만나를 보세요. 아무리 거두겠다고 부지런하게 설쳐도 하나님께서 안 주시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양식 끊으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끊으시겠다고 하십니까? 시편 105:16에는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당하여 고생했습니다. 이삭이 기근을 당했습니다. 야곱이 기근을 당했습니다. 왜 성경의 족장들이 기근을 당했습니까? 양식을 의지하시니 끊으셨습니다.
광야의 식탁을 보세요. 하늘에서 새벽마다 주시는 만나는 잠시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양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깜빡 잊고 새벽에 만나를 안 주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십니다. 왜냐하면 양식을 끊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16-17에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고 합니다. 이 성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양식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양식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왜 요즘과 같은 풍요한 시대에 세계적 식량 위기를 맞습니까? 인간의 과학주의와 지식주의는 인간의 교만의 산물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 두고 보자”하시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에 한발과 폭우와 눈사태와 지진을 주십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많이 뿌려도 먹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주인 이야기를 보세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양식이 또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양식은 인간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 주인이 될 때 위기가 옵니다. 문제가 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파괴됩니다. 멸망을 자초합니다.
조르즈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오! 주님, 당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다 내주어 빈털터리가 되셨던 것처럼, 저도 이제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섬세하게 배려하시고, 섬세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것을 다 잃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을 빼앗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참 좋은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생스터목사님이 어느 소녀의 병실을 심방했습니다. 소녀는 몹쓸 질병으로 시력이 점점 약해져가고 있습니다. 이 소녀는 목사님에게 “하나님께서 저의 눈을 빼앗아 가시려고 해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얘야, 빼앗기기 전에 드려라”라고 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부터 빼앗으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행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양식을 의지하고, 정욕을 의지하고, 재물을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건강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영의 양식을 보지 못합니다. 의뢰하는 양식을 끊어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끊어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적 양식을 하나님이 끊으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끊으시면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떠나면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26절 하반절에서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인이 정성으로 만든 것이, 풍성한 떡이, 맛있는 요리가 배부르지 않습니다. 이런 모두가 다 헛됩니다.
‘신경성 폭식증’이란 병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폭식이 나타나는 식사 장애입니다. 한 자리에서 배고픔과 상관없이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폭식 기간 동안에는 먹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고 중단하지 못하는 증세입니다.
애정결핍을 아시지요? 애정이 결핍되면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자도 졸립니다. 이건 군대에서 졸병들도 그렇습니다. 졸병 때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고프고, 아무리 자도 졸립니다.
왜 폭식을 하게 됩니까? 먹어도 배고프기 때문에 먹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먹는다고도 합니다. 폭음을 왜 합니까? 마셔서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폭음도 스트레스 해소용입니다. 먹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됩니까?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됩니까? 우리는 안 먹어도, 안 마시고도 기분 좋고 스트레스가 해소 되니 최고의 은혜입니다.
아모서 8:11에는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을 보세요. 머리는 금이고, 가슴과 두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쇠이고, 발의 얼마는 쇠이고 얼마는 흙입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진흙으로 된 발에 의지하여 서 있으면 결국 조만 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는 의지하지 못할 것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시편 127:1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모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셔야 주십니다.
마태복음 6:31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먹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가장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주십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안 주시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본성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엘리야를 보세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자청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주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 사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6:33에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배부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절대로 배부를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를 보세요. 하나님은 주시고, 인간은 거둡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이 주신다고 하더라도 게으르면 못 먹습니다. 과다하게 욕심을 부려도 헛수고입니다. 여호와이레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아시고 미리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게 되면 이미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인간적 생각으로 염려하여 하나님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제자들이 먹였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먹이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먹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의 쌍 페테르부르크 즉 옛날 레닌그라드에 가면 ‘이삭성당’이란 러시아 정교회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세계최대의 단일성전이라고 합니다. 크고 화려하고, 제정 러시아의 화려함을 죄다 모아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성당 안에는 아름다운 조각과 그림과 채색유리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이 성당의 강단 안쪽에는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상이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성당에 가봤지만 그 안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다 모아놨는데 왜 예수님은 슬퍼하실까요? 더구나 예수님의 슬퍼하시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공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고 삽니까? 하나님입니까, 물질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과학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인간의 지식입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어떤 성전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주시기는커녕 빼앗으시고 진노하십니다.
결 론
마르틴 루터는 ‘대 요리문답’에서 “무엇이든 당신의 마음에 의지하는 것, 어디든 당신의 마음이 머무는 곳, 그들이 사실상 당신의 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인간적인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해석하면서 “양식을 달라고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것을 의지하고 살고 있습니까? 양식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육신입니까, 영혼입니까? 세상지식입니까, 하늘지식입니까? 돈입니까, 믿음입니까?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의뢰할 것이 못됩니다. 의지할 것이 되지 못하는 진흙 위에 서 있을 겁니까? 쓸데없는 것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이 끊으시면 감사하세요.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육적인 문제에 급급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심판하시어 새언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레 26: 27-39 / 조용호 목사
◈ 주 해: 성령님의 조명
1. 하나님은 언약대로 순종하는 백성을 배불리 먹게 하시며 마음의 평화까지 주신다.
1) 언약안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
2) 반면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며 마음에 하나님의 법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다(15절).
2. 1차 재앙은 언약을 깨뜨린 반역의 죄로 인해 시작된 징계다.
1) 2차 징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을 꺽는 것이다(19).
2) 언약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5차까지 징계하심으로 멸망에 가까운 심판을 하신다(28).
레 26:23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3) 이 정도면 돌아와야 하는데 이런 징벌을 당해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끝까지 징계하심으로 결국 다시 언약안으로 이끄신다.
3. 오늘 본문은 언약을 배반한 하나님의 원수에게 5차로 징계를 경고함으로 시작된다.
레 26: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레 26: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1) 5차 징계는 끝까지 하나님을 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항할 마음과 힘자체를 꺽는 마지막 징계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처참한 징계다.
2) 아들과 딸의 살을 먹게 되는 징계, 자신의 완악함과 고집을 다 꺽어 버리는 징계다.
- 아들과 딸을 먹는 징계는 전쟁으로 갇혔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3) 아들과 딸의 살을 먹으면서 버텼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한다.
- 이스라엘의 시체들이 부서진 우상들 위에 던져진다.
4) 성읍과 성소는 황폐하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여러 민족 중에 흩어진다.
5) 이스라엘이 받는 징계가 너무 혹독하여 ‘원수’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조차 놀랄 지경이다.
4. 안타까운 것은 끝까지 언약을 배반하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공동번역]레 26:31 너희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고 너희 성소들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며 너희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피우는 향기를 역겨워하며 코도 돌리지 아니하리라.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언약을 배신하고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제사를 드렸다.
2) 언약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다.
- 언약을 떠난 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가증히 여기며 역겨워할 뿐이다.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5. 레 25장에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말씀이다. 안식년과 희년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집중하여 언약안에 거하는 것이다.
1)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씀을 싫어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오지 않았다.
2) 그러자 하나님은 강제로 가나안 땅을 안식하게 하신다.
3) 말씀에 순종하는 안식년은 배부르고 평안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식년이다.
- 그러나 말씀에 불순종하여 행하여지는 강제 안식년은 비참하고 황폐하다.
4) 우리 인생에서도 “강제 안식년을 당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 강제 안식년을 당하면 언약 안에 거하지 않았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6.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이방 땅의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심판은 끝나지 않는다.
1)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강한 마음으로 비참한 환경에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2)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들의 땅에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신다.
레 26:36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레 26:37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레 26:38 너희가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의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3) 마음이 약해져서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듯 도망한다. 그래서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가다가 엎드러진다.
- 원수들을 맞설 외적인 힘도 없고, 마음의 힘도 없어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한다.
4) 황폐한 상황, 포로된 상황에서 불안증(정신병)까지 생겼으니 죽을 맛이다.
7. 레위기 26장은 2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1) 구원받은 언약백성이 이렇게도 지독하게 완악하고 교만하고 하나님노릇을 하는가?
- 그렇다. 이 일들은 이스라엘에 실제로 일어난다.
- 우리의 옛사람과 육신은 이렇게 지독하게 완악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한다.
- 내안에 바로와 같은 완악한 마음, 자존심, 자아추구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2)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징계해서라도 언약백성으로 돌아오게 하시는가?
- 그렇다. 하나님은 이렇게 지독히 심판하시더라도 우리를 언약안에 거하게 하신다.
-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버리면서 까지 우리를 언약안으로 부르셨다.
- 창세전에 약속하신 생명주는 이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다.
8. 레위기 26장은 언약안에 거하라는 말씀이지, 이런 징벌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복을 잠시 받았지만, 언약을 떠나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징벌을 받음으로 멸망하였다.
2) 이 징벌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도 이런 징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3)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 약한 할아버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 아들을 십자가에 내 주신 하나님은 멸망하는 심판을 통해서라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9. 레위기 26장의 징계가 다 집행된 후, 이스라엘은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 스스로 언약 안으로 돌아올 마음의 힘도 믿음도 없게 되었다.
2) 그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3) 지독한 이스라엘의 죄성과 악함보다 더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의 열정이다.
- 새언약을 향한 열정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과,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신 아버지에게서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4) 삼위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분리되는 고통을 지불하면서까지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셨다.
5) 사랑으로 순종한 아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죄를 담당한 아들을 심판하고 버리셨다면
- 그 하나님의 뜻을 꺽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어떤 피조물도 없다.
10. 우리의 마음의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징계의 손길은 아프다. 그러나 그 징계는 옳다.
1) 하나님의 징계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교만하다.
-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 우리의 자존심이 꺽일 때까지...끝까지 징계하신다.
- 교만한 나의 자존심을 꺽는 징계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징계는 옳고 선하다.
2)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과 대항했고 심지어 동방의 의인인 욥마저 하나님과 대항했었다.
- 나 같은 자 안에는 얼마나 높은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겠는가?
3) 욥처럼 심판을 받은 이도 드물지만, 욥처럼 심판이 사랑임을 아는 자도 드물다.
- 무덤에서 우리는 몸도 맘도 힘을 잃는다. 파산한 그 곳에서 오직 주의 긍휼만을 구한다.
4) 그런데 그 무덤에 주님이 끝까지 함께하신다.
-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 그 징계는 우리에게 새생명, 부활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손 그림자였던 것이다.
◈ 나의 묵상
비참한 존재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다시 의를 기초로 세우시는 하나님, 모래 위의 집을 무너뜨리는 하나님, 장사복음을 알고도...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심판의 역사를 볼 때 내 마음은 놀란다. 이보다 훨씬 약한 심판을 받고도 나의 마음은 놀라고 불안하고 황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는 끝이 없음을 보고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수 없음을 본다. 그러면,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언약안으로 돌아오면 좋은데, 내 안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완악한 마음, 바로의 완악함이 있다. 어찌 이리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지 모르겠다.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나의 완악한 고집을 꺽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은 심판이 필요한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2. 복음
하박국의 기도대로 하나님은 진노중에도 긍휼을 베푸셨다. 나를 치셨으나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셨고, 나를 치셨으나 또한 싸매어 주셨다. 왜 이스라엘처럼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이방 나라에 쫓겨나지 않게 하셨는지 알 수 없다. 심판을 견디지 못함을 아시기에 그렇게 하셨다. 멸망하는 심판으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으로 부서지는 그릇임을 알기에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들어 있다. 언약안에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세밀하게 나를 공감하시고 도우시는 주의 손길이 있다. 반드시 죽어야 할 자를 반드시 살리시는 주님의 지혜가 있다. 그 지혜의 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 있음을 알게 하시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하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십자가 복음을 믿고 새로운 산길로 나아가 은혜의 보좌에 이른다. 나를 동정하시고 은혜의 보좌로 이끄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있다.
3. 생명
나의 지독한 고집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두렵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주님이 이기실 것이다. 죄와 사망과 사단을 이기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자아와 옛사람과 육신을 이긴다. 그래서 아들안에 있는 생명 있음을 알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신실한 심판으로 신실하게 생명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그럼에도 성령님이 내 마음을 만지사 하나님의 징계를 기쁘게 받는 가난한 마음으로 빚어주시길 간구한다. 주님의 징계가 깊은 사랑임을 아는 단계까지 주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한다. 나를 달콤한 사랑으로 안아주시고, 나를 잔인한 사랑으로 인도하신 그 사랑을 찬양한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 징계를 통해 나에게 나타났다.
◈ 묵상 기도
주님, 저는 하나님의 징계로 건강도 잃었고, 마음도 불안해 졌습니다. 영과 마음과 몸이 쇠약해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처럼 저의 교만은 꺽이지 않았고, 저는 자존심을 주장하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얼마나 악독한 교만이 있는지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제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스라엘에게 임한 징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것을 아시고 긍휼안에서 심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는데...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멸망한 이스라엘에게 새언약을 약속하셨듯이, 늘 저에게 복음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부터 있는 초등부 캠프에 함께하사 다음세대가 영으로 하나님을 알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 일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징계, 순종으로의 강한 초대
레 26:27-39
레위기 26장은 하나님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맞이하게 되는 저주가 이어집니다. 그 재앙은 더 심해집니다. 자녀의 살을 먹고 우상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성읍과 성소는 황폐하게 되고 포로로 흩으시며 대적의 칼에서 망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가혹한 재앙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완전히 멸망시키시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으신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순종해서 이미 말씀하신 복을 누리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이 말씀을 모세로부터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요? 아마도 잘 지켜야 한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이스라엘은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징계를 계속 받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전쟁에 승리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기도 했지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징벌을 그대로 맞이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로 성소와 성읍은 더럽혀지고 기근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포로로 흩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아람이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에워쌌을 때(왕하 6:28-29 )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에 자녀의 살을 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애 2:20, 4:10).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시려는 계획을 위해 축복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징벌도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징벌의 히브리어 뜻은 ‘잘되라고 혼을 내주다’, ‘벌주다’. ‘훈계하다’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가르칠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를 훈계할 때 사용되어집니다.
욥기 5장 17절에서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심한 고난일지라도, 그 징계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멸망할 자는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십니다.
징계를 하실 때는 단번에, 벌하시지 않습니다. 계속 돌이킴의 기회를 주십니다. 경고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징계의 정도를 점차 높이시며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돌이키지 않을 거니?”라고 말씀하시듯 애타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14절과 15절에 청종하지 않고 언약을 배반하면 질병, 파종의 헛됨, 전쟁 패배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18절에 또 그렇게까지 되어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가뭄과 땅의 소산이 없고 들짐승의 해를 입게 됨을, 23절에서는 이런 일을 당하여도 돌아오지 아니하면 칼에 도륙 당하고 염병과 양식 주림이 있을 것임을, 27절에 이같이 될지라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자식을 먹고 우상과 함께 죽임 당하며 대적의 칼에 흩어지며 소멸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벌하기보다는 벌하지 않으시려는 마음이 읽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때론 축복의 말씀으로, 때론 징계를 경고하심으로. 말씀을 통해,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경외함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님께 올려드리면 좋겠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징계가 오기 전에,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루살렘 멸망 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보며 예레미야가 소망을 이야기하는 말씀 예레미야애가 3: 32-40을 읽으며 마칩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렘 3:3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