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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돌을 까뒤집거나 코피를 터뜨리라고 어릴 때 동네 어른이 가르쳤다. 그래도 호랑이가 가지 않으면 엎드려 죽은 체라도 하라고도 했다. 동화에는 ‘아이고 형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넙죽 절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호랑이는 그렇게 인격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옛날에는 콜레라가 걸리면 호랑이 고기를 삶아 먹었다. 종기에는 범 그림을 그려 붙였다. 독감에는 ‘범 왔다’를 세 번 외쳤다. 호랑이의 용맹함이 감기에서 종기까지 치유약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랑이의 진면목은 귀신퇴치에 있었다. 풍속통의에는 ‘요즘 사람들이 갑자기 악귀를 만났을 때 호랑이 가죽을 태워 물에 타 마시면 능히 악한 것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호랑이가 귀신을 물리져 주리라 생각했던 것이 조상네들의 신앙이었다. 호랑이는 한민족에게 하나의 신앙이었다.
호랑이는 민족정기였다. 국토를 호랑이로 그린 지도도 있었다. 인간의 선악과 시비를 알았고 효자와 불효자를 구분하는 영물이었다. 나아가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사랑을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호랑이 신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장 신빙성있는 자료는 역사에 있다. 호랑이는 견훤에게 젖을 먹였으며 김현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보다 앞서 단군신화에서는 곰과 함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박차고 뒤어나가 호랑이로 남았다. 동이의 경전이라 부르는 산해경에는 서왕모가 호랑이였다.
서왕모는 불사약을 지키고 곤륜구를 통해 연결되는 하늘나라의 구중궁궐을 지켰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신도와 욱루를 시켜 못된 귀신을 죽였다.
이 신화들에 의하면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격적이면서도 신적인 존재이다. 나아가 해와 달까지 신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ㅣ=ㅣ에서 보듯 해와 동일어원이었으며 달은 토끼로 바뀌었지만 그 어원은 호랑이 토免라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제 해도 달도 뺏기고 시베리아 들판도 뺏기고 겨우 동물원 더부살이에 급급하다. 그런데도 한국인에게 백두산 호랑이는 신령스러움의 상징이다. 그것이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인사동에 전통문화축제가 열렸다. 그림이 빠질 수 있나. 하물며 호랑이 그림이 빠질 턱이 있나.
소년소녀 가장 돕기 기금마련에 백두산 호랑이가 등장했다. 백두산 호랑이가 이 땅의 백성들과 관계가 있긴 있나 부다.
약수리 벽화고분의 백호도이다. 벽사맹호도辟邪猛虎圖의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벽사맹호도는 삿된 기운을 몰아내 주는 호랑이 그림이다. 한껏 위엄을 뽐낸다.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거나 위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린다’는 말은 무섭게 그리려다 우서운 호랑이를 그리는 경우를 말한다.
민화의 환쟁이들은 기실 정규 화업을 닦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심사정의 맹호도나 잘 그린 화본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익히고 한겨울 소일거리로 노자품을 파는 것이 이 땅의 환쟁이들이었다.
그러니 실물을 보고서도 묘사하기 어려울 테지. 아둔한 손놀림으로 무섭게 보이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까. 제대로 된 화본이 있었겠는가. 희보 호랑이를 보면서 벽사 호랑이로 바꾸려니 웃는지 우는지 모를 호랑이가 그려질 법도 한다.
그래서 민화의 희보호랑이와 벽사호랑이를 구분하는 징표가 있다. 희보호랑이는 기쁘게, 벽사호랑이는 무섭게 그려진다. 희보호랑이는 하늘의 기쁜 소식을 들으니 기뻐야 하고 때로는 물구나무라도 서서 파안대소를 해야 하는 것이다.
벽사호랑이는 대나무와 함께 그려지거나 산속 혹은 달빛 아래 그려진다. 대나무는 벽사의 식물이기 때문이다. 뭇짐승이 깃든 산속에서 내려오는 것은 호랑이가 백수百獸의 왕이기 때문이다. 달빛 아래 그려지는 것은 호랑이가 달의 상징이었던 옛 신화의 잔재일 것이다.
희보 호랑이는 언제나 까치와 그려진다. 그래서 작호도鵲虎圖이다. 정월 초하루에 하늘의 기쁜 소식을 비는 그림이 작호도이다. 정월은 호랑이달 즉 인월寅月이다. 정월을 상징하는 식물은 소나무이다. 그래서 까치는 대부분 소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것으로 그려진다.
호랑이에 버금가거나 힘이 센 동물은 많다. 그럼에도 사자나 곰 또는 코끼리 등을 제치고 호랑이가 한국인의 마음에 자리한다. 지식이나 개념이 아니라 신화적 원형에 뿔리를 두기 때문이다. 벽사, 즉 삿된 것을 막아 주리라는 신앙이 깃들이어 있기 때문이다.
약수리 벽화 고분의 백호도
아예 목판으로 호랑이 부적을 만들었다. 마르고 닳도록 찍어내겠다는 심산이겠지. 그림 이상의 수요가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어쭈구리, 덤비겠다는 거야? 덤벼 봐, 덤벼... 그림 속의 산신호랑이가 벼른다. 누구에게 벼를까. 재액을 소멸하겠다 하니 재액을 어르는 것이겠지.
죽림출호도竹林出虎圖는 대밭에서 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호랑이는 대밭에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호랑이=벽사=대나무의 공식과 함께 그려진다.
담문록에 의하면 서방 산중에 큰 산귀가 있어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반드시 병에 걸린다고 했다. 이전이라는 사람이 산귀를 두려워해서 아침 저녁 대나무를 불 속에 넣었다. 뻥 뻥 터지는 소리에 귀신이 도망갔다는게다. 그렇게 폭죽爆竹의 기원이 되었다.
호랑이는 ‘양陽의 동물이요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라고 풍속통의에 소개된다. 그러기에 음音의 존재인 귀신과 도깨비를 능히 잡아 후려치고 부러뜨리며 깨물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모두 신화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상제의 구중궁궐을 지키며 동방을 향해 서 있는 호랑이신 개명수는 귀신을 쫓는다. 개명수=하후개=하후계이다. 모두 호랑이로서 태양의 뜻을 지닌다. 개는 연다는 뜻으로 계와 같다. 따라서 개명이나 계명은 밝음을 연다고 풀이된다. 호랑이가 밝음을 연다는 것이다.
산해경의 해내서경海內西經에는 상제의 지상도읍지인 곤륜산에 있는 구부와 상제의 정원을 관장하는 육오陸吾와 우토于菟가 호랑이였다. 또 산해경의 서산경西山經에는 육오가 호랑이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호랑이의 신화에는 산해경이 연결되고 서왕모가 개입된다. 중국에서 서왕모는 동물신이다. 인간 반 호랑이 반의 호랑이신이다가 호랑이를 대동한 여자로, 다시 산신할아버지로 바뀌었을 것이다. 서왕모->삼신->산신->신선으로 부계사회와 신선사상의 발달에 따라 그 위상과 이름이 변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세월이 변하면서 귀신잡는 호랑이는 장천사, 즉 장도릉과 함께 재등장한다. 도교를 창시한 장천사는 천하의 귀신을 물리치고자 호랑이를 타고 떠난다. 그래서 장천사를 태운 호랑이 발에는 찢어진 귀신이 그려지게 마련이다.
죽림출호도
장천사가 큰 칼 빗겨차고 귀신몰이를 나선다. 칼은 겁주기 위한 것이고 귀신은 호랑이가 찢어발긴다.
은상 청동기의 호랑이신이 귀신을 씹어 먹는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가. 상나라 시대의 표현이 서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신도神荼와 욱루郁壘는 복숭아나무 아래서 귀신을 왼새끼에 꼬아 죽인다. 복숭아 주인은 서왕모이다.
산신신호도山神神虎圖이다. 산신은 산에 사는 신령이고 신호는 신령스런 호랑이라는 뜻이다. 호랑이는 대개 허리를 감싸는 담요처럼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는 호랑이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가 분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렇다면 신화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서왕모이다. 산해경에 의하면 서왕모는 봉두난발에 비녀를 꽂았으며 자주 으르렁거렸다고 했다.
산신과 함께 그려지는 호랑이는 또 시중드는 시녀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해경에는 서왕모에게 먹이를 날아다 주는 삼청조가 있다고 했다. 호랑이 신에게 먹이라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였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중에 그려지는 그림에는 파란 옷을 입은 시녀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로 그려지는 산신의 형태는 비교적 산신도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다. 물론 후세의 무속에서 여자산신은 진화를 거듭하여 나름대로의 이름과 신격을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이어 중성적인 산신이 그려진다. 여자처럼 그려졌지만 수염이 달렸다. 남자 산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남신이 그려졌을 것이다.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산신은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로 그려진다. 결국 여신선에서 시작된 산신신호도는 할아버지 신선으로 정착된다. 이 과정에서 호랑이도 변화를 겪는다.
최초의 호랑이는 여자신선의 아랫도리거나 한 몸처럼 그려진다. 그러던 것이 몇 단계를 지나면서 호랑이는 분리되어 희보호랑이의 표정을 닮아간다. 산신에게 아양을 떠는 호랑이로 바뀌는 것이다.
서왕모가 남성화할 수 있는 배경에는 모계사회의 몰락이라는 시대상황이 있다. 서왕모가 산신이 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 유추할 수 있다. 삼신은 개국신인 환인ㆍ환웅ㆍ환검이다. 환검은 단군 왕검을 일컫는다.
초대 단군은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그래서 삼신과 산신이 같아진다. 산신의 영험에 할머니의 자상한 손길이 겹쳐진다. 그것이 산신할매 혹은 삼신할매라 불린다는 게다.
산신신호도가 부계사회에서 남성화할 때 서왕모는 삼신할매가 되어 기층민중의 속내신앙으로 자리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산신신호도
명소운종 산귀도의 산귀그림은 여자로 그려진다. 이름이 무산신녀란다. 생각나는 것이 없는가...여자산귀신.... 신녀....
서왕모는 중국인이 동물신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여자로 그렸다. 여자들의 축수용이다. 강소성 소주의 홍지인본이다.
호랑이와 우리 민족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한민족이 하늘 백성이기 때문이다. 벽사는 하늘에서 삿된 것을 멀리하게 해주시는 것이고 희보는 하늘의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백두산 호랑이가 민족정기란다.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서왕모에 멎는다. 서왕모는 곤륜산에 산다. 곤륜산은 하늘산이다. 태백산도 하늘산이다. 그래서 곤륜산이 태백산이 된다면 서왕모 역시 단군신화의 호랑이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다.
곤륜은 고대말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곤륜산은 번역하면 천산 즉 텐샨 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산이나 태양산 등이 한자로 표기되었다면 충분히 백산ㆍ박산ㆍ밝산 등의 이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큰 산ㆍ높은 산 등의 듯이라면 태산ㆍ태산 등이 된다. 오늘날 중국인이 습관적으로 천하제일산이라 하는 태산은 그 높이 때문에 천하제일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곤륜산은 황제와 요임금과 주나라 목왕이 유사를 건너 찾은 곳이다. 왜 죽음의 사막인 유사 즉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넜을까. 서왕모, 즉 서쪽에 있는 왕모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닿지 않은 곳, 죽음의 사막 건너편 신강성의 쿤륜산맥이 서왕모의 거처라 생각되었음직도 하다.
이미 서왕모의 신화는 상고시대부터 검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쿤륜산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곤륜산일까. 한국민족의 원형이 담긴 땅 그림에서 우리는 다시 곤륜을 만나게 될 것이다.
민화의 벽사 호랑이와 산신호랑이는 곤륜산+서왕모+개명수+신도+욱루+장천사 등의 신화나 전설이 호랑이의 신격화에 일조하여 그려졌다. 하여 오늘날도 한식집의 단골그림이 호랑이 그림이다.
호랑이의 달인 정월 호랑이 날인 모충일에 새해 첫 손님을 받았던 전포나 식당 등의 습속이 깔려 있다. 그 습속을 정당화했던 것이 역시 손님이 드나드는 곳에 삿된 것이 들어오지 말라는 벽사의식이었을 것이다.
호랑이 뿐이겠는가. 신부의 가마에 둘러치거나 서가에 둘러치는 호피장막은 소중한 것을 기나 잡귀로부터 보호하려는 벽사의 중요한 소도구였다. 그래서 호랑이의 나라 한국을 다시 보게 된다.
식당에 호랑이 그림을 붙인 것은 삿된 기운이 바깥에서 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귀신을 막는데 붙이는 그림이 문배門排인 이유도 거기 있다.
우리 그림인가. 산동의 유현에서 요즘 그린 연화 호랑이이다. 임금 왕자가 새겨진 백두산 호랑이 아닌가.
중앙일보 1996년 8월 14일자. 450년이나 호랑이 제사를 지내? 그것도 멸종한 한국호랑이에게? 멸종할 수 없는 신앙으로서의 호랑이겠지.
12. 바깥귀신ㆍ안귀신
눈병이나 독감이 돈다. 의사는 ‘만세 삼창은 안불러도 좋습니다... 만’ 하고 운을 뗀다. ‘외출해서 돌아오면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손발은 씻으세요’ 라고 처방을 내릴 것이다. 사실 이런 처방이야 의사가 없었던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실천했던 민간요법이었다.
조상들은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는 재해와 돌림병 등을 사로 규정하여 철저히 배격했다. 그것이 벽사이다. 금줄ㆍ산ㆍ동지팟죽 등이 그러한 벽사의 징표들이다.
금줄은 청솔가지ㆍ백지ㆍ고추ㆍ숯을 왼새끼에 끼운 것이다. 색깔을 보자. 솔가지의 파랑ㆍ백지의 하양ㆍ고추의 빨강ㆍ숯의 까망 그리고 새끼의 노랑이다. 동청 서백 남주 북흑 중황의 오방색이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연결된다.
산이란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을 떼어 왼새끼에 꽂은 것이다. 단옷날 소나무에 묶어 산멕이기를 한다. 단오제사는 동티를 막기 위한 것이다. 동지팟죽은 붉은 색을 무서워하는 귀신을 쫓는다.
이 모든 벽사의 의식이 치러진 곳이 문이었다. 금줄은 문간에 치고 산은 문밖 소나무에 걸었다. 동지팥죽은 문에 뿌렸다. 그런데 왜 문이었을까. 귀신은 벽을 통과할 수도 있고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문이 벽사 의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삿된 것들이 문으로 들어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묻혀 들어온다는 뜻이 있다. 사나 사기에 씌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문이었다. 그래서 문지방에 부적을, 문에 그림을, 문턱에 소금을 뿌렸다. 요즘 말로 하면 의사의 처방전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옛날의 무당이나 삼신할매는 돌팔이 의사였다. 부적이나 문에 붙였던 문배그림은 엉터리 처방전이었다. 그들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무면허 의료행위와 그 처방의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새마을 운동 중에서도 미신타파운동이라는 것은 중국의 문화혁명에 버금하는 우리의 정신적 문화유산파괴행위였다. 하긴 그렇다고 타파된다면 문화요, 원형이겠는가.
우리는 이제 문배 그림을 문에 내걸지 아니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파괴된 문화 속에서도 연하장을 돌린다. 경극화한 문신그림이 그려진다.
삼두신응도三頭神鷹圖라, 머리가 셋인 매를 그린다. 매는 시력이 좋아 멀리까지 볼 수 있다. 또 부리와 발톱이 날카로워 비둘기ㆍ개똥지빠귀ㆍ물오리ㆍ꿩 등 날짐승과 토끼ㆍ들쥐 등 들짐승을 찢어 먹는다.
순발력이 뛰어나고 파괴력이 엄청나다. 자연히 귀신을 찢어발길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해동청 보라매라ㆍ수렵시대 신시베리아 문화권의 조류숭배사상의 흐름에서 상찬되기도 했으리라.
보통 벽사의 매를 그릴 때는 표징이 있다. 머리가 셋이고 다리가 하나인 삼두신응도는 부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부적에는 그림의 내력이 적힌다. ‘신응이 머리 셋으로 화하여 남해 중에 출두하니 삼재를 소멸하고 귀신을 쫓는 부적神鷹化爲三頭 出南海中 三災消滅逐鬼符’이라 풀이한다.
삼재소멸은 삼재를 없앤다는뜻이다. 삼재는 보통 풍재風災 수재水災 화재火災를 뜻한다. 심화心火 풍병風病 수종水腫기도 하다. 또 인패人敗 재패財敗 우환憂患 혹은 천재天災 인재人災 관재官災가 되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과 제도에서 올 수 있는 재앙을 열거한다. 그것을 매가 찢어 발기리라 믿었다. 삼재라 머리가 셋이다.
매와 용호가 함께 그려지면 용호신응도龍虎神鷹圖라 부른다. 여기도 삼재소멸의 글귀가 적힌다. 「용은 오복을 부르고 호랑이는 삼재를 쫓는다 龍虎五福 虎逐三災」라 호랑이에 동등한 신격이 부여된다.
그런데 삼재가 뭔가. 그것은 재액 자체라기보다는 가능성의 의미가 짙다. 그래서 삼재소멸이란 기원이며 예방의 의미가 크다. 미리 조심하면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삼재법은 생후 9년 만에 드는 삼재를 피하기 위해 세 마리 매를 그려 문지방에 붙이는 처방이다.
거기에 매가 등장했다. 장수매의 전설은 조류신앙이 민족신앙과 결합한 좋은 예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로 시작되는 민요의 주인공이 장수매이다. 장수매의 전설은 만주ㆍ한국ㆍ일본 등지에 깃들인 매가 왜 시베리아의 조류숭배사상과 연관이 있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다.
한국인의 매는 그 중에서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인간의 편에서 귀신과 싸우기 때문이다.
삼두신응도
해동청 보라매는 용맹의 상징이었다. 사냥의 능력과 벽사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신 시베리아 문화권의 조류숭배사상에서 파악된다.
신응도이다. ‘머리 셋, 다리 하나인 매가 삼재 귀신을 쪼아 없앤다’ 라고 역한다. 산해경의 괴물이 매의 몸을 빌어 나타난 셈이다.
송하해치도松下獬豸圖는 소나무 아래 해태를 그린다. 해태는 기린처럼 뿔이 하나 머리에 난 짐승이다. 기린의 몸은 사슴과 같고 해태의 몸은 사자와 같다. 해타獬駝라고 할 때는 낙타가 연상된다. 해태와 기린과 해타는 분간이 어렵다.
그러나 해태는 인간의 선악과 시비를 분간하는 동물이다. 동북 변방에 사는데 사람이 싸우거나 다투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 했다. 그래서 암행어사를 치사豸史라 했다. 엄정한 판관에게는 해태를 새긴 사모를 씌우거나 흉배에 새겨 주었다.
해태는 불을 먹는다. 그래서 궁궐 등에 장식하거나 입구에 세웠다. 목조 건물이 중심이었던 우리나라에서 화재와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가 절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화문 앞의 해태는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는 불귀신을 잡아먹는 신수이다.
해태에 모란과 수석이 함께 그려지면 부귀장수를 의미한다. 반도ㆍ소나무와 함께 그려지면 역시 장수를 비는 그림이 된다. 선동이나 동자 역시 장수라는 개념을 보좌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선악 시비를 잘 가려 깨끗한 이름을 보존하시고 부귀 장수하시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오래 오래 부귀 장수를 누리려면 불조심하시라 등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이나 환쟁이는 그런 수사법과는 무관히 그림을 그렸다.
해태를 그린다고 이 그림은 청렴, 이 그림은 불귀신방패 등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문배그림에 그려지는 해태 역시 그 뜻이 명료하지 아니하다. 보통 문배그림으로는 계견사호라 하여 닭 개 뱀 호랑이를 그려 붙인다.
거기에 해태가 그려지는 것은 계견사호鷄犬巳虎의 성격이 확정되기 전의 통념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후대에 해태는 도태되거나 잊혀졌다는 뜻도 된다.
계견사호는 오늘날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실제 동물들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람들이 해태 대신 끼워 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계견사호 이전의 문배그림은 보다 신화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닭 그림의 문배세화가 그러한 사정을 설명해준다.
송하해치도
문배견도. 계견사호에서 닭은 태양을 부르고, 개는 ㅣㆍㅣ로 태양ㆍ뱀은 태호 복희씨로 태양신ㆍ호랑이 역시 개=계=ㅣ=ㅣ로 태양의 모습들이다. 태양의 네 가지 모습이라고 할 까.
칠성눌이라. 뒷할망의 처소이다. 뱀 귀신이 할망이 되었다. 뱀은 복희 여왜와 관련이 있다. 복희는 태호 즉 태양신과 동격이고 여왜는 서왕모와 동격이다.
문배금계도門排金鷄圖는 삿된 것을 쫓아내기 위해 문에 붙이는 닭 그림이다. 세화계도歲畵鷄圖라 부를 때는 새해에 붙인다는 의미가 강조된 경우이다. 금계도에는 조류신앙과 벽사의 뜻이 담겨 있다.
보통 닭 그림은 병아리들과 함께 그려져서 자손 기원을 표현한다. 황계黃鷄와 노란 병아리들은 가을 들판을 연상케 하므로 자손창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벽사의 금계는 신화적인 배경에서 비롯하므로 황계와는 구별하는 것이 옳다. 상서로운 구름과 불로초를 배경으로 금계가 있으니 이는 벽사 문배의 그림이라 보는 것이다.
닭이 벽사의 상징이 되는 이유는 한漢의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儀에 설명되어 있다. 그믐달에 닭을 죽여 문호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오늘날도 붉은 닭을 사용하는 것은 것은 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장례 행진에서 흰 닭을 관 위에 놓는 것은 악귀가 가득한 길을 치운다는 뜻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라 했다. 닭 울음 소리는 새해의 덕을 부르고 개는 묵은해의 재앙을 짖어 물리친다 라는 말이다.
결국 문배 그림의 계견사호는 이들 동물의 상징성에서 오는 유감類感이다. 비슷한 사물에서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는 뜻이다. 그림을 붙이면서 주술적인 효용을 노렸다면 그것은 유감주술이 된다.
닭이 매와 마찬가지로 벽사의 상징이 되는 것은 조류 신앙에 기인한다. 우리가 신앙으로 대했던 새들 중에는 태양의 삼족오, 태평성대의 봉황 등이 있었다. 나아가 고구려의 무사, 신라의 화랑, 오늘의 무당에 이르기까지 모자에 꿩 깃을 꽃는 습속이 이에 기인한다. 이 신앙의 배경에 신화가 있다.
하늘나라에서 금계가 울면 옥계가 울고 천하의 닭이 모두 운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에 내려갔던 귀신들이 모두 귀문을 통과해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조류숭배사상은 동이족과 연관이 많다.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는 새를 신하로 삼았다 했다. 새의 이름을 가진 관직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새가 존경을 받은 것은 시베리아 문화권의 공통습속이었다.
문배금계도
중국의 가정집 대문이다. 중국인은 빨간 천, 빨간 문신 그림을 그려 귀신을 쫓았다. 우리와 같은 것이 있다. 엄나무가 문 위에 걸려 있지 아니한가.
벽사란 삿된 것을 막는다. 혹은 물리친다는 뜻이다. 삿된 것을 물리치고 나면 올바른 것만 남는다. 그 옳고 바른 것만 보고 즐기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이렇게 벽사의 그림과 벽사의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많은 재앙이 기다린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위험과 재앙을 피한 결과이다. 지진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 전염병이나 고질병 등의 질병, 인간의 제도에서 오는 재난 등은 없어야 좋은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란 편리함이라는 표면적인 방향성을 내세우면서 뒤쪽에서는 재난과 재앙을 피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인류는 많은 재해와 재난을 과학과 의학 등의 힘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신비라 불렀다.
재앙과 재해를 일으키는 삿된 것은 무엇일까. 이들은 때로 귀신이나 잡귀라 일컬어졌. 정말 귀신이 있는가. 요즘사람들은 귀신이야기라면 지어낸 옛 이야기로 치부한다. 그러나 귀신은 있다.
귀신은 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실체이다. 구신은 산 사람의 기, 이를테면 생체 에너지Bio Energy를 먹고산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귀신도 없어진다는 말도 있다. 생체 에너지를 먹고 사는 것은 귀신이나 잡귀만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靈性 또는 성령聖靈 등도 산 사람들이 만든 생체 에너지의 결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와 교세가 깊고 큰 종교는 그 정신적 에너지가 응집하여 굳건한 범주와 섹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이 잡귀와 다른 것은 인류의 지혜, 즉 상식에 바탕하는 개념화된 논리와 객관화된 주관이 스스로의 논리와 감성체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보다 귀신과 친했다. 그러던 것이 전등이 발명된 후에 귀신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귀신은 음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둠을 전등이 밝히니 귀신이 숨을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귀신의 세력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귀신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해했다. 혹은 도끼로 쪼개고 난도질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조상들이 그러니까 바로 귀신들이었다. 그러기에 망치나 도끼 등을 들고 귀신을 벼르는 신장을 그려 대문에 붙이지 않았겠는가. 종교와 신앙이 둘이 아니었던 것이 우리 조상네들의 삶이요 의식구조였다.
당현종이 악질을 앓았다. 도끼를 든 장수가 귀신을 쫓았다. 오도자에게 꿈 그림을 그리게 했다. 종규도는 그러니까 도끼신을 그린 것이다. 한국의 귀신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박생광은 무속이라 이름하여 귀신을 그렸다. 귀신과 더불어 살고 언젠가 귀신이 되어갈 이 땅의 귀신들을 그렸다. 그러니 이 땅에서 귀신이 사라질 일이 있겠는가.
13. 천불만불의 민불화
한국인은 신앙적이다 한국인이라면 어느 종교건 하나 쯤 연결되어 있다. 몇 개의 종교에 다리를 걸치기도 한다. 종교라 할 수 없는 믿음도 성행한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수입된 이해오늘날까지 호국불교로서, 기층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기독교는 조선 정조 8년,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후 이 땅에 교회를 세운 것이 그 전래의 시작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외래 종교라면 천도교와 원불교는 이 땅의 종교이다. 천도교는 철종 11년인 1860년에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을 3대교주 손병희가 개창한 민족 종교이다. 원불교는 1916년 박중빈이 창교했으며 불교와는 무관한 자생종교이다.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11세기 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통치이념이 되었다. 유교가 위정자들의 이념이었다면 민중에게는 민중의 믿음이 전해 내려왔다. 종교가 체계적, 합리적인 논리체계를 갖추었다면 민중들의 믿음에는 산발적ㆍ신비적 주술행위가 강조되었다.
종교와 믿음은 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교파와 종파 등으로 나뉜 것 같지만 실상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종교나 믿음을 대하는 태도, 신앙적이라 할 수 있는 믿음의 근원은 우리의 문화사적 흐름과 맥이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무속화라 부르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단군이나 최영장군 같은 한국인, 관운장ㆍ제갈공명같은 중국인이 똑같이 취급된다. 제석천과 산신과 용왕이 한 화면에 그려지기도 한다.
맹인이나 창부倡夫ㆍ망나니 등이 지엄한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을 모시던 정성으로 모셔진다. 그 바탕 위에서 우리는 민불화를 이해하게 된다. 민불화란 민간신앙에 흡수된 불교의 도상을 말한다.
왜 한국인은 이렇게 쌓아올릴까. 산길의 돌을 치우기 위해서라면 돌 없는 곳에서는 이런 석탑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운주사에는 도선이 일으켜 세우려다 못 세웠다는 와불이 있다. 한국인은 잘 생긴 석굴암 부처에게도 절하고 못생긴 민불에도 절한다.
문수보현도文殊普賢圖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그린 불화이다. 부처의 협시불들이다. 그것이 민불화로 그려졌다. 문수보실은 사자를 타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해태처럼 그려졌다. 코끼리를 타고 있는 것은 보현보살이다. 하늘에는 부처가 구름 위에 타고 앉아 사천왕의 옹위를 받고 있다.
민불화는 불화의 엄정한 구도외 상호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나사가 풀렸거나 군기가 잡히지 않은 것처럼 엉성하게 보이는 그림이 그려진다.
정통불화에서 문수는 왼쪽에서 보현은 오른 쪽에서 부처를 모신다. 그래서 협시불이다. 문수와 보현은 삼세불을 모신다.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이 삼세불이다. 국립박물관의 아미타극락회상도에서는 아미타불을 모신다. 용주사 삼장보살상에서는 석가여래를 모신다. 천은사 칠성도에서는 지장보살을 모신다. 엄격한 불화의 전통에 따라 이런 그림은 조성된다.
그러나 민화 혹은 민불화의 표현은 매우 자유롭다. 이 그림은 마치 사천왕에게 ‘부처님 잘 모셔라, 나는 중생제도에 나설란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민불화는 불화의 상호와 지물, 속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문수보살은 범어로는 만주스리Manjusri, 한자로는 묘길상ㆍ묘덕이라 부른다. 모든 보살의 으뜸이다. 주로 석가여래나 비로자나불의 협시불로 그려진다. 보통 금색동자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바깥을 향해 세우고 칼을 드는 경우도 있다. 왼손에는 청련화를 든다고 했다.
보현보살은 범어로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라고 한다. 크게 뛰어난다는 뜻이다.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의 협시불로 등장한다. 흰 코끼리를 탄 금색동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연꽃 가지를 들고 나타나거나 불경책을 들기도 한다.
이렇게 불화와 민불화를 함게 보면 민불화가 얼마만큼 정통불화보다 표현이 자유로운가 알게 된다. 사실 격식이랄 것이 없다.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얼마나 배짱이 두둑할까.
문수보현도
이영우는 불 그리고 사천에서 문수 보현 대신 사천왕의 옹위를 받는 부처를 그렸다. 역시 민화적인 발상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래 전통불화에서 문수 보현의 외도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근엄하게 부처님을 모시는 주제에 언감생심 다른 마음을 품어? 아미타극락회상도이다.
보살신중도菩薩神衆圖는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군중들을 그린다. 신중이란 화엄신장을 뜻한다. 화엄경으로 표상되는 불법을 수호하는 무리라는 말이다.
이 그림은 민화라 하기에는 너무 잘 그렸고 불화라 하기에는 너무 격식이 무시되었다. 가운데에 불쌍한 동진童眞보살이 있다.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해서 동진이다. 위태천을 일컫는다. 양 옆으로 팔부중과 천계의 왕인 제석천, 물의 왕인 용신을 그린 듯 하다.
그린 듯하다 라는 말은 전통 불화처럼 상호나 지물이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옆으로 문수보살이 보인다. 그림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지 않다. 대신 머리에 두건처럼 둘러쓰고 있다. ‘잘 들어가는 부엌에 진 솔 마른 솔 가리랴’ 옛 속담이 그른 게 없다. 타고 있건 머리에 둘렀건 문수는 문수요. 보현은 보현이란 말이다.
전통 불화에는 이러한 표현이 자제되어 있다. 신중도는 일반적으로 제석천ㆍ대범천을 중심으로 천녀ㆍ천상중이 나란히 그려진다.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금강상ㆍ신장상이 또한 나란하다. 전통 불화의 신중도에는 문수와 보현이 그려지지 않는다. 다른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석천과 천상중ㆍ동진보살과 신장상이 그려질 때 문수와 보현은 그리지 않는다.
신중탱화에서도 동진보살은 중심이 된다. 때로 신중탱화에는 토속 신앙이 반영되기도 하지만 민불화와는 다른 질서가 있고 규율이 있다. 위로는 대범천ㆍ천동ㆍ천녀ㆍ일천자ㆍ월천자라 열립한다. 중간에는 토속신장, 아래는 금강역사와 신중상이 나란히 서 있지만 문수와 보현은 없다.
그렇게 보살신중도를 뜯어보니까 민불화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그림들이 있다. 정통 불화만큼 잘 그려졌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민불화라는 한 분야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릴 수 있었던 것이 민불화였다. 화원이 그려도 낙관이 없으면 민화요, 민불화였다. 화원이 되지 못한 화공, 혹은 불화공이 되지 못한 환쟁이가 그려도 역시 민화였다. 그래서 불화공, 즉 금어金魚가 그린 그림과는 그 품격이나 느낌이 다른 그림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런 그림이 그려졌을까. 사찰은 불화로 장엄되어 있다. 언제나 열려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배할 수있다. 그런데도 사찰 외부에서 이런 그림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과 숭배라는 차원에서 이런 그림을 재해석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보살신중도
천도제는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 스님은 옛 옷을 입고 옛 제사를 지낸다. 신도는 오늘 돈을 양은 대야에 담는다.
민불화이다. 워낙 오랜 불국토의 전통이 있으니 엄청남 불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디서 그 돈이 나왔나. 우리네 어머니 쌈지돈이지.
보살신장도菩薩神將圖는 동진보살과 신장들을 그린 그림이다. 신장이란 불법을 호위하는 무리들이다. 사부신장이 있다. 사천왕으로 그려질 수도 있다. 무리가 늘어나면 팔부신장ㆍ십이부신장ㆍ나아가 일백사위 신장도 있다.
정통 불화에서는 일성과 금강역사와 신장상을 그린다. 동진보살이 혼자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때로 전통불화라 할지라도 식별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지물이나 상호가 분명하지 않거나 혼동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통 제석천ㆍ대범천ㆍ천상중ㆍ팔부신장ㆍ일광보살ㆍ월광보살 등을 그린다. 무리가 늘어나면 하나하나의 신장 혹은 신중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두루뭉수리로 신장이라 부른다. 불법을 지키는 장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백사위신장쯤 되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장은 엇비슷하게 그려진다. 특징을 부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럴 필요가 없다. 불법은 만유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로 중생을 이끌었던 것이 불교 교단이다. 땅과 하늘과 물 속의 모든 중생을 그릴 지면이 있다면 그 모두를 그리는 것이 오히려 불화의 목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다. 근기란 사람마다 다른 수용능력과 반응양상이다.
고려시대 이맹근이 그린 관경변상도는 극락정토를 세 개로 나눈다. 다시 사람의 근기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구품연화도는 아홉 가지 극락의 모습이다. 부처가 세 보살의 일므과 함께 식별된다. 웬만한 중생도 짐작할 수 있는 도상이다.
김천 직지사에 영산회상도가 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현과 십대제자 사천왕이 배치된다. 이들의 이름과 특징은 불도를 깊이 알고자 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의 그림 중 오백나한도가 있다. 오백나한도라... 그 각각의 이름을 제대로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불교미술 전공자도 그림을 보고서 하나 하나 식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린 백성이 니르고자 할 배 있어도 못할 노미 하니라’는 훈민정음 서문이 생각난다. 그 어린 백성, ‘어리석은 ’ 민초의 힘이 불교를 이 땅의 기층 종교로 정착시켰다.
보살신장도
팔부신장쯤 되면 석굴암에 있것 천은사에 있건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 라고 줄줄이 읊을 수도 있다.
오백나한 쯤 돼 봐. 셀 수가 있나 그릴 수가 있나. 이름을 붙일 수가 잇다. 잿더미에 박힌 우박 떨어지듯 구석구석 박혀있지를 않나.
불경은 산스크리트어로 집결되었다. 이를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했고, 한국에서는 한역판을 한국어로 읽었다. 불교의 동전은 그렇게 다른 언어권과 문화권를 거치게 된다.
인도인은 영적이다. 우주에 외계인이 있어 신호를 보내면 인도인만이 해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전을 앞으로 외고, 뒤로 외고 넉자 걸러 외는 것이 얼음에 박밀 듯이 거침없는 종족이라고도 한다.
그 인도인이 불경을 결집했다. 나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을 단상에서 암송하고 그 자리에 모인 오백나한이 만장일치로 채택한 최초의 경전이 잡아함경이었다.
그것이 현실적인 중국인에게 전파되었다. 중국인은 현실적이어서 형이상학적 명상이나 초월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절망한 중국인도 있다. 그 중국에서 산스크리트어가 한자로 번역되었다. 모든 고유명사는 한자로 번안되었다.
다라니陀羅尼는 한자로 총지摠持라 했다. 산스크리트 경전을 발음대로 독송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의 주문이기도 하다. 그것을 세계에서 제일 외래어 표기가 난삽한 한자로 표기했다. 한자총지 자체가 주문이요, 다라니였다.
한국인에게 처음 전달되어 나중까지 남은 것은 한역 불경이었다. 영적인 인도의 교리가 현실적인 중국의 어려운 표기를 거쳐 신적神的인 한국인에게 전해진 것이다. 한국인은 샤머니즘을 배냇신앙으로 신명과 정신을 펼친다.
애니미즘 즉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믿음은 한국인에게 낯선 석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은 그럴 법하다. 그러나 현대 물질문명이 대량생산한 산업제품에까지 한국인은 인격을 부여한다. 새로 산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는 민족이 한국인 말고 또 있을까.
불법의 동전에서 이미 불교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도상은 흐트러지고 민속ㆍ무속ㆍ미신 등이 불교에 습합되었다. 호국불교ㆍ토속불교ㆍ기복 불교 등은 이 나라에서 새로 탄생한 한국불교의 고유한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불교가 토속화ㆍ한국화한 것은 불교 자체의 포용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밑간 데 끝간데 없다는 불교의 사상체계은 수미산에 비유할 수 있다.
수미산은 수메르Sumer 산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8만 유순이다. 1유순이 7km라는 견해를 따르면 56만 킬로미터가 된다. 중국인의 허장성세는 아예 족보도 내밀지 못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토록 포용적이니까 세계의 모든 종교와 무속ㆍ민속ㆍ원시 종교ㆍ토속 종교까지 포용하고도 그릇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한국의 토속 불교는 또 다른 면모가 있다. 불교의 원형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수미산이다. 높기도 하다. 돈황 필사본에 그려져 있다. 이렇게 높으니 한 층 쯤 더 그린들 알 것이며 덜 그린들 알겠느냐. 붓 쥔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14. 우리 몸에 우리 무속화
무당그림이라, 좀 고상하게 표현하여 무속화는 언뜻 보아도 뚫어지게 보아도 국적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인신ㆍ동물신 등처럼 신의 의지를 표방한 것도 있고 산신ㆍ수신ㆍ천공신ㆍ목신 드 자연물을 신격화한 것도 있다. 석가여래ㆍ염라대왕ㆍ태조대왕ㆍ공명 선생이 한 사당에 모셔진다. 화덕벼락장군ㆍ사해용왕신ㆍ풍신이 한 제사를 받는다. 한국ㆍ중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신까지 모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사람은 한국의 문화원류를 다시한번 되짚을 필요가 있다.
한국인을 신시베리아족으로 구분하는 견해가 있다. 몽골계 황인종인 우랄 알타이어족에서 알타이어족으로 갈라진 종족이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이견이 있긴 하다. 아무튼 알타이어족은 몽골족의 전파와 엇비슷하게 세계로 뻗어나간다.
유럽으론 흑해와 스탄디나비아 반도ㆍ지중해의 터키에 이른다. 베링 해를 건너 남북 아메리카로 뻗어 나갔다. 아시아에서 알타이어족은 시베리아ㆍ요녕을 거쳐 지금의 한반도로 들어온다. 그것이 조선과 부여ㆍ삼한을 이어 삼국으로 연결되는 반도의 원주민이다.
또 한 줄기 아시아에서의 이동은 중원과 산동성을 거쳐 반도로 유입된다. 그것이 동이족의 흐름이다. 동이족이전에는 이족이라 불렀던 이 종족은 중국에서 알타이어족을 지칭한 말이다.
동이는 중국으로 들어온 수렵인종이었다. 활을 잘 쏜다해서 이夷라 했다. 사람과 활이 합한 글자이다. 동은 동쪽ㆍ벌판ㆍ새의 뜻을 가진다. 옛 한국 말에는 동쪽과 벌판과 새가 모두 새였다. 중국어로 표기하면서 동이 되었다.
동이족은 까만 새옷, 즉 오의烏衣를 입고 태양에 제사를 지냈다. 까만 새는 까마귀이다. 그 동이족은 태로 복희씨ㆍ염제 신농씨ㆍ황제 헌원씨의 삼황 신화시대에서 이미 중원을 무대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렵ㆍ목축ㆍ농경에 이르는 고대세계의 주도세력이 이족, 즉 동이족이었던 것이다.
순임금은 동이족이었다. 상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다. 상나라가 망하자 그 유민은 주周ㆍ초楚ㆍ송宋ㆍ연燕ㆍ한韓 그리고 조선으로 흩어진다.
중국의 토착민 복장이다. 토착민이라, 화하족이 아닌가 보다. 그리고 머리에 새 깃을 꽂았다. 새사람 아닌가.
동이의 기자箕子는 반도에 먼저 들어온 알타이어족을 융섭한다. 기자는 기산箕山, 즉 태양산과 같은 기箕자를 쓴다.
산신신장도山神神將圖는 비빔밥처럼 한 그릇에 놓여진 이질적 문화를 보여준다. 동진보살과 신장ㆍ산신ㆍ용왕 혹은 용신이 하나로 엉켜 그려진 그림도 있다. 불교와 토속신앙이 습합되어 있는 경우이다.
동진보살은 모든 신장들의 우두머리이다. 주위에 신장들이 둘러싸기도 한다. 때로 관음과 용신도 그려진다. 영락없는 불교의 소재이지만 그런 그림이야 불화의 독차지는 아니다. 무당의 신당에서도 발견되는 것이 보살신장도이다.
산신도는 보통 호랑이와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를 그린다. 그런데 그 뒤에 시녀들이 그려졌다. 산신 할아버지에게 시중을 드는 시동이라 해도 엉덩이에 눈이 갈 텐데, 시녀들이라... 이상하지 않은가. 시동이나 시녀들이 산신 혹은 신선의 가르침을 받아 도통을 해t다는 이야기는 없다. 결국 노력봉사하고 얼굴만 팔린 셈이다.
그렇다면 왜 시동이나 선동, 혹은 시녀일까. 그 원형 중에 하나에 서왕모가 있다. 세 마리 파랑새 삼청조가 후대에서는 서왕모를 그리는 시녀로 그려졌었다. 인격적으로 대우받기 위한 배경이 아니었다. 무속에서야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격은 어디서나 같다.
무속화에서 용신이라 하여 그려진 그림은 관음보살일 수도 있다. 불화에서 관음은 손에 정병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다. 그 지물이 바뀌었을 뿐 자세와 상호와 의습이 똑같다. 손에 든 것은 사슴 뿔, 다른 말로 하면 녹용처럼 보인다.
불화에서는 불교의 교리에 맞지 않는 지물은 허용되지 않는다. 불화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불화공, 즉 금어의 수련은 철저히 수도와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다. 금어가 그리는 것은 그림이라기보다 신앙이다. 여기에 부처의 상호와 보살ㆍ신중 등이 모두 격식에 맞아야 한다. 색채와 안료 등도 철저히 규제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빔밥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아직도 장사집에는 빕을 비벼 먹으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물에 말아 먹어도 타박이다. 그거야 장삿집 이야기가 아닌가. 상놈들이야 평생 재수가 있어본 일이 없으니 재수가 무슨 문제이며 비빔밥에 재수가 무슨 상관인가.
꽁보리밥에 신 무김치ㆍ고추장 푸욱 퍼 넣고 밭에서 금새 따온 상추랑 쑥갓 넣고 참기름 한루 부어 푹푹 쓱쓱 비벼서는 입이 미어져라 먹어도 그게 어디 흉인가. 그렇게 민초는 살아왔다.
우리가 민화라 불렀던 그림은 민초의 삶처럼 그렇게 편한 그림이었다.
산신신장도
호구아씨라 했다. 휘장을 둘렀다. 시녀들이 둘 옹위한다. 서왕모에게도 시녀가 있었다.
삼청조는 머리가 빨갛고 눈이 까만 맹금이다. 서왕모에게 날고기를 제공했다. 그런데 시녀로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관음보살이 용을 타고 녹용을 들었다? 정력제를 봉헌하여 환심을 사려는 모양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해석해도 누가 불평 한마디 않는다.
오방신장도五方神將圖는 다섯 방위를 지키는 신장을 그린 그림이다. 오방이란 동서남북과 그 중앙이다. 신장이라 규신을 쫓는다. 그래서 이 그림은 귀신처럼 그려졌다. 귀신보다 무서워야 귀신을 쫓을 것이 아닌가. 한 발을 들고 합장을 하는 신장, 빨간 도끼와 파란 칼, 초록색 도끼와 창 등을 들고 있다. 신장이 다섯이라 오방신장이고 각각 역할과 이름이 있다.
동청제ㆍ서백제ㆍ남적제ㆍ북흑제와 중황제이다. 그런데 모든 신장들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색깔로 구분된다거나 지물ㆍ역할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짬뽕이다.
오방신장도 중에는 무장ㆍ문신은 물론이고 가발 쓴 신장이 등장한다. 무수 보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창칼을 들고 있기도 하고 동진보살 같기도 한 신장도 있다.
때로 창칼을 든 무관과 함께 할아버지가 그려지기도 한다. 오방색 즉 청백적흑황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방위와 연결되지는 안는다. 그러나 오방신장도는 기본적으로 다섯방위와 다섯 색으로 대표되는 오방사상을 담고 있다.
오방사상에서 나온 것이 오방신장이요, 사령사신이다. 사령은 용봉구린이다. 오방사상에 보다 가까운 것이 동청룡ㆍ서백호ㆍ남주작ㆍ북현무이다. 사령사신에서 가운데 상징이 없는 것은 중원이 세계의 중심이요ㆍ인간의 삶터라는 인식 때문이다.
오방사상은 황제와 순임금에게서 발견된다. 황제는 관원을 임지로 보낼 때 오색토를 하사했다. 방위마다 색이 달랐다. 동청 서백 남주 북흑 그리고 중앙에는 황토를 하사햇다. 황제는 헌원씨이다. 씨는 씨족 혹은 부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황제는 별명이다. 누런 임금이라는 뜻이다.
누를 황=빛날 황=빛 광으로 예부터 중원에 사는 종족에게 태양은 누런 색으로 생각되었다. 황사때문이었다. 황사를 경험하지 않는 종족에게 태양은 흰색이었다. 결국 황제는 태양과 동등한 신격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수렵목축문화는 알타이어족이 중국대륙으로 이목하던 신석기시대였다. 알타이 문화의 태양숭배사상이 황사 아래서 만든 태양신을 황제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순임금은 오악에 제사를 지냈다. 동태산ㆍ서화산ㆍ남형산ㆍ북항산 그리고 중숭산이다. 순임금은 마르고 닿도록 반복하지만 동이족이다.
오방신장도
오악이라 중국에 있다. 맞는가. 중국에는 주인이 없다. 중원을 차지하면 주인이다. 오악이 만들어지던 시절 중원의 주인공은 이족이었다.
제준과 오색조 즉 봉황이다. 제준은 태양이다. 새처럼 그려졌다. 그리고 새들이 따른다. 새임금인 모양이다. 조류숭배사상과 태양숭배사상은 상고시대 동일한 것이었다.
만법통일도萬法統一圖에는 인의의 상징인 공자와 자비의 상징인 석가가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박애를 대표하는 기독이 그려진다. 기독은 예수를 말한다. 민화 혹은 무속화에서 예수가 등장하다니, 희귀한 일이다. 18세기에 처음으로 김대건이 영세를 받았으니 그림을 그린 연대가 오늘날에서 그다지 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법통일이라니 유교ㆍ불교ㆍ기독교로 인지되는 세계의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라는 의미인 것 같다. 한국인은 조상의 제사를 지낸다. 초파일에는 절에 간다. 크리스마스에는 구제품 타는 재미에 교회에 간다.
종교와 연관된 이런 경험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나 둘 쯤 있게 마련이다. 한국인에게 종교라는 것은 편리한대로 의탁할 수 있고 필요하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엉겹결에 나오는 말은 ‘아이고 하느님’이고, 죽을 고비에는 ‘어머니’가 신앙이었다.
한국인에게 만법은 하나였다. 문화사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 수메르ㆍ바빌론ㆍ메소포타미아ㆍ에트루리아에서 알타이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원류에 황인종 혹은 검은 머리여수의 몽골족이 있으며 알타이어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세계에 퍼져 나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불교ㆍ유교ㆍ기독교는 하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신화적인 접근과 유물 유적의 확인에서 수긍할만한 논리가 전개된다. 이를테면 성경의 흑암Tehom는 바빌론 신화의 큰 뱀Tiamat의 번역이다. 복희끼는 뱀 꼬리를 가졌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해 뜨는 동방이 나무목木방이라는 논리와 일치한다. 천사K'rubim는 인도 신화의 금색조Garubin,Garuda와 근원이 같다.
노아의 홍수 신화는 시베리아 신화의 나마, 바빌론 신화의 우트나피시팀Utnaphshtim, 길가메슈Gilgamesh의 신화와 일치한다. 노아의 홍수 때 날려 보낸 까마귀는 알타이 신화에서 태양의 상징이었다. 미트라교에서는 길 안내자였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왕국의 시조를 안내한 일관이었다. 북구 신화의 오딘을 인도한 것도 까마귀였다. 그렇게 세계의 종교는 신화로 통일되어 있었다.
만법통일도
스님은 말이 없다. 어느 누구도 돌하루방을 하필 절 뒤 애기불상과 모형탑 사이에 두었는지 묻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넓다.
무당의 부채에는 신토불이라는 말이 낯 뜨거울만큼 뜨내기 귀신이 많다. 그럴까. 우리 귀신이니까 우리 굿판에 강림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종교란 비빔밥이나 짜장면 같은 것이었다. 비빔밥은 아마도 빈궁했던 우리 조상들이 적은 양이나마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혹은 어려운 세월에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딱 먹고 잽싸게 일터에 가야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쨤뽕은 중국 음식에 일본 말이 붙었다. 잡동사니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것이 한국에서 자장면 다음으로 인기있는 중국 음식으로 통한다. 자장면은 그 푸짐한 먹음새에서, 짬뽕은 얼큰한 매큰한 맛과 양에서 한국인의 식성과 어울렸을 것이다.
결국 중국음식이건 일본 음식이건 이 나라에 오면 모두 한국음식이 되어 버리는 것이 이 나라 백성의 왕성한 식욕과 엄청난 식성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지정학적이고 체질적인 풍토에서 나온 비빔밥은 민족적인 것이다. 우리 땅에 나오는 신토불이 농산물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서로 넣어 비비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비빔밥이라 했다.
최초로 시베리아를 건너온 뷰리아트계 몽골인들의 알타이문화와 나중에 중원을 통해 들어온 동이문화 역시 우리의 것이었기에 비빔밥에 함께 비벼질 수 있었다.
짬뽕은 아예 우리 것이 아니더라도 한 그릇에 넣고 지지고 볶으면 우리 것이 되어 버렸다. 무속이나 신교 등으로 불리는 우리의 신앙에 불교나 유교ㆍ기독교가 들어와도 결국은 우리 뱃속에서 똑같이 소화되었다.
한국 고추나 중국고추, 나아가 멕시칸 고추라도 고추이기만 하면 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었다. 그것은 고추라는 공통분모의 위력이었다. 불교ㆍ유교ㆍ기독교들이 우리 문화의 원류에서 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의 열매였던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양념이 아니라 원자재를 바꾼 일이 없다. 같은 배추라고 양배추로 김치를 담지 않는 것, 그것이 한국인이었다. 그것이 민족성이리라.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형이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한 민족에게 문화나 신앙ㆍ종교 등은 매우 굳건한 뿌리가 있다. 그런 배경에서 그려진 것이 민화요ㆍ무속화이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뿌리 위에 외부적인 문화와 신앙과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한국인은 비빔밥을 즐겨먹고 짬뽕을 우리네 음식처럼 먹는다. 한국인은 잡식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새김질을 하여 이 땅에 내놓는 것은 한국인의 똥이다. 외부의 비료 없이도 농작물을 성숙시킨다. 신토불이라, 우리 몸에 우리 농산물이라 한다. 토종 물고기나 생태계를 보호하자면서 불루 길이나 황소개구리를 때려잡자고 한국인은 팔을 걷어붙인다.
그런데 어떤 것이 우리 것인가. 그 우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켜나가면 우리의 원형이 나온다. 그 원형에서 만법은 하나이다.
서낭당이 없어진다. 신세대는 이제 짚북데기에 빌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낭당에 비는 마음의 기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원형이라는 것이다.
15. 저승이 어디메뇨
하늘 도장의 그림이라. 천인화라는 이름 아래 살펴본 민화의 하늘사상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죽음이다. 한국인의 죽음, 그것이 문제다.
산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 사후의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있다. 장례의식과 장례방식이다.
티베트는 조장鳥葬를 한다. 새가 뜯어먹기 좋도록 시체를 바스러뜨린다. 백골이 선연하면 죽은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는다. 인도에서는 갠지스 강에 시체를 버린다. 역시 독수리가 뜯어먹는다. 부자들은 가트라는 이름의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다. 덜 부유한 사람들은 태우다 나무가 모자라면 시체의 뼈를 부러뜨려서 불쏘시개처럼 불안에 쑤셔 넣는다.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든다. 영혼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육체가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벽화를 그렸다. 영혼이 살고 있는 곳, 죽은 사람이 가는 하늘나라를 지상에 남은 사람들이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장례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전재로 한다. 모든 종교는 내세와 사후의 안락을 내세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인은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다.
분리의례라는 것이 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따로 떼어 놓는 의식이다.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한다. 구공을 막고 손발을 묶는다. 사후강직死後强直에서 풀린 시체가 살아있는 사람을 쳐 생사람 잡지 못하게 함이다.
관은 벽사의 나무인 소나무를 쓴다. 관을 못질할 때는 대나무 못을 쓴다. 녹이 슬지 않는다는 효용도 있지만 대나무에 벽사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자는 사邪, 즉 삿된 것으로 취급당한다.
입관할 때 관 위에는 빨간 천을 덮는다. 죽은 귀신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함이다. 그 위에 황토를 덮는 이유는 삿된 것을 정화하려는 목적이 있다.
한국인은 이렇게 죽은 자를 삶에서 떼어놓는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는 내세가 없는 것일까.
한국인은 산에 육신을 묻는다. 산은 하늘사다리이다. 영혼이 한걸음이라도 하늘에 빨리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독수리에게 시신을 먹이는 티벳의 조장터이다. 뒤쪽에서는 새에게 죽은 육신을 제공한다. 앞에서는 향을 피운다. 그래서 영혼이 새의 인도를 받는다. 새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덕흥리 고분벽화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이다. 물론 고분 벽화는 조선의 민화가 아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 민화의 사생관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조선에 이르러 유교의 영향으로 의식의 내면으로 숨어 들어간 한국인의 내세사상이 고구려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좌정하고 주위에 13군 태수가 옹위하고 섰다. 생전의 생활이 그러하였으니 죽은 후에도 그러하리라는 추측과 그러하기를 바라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욕방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렇게 성대한 분묘가 꾸며지고 그림이 그려졌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의 사생관이 담겨 있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영혼은 어딘가에서 생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리라는 믿음이다. 그 어딘가가 과연 어디일까.
고구려 고분벽화는 오늘날 갈 수 없는 땅에 있다. 그래서 고분벽화를 보려면 중국 측 집안 등에 있는 벽화를 보거나 북한에서 나온 고고학술총서, 혹은 고구려벽화 재현전 등을 통해 추측해야 한다. 그 고분 벽화에 그려진 그 어딘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 자가 갈 수 없는 곳, 그러면서도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곳, 그것이 고구려인들에게 벽화를 그리게 했을 것이다.
안악 3호분의 남자 주인공은 위엄있게, 여자 주인공은 부잣집 마나님답게 당당하게 그려졌다. 시종 무관은 공손하면서도 용맹스럽게 묘사된다. 뛰어난 동세와 성격묘사이다.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성숙되어 온 벽화 문화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고구려의 빼어난 솜씨는 고려 수락암동 벽화ㆍ둔마리 벽화 등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고분 벽화의 맥은 끊어지게 된다. 장제가 바뀌기 때문이다. 유교의 영향권에서 한국의 장제는 목곽 토분으로 정형화한다. 상여를 만들고 꾸미고 장식할망정 무덤 속이나 관에 치장을 하지 않는 것이 조선의 장제였다.
그렇다면 고구려 벽호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유교 이전의 세계로 가볼 필요가 있다. 유교 이전에 불교가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사람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덕흥리 고분 벽화
같은 덕흥리 고분벽화이다. 고러겨 고분이 석실분인 까닭은 천장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누워서 볼 수 있는 하늘나라를 그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신라인은 무덤에 사후의 삶을 위해 흙인형을 파묻었다. 왜 흙인형인가 동이의 순장 대신 흙에서 태어난 인간을 상형한다.
시왕심판도十王審判圖는 저승에 있다는 10위의 대왕들이 죽은 자를 심판하는 그림이다. 죽은지 49일이 되는 날까지 죽은 사람은 차례로 시왕들에게 7일마다 일곱 번 심판을 받는다. 생전의 선업ㆍ악업에 따라 극락ㆍ지옥ㆍ화생이 결정된다.
시왕도는 근엄한 표정을 하고 눈을 부릅뜬 시왕을 그린다. 죄인을 다스리는 시왕답다. 홀을 드는 것은 엄정한 판관의 위엄을 상징한다. 얼굴이 시커멓게 그려지는 것은 명부, 즉 죽은 자의 세계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들고 있거나 손밑의 명부에는 죽은 자의 죄상이 적혀 있다.
전통 불화에서는 시왕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진광대왕ㆍ제2초강대왕ㆍ제3송제대왕ㆍ제4오관대왕ㆍ제5염라대왕ㆍ제6변성대왕ㆍ제7태산대왕ㆍ제8평등대왕ㆍ제9도시대왕ㆍ제10오도전륜대왕이 그려진다.
그러나 시왕은 심판하는 죄목과 관장하는 지옥 및 형벌ㆍ그리고 변화되어 나타나는 이름이 각기 다르다. 불교의 수행과 연결되어 당시 인식과 풍습을 반영한다.
지옥은 칼날 산ㆍ끓는 물ㆍ얼음물ㆍ칼 나무 등이 있는 곳이다. 죄인은 혀 빼기ㆍ독사에 물리기ㆍ톱질당하기ㆍ뼈 바르기ㆍ쇠판위에 눕히기ㆍ뜨거운 바람 길이나 어둠 속에 앉히기 등의 고통을 당한다. 물리적 고통들이다.
죄목 역시 당시 세태와 연관이 있다. 소박한 송사이다. 어른 말에 말대답하면 혀를 빼는 지옥에 간다. 역적ㆍ살인ㆍ강도ㆍ고문ㆍ도적질을 하면 독사로 몸을 감는 지옥에 간다. 장사치가 도량형을 속이면 톱으로 뼈를 켠다. 혼인을 못하면 바람 길에 앉히는 지옥이 기다린다. 남녀 구별을 몰라 자식을 못 낳으면 어둠 속에 두는 지옥행이다.
공덕이 쌓이면 지옥행이 면제되기도 한다. 역시 소박한 농경시대의 덕목이다. 깊은 물에 다리 놓는 월천공덕ㆍ배고픈 사람 밥 주는 급식공덕ㆍ목마른 사람 물 주는 급수공덕ㆍ벗은 사람 옷 주는 착복공덕 등이 그러하다.
민화의 초기 형태를 우리는 감로왕탱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감로왕탱화는 목련존자가 우란분재를 베풀어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미줄에 매달린 어머니가 발밑에 매달린 다른 아귀들을 걷어찬다. 그래서 다시 아귀도로 빠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일곱 여래에게 열반의 즐거움ㆍ감로수ㆍ극락왕생을 준다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중단에는 극락왕생을 비는 성대한 제상을 차렸다. 하단에는 육도 중생을 그린다. 당시의 생활상 뿐 아니라 민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하여 흥미롭다. 고해라, 삶이란 죽음의 한 부분이라는 사상일까.
흥국사 감로왕탱화에서는 부처ㆍ중생ㆍ아귀가 둘이 아니라는 사상이 엿보인다. 중생이 사는 것이 바로 죽음을 향한 행진 아니던가.
‘처자! 어디 찻집에 가서 쌍화차 한잔 함세’ '흥, 엉큼한 녀석, 조선 시대에 무슨 찻집이 있어‘ 그러고 년놈이 수작질인 모양이다. 그러고 그러고 사는 것이 고해라는 뜻인가 보다. 시왕심판도의 부분이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이다. 모란수석병과 함께 장례의식에서 볼 수 있다. 모란수석병은 뒤집으면 백지병풍이 된다. 뒤쪽은 대개 흰 종이를 바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는 백지병풍을 둘러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산 사람들은 병풍의 뒤쪽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모란 병풍일까.
모란은 부귀, 수석은 장수를 의미한다. 그러면 죽은 자에게 부귀와 장수를 빌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해 짚신과 노자돈을 마련했던 것일까. 백지 병풍의 비밀은 감모여재도에 있다.
감모여재도는 ‘마치 옆에 계신 것처럼 느끼어 사모한다’는 뜻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신주를 모신 사당 그림이다. 신주란 귀신이다. 자기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선배다. 귀신 대신 모시는 위패가 신주이다. 옛 조상 구신들은 부르면 달려왔다. 막대기를 공중에 휘휘 저으면 귀신이 감겨들었다. 제수를 차리면 자기 몫을 챙겨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귀신이 많아지면서 자기 젯상도 찾지 못하는 귀신들이 생겨났다. 막대기를 정성 들여 깎고 이름을 써주자 귀신들은 자기 제사를 독식하게 되었다. 조상들은 흠향만 하고 자손들이 그 음식을 나눠 먹었다.
조상귀신들은 먹은 만큼 갚을 줄 알았다. 자손이 많아 다복이었고, 먹을 것이 많아 부귀였다. 제사를 지내려 성묘를 하러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신주에 절하는 것, 그것이 대가족 제도하의 평안이었다.
그래서 감모여재도에는 부귀의 모란, 평안의 병, 다손의 포도 등을 그린다. 앞쪽 젯상은 화려한 채색이고 사당 뒤 고목은 음울한 무채색이다. 이쪽이 이승이고 저쪽이 저승인 까닭일 게다.
그 사이에 문이 있다. 저승으로 통하는 문이다. 거기에 종이 신주, 즉 지방을 붙인다. 선고유인 무슨 성씨, 학생부군신위 등이다. 벼슬 못하고 죽은 유인과 학생에게 벼슬은 주는 것이다.
그래서 모란 병풍은 죽은 자를 향해 둘러져 졌다. 감모여재도는 화려한 채색으로 부귀장수의 상징을 그렸다. 살아 누리지 못한 부귀영화를 죽어서라도 누리라는 산 자의 기원이다.
이제 덕흥리 고분의 초상화와 감로탱화의 육도 중생, 모란 병풍과 감모여재도의 귀신들이 한결같이 산 사람의 기원과 송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귀신에 둘러 싸여 공생공사하는 것이 조선인이다.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오늘 살아 있는 자들고 역시 죽어 귀신이 될 것이니까다.
감모여재도
제사는 조상의 음덕을 빌어 우리를 확인하는 절차이다. 이어령은 우리를 ‘울 안에 있는 이’라 했다.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벼슬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 귀신 앞’이라 씌어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선비先妣라 한다. 인류를 창생한 여왜의 다른 이름이다.
한국인에게 내세사상은 하늘사상이다. 고분 벽화는 무덤 자체가 하늘나라이다. 영수서조는 하늘의 신령스런 짐승돠 상서로운 새가 이 땅에 내리는 것이고, 성수도는 하늘나라의 구중궁궐이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별자리로 비친다. 불교의 지옥도나 감로탱화는 죽어 우리가 거쳐야 할 세상이다. 감모여재도는 하늘로 향하는 문이다. 그 문 뒤에 저승이 있다. 상여 소리에 “대문 밖이 저승”이라 했느니 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 그림이란 바로 하늘사상을 담는 그릇이었다.
천시신명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 왕겸의 할아버지 환인이 ‘밝음의 근원’ 즉 태양이자 태양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우리 문화권에 전승된 태양숭배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궁전이란 동이족이 중심이 되었던 신화 시대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하늘 궁전을 지키는 영수와 서조 들은 동이족의 경전이라는 산해경의 주역들이었다. 용과 봉과 호랑이와 닭 등은 시베리아 문화권의 공통소를 간직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고스란히 가슴으로 느껴지는 상징들이다. 그것은 화하민족 혹은 오늘날의 한족의 것과는 전혀 다른 원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귀신을 만들고 쫓고 모시는 의식은 상고 시대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이 동이의 문화에 있다. 한족이 가져가 나름대로 개조를 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중국인의 벽사 상징들은 매우 합리적이다. 귀신의 합리성이 아니라 현실적 중국인의 합리성이다.
유교는 중국에서, 불교는 인도에서 이 나라로 전해졌다. 그러나 유교는 동이의 하늘사상을 조상 숭배로 바꾸었고 불교에는 알타이 신화와 문화의 원형이 스며 있다. 그렇다면 불교와 유교란 이 땅의 무식한 민중들에게 남의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겠는가.
결국 문화ㆍ예술ㆍ종교ㆍ사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망각하고 있었던, 때로는 생살을 베어내듯 잘라 버린 우리의 원형이 동양 세계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 옹골찬 문화를 지켜 온 것이 기층 민중이었고 민중의 삶과 한을 담은 그림이었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것이 무섭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일민족이고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을 모시는 유일 종교의 나라, 그것이 한국이라는 게다.
그 한국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하느님의 존재를 찾아나갈까. 그래서 땅의 이야기로 나아가기로 했다. 천지인에서 지의 세계가 기다린다.
동이 장군 치우는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다. 창과 방패 등 병장기를 만들고 황제와 싸웠다. 질린 황제는 치우 그림만 보고도 치를 떨었다. 치우 그림이 귀신 쫓는 시원이 되었다.
치우->처용->제용->제웅이 되었다고도 한다. 상여 앞의 악귀를 쫓는 방상시는 악귀와 귀신과 귀신 쫓는 귀신 류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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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호랑이가 귀신까지 먹는줄은 몰랐네요 ㅎㅎㅎㅎㅎ
저도 재미있어서 퍼왔거든요 ㅎㅎㅎ
기..인... 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정말로 희안한 글입니다
저도 끝까지 읽어보고 갑니다 ㅎㅎㅎ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