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트림 씬은 늘 존재해 왔다. 인간 내면의 파괴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욕구불만의 또다른 표현수단의 음악으로서 익스트림 뮤직은 존재 이유를 가진다. 초기 켈틱 프로스트와 슬레이어로 대표되는 이 씬의 지금은, 수많은 가지치기로 모습은 달리하고 시장은 작아졌을지언정 그 어두움과 파괴의 미학은 극단의 끝이라는 뿌리를 져버리지 않고 있었다.
고딕, 블랙, 데쓰 메틀로 크게 나뉘는 이 사악한 장르는 각각의 색깔을 분명히 하며 어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는 법. 그 세력의 대표주자를 제외하고는 비슷비슷한 곡 구성으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수많은 밴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너리즘을 부추기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쪽 계열이 가지는 파괴와 스피드 그리고 광폭함 만으로는 그 표현 영역에 있어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찾게 되는데...
클래시컬한 현악기를 도입 한다거나 일렉트로닉 테크노/인더스트리얼의 삽입 혹은 극단의 스피드에서 고삐를 늦춘 미드 템포의 견고하게 짜여진 스래쉬메틀화, 기승전결의 복잡한 구성의 프로그레시브 메틀과의 조우 등 그들이 배신이라고 까지 여길 만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서 씬의 생명을 유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다소 진지한 메시지를 주로 하는 데쓰 메틀에도 불어닥친 변화와 타협의 물결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데쓰메틀의 죽음의 향연을 모체로 하여 여기저기서 뽑아온 의외의 종자를 가져다가 교미 시켰는데, 멜로딕 스피드 메틀의 귀에 감기는 멜로디와 질주감, 거기에 데쓰 메틀의 파괴감, 찢을 듯한 스크리밍 (혹은 쇳소리로 갈아대는 그로울링) 을 버무린 멜로딕 데쓰 도 그 중 하나이다.
멜로딕 데쓰라고 불리우는 이 변종장르는 그야말로 익스트림씬의 이단이며 한편으로는 밀어부치기만하는 그저그런 수많은 아류에 식상해있던 매니아들에게 새로운 청량감을 안겨주는 단비같은 것이다. 물론, 익스트림씬의 골수 매니아들은 멜로딕 데쓰 라는 이 신장르를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인스턴트성 음악이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아마도 공격성이 다소 감소된 사운드 메이킹의 이유가 클 것이다.) 하지만 스래쉬 메틀의 대중화에 기여했던 메틀리카처럼은 아닐지라도 익스트림씬의 더 정확히 데쓰메틀의 사세확장이란 면에서 멜로딕 데쓰라는 이 변종 장르는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멜로딕 스피드 메틀 팬들에게 까지도 어필할 만큼 달짝지근한 흡수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앳 더 게이츠(At The Gates)와 카르카스(Carcass) 에게서 감지된 이 극단의 연주속에 스물스물 녹아있는 멜로디는 그들이 수명을 다한 후 다음 세대에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인 플레임즈(In Flames)와 다크 트랭퀼리티(Dark Tranquility) 라는 지금은 거물이 된 이 밴드들은 말 그대로 멜로디 데쓰 메틀이라는 장르를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웅장한 스케일에 고딕적인 성향까지 섭렵한 다크 트랭퀼리티, 휘몰아치는 듯한 스피드와 날카로움을 무기로 하는 인 플레임즈를 선봉으로 바로크적인 화려한 키보드가 전면에 나선 칠드런 오브 보돔(Children Of Bodom), 멜로디에 멜로디를 강조하는 아치 에너미(Arch Enemy), 비교적 정통성에 충실한 소일워크(Soilwork)와 테크닉적인 칼마(Kalmah) 까지, 멜로디를 기본으로 새로운 양념들을 첨가시켜 나름대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며 지금도 휘발유에 불붙듯 걷잡을 수 없이 많은 밴드들이 난립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거물급 신인밴드가 출사표를 내밀었다. 그것도 익스트림 씬의 본고장인 북유럽이나 서구 변방이 아닌 아시아에서...
라우드니스(Loudness)와 앤썸(Anthem)으로 동양권 락 음악의 서구화 혹은 세계화에 든든한 다리를 놓았던 일본의 락 음악시장은 우리의 그것보다는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비교적 다양한 장르와 꾸준한 매니아 층이 공존하는 비옥한 토양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 별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멜로딕 스피드 메틀이나 에픽 메틀이 여전히 차트를 누비고 있는 것도 이와 다름 아니다. 게다가 일본의 멜로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멜로딕 데쓰 에도 자연스레 투영되어 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했다. 그렇지만 자국내 밴드에게 인색한 것은 우리내 실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지라 일본의 밴드들 역시 바닥과도 다름없는 인디 씬 에서부터 정식적인 수순으로 차츰 한 걸음씩 밟아나가야 한다. 그렇게 차츰 커리어를 쌓아나가며 이제야 비로소 세계무대를 두드리는 밴드가 하나 있었으니, 그 것이 바로 여기 소개하는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Blood Stain Child), 멜로딕 데쓰의 또 하나의 기린아 이다.
짧게나마 그들의 바이오그래피를 살펴보면, 99년 6월 비젼 퀘스트(Vision Quest) 라는 밴드 명으로 오사카의 고교생 스쿨밴드로서의 그들은 멜로딕 파워메틀을 카피해나가던 중이었다. (비젼 퀘스트의 라인업 중 지금의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를 구성하고 있는 멤버로는 Ryu<g>, Ryo<b>, Violator<ds>, Aki<k> 이다.) 그렇게 곡 작업과 공연에 매진하던 중 하이톤의 보컬리스트가 함량 미달이라는 팀 내의 결정으로 그와 결별하고 베이스에만 매진했던 Ryo 로 하여금 보컬을 겸하게 한다. 이 때부터 칠드런 오브 보덤 류의 멜로딕 데쓰 메틀로의 업종 변환과 동시에 사운드 보강이라는 측면에서, 잭 와일드의 플레이를 흠모하는 기타리스트 Daiki 를 영입하게 된다. (물론 밴드명도 이때부터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로 개명한다.) 비젼 리퀘스트 시절의 몇 곡도 새 밴드에 맞게 다듬고 틈틈이 써내려간 새 곡들을 추려 작업한 데모테잎이 오사카의 헤비메틀 전문 라디오 FM에서 많은 리퀘스트를 받으며 인디씬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그들의 행보를 눈여겨 보던 이 프로그램의 PD 인 Wada Makoto 가 익스트림 전문 레이블을 발족하려던 시기와 맞아떨어져 Captain Rock을 출범하면서 1호 밴드가 되어 첫 데뷔 앨범을 갖게 된다.
총 7곡이 수록된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의 첫 앨범에는 각기 다른 멤버들의 고른 취향과 기질이 그대로 배어있다.
유러피안 스피드 메틀 풍의 전형적인(유려한) 멜로디와 료의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는 고통에 찬 외침으로 시작되는 동명 타이틀 트랙인 “Silence of Northern Hell” 이 터져나오면 그 서슬퍼런 독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얼마 전 뇌종양으로 사망한 척 슐디너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하는 료의 스크리밍은 그 깊이에 있어서는 모자란 듯 보이지만 리드미컬하게 라인을 타는 감각은 뛰어나다. 비젼 퀘스트 시절부터 다듬어 온 이 곡은 질주하는 가운데 같은 라인을 밟아나가는 키보드와 여성 소프라노 코러스가 그 묘한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작부터 흡사 메이헴(Mayhem)이나 엠페러(Emperor) 스타일의 심포닉 블랙메틀을 연상시키는 “Crimson Symphony”에서는 이런 어두운 취향이 더욱 구체화된다. 이 곡에서는 무엇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곡 전개가 눈에 띄는데 블라인드 가디언의 서사시적 구성을 좋아하는 료와 크래들 오브 필쓰(Cradle Of Filth)와 딤무 보거(Dimmu Borgir)의 심포닉 블랙메틀의 드라마틱한 전개에 눈독들인 바이올레이터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어지는 세 번째 곡, “Under The Sun Of Grief” 에는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두드러진다. 특히, 바로크 메틀의 작법에 관심이 많은 다이키가 주도하는 멜로디라인은 지극히 일본색을 띄며 같은 장르의 음악이라도 연주자의 출신성분이나 문화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것 또한 음악을 듣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듣자마자 누구나 알아차릴 네 번째 곡, “Legend Of Dark” 는 영락없는 칠드런 오브 보덤에 대한 오마쥬이다. ‘너희가 하는건 우리도 할 수 있다.’ 는 배짱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이 곡에서는 적재적소에 브레이크를 거는 섹션도 시원스럽고 기타와 키보드의 유니즌 플레이가 만들어내는 힘찬 드라이브감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앞서도 말했던 인디 씬에서부터 키워왔던 키보디스트 아키의 역량이 상당히 출중하다는 것인데, 주거니 받거니 마디를 나누어가지는 기타와의 솔로 배틀에서도 드러나는 테크닉 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거니와, 한 곡 내에서 톤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곡의 맥을 짚어가는 것은 다른 멜로딕 데쓰 메틀 밴드와 차별을 가지는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의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장미가 물씬 풍기는 “Requiem”은 데모테잎에도 수록되었던 곡으로 더욱 정돈되고 풍부해진 믹싱으로 거듭났으며 그에 걸맞게 료의 보컬도 보다 명확한 스크리밍과 공격적인 색깔을 띄게 되었다.
키보디스트 아키의 섬세한 터치가 유난히 돋보이는 곡 “King Of The Sacred Sword”를 지나 세상에 대한 지독한 조소를 보내는 "Infernal World"를 마지막으로 그 서슬퍼런 침묵의 외침을 마감한다.
앨범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가지런한 안정감보다 넘쳐흐르는 자신감이 지배적이다. 그만큼 첫 메이져 데뷔 앨범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어차피 트래디셔널 송이 아닌 다음에야 오리지널리티를 따진 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테고, 다만 익스트림 메틀의 시장이 비교적 협소한 아시아에서 그 또다른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는데 의를 둘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양인들의 그것과는 또 다른 동양적인 파괴미학을 멜로딕 데쓰 라는 미명하에 펼쳐나갈 그들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것은 비단 이 돈 안되는 음악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블러드 스테인 차일드 본인들 뿐만 아니라 지금도 클럽 생활을 전전하며 나름의 열정을 태우고 있는 수많은 미완의 밴드들이 바라는 그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