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兵隊의 發祥地 "德山"
鎭海市의 동쪽 天子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海兵隊의 發祥地인 德山은 소죽도와 대죽도가 있는 행암만(진해항) 동쪽 연안 일대의 조그마한 마을로서 이 마을 안(행암만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日帝時代에 건설된 약 20만평의 비행장 부지가 곧 해병대의 창설 당시의 해병들의 요람지로 제공되었던 그 유서 깊은 터전이었다.
이 德山은 영기어린 天子峰의 서쪽 기슭 마을일 뿐아니라 특히 天子峰 일대에서 어떤 大將軍이 나서 백만군을 육성할 때 그 訓兵들의 말에 물을 먹였다고 하는 傳說을 지니고 있는 將川洞을 바로 이웃(남쪽)에 두고 있는 마을이란 점에서 이 마을에서의 해병대의 발상은 우연인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닌 그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1949년 해병대가 창설될 그 당시 이 德山에는 정확한 통계 숫자는 알아 볼 길이 없으나 다만 德山洞의 원주민인 권수상 씨(61세 1980년)의 말에 의하면 현 가구수 및 동민의 절반 가량인 300세대의 가구수에 약 1,500명 정도의 동민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德山洞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官舍村, 즉 일본 해군 장병들과 군속 및 노무자들을 위해 건립한 관사촌에는 대부분이 외국에서 귀환한 귀환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海兵隊가 주둔하고 있던 그 德山 비행장은 일제시대에는 일본 해군의 항공대가 점유하고 있었고 8.15 광복 후에는 미군이, 그리고 1947년도 경에는 한 동안 한국 육군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해병대가 창설된 그 당시의 녹슨 비행장 기지내에는 갈대와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그 기지내는 그대로 야외훈련장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
海兵隊의 發祥塔
해병대의 發祥地인 경남 진해시 德山洞에 위치하고 있는 德山비행장(사진 중앙에 비행장 활주로가 남북으로 보이고 있으며 활주로 주변은 Golf장(9 Holes)으로 되어 있음) 사진의 북쪽이 진해시이며 오른쪽 방향에 天子峰이 위치하고 있으며 왼쪽에 행암만이 검게 보이고 있음. 發祥塔은 사진의 중앙 위쪽에 보이는 동산에 위치하고 있음.
특히 基地의 서북쪽의 오늘날 海兵隊 發祥塔이 세워져 있는 그 43고지(동내산)는 해병 1, 2기생들이 너무나 자주, 빈번이 오르내려서 그들의 영원한 꿈 속의 훈련장으로까지 느끼게끔 하게 하였다.
이 發祥地에서 심신 공히 성장하고 있던 해병들은 또한 고요한 행암만의 물결을 헤치며 해병으로서 마땅히 익혀야 했던 戰鬪水泳의 연습을 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는 흔하기만 했던 점복을 따서 반찬으로 해먹기도 하고 또한 때로는 오락회의 안주거리로 삼기도 했었는데 그들의 숙소변에는 다정한 자장가와도 같은 행암만의 파도소리가 언제나 쉴새 없이 찰싹이고 있었다.
創設된 후 약 9개월 간 주둔했던 그 德山비행장, 해병대가 그 유서 깊은 德山땅을 떠난지도 31년(1980년) 전의 옛일, 그 사이 세월은 많은 것을 변모케 하여 오늘날의 德山과 將川 일대는 크고 작은 공장들과 그것들에 부수된 주택촌 등으로 31년 전의 옛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이 사실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더 변해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나 확실한 것은 海兵隊의 發祥地란 그 뿌리 깊은 인연만은 鎭海의 동천에 우뚝 솟아 있는 그 의연한 天子峰의 모습과 함께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다.
지난 1964년 해병대에서는 창설 15주년을 맞이하여 비행장 기지내에 있는 그 동내산(43m고지) 위에 [해병대 처음 세운 곳]이라고 새긴 發祥塔을 세움으로써 海兵史의 淵源을 이루는 그 영영한 인연을 記念하고 있다.
오늘의 해병들은 이런 선배들의 낭망적이고 또 고귀한 피와 땀의 흔적들을 잊지말고 그들이 못다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첫댓글 해병대 교육 훈련 - 천자봉 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