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었다
아지랑이가 천산산맥을 일렁이게 했다
천산산맥은 아지랑이의 일렁임 속에서
산색을 바꾸며 사내들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사내들은 천산산맥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낼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갈대가 지천으로 널렸다면 볍씨를 받아 줄 땅이다
사내들은 천산산맥의 보랏빛 산색을 보며 볍씨를 골랐다
굶주림 속에서도 볍씨만은 지켜왔던 사내들은 미소를 지었다
사내들의 미소 속에 모든 내일이 있었다
이동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유랑이었다
마지막으로 부슈토베의 토굴을 떠난 사내가 민족학교 교사였다
그는 예까쩨리나의 이사짐을 챙겨 함께 부슈토베 언덕을 내려갔다
1938년 4월 9일이었다
부슈토베에서의 182일은 죽음과의 동거였다
죽음은 언제나 잠자리에 함께 들었다
죽음이 먼저 눈뜨는 날은 공동묘지에서 사자 밥을 받았다
죽음보다 먼저 눈뜨는 날은 토굴에서 아침 햇살을 맞았다
죽음의 땅 부슈토베는 사내들에게 통점으로 남아 오래도록 아플 것이다
그 통점 속에 볍씨가 자랄 것이고 백일홍이 터질 것이다
1938년 봄, 2차 이주가 시작되었다
2차 이주는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강제이주 정책은 거칠고 치밀하지 못했다
강제이주 정착지를 마련하지 못한
카자흐스탄 내무위원회는 겨울 난후 한인들을 재배치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또 다시 짐을 꾸렸다
유랑의 끝은 언제나 새로운 유랑의 시작을 말했다
재배치를 위한 2차 이주가 강제이주의 끝은 아니었다
부슈토베의 사내들도 이삿짐을 꾸렸다
사내들이 이삿짐을 부릴 곳, 그 곳은 새로운 숨결이 일기 시작했다
갖 세운 벽채가 새 숨결을 내쉬기도 하고 폐가가 새 숨결을 내쉬기도 하고
창고가 새 숨결을 내쉬기도 하고 마구간이 새 숨결을 내쉬기고
오래된 사원이 새 숨결을 내쉬기도 하고 옛 감옥이 새 숨결을 내쉬기도 했다
사내들이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숨결을 밀어 넣으며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이 밀려 왔다 새로운 공간은 사내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아낙들은 그 공간을 밥 짓는 냄새로 채웠다
공간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혹은 노인들의 신음소리로 차기도 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사내들의 땀내로
채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내들은 해동이 되지 않은 부슈토베의 습지로 나갔다
잔설이 남아 있는 벌판에 수로를 낼 자리를, 못자리를 할 자리를,
농로를 낼 자리를 어림하며 웃었다 검은 얼굴들의 천진스런 미소였다
사내들은 웃음은
살아남아 해토를 볼 수 있다는 안도, 살아 있음의 충일 함이었다
검은 얼굴들이 환하게 변하고 있었다
천산산맥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천산산맥을 넘어오는 봄바람의 부드러운 옷깃이 보였다
현지인들은 친절했다
그들은 원형식탁으로 사내들을 불렀다
원형식탁은 사랑이었다
원형식탁은 평등이었다
원형식탁은 작은 축제였다
무엇이던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 원형식탁이었다
그러나 벼농사만은 말렸다
습지이기는 해도 우슈토베의 지하수는 염분이 많았다
염분 때문에 벼농사는 불가능 할 것이라고
헛수고일 것이라고
현지의 집단농장 친구들은 손사래를 저었다
사내들은 해보지 않고는 포기 할 수 없었다
적당량의 염분은 오히려 벼의 성장을 도울 거라고
지켜보라고 큰 소리쳤다
습지가 농토로 바뀌고
수로가 놓이고
농로가 뚫리고
기적처럼, 아니 기적의 볍씨가 자라고
햇빛이 구릉을 넘어와
물 댄 논에 은빛으로 쌓였다
그것으로 사내들은 풍요로웠다
유월의 우슈토베는 해 붉게 달아오르는 때,
사내들은 들판에서 꿈을 꾸었다
사내들의 발목은 튼실했다
들판은 말없는 축복이었다
들판은 하늘을 낳는 여인이었다
들판은 사내들의 운명이 바뀌는 손금이었다
손금 하나하나에 사내들의 생각이 숨어 빛났다
손금은 들판을 살찌우는 수로였다
예카테리나는 규칙적으로 오는 진통을 견디고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가위를 확인 한다
진통은 주기가 짧아진다
온 몸의 뼈들이 한 간씩 물러나며 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온다
그녀는 수건을 입에 문다
비 오 듯 하는 진땀이 뼈마디를 적시고 방바닥을 적신다
한 집에 살고 있는 민족교사 아낙이 들어선다
아직 멀었어 더 아파야 나와
예카테리나는 물고 있던 수건을 뱉는다
아직 더 아파야 나와요?
그럼, 양수가 터지고 몸이 천 갈래 만 찢기는 통증이 와야 나와
예카테리나는 눈을 감는다
보리스의 얼굴이 떠 올랐다
네 말이 맞다 나는 흑빵과 나를 바꾼 거였어
뭐라고 했니? 뭘 바꿨어?
아낙이 물었다 아낙의 물음은 힐난으로 들렸다
그 길 밖에 없었어 살아야했으니까
살아야지 그럼, 아이 잘 키우며 살아야해
예카테리나는 다시 수건을 물었다
새벽에 왔다
진통은 밤새 계속되었다
밤은 느리고 무겁게 흘렀다
예카테리나는 앞날이 더 느리고 무거울 것을 생각했다
입에 물었던 수건을 몇 번이나 뱉고 다시 물었다
밤은 그녀가 물고 있던 수건에 진통의 무늬를 새겼다
검은 색의 무늬는 새벽이 되면서 붉은 색으로 변했다
양수가 터졌다
민족학교 교사 아낙이 새 생명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예카테리나는 몸에서 한 우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이 왔다
이어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혼미한 예카테리나는 아낙에게서 가위를 받았다
태를 잘랐다
태를 자르는 일은 맡겨달라고 부탁했던 예까쩨리나였다
왜 태를 스스로 자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기는 피투성이였다
사타구니도 피투성이였다
짐승이구나 내가 짐승이구나
예카테리나는 혼잣말을 했다
애썼다 예카테리나 아들이야 축하해
아낙의 말소리를 들으며 예카테리나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