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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현감(平澤縣監) 풍옥헌(風玉軒) 조공(趙公) 묘갈명 |
오호라, 옛적 우리 선인(先人)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조 사문(趙斯文) 평택공이 파산(坡山 성혼(成渾))의 문하에 있을 적에 행의(行義)와 조리(操履)로 스승에게 허여를 받았고, 굳은 절조와 바른 논의는 동문의 제공(諸公)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평택공이 일찍이 사문(師門)에 이르렀는데 중도에 뜻밖의 재앙에 걸려들었으니, 사림의 불행이고 군자가 슬퍼하는 일이다. 당세의 문장에 뛰어난 이가 공의 행적을 드러내어 찬양해야 하는데도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다.” 하였다. 이는 사문의 남긴 법도가 겸손과 겸양의 도리에 힘썼고, 희온장(希溫丈)이 선대의 행적을 스스로 서술하여 문인들에게 드러내 주기를 요구하려 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비석을 세우지 못하도록 한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오공(吳公)의 뜻과 동일한 법도를 따른 때문이 아니겠는가. 희온은 바로 공의 막내아들 창강공(滄江公)의 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선인의 가르침을 받아 매양 공에 대해 탄복과 경모의 마음을 감히 잊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공의 증손 현보(賢輔)가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학식이 천루한 데다 노쇠함이 또 심하여 진실로 감당할 수 없으나 선인께서 남긴 뜻을 생각하여 감히 사양하지 않고 공경히 받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은 휘(諱)는 수륜(守倫), 자는 경지(景至),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시조 휘 맹(孟)은 고려 태조를 도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세에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휘 익정(益貞)에 이르러 우리 세조조(世祖朝)와 예종조(睿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한평공(漢平公)에 봉해지고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공숙(恭肅)이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팽(彭)은 진사로 문학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부 휘 종경(宗敬)은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김안로(金安老)의 간악한 정상을 알고 그가 재차 조정에 들어오려는 것을 극력 저지하다가 김안로의 당여에게 배척을 당하여 생을 마쳤다. 부친 휘 정기(廷機)는 경학(經學)으로 선묘(宣廟) 초에 오래도록 경연에서 시강(侍講)하였는데, 졸한 뒤에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모친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관찰사 욱(昱)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을묘년(1555, 명종10)에 태어났다. 기묘년(1579, 선조1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갑신년(1584)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고, 을유년(1585)에 체직되었다. 경인년(1590)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임진년(1592)에 왜란으로 인하여 직책을 잃었다. 계사년(1593)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다. 신축년(1601)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며, 갑진년(1604)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으로 승진하였다. 을사년(1605)에 대흥 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고, 정미년(1607)에 파직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경술년(1610)에 체직되었다. 신해년(1611)에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제수되었으며, 임자년(1612)에 무고의 옥사에 걸려 4월 3일에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겨우 58세였다. 양주(楊州)의 치소 동쪽 광암리(廣巖里)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식견이 매우 뛰어나 가정에서 배울 적에 이미 위기(爲己)의 학문을 알았다. 장성하여 우계(牛溪) 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겸손하고 독실하여 몸가짐을 경건히 하고 정성스럽게 남을 대하여 자신에게 얻기를 힘쓰고 남에게 구함이 없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상(執喪)이 예제(禮制)를 넘어 마침내 중병을 얻었으나 편모를 섬길 적에 색양(色養)이 지극하여 맛난 음식을 한 가지라도 얻으면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고, 비록 때로 변변찮은 음식을 먹더라도 모친께 올리지 않았으면 먹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돌보는 데에는 겨울과 여름을 한 가지 옷으로 지내고 아침과 저녁에 한 끼를 먹었으나 오히려 분수에 넘침을 부끄러워하였다.
집에 거처할 적에는 엄숙하고 단정하게 앉아 종일토록 공경하고 삼갔다. 교관이 되었을 때는 학업을 권장하고 가르치는 데 규정을 엄격히 세웠으며, 나아가고 물러나고 절하고 읍하는 데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으로 법을 삼았다. 각기 장점을 따라 가르치되 지극한 정성으로 게을리 하지 않아 매서운 추위와 혹독한 더위에도 강마(講磨)를 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도가 가장 많았으니 더러 양식을 가지고 거처를 마련하여 따라와 배우기도 하였다.
고을을 맡아 다스릴 적에는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고 공무를 잘 수행하는 데 마음을 쓰고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봄가을로 지내는 향교(鄕校)와 사직(社稷)의 사전(祀典)은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몸소 행하였으며, 삭망(朔望)에 행하는 망궐례(望闕禮)도 병이 들지 않았으면 거르지 않았다. 두 차례 고을 현감을 지낼 적에는 모두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조정에 보고되었다. 공이 체직되기에 이르러 평택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달려와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우리 태수같이 어진 분에게 어찌 이러한 일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오호라, 공이 화락한 덕으로 언행을 삼가니 친척들은 그 돈목함을 좋아하고 붕우들은 그 신의에 감복하였다. 전전긍긍하며 조심하는 마음을 늙도록 한결같이 견지하였으니, 성인이 말한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형벌을 면할 것이다.”라는 데에 공이 실로 해당하였으나 끝내 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온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가슴 아파하여 마지않는 까닭이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여 특별히 좌승지를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사제(賜祭)하였으며, 창강공이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참여하였다 하여 또 병조 참판을 추증하였다.
공이 일찍이 호서(湖西)의 별장에 소헌(小軒)을 짓고 ‘풍옥(風玉)’이라고 편액을 걸었고, 정미년(1607, 선조40)에 대흥현(大興縣)으로부터 돌아와서 또 두어 칸의 작은 초가를 짓고 ‘만귀(晩歸)’라고 편액을 걸어 만년을 보낼 곳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모친의 봉양을 위해 다시 현읍(縣邑)을 맡아 나가느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좌찬성 대년(大年)의 손녀이며 현감 선복(善復)의 따님으로 공의 배필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갑인년(1554, 명종9)에 태어나 기사년(1629)에 돌아가셨는데,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척(滌)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임자년(1612, 광해군4)에 부친이 돌아가시는 화를 당하자 애통함으로 몸을 훼상하였고, 이어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다가 몇 년 안 되어 죽었다. 계해년(1623)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둘째는 일(溢)이다. 막내 속(涑)이 바로 창강공인데 계해년에 정사 공신의 녹훈을 사양하였고 학덕과 절행으로 당세에 중망을 받았다. 대헌(臺憲)을 거쳐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마쳤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사포(司圃) 권진(權鎭)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참의 이덕수(李德洙)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첨지(僉知) 이후재(李厚載)에게 출가하였다.
척의 1남은 종운(從耘)이니 익찬(翊贊)이다. 일은 4남을 두었으니, 흥운(興耘)은 첨지이고, 다음은 기운(起耘)ㆍ달운(達耘)ㆍ선운(善耘)이며, 1녀는 남이형(南以亨)에게 출가하였다. 창강의 1남은 지운(之耘)이니 현령이고, 6녀는 정자(正字) 김익진(金益振), 신만(申㬅), 첨정(僉正) 이행하(李行夏), 한여천(韓如川), 판서 박태상(朴泰尙), 이서익(李瑞翼)에게 출가하였다. 사포는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한(垾)이고, 다음 류(塯)는 첨지이고, 다음은 보(堢)이며, 2녀는 이효심(李孝湛), 첨정 서필성(徐必成)에게 출가하였다. 참의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판서 홍연(弘淵)이고, 1녀는 판서 김익희(金益煕)에게 출가하였다. 첨지의 1남은 형(逈)이니 헌납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인이 또 말씀하기를, “우계 선생의 문집을 편정(編定)할 때에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성공(成公)이 문하의 제공들과 함께 공의 처소에 모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교감하였으니, 공이 동료와 벗들에게 추중받았음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다.”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일찍이 이공 유겸(李公有謙)과 담소하다가 이야기가 선배에게 미쳤는데, 이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 공에게 수학하였다. 이 때문에 칭송과 경모의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가정에서 들은 것이므로 아울러 비석의 끝에 적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적 성인의 문하에 / 昔在聖門
사과(四科)를 두었으니 / 其科有四
이로써 사람을 관찰하면 / 以此觀人
또한 비교할 수 있네 / 亦可倫擬
아 생각건대 조공은 / 嗟惟趙公
진실로 지성이 있었으니 / 寔有至性
이를 몸에 온축하고서 / 蘊之於躬
거의 덕행을 이루었네 / 庶幾德行
좋지 못한 때를 만나 / 遭時不淑
그 목숨을 잃었는데 / 迺隕其命
성조에서 포장과 은혜를 내렸으니 / 聖朝褒恤
하늘의 뜻 실로 미리 정해졌도다 / 天固有定
세도가 한층 떨어져 / 世道一降
아첨을 서로 일삼으니 / 夸毗交騖
공의 풍모를 아득히 회상하건대 / 緬懷風韻
어느 곳에서 다시 보겠는가 / 何處復覩
동그랗게 솟은 묘소에 / 宰如之丘
몇 척 높이의 묘갈이 있는데 / 有碣數尺
내가 가정에서 들은 것을 서술하니 / 我述庭聞
백세토록 공을 알 수 있으리라 / 百世可識
平澤縣監風玉軒趙公墓碣銘
嗚呼。昔我先人。嘗言曰。趙斯文平澤公。在坡山門下。以行義操履。見許於函丈。執守之確。論議之正。爲同門諸公所重。又曰。平澤公早及師門。中罹奇禍。士林不幸。君子悲傷當世之操觚者。宜有稱揚闡微之法。而尙闕焉。蓋師門遺矩。務在謙卑退讓之道。而希溫丈不欲自述先跡。求顯於文人之手者。抑或與楸灘吳公不令立碑之意。同一揆耶。希溫。卽公之季胤滄江公之字也。拯自幼獲承先人之敎。每於公感歎景
慕之私。不敢忘於中矣。今者。公之曾孫賢輔。以公遺事。來請銘。拯學識淺陋。衰耗又甚。誠不敢當。而念先人遺意。不敢辭。敬受而序次焉。公諱守倫。字景至。豐壤人。始祖諱孟。佐麗祖爲門下侍中平章事。後世冠冕不絶。至諱益貞。仕我世祖睿宗朝。官至吏曹參判。封漢平公。贈禮曹判書。諡恭肅。乃公之高祖也。曾祖諱彭。進士。有文學早世。祖諱宗敬。弘文館典翰。知金安老之奸。力沮其再入。爲其黨所擠而終。考諱廷機。以經學。宣廟初。久侍經幄。卒。贈副提學。妣晉山姜氏。觀察使昱之女。公以嘉靖乙卯生。己卯。中司馬。甲申。除慶基殿參奉。乙酉。遞。庚寅。除宣
陵參奉。壬辰。因亂失職。癸巳。除繕工監役。旋遞。辛丑。除童蒙敎官。甲辰。陞漢城參軍。乙巳。除大興縣監。丁未。罷。己酉。除戶曹佐郞。庚戌。遞。辛亥。除平澤縣監。壬子。罹誣告獄。以四月三日。歿於縲絏之中。壽僅五十八。葬于楊州治東廣巖里艮坐之原。從先兆也。公性聰穎。自小見識超詣。學於家庭。已知爲己之學。及長。受學於牛溪先生。謙恭篤實。敬以持身。誠以接物。務得於己。而無求於外。早孤執喪踰制。遂得重病。事偏親。色養備至。得一甘旨。喜形於色。雖時食微物。未及進於親廚。則不食。至於自奉。冬夏一衣。朝夕一飯。猶以踰分爲媿。家居整飭端坐。終日欽欽。爲敎官時。勸
課訓誨。嚴立規程。進退拜揖。一以小學爲法。各隨其所長而敎之。至誠不倦。雖祈寒酷暑。講磨不輟。是以門徒最盛。或贏糧爲居而從學者。爲邑。專以愛民奉公爲心。不行私惠。以要名譽。春秋鄕校,社稷祀典。必潔誠躬行。朔望望闕之禮。非疾病不廢。兩縣皆以善治啓聞。及被遞。平澤一邑之民。盡皆奔走號哭曰。豈以吾太守之賢而有此事耶。嗚呼。以公豈弟之德。愼言謹行。親戚悅其敦睦。朋友服其信義。戰兢一心。到老不懈。聖人所言。邦有道不廢。邦無道免於刑戮者。公實有之。而乃不免於淫禍。此一世之所以痛傷。久而不能已者也。癸亥。仁祖卽位。特贈左承旨。
遣禮官賜祭。以滄江公參靖社功。又贈兵曹參判。公嘗於湖西別業。搆小軒。扁以風玉。丁未。還自大興。又結數間茅屋。扁曰晩歸。擬爲終老之所。而爲親養再赴縣邑。志竟未就焉。夫人東萊鄭氏。左贊成大年之孫。縣監善復之女也。配德無違。生於甲寅。歿於己巳。祔葬於公墓之左。三男三女。男長曰滌。性至孝。壬子之禍。哀痛過毀。仍廬墓下。數年而歿。癸亥。旌閭。仲曰溢。季曰涑。卽滄江公。癸亥辭勳。德學節行。重於一世。歷臺憲。終尙衣院正。贈吏曹參判。女長適司圃權鎭。次參議李德洙。季僉知李厚載。滌一男。曰從耘。翊贊。溢四男曰興耘。僉知。曰起耘,達耘,善耘。一女南
以亨。滄江一男。曰之耘。縣令。六女曰正字金益振,申㬅。僉正。李行夏,韓如川。判書。朴泰尙,李瑞翼。司圃三男二女。曰垾。曰塯。僉知。曰堢。曰李孝湛。僉正。徐必成。參議一男一女。曰判書弘淵,判書金益煕。僉知一男。曰迥。獻納。內外曾玄多不能盡載。先人又言牛溪先生文集之編定也。滄浪成公與門下諸公。會於公所。終始勘訂。其爲儕友之所推。此亦可見。又言嘗與李公有謙。談及前輩。自言始受學於公。爲之誦慕不衰。玆皆家庭之所逮。聞者並著于石末云。銘曰。
昔在聖門。其科有四。以此觀人。亦可倫擬。嗟惟趙公。寔有至性。蘊之於躬。庶幾德行。遭時不淑。
迺隕其命。聖朝褒恤。天固有定。世道一降。夸毗交騖。緬懷風韻。何處復覩。宰如之丘。有碣數尺。我述庭聞。百世可識。
[주D-001]뜻밖의 재앙에 걸려들었으니 : 1612년(광해군4) 봄에 봉산 군수(鳳山郡守) 신율(申慄)이 김제세(金濟世)를 붙잡아 혹독하게 심문하자, 김제세가 “김직재(金直哉)가 반역을 도모하였다.”라고 무고하였다. 이에 황해 병사 유공량(柳公亮)과 감사 윤훤(尹暄)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고 김직재를 체포하여 조정으로 올려 보냈다. 조정에서 김직재를 국문하자, 김직재가 “황혁(黃赫)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순화군(順和君)의 양자인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라고 자백하면서, 정경세(鄭經世)ㆍ정호선(丁好善)ㆍ최유해(崔有海) 등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옥사가 성립되었는데, 평택공(平澤公) 조수륜(趙守倫) 또한 이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19 光海君故事本末 金直哉之獄》
[주D-002]위기(爲己)의 학문 : 진정한 자기 완성을 위한 학문을 말한다. 공자가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는 남을 위해 학문을 하는도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 《論語 憲問》
[주D-003]색양(色養) : 공순(恭順)한 안색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 부모의 안색을 살펴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도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에 대해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기가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
[주D-004]나라에 …… 것이다 : 공자가 언행을 삼가던 제자 남용(南容)의 사람됨을 평한 말로, 《논어》 〈옹야(雍也)〉에 보인다.
[주D-005]성인의 …… 두었으니 : 공자가 제자의 장점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이요,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이요,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요,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ㆍ자하(子夏)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공문사과(孔門四科)’라고 한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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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십니까!
오늘 풍양조문의 풍옥헌공 조수륜 선생의 묘갈명을 올린 이유는 첨정공
강수곤 선조와 친분이 두터웠던 친구이셨기 때문입니다.
풍옥헌공은 우계공 성혼 선생의 문인으로서 학문이 뛰어나시고 행실도
단아하신 분으로 알고 있으며, 모친께서 진주강문이신 강욱 선조의
따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옥헌공께서 1612년 평택현감으로 재임시에 "김직재의 옥"
이라는 사건에 연루되시어 희생되신 점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픔니다.
끝으로 현종 여러분께서 진주강문의 외손이신 풍옥헌공을 기억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년 5월 28일(금) 문 암 올 림.
며칠전 5월27일(음4월16일 족보기록)이 저의 귀빠진 날인데,
이 날 저의 생일기념으로 다음과 같은 관심있는 일을 하나 했다 생각합니다.
개인택시 영업중 틈을 내, 국립중앙도서관(고문헌실 하루전 예약)을 찾아
우리 진주강문의 최초족보인 남한보(南漢譜 1685)보다 조금 앞서 저술된
씨족원류(氏族源流 저작연대 미상이나 저자의 생년참조 1650~1680추정)를 복사하여 왔습니다.
씨족원류(조선후기의 538문중 족보자료 집대성)는
여타 만성보중 보학계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있는 책이라 합니다..
이 책의 저자 조종운(趙從耘 1607~1683 )에 대하여
인터넷서핑을 통해 알아보고 정리하고 있던중에
문암선생의 전화를 받고 또 이 글을 보게 되니
풍옥헌공 조수륜(趙守倫 1555~1612 역시 진주강문외손!! )께서는 조종운의 조부(祖父)가 되시는데...
오늘의 시점에서 어떻게 문암선생과 제가
연관되는 똑같은 사실(史實)에 대한 공유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진국의 강문외손들!!!께 감사의 글을 남깁니다.
오늘 선생님과 반가운 통화를 하면서 자세한 말씀을 들였는데 이를 글로
정리하여 주신 선생님의 정성이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사실 처음에 첨정공의 생애를 연구하고 싶었던 것인데, 전혀 생각치 않았던
풍옥헌공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 한마디로 범상치 않은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풍옥헌공이 저의 선조가 아니거늘 마치 첨정공을 대하는
기분이 들었으니 이를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수암공께서 풍옥헌공이 우계공의 문인이라고만 하셨지 고제라는
표현은 하지 않으셨으나 다른 자료를 통하여 고제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풍옥헌공의 손자가 다름아닌 씨족원류의 저자이셨다니 오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대단히 놀랐습니다.
제가 요새 첨정공과 풍옥헌공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저의 생각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어서 연락을 드린 것인데, 추가로
연락을 주셔서 그런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시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끝으로 며칠 지났지만 생신을 축하드리오며,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생활되시기 바랍니다.
2021년 5월 29일(토)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