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학센터 직원 4명이 모처럼 직원식당을 벗어나 외출해서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졸업식하고 짜장면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중학교때는 졸업식하고 명호면 소재지에서 짜장면 먹은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시골 촌놈들이이야 귀한 음식이지만, 알고보면 싸구리 음식이 아닌가도 싶다...
물론 비싼 고급 중국음식점에서 파는 짜장면도 있겠지만, 고급 중국음식점에서는 짜장면보다는 더 좋은 음식
먹겠지, 설마 짜장면 먹으로 가지는 않겠지...
하여튼 90년 가까이 전통과 오랜역사를 지닌 중국집이 대학로에 있다는것은 고마운 일이다
병원에서 10분거리에 있는 진아춘에서 탕수육이랑 삼선짜장을 먹었다
그게 그 맛인데도 왠지 역사와 전통이 때문에...아님 추억때문에 맛이 더하는 것 같다
사실, 먹거리X파일보고 다시는 짜장면 안먹고 싶었는데....ㅎㅎㅎ
그리고 커피 먹으로 갔다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서 보고 느끼는것중에 가장 인상적이 남는 일이 뭐냐고 물었더니
산봉우리, 커피 자판기, 아파트였다고 한다.
아무튼 요즘 한국사람들 커피 너무 좋아하다못해 중독 느낌이....
역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학림(1956년)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쓴 커피가 달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된 탁자니 소파 그리고 LD판이 나오는 클래식 음악 사이로 판 튀기는 소리...
또 밖에 보이는 샘터 건물들이 어울려져서 편안하게...그것도 다방..안방 뭐 하여튼 방 분위기라...
추울때 따뜻한 온돌방에서 나오기 싫듯 나오기 싫어지는 그런 곳이다
사실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하다
결혼하기전에 지금 마누라를 학림에서 만나
세상을 창조하는....지구를 구하도록 가족을 만드는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함..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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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대학로에 올 일 있으면
배고플때는 진아춘으로
커피 냄새가 그리울때는 학림에서
거꾸로 가는 세상을 즐겨보시오
간혹 뒤로 가야 지나치고 못 본것을 다시 볼 수 있고
허기보다는 진짜 배고픔을 해소 할 수 있다
퍼온글_향토자원-지역정보
진아춘은 1925년 중국인 이진산이 종로구 학림다방 옆 2층 건물에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무려 85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음식점이다. 이씨는 중국 산둥성지역에서 살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먹을 것이 없어지자 두 명의 아내와 함께 조선땅으로 건너왔다. 자식은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
은 딸 한 명 뿐이어서 아들이 없던 이씨는 종업원 중 송협국을 양자로 삼았다. 이씨가 죽자 송씨
가 가게를 이어받게 되었고, 송씨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딸이 '마산진하춘'을 운영하다 대만
으로 떠나고, 아들 둘과 송씨마저 미국으로 떠나게되어 조카인 형원호씨와 박숙경씨 부부가 진아
춘을 맡게 되었다. 잠시 송씨의 아들이 다시 돌아와 진아춘을 운영하게 되었지만 영업부진으로 함
흥냉면집으로 업종이 바뀌고, 형씨는 진아춘의 오랜 역사가 끊기게 됨을 마음아파했다.1999년 형
씨부부는 미국 오하이오주로 건너가 중국음식점을 차릴 생각이었지만, 그곳에서 대학로 진아춘에
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서울대 학생들이 교수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광화문 근처에 '중화'라는 중국음식점을 다시 차렸다.
현재 두산그룹의 박용현회장도 서울대병원에 계실 때 자주 애용하셨고, GS계열의 한 오너도 "오랫
만에 진아춘의 음식을 먹으니 맛있다"고 해주시는 말에 용기를 내어 다시 대학로에 진하춘을 차리
게 되었다고 한다. 광화문에 있는 '중화'는 형사장의 여동생이 맡아서 하고 있고,진하춘을 찾아주
는 손님은 예전의 추억을 잊지못하고 오시는 단골손님이 많다고 한다.
형씨는 "2004년 서울대 박물관에서 학생들이 찾아가지 않은 담보를 기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냈습니다. 그 때 보니 맡겨진 시계만 해도 몇백개가 됐고 학생증이나 학생들이 사용하던 가방
등도 있었다"고 했다.
창업주 이진산씨 때부터 내려오는 일화도 있다. 장면 전 총리는 대학로에 있는 동성고(당시 동성
상업) 교장 시절 이 집 단골이었다. 누가 볼세라 항상 문 옆에 있는 식탁에 숨어 자장면 곱빼기
를 먹었다고 한다.
또다른 단골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어렸을 적 먹었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겠냐?"고 물어 형 사장이 유산슬·양장피·자장면 등으로 이뤄진 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박숙경씨는 "돌아가신 서울대 임원택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단골"이라고 했다. 임 교수는 일
주일에 1~2번은 꼭 들렀는데 제자들과 올 때는 그 수에 상관없이 '소고기 탕수육'을 머릿수대로
시켰다고 한다.
형 사장 부부는 이제 가게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려 한다. 부부는 1995년부터 100만~300만
원씩 서울대병원에 기부금을 내왔다. 작년 11월부터는 손님들이 군만두를 먹고 내는 현금을 모아
서울대 어린이병원에 기부했으며 성균관대에 1억원 기부금을 약정해 내고 있다.
짜장면 역사_전우영(역사학자)
1950년대 말의 어느 날, 지금의 서울 을지로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당대 최고의 중국요릿집 아서원(雅敍園) 1층 계산대에 앉아 있던 장궤(掌櫃)는 위층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돈은 있어 보이지만 든 건 없어 보이는 초로의 시골 신사가 종업원의 멱살을 쥔 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이런 경우 늘 그래왔듯,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다가가 정중히 대신 사과한 뒤 연유를 물었다. 이 시골 신사, 아직 성은 가시지 않았으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순 없어 짐짓 자세를 가다듬고는, 돈도 서울 돈 시골 돈 따지느냐고 되물었다. 장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가 설명한 자초지종은 이랬다.
정통 중식 아닌 탕수육과 짜장면
자기가 이번에 서울의 행세하는 집 딸을 며느리로 맞게 되어 큰맘 먹고 결혼식 피로연장을 서울 제일의 중국요릿집이라는 아서원에 마련하고 최고급 음식만 내오라고 시켰는데, 나온 음식을 보니 최고급이 아니더라. 장궤가 시킨 건지 종업원들이 제 마음대로 한 짓인지는 몰라도, 시골 사람 무시하는 마음이 없고서야 돈을 적게 내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장궤가 그건 오해라고, 분명 아서원 최고의 음식만 골라서 내온 거라고 해명하자, 이 신사의 분노는 도리어 폭발했다. “여보 장궤, 여기 좀 보라고. 우리가 아무리 시골 사람이라도 그렇지, 평생 탕수육 한 번 못 먹어봤을 줄 알아? 탕수육이 없잖아, 탕수육이!”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장궤는 탕수육이 왜 빠졌는지 설명하느라 적잖이 애를 먹어야 했다.
지난 한 세기 중 거의 반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평범한 한국인들에게 중국음식점은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그리 만만치 않은 ‘외식 문화 공간’이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주머니 사정이 조금 나은 직장인들이나 중국음식점을 한 끼 ‘때우는’ 장소로 심드렁히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보통의 어린이들에게 짜장면을 먹는다는 것은,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하나 만드는 일이었다. 그랬으니 하물며 탕수육이랴. 그러나 짜장면과 탕수육은 정통(?) 중국 음식이 아니다. 미국의 중국음식점들 중에는 간판에 크게 ‘차이니스 레스토랑’(Chinese Restaurant)이라 써놓고 그 옆에 다시 작은 글씨로 ‘코리안 스타일’(Korean Style)을 부기한 곳이 있다. 이런 집에 가야 ‘한국식’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 수 있다. 이런 중국음식점 주인들은 한국인이거나 한국에 거주하다 미국으로 재이주한 중국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엄청난 호황을 맞았던 일본 경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반동공황의 습격을 받았다. 전쟁 중 아시아 시장에서 일시 물러났던 유럽 자본이 복귀한 탓에 일본 경제는 수출 감소와 설비투자 과잉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3년에는 도쿄 일대에 초대형 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건물이 도괴(倒壞)되었고, 여러 회사가 도산했다.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재정지출 확대는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금융공황을 낳았다. 1920년대 내내 일본 경제는 전후 반동공황, 진재(震災)공황, 금융공황 등 연이은 공황의 타격을 받았다. 1920년대판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조선은 지진을 겪지는 않았으나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함께 떠안아야 했다. 공장이 많지 않았음에도, 해고와 임금 삭감의 찬바람이 불었다. 노동자들은 형편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느니 그냥 놀겠다고 버틸 수도 없었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을 거치며 농토를 잃은 농민과 중국인 쿨리들이, 그들의 뒤를 압박했다.
호떡집으로 돈을 번 사람이나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만둣집을 차렸다. 우리가 만두로 통칭하는 음식 역시 중국인들은 만두(饅頭), 교자(餃子), 포자(包子)로 나눈다. 속이 없는 게 만두, 고기·생선 등의 소를 넣고 윗부분을 보자기처럼 말아올린 게 포자, 반달 모양으로 빚은 게 교자다. 호떡집에서 만두도 팔고 만둣집에서 호떡도 팔았지만, 호떡집보다는 만둣집이 번듯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만둣집은 1920년대 초에 개업한 취천루(聚泉樓)인데, 서울 최초의 만둣집이라는 설도 있다. 이 집은 지금도 명동길 초입에서 개업 당시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며 고집스레 만두만을 팔고 있다. 이 집에서 짜장면은 먹을 수 없다.
중국인의 도한(渡韓)이 계속 늘어나자 호떡집이나 만둣집보다 훨씬 규모 있던 ‘청요릿집’들도 싸구려 메뉴를 개발했다. 짜장면의 원조로 알려진 인천의 공화춘(共和春)은 1905년에 개업했지만, 이 집에서 언제부터 짜장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 쿨리의 도한이 본격화한 1910년대 후반 이후일 것이다. 서울의 중국음식점들도 그 뒤를 따랐다. 서울의 유서 깊은 중국음식점으로는 1907년 문을 연 아서원과 1910년대 말에 개업한 관수동의 대관원(大觀園), 1920년대에 문을 연 명동의 동해루(東海樓)와 명륜동의 진아춘(進雅春)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아춘만 남았다. 1920년대 서울에는 이들 외에 중국음식점이 100곳 가까이 됐다. 가난한 중국인을 위한 음식이라고 해서, 가난한 조선인이 먹지 말란 법은 없다. 오늘날 짜장면과 더불어 중국음식의 쌍벽을 이루는 짬뽕도 가난한 중국 유학생을 위해 일본 나가사키의 중국음식점에서 개발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중국음식점들은 장탕반(醬湯飯)과 설렁탕집을 제치고 서울에서 가장 대중적인 외식업소가 되었다.
참고로 근래 중국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짱깨’는 장궤(掌櫃)에서 온 말이다. 장궤는 글자 그대로 ‘돈궤를 맡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요즘 용어로는 지배인(支配人)에 해당한다.
첫댓글 자장면은 어릴때 먹었던 것이 가장 맛났던 같아...손으로 만든 면발에 돼지비계도 들어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