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날
전통적으로 머슴은 일 년 동안 주인집 일을 해주고 쌀 몇 가마니를 ‘사경(私耕)’으로 받았다. 이를 오늘의 관점에서 가름하면 연봉제이며 일시불로 보수를 받는 근로조건이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내 경우도 대학에 연봉제를 전제로 근로 계약을 하고, 보수는 ‘쌀’ 대신에 ‘현금’을 매달 ‘월급’으로 받았었다. 지엄하게 반상을 가르던 왕정시절 노사문화가 정립되지 않았어도 피고용자인 머슴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머슴날’을 만들었다. 이런 철학이 오늘의 ‘노동절’로 진화한 게 아닐까. 노동조건이나 문화 환경이 판이하지만, 이들 둘의 상관관계를 짚다가 지난시절 ‘머슴날’ 풍습을 더듬고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고리타분한 자료를 들추며 눈길을 돌렸다.
선조들은 음력 2월 1일을 ‘머슴날’이라고 했다. 이는 머슴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구에 도래할 새봄의 농사일에 신역이 고될 머슴을 격려하려는 날로서 ‘노비일(奴婢日)’이나 ‘일꾼날’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지난 가을 추수를 마치고 기나긴 삼동의 농한기를 보낸 상태에서, 다가오는 새해의 농사일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할 머슴이 농악이나 가무를 즐길 격려의 마당을 펼쳐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날이다. 이날 모든 주인은 특별 보너스로 용돈을 쥐어주고 푸짐한 음식과 술을 장만해 후하게 대접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를 비롯해 조선 영조와 정조 시대의 학자였던 유득공이 저술한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전해지는 내용이다. 정월대보름에 세운 볏가릿대에 넣어 두었던 곡식을 꺼내 송편을 만들어 머슴이 실컷 먹도록 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만든 송편을 나이 수만큼 먹으면 좋다고 믿어 머슴이 그렇게 먹도록 적극 권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
미성년자 머슴은 덩치가 크거나 일할 능력 여부를 떠나 어른 머슴과 노동력을 맞교환하는 ‘품앗이’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연유에서 매년 20살의 성년이 되는 머슴은 동네 어른이나 나이든 머슴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것으로 성인이 되었음을 고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장정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비로소 성인 머슴과 품앗이를 할 자격을 얻었다. 이런 견지에서 일부지방(경상남도 의령과 양산)에서는 머슴날에 성인식을 치르는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는 기록이다.
어떤 가치관을 토대로 생각해도 머슴은 죄다 사회의 주류세력이 아니고 비주류로서 소외계층이다. 따라서 평소에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들을 격려하거나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있었음은 불문가지이다. 그런 맥락에서 머슴날의 취지에는 육체노동을 하는 머슴이지만, 자긍심을 갖도록 이끌어 생산성을 높이고 싶다는 의도가 전제되었으리라.
한편 음력 2월 1일은 영등굿, 노래기 퇴치, 중화절 등의 풍습도 함께 전해지는데, 이들에 대한 내력을 찾는 여행이다.
영등할머니는 바람의 신이다. 평소에는 천계(天界)에서 살다가 2월 초하루에 인간 세상에 내려와 20일에 귀천(歸天)한다(지역에 따라 귀천 날짜 다르게 전해짐)는 얘기이다. 그런데 영등할머니가 인간 세상에 내려 올 때 동행하는 사람은 딸이나 며느리였다. 딸을 대동하는 해는 일기가 순조로워 농사에 별 탈이 없었다. 하지만 며느리가 함께 내려오면 고부간의 갈등 때문인지 일기가 불순하고 바람이 심해 농사에 피해를 입힌다고 여겼다. 이런 이유에서 액막이로 2월 초하루 새벽에 새 바가지에 맑은 물을 떠다가 장독대, 광, 부엌에 올리면서 우순풍조를 기원했다.
우리 선조들은 바람을 몰고 오는 영등할머니와 며느리를 달래려고 모셨던 풍신제(風神祭)를 ‘바람 올린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바람이 심한 제주도에서 어부와 해녀의 풍요를 비는 마을 당굿을 ‘영등굿’이라고 하여 여태까지 민속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 영등할머니 전설은 주로 남해안 지방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해지는 풍습이다.
바람을 몰고 온다고 믿어 영등할머니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거센 바람으로 난파선이 많이 생긴다는 속설이 생겼다. 이 때문에 뱃사람들은 이 기간에 배를 띄우지 않았다. 또한 이날 빨래를 해서 풀을 먹이면 집안에 구더기가 생긴다 해서 빨래를 금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영등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황토를 파다가 대문 앞에 뿌리며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외에도 집에 부정한 사람 출입을 막거나 대나무에 오색 헝겊을 달아 사립문에 매다는 등의 온갖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추려고 심신을 정갈하게 했다.
2월 초하루는 또 다른 ‘노래기 퇴치’ 풍속이 있었다. ‘노래기’를 ‘노내기’라고 부르는 지방도 있다. 이 노래기는 몸길이 3cm 정도로 지네 모양과 흡사한 벌레로 ‘노린내’가 심하게 나며 음습하거나 두엄 무더기 부근 같은 더러운 곳에 주로 서식한다. 이들은 여름이면 집안의 음지로 잘 모여들며 다른 이름으로 백족충(百足蟲), 환충(環蟲), 마륙(馬陸)이라고도 부른다. 2월 초하루 집안 구석구석을 말끔하게 청소한 다음에 종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향낭각시(香娘閣氏)’의 노리개를 만들어 한자로 ‘향낭각시속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라는 8글자를 써서 서까래에 매단다. 이를 직역하면 ‘향낭각시 속히 천리 밖으로 가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노래기가 집에서 없어진다고 믿었다. 여기서 ‘향낭각시’는 노래기가 우쭐하도록 듣기 좋게 마음을 사려고 불러주는 표현이다. 이 밖에도 이날 ‘콩볶기’를 통해 노래기를 퇴치함과 동시에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2월 초하루 콩을 볶으면서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알 볶아라.’ 주문(呪文)을 외운다. 이렇게 콩을 볶아 먹으면 노래기가 없어짐은 물론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중화절(中和節) 또한 2월 초하루였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농사철의 시작을 기념하는 음력 2월 1일을 지칭하던 이름이 중화절이다. 이날 임금이 중화척(中和尺)을 신하들에게 내리던 풍속이 있었다. 원래 중화척은 중국의 풍습이었는데, 정조 20년에 임금이 2월 1일에 처음으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중화척을 하사함으로써 중화절이 의의를 찾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여기서 중화척은 임금의 신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하들에게 경들을 믿으니 정성을 다해 보필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런데 중화척은 반죽(班竹)이나 이깔나무 같은 붉은빛을 띄우는 나무를 재료로 만든 자로서 아녀자들이 바느질에 사용하던 자보다 조금 작았다.
오늘날 음력 2월 1일은 그 의의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는 머슴날, 영등굿, 노래기 퇴치, 중화절 등의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던 길일이었다. 요즘 노사관계에서 첨예한 대립과 사생결단의 일방통행만이 난무하는 터수에 노동절의 날짜를 잘못 정해 탈이 잇따른다면 이 머슴날로 바꿔보면 어떨까하는 덜떨어진 생각을 해본다. 반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절 주인과 머슴은 옹색한 환경에서 사경이나 노동조건을 조율하려고 밀고 당겼어도 상생을 위해 믿음과 인간미를 전제로 협상하는 아름다움을 견지했기에 하는 얘기이다.
2011년 12월 5일 월요일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