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밤 이야기
김영순
바람의 송곳니가 밤 내
추녀 끝을 뜯던 그 겨울 나는
빈속에 마른 강냉이를 뜯으며
트랜지스터라디오 속의 아씨처럼 울었네
아직도 내 기억의 천장에서는
가난한 쥐들이 바스락거리고
홑이불 뒤집어쓰고
강냉이 우리에서 바라보던 그
하늘만은 부자였네
달과 별만 껴안으면
아무 때나 잠들 수 있었던 밤
춥지만 내 생애에서 가장 따뜻했던
그 겨울밤
장이 서다
봉평 장날이면
메밀전 부치는 아낙 사이로 나귀 방울 소리 들리고
올망졸망 대추 밤 파는 할매 주위엔
예닐곱 살 아이의 오얏빛 웃음이 구르기도 합니다
하루를 여닫는 노총각
어물 좌판 위로
팔리지 않아 뒤척이는 자반의 눈빛도
요사이 내 안엔 꿈인 듯
종종 기쁘고도 슬픈 장이 섭니다
품 안에 소 팔러 나갔다 돌아오는 아버지
그 발자국 위로
가는 길 모르고 따라나섰다 큰 눈으로 울던
소의 그림자가 겹치기도 합니다
왁자했다 고요해지는 거리를 뒤로
새터 마을 장터엔 다시 또 새벽을 낳는 소리 들립니다
그 소리들이 긴 어둠을 깨웁니다
잠든 내 영혼을 깨웁니다
오래된 연가
산등성 등성 마다 달빛 가득 걸어 놓고
처마 끝 호롱불도 환희 밝혀 놓았건만
산 깊어 못 오시나 물 불어 못 오시나
반딧불도 반짝반짝 징검다리 놓는데
싸리울 나팔꽃 사이로 지나가는 비 소리만
너에게 있어 난
기억 용량이 적은 컴퓨터이다
이쁜 너로 기억하고 싶어도
착한 너라며 사랑하고 싶어도
열에 들 뜬 메모리칩으로는
널 받아들이는 속도가 더디기만 한
야심, 알 수 없는 회로 속으로
또 길을 잃고 마는 난 너에게
네가 원하는 홈 하나 허락할 수 없는
1메가바이트의 386컴이다
찌지직거리는 음악밖에 전할 수 없는
널 사랑한다 하면서 가끔
저 속에 숨어 있는 악성바이러스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는 하지만
숨 끊어지는 날까지 함께 하자고
더듬거리는 나만의 혀로 말하고 싶다
네 기억에서 야위어지는 게 더 슬픈
김영순 시인- 2003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오래된 연가’, 한국시인협회 회원
첫댓글 잘 지내시지요 가을보리님
카페가 봄 단장을해서 더 아름답네요^^
시집 <오래된 연가>와 함께, 날마다 기쁜 날 되세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