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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8 금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티모4,10-17ㄴ 루카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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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자들의 삶 -기도, 도반, 가난, 하느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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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보름을 앞 둔 달이 참 밝았습니다.
04:20분 경 서녘 산 넘어 지는 달이 참 크고 둥글었습니다.
이어 06:50분 동녘 산에 떠오르는 해가 참 찬란했습니다.
해는 뜰 때 가장 크고 달은 질 때 가장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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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도반한 낮의 태양이요 밤의 달입니다.
동시에 하늘 안 일정한 거리의 고독을 유지하며 아름다운 도반 관계의
해와 달(日月)입니다.
문득 떠오른 것이
제가 좋아하는 어느 선사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란 말입니다.
낮에는 해와 같은 얼굴로 밤에는 달 같은 얼굴로
주님의 도반이 되어 살면 좋겠다는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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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자매가 전해 준 도반인 남편이 떠날 때의 임종어도 잊지 못합니다.
남편이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남편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늦게 서야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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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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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가득 담긴 마지막 임종어였다 합니다.
아마 이보다 더 좋은 아내 도반에게 줄 수 있는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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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제자들의 삶’에 대해,
기도, 도반, 가난, 하느님의 나라 네 측면에 걸친 묵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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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이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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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은 기도한 얼굴이냐 기도하지 않은 얼굴이냐 두 얼굴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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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누차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기도해야 하느님으로부터 활력을 제공 받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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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와 감사의 기도는 물론이고 좋은 일꾼을 보내 달라는 청원기도 역시 필수입니다.
주님의 일꾼들은 하느님이 보내주셔야 하는 선물입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스카우트할 수 없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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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도반과 함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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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도반은, 길벗은 필수입니다.
하느님 향한 내적여정의 동반자가 도반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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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씩 짝지어 파견했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도반과 함께 하는 삶을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궁극의 영원한 도반은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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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건하게 해 주셨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바로 주님이 영원한 도반임을 입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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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가난한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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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무소유의 제자들처럼 살 지는 못할지라도
그 무소유의 정신은 늘 배워야 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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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게 바로 가난입니다.
무소유의, 무욕의 텅 빈 가난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샘솟는 맑은 기쁨이요 자유로움이며 평화입니다.
사실 이런 삶 자체가 복음 선포요 이웃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자기를 비운 가난이 세상 이리 떼와의 영적전쟁에 최상의 무기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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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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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의 복음 선포가 바로 제자들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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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영육의 치유의 은총이요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도 복음 선포가 그의 궁극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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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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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우리의 영육을 치유하시어
당신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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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2티모 4,10-17ㄴ
복음 루카 10,1-9
전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친구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꿨다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꿈을 꿨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화를 잃어버린 거야. 이 운동화 찾는다고 계속 헤매다가 잠에서 깼어. 이 꿈이 좋은 거냐? 아니면 나쁜 거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별 것 아닌 꿈에도 신경을 많이 쓰더군요. 그런데 어떤 친구가 말을 합니다.
“야! 신발 잃어버리는 것이 좋은 꿈이라는 것도 몰라?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 너한테 복덩이가 들어온다는 꿈이야. 오늘 네가 술 사!”
이 말에 “그래? 그럼 술 사야지.”하면서 기분 좋게 자신의 꿈을 받아들였고, 좋은 시간을 우리 모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우연히 인터넷에서 ‘신발을 잃어버린 꿈 해몽’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생각나면서 이 글을 열어 보았지요. 그랬더니만 이 꿈은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라고 합니다. 즉, 연인이나 배우자와 다투거나 헤어지는 나쁜 꿈이랍니다. 하지만 제 친구는 그 꿈이 좋은 꿈이라고 하면서 축하를 받았고 같이 있었던 우리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의 꿈을 꾸었던 친구에게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더니, 정말로 좋은 일만 계속 생겼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사람이 꾸는 꿈은 모두 악몽이라고 하지요. 반면 지혜로운 사람이 꾸는 꿈은 모두 좋은 꿈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꿈에 대한 해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쁜 상황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가장 좋은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별로 좋지 않은 상황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가는 전교여행. 어떻게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상황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오지요.
나약한 사람은 불길한 징조를 만들어 스스로 운명에 갇히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길한 징조를 만나도 그 안에서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나약한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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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2013. 10. 18. 금)(루카 10,1-9)
<기쁜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점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또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을 때,
제자들이 나자렛으로 다시 갔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을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가난한 목수의 아들'의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즈카르야'도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4)." 라고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했는데,
그 말을 들은 즈카르야의 반응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즈카르야는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만 보입니다.
천사가 한 말은 아기를 낳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기를 주실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자기 아내 엘리사벳과 자기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 것으로 알아들었고,
엘리사벳과 자기가 모두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즈카르야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은 당연히 그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일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은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을 쫓아내셨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은 마귀들이 쫓겨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했고,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루카 8,37).
그들이 마귀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몰랐고, 예수님의 권능의 성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힘을 마귀들보다는 센 다른 힘으로만 생각했고,
그 힘을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서 복음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열두 제자도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했고(마르 6,13),
일흔두 제자도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했습니다(루카 10,17).
아마도 게라사인들은 제자들에게도 떠나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그런 상황을 예견하셨습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6)."
이 말씀은, 제자들이 빌어주는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제자들 책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루카 10,10)."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인데,
모든 사람이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듣기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흘려듣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복음 탓이 아니라 그 사람들 탓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 세례를 받을 때에는 안 그랬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무디어지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고난과 시련에 걸려 넘어지고,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서(루카 8,12-14)
기쁜 소식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처음 들을 때에는 기뻐하겠지만,
매일 똑같은 소식을 듣는다면 처음처럼 기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은 '기쁜 소식'의 '소식'이라는 말을
세속에서 사용하는 '새로운 뉴스' 라는 뜻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기쁜 소식'의 '소식'이라는 말은
한 번 들으면 낡은 소식이 되는 그런 뉴스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날마다 새겨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어제 듣고 기뻐했더라도 오늘 들으면 더욱 기뻐지고
더욱 힘이 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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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행복>
네델란드에서 아주 규모가 큰 지역정신건강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정신의학자 마르텐 데브리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수록 더욱 행복할 수 있다는 명제를 강하게 시사 하는 사례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병원 당국은 EMS(Experience Sampling Method:경험추출법)을 통하여 환자들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 병원에는 12년이 넘도록 심한 정신분열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처럼 그 여자도 머리가 산만하고 감정도 무디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의료진은 두 주일의 EMS 조사를 통하여 그 여자가 딱 두 번 만족스러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것은 두 번 다 그 여자가 손톱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의료진은 그 여자가 손톱 다듬기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그 강의를 열심히 듣고는 얼마 안 가서 병원에 같이 있는 환자들의 손톱을 도맡아서 다듬어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손톱 다듬기에 몰입하는 동안 자신감을 회복하고, 집중력을 길러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 새 사람이 되었고,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는 손톱 다듬는 미용 전문가로 개업하였고 일 년도 못되어 생활 기반을 잡았습니다.
그 여자가 왜 손톱 다듬기에 매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사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런 해석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손톱 다듬는 일을 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몰입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몰입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몰입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위의 여자는 우연히 손톱 다듬기를 통하여 몰입을 경험하였습니다만 몰입하는 데는 이것이 최고다 하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몰입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칙센트미하이에 의하면 몰입이란 약간은 힘겨운 과제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발췌: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해냄, 56-57]
오늘 우리는 복음사가 루카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루카가 쓴 복음에는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는지가 나옵니다.
이 사건은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님, 두 분의 비밀스런 에피소드였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원죄 없으심을, 그것이 교의로 선포 된지 4년 뒤인, 1858년에 루르드 발현으로 벨레뎃다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처럼 겸손하신 성모님은 당신의 비밀을 좀처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는 베일에 쌓여있던 성모님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것을 적어 후대의 사람들도 그것을 읽고 그리스도 잉태의 신비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으면서 이 깊은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루카는 나중에서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지만, 집요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을 것이고, 성모님도 직접 만나 귀찮을 정도로 그 비밀을 알려달라고 졸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고 하세요? 그냥 알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키며 살면 되지. 때 되면 안 알려 주시겠어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루카가 그렇게 넋 놓고 앉아만 있었다면 감추어진 예수님의 잉태 비화는 성경에 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더 알려고 한 루카의 열정이 감추어진 비밀을 열리게 했고,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 비밀을 글로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루카는 성령강림이나 사도들의 복음전파 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사도들의 행적도 기록에 남겨놓아야 후대에 초대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만 복음전파를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을 글로 남겨놓지 않았다면 현 시대에, 교회는 후대에 제자들이 작당하여 만든 집단이라고 해도 그것을 반박할 증거가 희박했을 것입니다. 루카는 이렇게 끝까지 알아내고, 그것을 후대에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루카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 그 진리를 수집하는데 평생을 몰입할 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몰입할 줄 안다는 것은 그것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흥미 없으면 다른 사람도 흥미 없습니다.
라틴어에서 흥미(inter-est)라는 단어는 “사이에 있다”라는 뜻을 가진 inter sum의 삼인칭 단수 현재 서술형입니다. 흥미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두 가지 사이에 개입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흥미는 가지는 것이 둘 사이에 서서 연결시켜주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 흥미가 있다면 하느님과 사람을 알려고 하는 사이에 둘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 용어 사전에서는 흥미를 “물건이나 사건이 만드는 변화에 대한 태도나 감정, 혹은 자신에 대한 관심 대상의 특징에 대하여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기”라고 정의합니다. 무언가를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것에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멀리 나가야만 선교가 아닙니다. 오늘 루카 성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적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료를 수집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으며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해 흥미가 없거나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 물건을 사도록 설득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면서 그 분을 알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아 몰입할 정도로 흥미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살펴야겠습니다.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남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맛 들입시다. 남들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만 보아도 그것에 흥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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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 팔지 마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들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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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사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 굳이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셨고, 그들과 함께 구원 사업을 펼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다음의 예화를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백인 교사가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한 학교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갑자기 책상을 가운데로 끌어당기더니 한데 모여 앉았습니다. 교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부정행위는 안 된다고 훈계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선생님을 보고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는 지금껏 어려운 문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다른 이들과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체가 이미 공동체성을 본질로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공동체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도 그렇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께는 우리가 필요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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