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 營 地 區 戰 鬪"
1. 토영작전의 의의
2. 해병대의 상륙공격 태세
3. 상륙작전
4. 시내 소탕전
5. 원문고개 공방전
6. 상훈
1. 統營作戰의 意義
敵, 人民軍의 공격도 8월에 이르러서는 점차 약화되고 전선은 洛東江을 중심으로 피아 대치하는 정도로 되었다.
東部戰線에서는 浦項을 중심으로, 中部에서는 倭館 등지에서 혈전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西部地區에서는 安義방면에서 '진동리'를 공격한 적이 '마산'과 '진해'를 위협하였으나 이미 언급한 바와같이 해병대의 맹격에 공세는 돈좌되었다.
또한 그 후 UN군의 일익 치열해지는 저항으로 정면에서는 그들의 의도대로 '마산', '진해' 및 '부산'에 침입하기 곤란함을 개닫고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는 측면, 統營으로 병력을 돌려 見乃梁海峽(폭 300m)을 건너 巨濟島를 점령함으로써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할 것을 기도하였다. 사실 이렇게 되면 '마산'과 '진해'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적의 사정거리내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적의 기도에 대비하기 위하여 해군에서는 해병대를 '통영'방면으로 파견하게 되어 다시 역전의 金聖恩부대가 또 이곳의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2. 해병대의 상륙공격 태세
8월15일 미명을 기하여 적, 인민군 제7사단 소속부대인 370명이 固城으로부터 統營으로 향하고 그 선두가 '통영시'북방 약 3km지점인 '통영반도'로 통하는 가장 좁은 지대인 轅門(원문)고개에 진입하였다. 이때 '원문'고개를 방어 중이던 경찰군 약 100명은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우세한 화력지원하에 공격해 오는 적을 저지할 수 없었다.
치열한 교전끝에 야간이 되자 경찰군은 중과부적으로 '통영'을 포기하고 선박에 의하여 閑山島로 철수하였다. 적은 이 틈을 이용하여 8월17일 01:00시 '통영'시내에 침입하였다. '통영'시내에 침입한 적은 그 후소북대 300명과 합세하여 '통영'의 연해를 경비 중이던 해군소속 901정 및 302정과 교전 중에 있었다.
이와같은 형세하에 8월16일 17:00시 해군총참모장은 해병대 金聖恩부대를 즉시 巨濟島의 서해안에 상륙케 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대는 이날 즉시 비상소집으로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전장병을 512艇과 FS 平澤號에 승선케 하는 동시에 보급물자를 적재완료하고 8월16일 22:00시 통제부사령장관 및 해군사관학교장이하 다수의 장병의 환송리에 목적지를 향하여 용약 출동하였다.
해병대가 해군함정의 지원하에 단독상륙전을 수행하는 것은 이 작전이 최초이므로 장병의 사기는 자못 충천하였으며 또한 임무의 중대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해병대의 출동부대를 탑재한 선단은 8월17일 03:00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紙島의 동북에 도착하여 선영을 감추고 정찰대를 소선박으로 '거제도' 서해안 見乃梁 및 이와 대치되어 있는 統營半島의 북동단 長項里에 상륙시켜 적정을 수색하게 하였다.
17일 07:00시 정찰대의 귀대보고에 의하면 적은 長坪里 및 見乃梁방면에 출현하지 않았으며 '통영'에 침입한 적 병력은 주력 약 350명과 후속부대 250명을 합하여 약 60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박격포 및 기타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적정을 입수한 金聖恩 대령은 곧 중대장회의를 소집하고 작전을 토의하였다.
이때 부대장은 '거제도'를 방어함에 있어 소수병력으로서 길다란 '거제도'의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일부 병력을 轅門고개에 진출시켜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는 한편 주력으로서 '통영'시내에 침입한 적을 섬멸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다음과 같이 타전하고 紙島의 동해안에서 해상을 경계하면서 작전명령을 기다렸다.
즉 "統營에 침입한 적은 완전 1개 대대로 추산되며 '통영'반도로부터 '거제도'에 상륙할 기도가 농후하니 '거제도'의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통영'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고 '원문'고개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함이 양책이라 생각되므로 '통영'공격을 감행함이 如何한가?"
이리하여 해상경계를 하면서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8월17일 12:00시 '통영'해상을 초계하고 있던 砲艦 703艇의 함장 李成浩 중령은 '통영'방면의 적정에 대하여 "적은 '통영'해안선 일대를 비롯하여 '통영'의 북방고지에 배치되고 있으며 특히 '통영'의 동방고지인 每日峰에는 완강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내왔다.
金聖恩부대장도 자신의 작전복안을 703艇長에게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8월17일 17:00시 해군총참모장으로부터 '통영'부근에 있는 703, 901, 512, 302, 307艇, 및 FS 平澤號를 해병대 金聖恩부대장이 통합지휘하고 '통영'공격을 감행하라는 요지의 작명이 하달되었다.
이제 공격부대에 남은 문제는 '통영'에 상륙하되 먼저 어느 지점에 상륙하여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Key Point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金聖恩부대장은 여러가지 복안을 수립하여 보았으나 결국 전병력을 '거제도'의 '견내양'대안인 長坪里에 상륙시키기로 결심하고, 상륙 후 일부 병력을 '원문'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고 주력으로서 '통영'시내에 침입한 적을 섬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8월17일 17:00시 각대에 행동할 것을 지시하렸다.
3. 上陸作戰
金聖恩부대는 長坪里에 상륙하여 '통영'시내에 침입한 적을 공격하고 일부 병력은 '원문'고개로 진출하여 '고성'방면으로부터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부대장은 다음과 같이 작명을 하달하였다.
1. 제2중대는 우선 '장평리'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며 주력부대의 상륙작전을 엄호하고 목표 #1을 점령할 것이며
2. 제3중대는 상륙 즉시 목표 #7을 점령하고 제2중대와의 면밀한 협조하레 적에대한 정찰을 실시한다.
3. 중화기중대는 제2중대 및 제3중대의 공격을 지원할 것이며 제7중대는 예비대로서 '장평리'에 위치한다.
이와같은 작전계획에 따라 각대는 8월17일 18:00시를 기하여 제2중대부터 상륙을 개시하였다. 이미 정찰대의 정찰결과로 '장평리'부두는 수심이 얕아서 함선을 접근시키기 곤란하였음으로 발동선 2척에 분승하여 상륙하였다. 무혈상륙한 제2중대는 상륙 즉시 제1교두보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적정은 발견치 못하였다.
8월17일 19:00시 계속하여 제3중대, 제7중대, 중화기중대, 및 본부중대의 순서로 무혈상륙을 완료하였다. 19:30시까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제2중대와 제3중대가 각각 목표 #1, 7, 및 6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자 우군 포함 703艇을 비롯한 掃海艇 302, 307은 '통영'남해안 일대를 포격하였고 상륙용주정 512艇 및 FS 平澤號는 급거 남하하여 우군 함정과 함께 '통영'에 함포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때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야간에 고지에 배치된 병력을 철수하여 '통영'남해안 일대에 집결시키고 해안선으로 배치를 변경하였던 것이다. 공격을 개시한 제2중대와 제3중대는 각각 목표 #1, 6, 및 7을 접적없이 점령하였다. 이같이 상륙 및 내륙진출에 성공한 것은 지휘관의 정확하고 면밀한 적정판단으로 상륙지점의 선택이 적절하였기 때문이었다.
상륙부대의 내륙으로의 진출에 따라 해군함정 901艇은 '원문'고개 서방 灣내에깊숙히 침투하여 '통영'시내로 침입하려는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고성'에서 '원문'고개로 통하는 도로를 포격하였다. 이같이 해군 함정의 포화를 '통영'시내에 집중하면서 17일 밤을 새우고 8월18일 05:30시를 기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중대는 07:30시 목표 #4, 5를 점령한 후 '원문'고개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3중대는 목표 #8을, 제7중대는 목표 #9, #10에 각각 진출하여 이를 점령하였으며 본부를 每日峰(148고지)북방 1km지점인 東大里부근에 설치하였다.
제7중대가 '매일봉' 정상에 도착하였을 때 적 약 100명이 산정밑 100m지점에서 산정을 향하여 기어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적은 해병대보다 먼저 '매일봉'을 점령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해병대가 먼저 '매일봉'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적은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제7중대는 호기를 포착하고 일제히 맹열한 사격을 가하였다.
8월18일 07:40시 태양은 아군의 배후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이 휘황하게 비치는 햇빛으로 인하여 적은 눈이 부셔 사격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위치한 곳에는 수목이 없었고 또한 이용할만한 지형지물은 전혀 없는 草原地였다.
아침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뚜렷하게 보이는 적을 하나도 놓지지 않고 제7중대 장병들은 총열이 달아오도록 맹사격을 가하였다. 적은 불의의 공격을 받자 일단 그 자리에 정지, 산개했으나 해병들의 정확한 사격은 적의 반수를 사살하였다.
적은 해병들의 사격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每日峰을 점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분산, 방향을 돌려 貞梁里방면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해병들은 도주하는 적을 포착하여 계속 사격을 가하니 적은 지리멸열되어 도주할 방향조차 못찾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매일봉' 서쪽사면에는 적의 시체가 유기된채 피로 덮히고 또 덮혀 있었다.
이때 적, 인민군 대대장과 작전참모는 혼자만이라도 살려고 2명의 사병을 대동하고 쏘련제 찦차에 박격포 2문과 120mm포를 끌고 '원문'고개 북방으로 도주하고 있엇다. 이를 포착한 제2중대는 즉시 추격하여 적 4명 전부를 사살하고 포를 위시한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공격부대의 지원을 담당한 중화기중대 박격포반은 '정양리'일대를 포격하여 도주하는 적에게 명중탄을 집중시켰으며 계속하여 '통영'방면에 있는 178고지의 적을 포격하였다. 해상에서는 703艇이 지상부대를 지원하여 '정양리'방면으로 패주하는 적의 퇴로에 대하여 직격탄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정양리'와 그 남방의 해안선일대는 회염에 휩싸였다.
4. 市內 掃蕩戰
統營戰鬪에 이어 승패의 관건이 되는 每日峰을 점령한 해병대는 여기서 적의 대부분을 사살하고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8월18일 12:20시 703, 307 및 302 艇長들은 南望山 및 시내일대에 있는 적진지에 대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소총 및 기관총으로 대항하였으나 우세한 아군의 화력에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통영'시내 중앙고지에 포진한 일부 적만은 강력히 저항함으로 추가적인 지원사격을 요청하니 703艇에서 지원사격하는 포탄이 '통영'시내의 중앙고지의 적진지에 명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적은 완전히 퇴로를 차단당하고 반수이상의 병력의 손실을 보았다. 특히 대대장, 중대장, 및 소대장들의 대부분은 사살당하여 지휘계통은 혼란에 빠져 부대수습이 어렵게 되자 살아남은 적은 각기 민가에 도피, 침입하여 무장과 군복을 벗어 버리고 민간복장으로 갈아입고 시내를 우왕좌왕하며 헤매고 있었다.
8월18일 14:20시경에 이르자 적의 저항은 거의 없어지고 시내의 잔적은 저항보다 피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金聖恩부대장은 제3중대에 703艇의 지원사격하에 178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3중대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固城, 統營間 도로부근에 이르렀으나 여기서 178고지의 적으로부터 맹열한 사격을 받았다. 제3중대는 곧 적과 교전하였으나 적의 우세한 화력과 필사적인 저항으로 인하여 15:50시 더 이상 전진못하고 공격은 좌절되었다. 부대장은 즉시 703艇으로 178고지에 있는 적을 포격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포탄의 잔량이 극소하므로 부대장의 요청대로 지원을 하지못하였다. 더욱이 각 중대에서도 탄약을 대부분 소모하였으나 아직 탄약보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진해'로부터 金錫根 중위가 지휘하는 지원병력 1개 중대와 보충탄약이 長坪里에 도착하였다. 金聖恩부대장은 즉시 金錫根중대와 탄약을 실은 함선을 南望山동측에 위치한 長子島로 이동케 하였다.
18일 18;50시 지휘소를 '매일봉'으로 이동한 金聖恩부대장은 적정을 판단하고 '통영'반도 서단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고성'방면으로 도주하는 적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513艇, 504艇에게 '통영'반도 서북방 해상에서 도주하는 적을 섬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제2중대에도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원문'고개에서 바다를 건너가는 적을 섬멸하게 하였다.
8월18일 23:00시 증원병력과 탄약을 실은 선박이 長子島부근에 도착하였다. 부대장은 우선 탄약을 傳馬船으로 제7중대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양륙시키도록 명령하고 金錫根중대는 南望山을 점령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일 01:00시에 각 중대는 탄약보급을 받았고 金錫根중대는 703艇의 엄호사격하에 '남망산'을 공격, 점령하였다. 이날 02:20시 해병대는 다시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2중대는 '원문'고개에 잔류하여 적의 증원부대의 남하를 저지하고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였다. 또한 제3중대는 적의 경미한 저항을 받으면서 전진하여 03:30시 178고지를 점령하였다.
統營市內의 소탕전에 있어 전략적 요지인 178고지를 점령한 金聖恩부대장은 제7중대와 수색소대 및 金錫根중대를 '통영'시내의 잔적소탕전에 투입하였다. 적은 각처에서 수류탄, 따발총, 권총 등으로 집요하게 저항하여 왔으며 이같은 규모의 시가전이 10:00시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제3중대와 金錫根중대는 시내소탕전을 시작하자 '통영'북방으로 패주하는 잔적을 급습하였다. 제2중대와 제7중대는 '원문'고개에 배치되어 중화기중대의 지원하에 적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이와같은 해병대의 적극적인 일대소탕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퇴로를 차단당한 적은 木船 3척을 이용하여 해상으로부터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나 해상을 경계 중이던 504艇 및 512艇이 이들 목선을 격침시켰다. 統營上陸作戰을 성공리에 완수한 해병대는 '원문'고개에 빈번히 내습하는 적의 후속부대를 격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統營공격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은 UN군의 철수작전에 있어서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UN군의 최후방어선으로 洛東江전선에 종지부를 찍고 또한 군사적 요충지인 '진해', '마산' 등이 적의 위협으로부터 제외될 수 있엇다는 것도 統營作戰에 힘입었던 것이다.
이러한 큰 성공에 대하여 鎭海統制府司令長官을 비롯하여 각계, 각층에서 축문과 찬사가 殺到하였다. 鎭海 통제부사령장관으로부터의 축전은 다음과 같다.
金聖恩 大領귀하
南海의 요충 '통영'을 구출하고 수많은 양민을 安泰에 놓은 동시에 혁혁한 전과를 획득하였음은 실로 金聖恩大領의 탁월한 지휘, 통솔하에 부하장병 전원의 위대한 전투력과 애국심을 발로한 증좌이며 아울러 해상에서 불민불휴의 경비를 계속하고 탄약정수의 부족을 극복하고 백발백중의 유효사격을 실시하여 막대한 전과를 획득하였음에 대하여 충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포하는 동시에 이후에도 계속하여 침착, 용감한 건투를 비는 바이다.]
統營地區作戰에서 8월18일까지 얻은 전과는 다음과 같다.
戰果: 사살 274명 포로 47명 중기 5문 경기 18정 122mm 박격포 1문 야포 3문 장총 68정 따방총 100정
99식 소총 5정
被害: 전사 5명 부상 17명
5. 轅門고개 공방전
統營市를 완전히 장악한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방어하는 것이 당면 임무였다. 사실 '원문'고개는 '통영'공방의 유일한 전술상의 요지였던 것이다.
8월19일 15:40시 적은 약 3시간 동안 야포 6문으로 간단없이 地域射擊을 가한 후 1,000명의 병력으로 金光植 중위가 지휘하는 제2중대와 安昌寬 중위가 지휘하는 제7중대 진지에 살도하여 왔다.
제2중대와 제7중대(후일에 제1중대로 개칭)는 박격포와 703艇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맹열히 응전하였다. 그러나 적은 문자 그대로 人海戰術로 아군 진지내에까지 침입하였다. 치열한 진내에서의 수류탄전이 전개되어 4시간 여에 걸친 교전 끝에 적은 많은 시체를 유기하고 도주하였다.
해병대의 臨戰無退의 정신은 적에게 일보의 양보도 없었다. 이 공격에서 실패한 적은 12시간 후인 8월20일 04:00시 경 재차 공격하여 왔으나 교전 30분 후에는 전례에 없이 치열한 白兵戰까지 전개되었다. 정면공격에서 실패한 적은 격전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다시 약 80명이 '원문'고개 해안선을 따라 아군진지 후방으로 침투하여 왔다. 이로 인하여 전세는 자못 위험하게 되어 협공을 받게 된 해병대는 밤 새도록 혼전을 계속하였다.
2차에 걸친 공격에 실패한 적은 이상 더 싸워봐야 병력손실만 초래할 뿐 승산이 없음을 자인하고 06:00시 경부터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해병대를 포위, 협공할 기도하에 아군 진지 후방에 침입하였던 적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주력이 도주함로써 오히려 해병대의 협공을 받게 되자 뿔 뿔이 도주하였다. 이때의 전과로서 적 229명을 사살하였고 포로 6명에, 그리고 기타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피해로서는 전사 7명에, 부상자 20명이었다.
8월21일 金聖恩부대는 진지의 보강을 하는 한편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3중대와 統制府의 지원중대가 '원문'고개의 제2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진지보강을 완료하고 경계 중 21일 22:00시경 적의 약 1개대대 병력이 재차 공격하여 왔다. 밤 새도록 피아의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으나 적은 결국 22일 아침 '원문'고개 북방으로 도주하였다.
高鐘碩 三等兵曺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62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며 포로 4명(중대장 1명 포함)따발총 3정, 아식 소총 2정을 노획하였다. 한편 해병대는 2명의 전사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때 安昌寬 중위가 지휘하는 제1중대의 高鍾碩 三曺(개성출신으로 당시 19세)는 야간의 白兵戰에서 적 6명을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高 三曺도 장열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그 당시 각신문에 크게 揭載되어 널리 알려지는 한편 李 大統領의 특명으로 二階級 特進의 영예를 받아 高 三曺는 一曺(오늘날의 상사)로 특진하였다.
이 '원문'고개 공방전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해병대의 투지를 찬양하여 申性模 국방장관으로부터 8월21일부 표창장이 金聖恩부대장에게 수여되었다. 또한 8월23일 20:00시 해군참모총장 孫元一 소장이 해병대의 전투상황을 시찰하기 위하여 전선에 도착하여 부대지휘소에서 해병대의 전선을 시찰한 다음 해병대의 공훈과 감투정신을 치하하고 앞으로 더욱 건투하여 국군의 선봉이 될 것을 바란다는 要旨의 격려와 찬사를 하였다.
한편 해병들은 내침하는 적에 대비 계속하여 전투의 여가를 타서 진지를 보강하고 사계청소, 지뢰매설 등의 작업을 게을리 하지않았다. 교대로 휴식하면서 적정수색을 계속하던 중 8월26일 10:00시 '통영'반도에 잠복하고 있던 적 인민군 장교 1명을 생포하였다.
8월26일 사령관명에 의하여 동일부로 金聖恩부대 호칭을 제161부대라고 개칭하게 되었으며 제7중대를 제1중대로, 제1중대를 제4중대로 개칭하게 되었다. 한편 부대는 9월10일에 이르는 동안 鎭海에서 1개 중대의 支援兵을 받어 증강됨에 따라 아울러 해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특히 8월28일에는 全 중위가 지휘한 청년방위대원 32명이 '통영'서북방면에서 적전상륙을 감행하여 적 14명을 사살하는 등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적은 '원문'고개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정면공격을 피하고 신경전으로 확성기를 장치하고 해병들에게 항복하라느니, 때로는 군가를 부르기도 하며 해병들의 전의의 저하를 꾀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소대나 중대단위로 야간기습을 매일같이 감행하여 왔다.
해병대는 적의 기습대를 그때마다 진전에서 저지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에게는 언제나 박격포나 함포의 명중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공격전에 실패한 적은 마침내 공격을 단념하고 방어태세의 진지구축을 꾀하였으나 우군의 항공기로부터의 공중공격은 이를 허용치 않았다.
9월8일 생포한 적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전선에 투입된 부대는 인민군 제104연대 제21대대와 제22대대라하며 이 부대는 적의 점령지구에서 징집한 학도들로서 편성되었으며 이들 적은 진퇴양난의 곤경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했다.
9월10일 07:00시 閔容植 중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 및 金文常 중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해군의 昌慶號로 '통영'에 도착하여 곧 '원문'고개 방어진지에서 출동이래 혁혁한 무훈을 세운 제2중대 및 제3중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한편 제2중대와 제3중대는 새로운 작전을 위하여 9월11일 24:00시 선박편으로 '통영'을 출발 釜山으로 향하였다. 즉 金光植 대위가 인솔한 제2중대와 李鳳出 대위가 인솔한 제3중대는 '제주도'에서 새로 편성한 해병대의 주력부대와 합류하여 仁川上陸作戰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12일 釜山을 떠나 仁川으로 향하였다.
이에 앞서 [金聖恩부대에서 정예 2대 중대를 차출하여 '부산'으로 이동케 하라]는 전문을 접하여 金聖恩부대장은 즉시 각급부대장을 소집하고 참모회의를 열었다. 이때 각중대장은 서로 "내가 가야한다", "우리 중대에서 가야한다"고 하여 어느 지점에 상륙할 것인가는 몰랐으나 一大上陸戰이 전개될 것이라는 예측하에 한결같이 상륙전에 참가할 것을 바라게 되어 한 때 參謀會議는 고성만 오고 가고 하였다.
결국 제2중대와 제3중대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즉 仁川上陸作戰에 참가하는 영광을 차지하였으나 이때 제1중대장 安昌寬 대위는 金聖恩부대장에게 "왜 우리부대를 보내지 않느냐"고 강력히 출동할 것을 상신하였으나 金聖恩부대장은 "선발된 부대가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것도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이나 현전선인 '통영'의 '원문'고개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라고 하여 흥분한 중대장을 진정시켜 비로서 전기 2개 중대만을 출발토록 하였다.
한편 '원문'고개에서 방어임무를 수행 중인 161부대(金聖恩부대)는 9월20일 防備隊인 제1대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9월15일 단행된 역사적인 仁川上陸作戰에 뒤이어 서울奪還作戰에 참가하기 위하여 8월23일 LST 丹陽號로서 '통영'을 떠나 용약 仁川으로 향하였다.
統營地區의 종합전과는 다음과 같다.
戰果: 사살 469명 포로 83명 야포 3문 중기 6문 경기 22정 122mm 박격포 2문 따발총 128정 아식 소총 107정
3/4ton Trk 3대 권총 13정 전화기 5대 M1소총 3정 대전차포 1문 기관단총 14정 목선 2척 RKT포 2문
포탄 20발 수류탄 다수
被害: 전사 15명 부상 47명
6. 상훈
이 전투의 전공으로 "통영 상륙작전"에 참가한 전 장병이 1계급씩 특진했는데 이때 부대장이었던 김성은 중령도 대령으로 특진했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통영 상륙작전"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첫댓글 제 4대 해병대 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