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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국민의 정부로부터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사회 계층간의 사교육비 지출은 점점 벌어져 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는 이들 두 정부가 경제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 기초생활 보호제도의 도입 등의 사회복지 제도를 펼치는 2중적인 정책을 동시에 추구한 탓이다. 그러나 그런 혼합정책을 5년 이상 추진한 결과 그들 정치인들이 내세운 사회통합과 국민복지는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는 것이 이제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른 부분은 모르겠으나 교육부문은 그런 징후가 완연하다. 그러나 교육복지의 실패는 국민복지와 사회통합의 실패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한국은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 생산력 대비 교육비 지출( 공+사 교육비)이 세계 1위라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디피 대비 (공)교육재정은 4.19% 이지만 사교육비를 거기다가 합산하면 8%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외양으로만 보아서 한국은 세계 최고의 교육 대국인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한국인들의 평등주의 사상이다. 고래로부터 우리의 선인들은 국가의 인재는 도시나 시골에 관계없이 골고루 태어난다는 것을 주장해왔고 또 실제로 그러하다. 이는 가난한 시골의 아이들이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가정 경제의 핵심에 교육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라면 가정의 분열과 파탄까지도 감행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열정과 정서이다. 상류층의 교육수준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인지되면 서민층의 절망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육 평등을 위한 정치권의 노력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인생의 출발점이다. 이런 출발점부터 어는 특정 계층은 프리미엄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핸디캡을 가지고 출발하는 계층의 자녀들은 결국 신분적인 속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된 주된 원인으로는 민주화된 정부의 대통령의 자질 미달과 준비 부족에 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와 인권탄압을 비판하지만 그의 개발독재의 시대에 빈부의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중, 고등학교의 무시험-평준화 개혁 정책은 이 나라 교육의 백년대계를 결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의 시대에는 뭔가 교육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결단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진정 교육문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양극화를 해소한다고 하면서도 학교 시장의 개방과 민영화 정책을 꾸준히 밀어붙이고 있다.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 등 평준화를 깨는 교육기관의 설립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는 현재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미래의 양극화를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진정 양극화를 지양하고 사회적 통합을 원한다면 우선적으로 교육의 평등화부터 추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획일적인 평등화가 아니라 독일처럼 다원적인 학교제도를 통해서 학생들의 적성과 희망에 부응하는 진학제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4-3-3. 자유와 평등의 조화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현금의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피해 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육의 평등과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현재의 정부 혹은 서울시장 이명박씨 등이 추진하는 경제적 목적의 명문고 설립 전략은 실패한다. 이들은 한국민의 교육에 대한 절대적인 희망을 무시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의 무의식적인 소망, 거의 본능적인 절규를 듣지 못하는 자들이 정치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이 나라에 인재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명박 서울시장은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욱 경제를 목적으로 교육을 이용하는 의식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를 차기의 대통령으로 뽑아서는 안될 것이다. 교육은 경제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칸트(I. Kant)식으로 말한다면 교육은 경제의 수단이며 동시에 목적이다. 이 중 어느 한쪽만을 취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교육의 공화주의"를 이미 정립한 바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교육은 국가의 소관으로 간주하고 경제는 개인들의 소관으로 간주하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전제조건과 복잡한 상호관련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교육과 경제에 대한 대원칙을 말한 것이다. (경제에 대한) 교육의 수단주의를 택할 경우 현행의 입시지옥을 벗어 날 길이 전혀 없다. 입시지옥은 인간성의 박탈을 말한다. 교육을 시장의 질서에 편입시킬 때, 시장 역시 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인간이 경쟁을 너무 빨리 배운다고 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물론 생존 경쟁을 대비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런 단계로 본격적으로 진입하지는 않는다. 현재 한국의 학생들은 쓸 때 없는 경쟁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모순과 부조리를 한시 바삐 해결해야 한다. 경제지상주의-교육 도구주의를 부르짖는 신문과 정치인들은 이 나라에서 즉시 추방되어야 한다. 그들은 경쟁력이라는 허울 하에 이 나라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짓밟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의 교육을 통한 출세주의 역시 고쳐야 한다.
교육은 평등을 통한 자유의 구현이다. 그 평등은 국가의 보호 하에 비로소 가능하다. 그 평등은 동시에 개성의 다양성과 자유의 진보를 함축한다. 교육을 전적으로 시장 질서 하에 두려는 자들은 다시금 말하지만 경제의 파탄은 물론 인간성의 파탄과 국민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초래시키는 자들이다. "경제 지상주의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경제를 인간적 삶의 유일한 가치로 치부할 때, 그 경제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쾌락주의의 역설과 유사하다. 쾌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쾌락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고통과 절망이 오는 것처럼 모든 인간사를 경제와 경쟁의 두 가지 척도로만 재단하는 자들은 결국 그 소망의 정반대를 맛보고 말 것이다.
4-4. 농어촌의 교육황폐화
신학기를 맞이하여 대부분의 (도시의) 학교들은 신입생들을 맞이하고 이들을 가르칠 방법과 이에 대응하는 학교 정책 마련에 분주하다. 가령 학교운영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든지 혹은 각급 학년회의를 열어서 신학기 학생과 수업관리, 입시관리 등의 교무행정으로 학교들은 부산하게 움직인다. 이는 학부모, 학생 그리고 교육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새로운 학교와 교육 여건을 반영한다. 이와는 달리 경우 학교나 교육시설이 모자라고 혹은 교사의 수가 부족하여 응급적인 조처를 취한다는 기사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대도시의 새학기 풍경과는 정반대로 농어촌이나 벽지의 신학기 소식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이는 부흥이나 발전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쇠퇴와 조락(凋落)에 관한 소식들이다.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들이 아니라 지방의 신문들을 보면 농어촌 학교의 통폐합이 신학기 주요한 교육 관련 기사의 하나이다. 또는 복식학급(2개 학년을 한 학급으로 편성하여 한 교사가 가르침)에 관한 기사이다. 후자의 경우 2복식학급도 부족하여 3복식 학급(3개 학년을 한 학급으로 편성하여 가르침)도 생긴다고 한다.
무등일보 인터넷판 3월 9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남도교육청은 오는 2009년까지 통폐합이 추진되는 164개교의 학부모나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통폐합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도내 22개 일선 시·군교육청별로 지난달부터 진행중이다. 설문조사가 끝난 광양지역의 경우 통폐합 대상 초등 6개교와 중학교 3곳 가운데 재학생 4명인 사곡분교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반대한 것으로 조사됐다. 목포·여수·순천·신안·진도·완도·화순 등의 소규모 학교 76개교의 경우도 64개교에서 통폐합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통폐합이나 혹은 이를 연기하고 대체하는 복식학급 제도가 이 나라 교육소외 지역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3월 9일의 한겨레 신문의 왜냐면에는 다음과 같은 복식학급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도시의 신설학교 교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울 권리를 잃어버린 시골 학교 아이들의 슬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리 학교는 전체 학생 11명인 산골마을의 소규모 학교로 몇 해 동안 복식학급(2개 학년을 한 학급으로 편성하여 한 교사가 가르침)을 운영했다. 1년 동안 담임으로 복식학급을 맡아본 경험은 교사로서 많은 한계와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위한다면 복식학급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2006년부터 3복식 학급(세 학년을 한 학급으로 묶음)을 편성하라는 지침이 충남교육청에서 내려왔다. 예고된 사항도 아니었고 어느날 갑자기 학급편제 예외조항으로 내려온 지시였다. 지침대로라면 3·4·5학년 세 학년이 한 교사한테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입학하는 1학년 새내기들은 졸업반 6학년과 같이 배워야 한다. 3복식 담임은 1주일에 서로 다른 30과목 이상을 가르쳐야 하며,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서 40분에 배울 내용을 13분 동안 혼란스런 가운데 공부해야 한다. 교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 곳, 학생이 기본학습을 받지 못하는 곳을 학교라고 부르며 다녀야 할 판이다.
노무현 정부는 말로는 양극화 해소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교육의 민영화를 도입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의 아프리카 순방 중에 우리 교육계를 향해 쓴 소리를 했다. 즉 교육계가 사회 변화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집단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교육계가 반발하고 있다. 그는 “ 사회 변화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집단이 학교 선생님들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교육 시장 개방에 반대하고 교원 평가제를 수용하지 않는 교단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전교조 등 교육 단체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협상 중단을 요구했다.
이런 사정을 볼 때, 앞에서 열거한 농어촌 학교와 교육의 상황이 앞으로 더 어떻게 변화할지 미리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대로라면 농어촌 학교의 통폐합과 복식수업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교육시장의 개방은 교육의 민영화를 더욱 조장하고 이에 따라 유효 수요가 부족한 낙후된 지역의 교육은 그만큼 시장원리의 요구에 따라서 생존사회에서 도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원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런 사회적 상황이 진정 자연의 원리일까라고 반문해 볼 수 있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아니 혹은 알면서도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한국의 경우 산업이 교육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산업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벌써 여러 차례 역사적으로 입증되어 왔다. 가령 강남의 부동산 폭등은 박정희 시절 인위적인 교육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좋은 명문 학교를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김으로써 그 지역의 개발을 유도했다. 그 뒤 이를 반영하는 학원들의 밀집이 강남의 부동산 신화를 뒷받침한 것은 다 안다.
진정 어느 지역의 산업의 퇴조와 인구의 감소 뒤에 오는 후속 조처로서 학교의 폐지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교육과 문화의 부흥이 도리어 어느 지역의 경제발전을 가져온다면 인구 감소를 이유로 그 지역의 학교를 폐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무리한 복식수업을 받게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국의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알아야 할 점은 농어촌의 인구 감소, 특히 어린이 인구의 감소는 그 원인이 그 지역의 부실한 경제 여건이 아니라 오히려 부실한 교육여건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서 벌써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인구의 대도시 집중 혹은 서울 집중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물질적인 여건이 아니라 문화적-교육적 여건이다. 좋다는 학교와 학원이라는 매력이 해방 이래 한국의 인구를 서울로 인구를 흡수하는 주된 원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지방의 경제가 발전이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교육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똑똑한 인재들은 한결같이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이사를 간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가 개혁하려다가 실패한 신행정수도 이야기의 원인이다.
대통령과 그의 관료들은 사회현상의 표피만을 보고서 대책을 추구하다가 실패를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가령 8.31 부동산 대책과 그 결실을 보라. 권력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도덕성이나 의지가 아니라 인식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 그러므로 정부나 교육부는 빨리 농어촌 교육 부실의 원인을 알아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농어촌 학교의 폐지나 복식 수업의 문제를 그 근원적인 문제인 농어촌 인구감소의 문제로 환원시켜서 이를 치유함으로써 학교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의 장래가 암울하다.
이런 문제 해결없이 양극화 문제나 사회 통합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4-5. 지방 대학의 공동화와 더욱 커지는 지역간의 교육격차
위에서 말한 농어촌 초등학교의 몰락과 더불어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방 대학들의 몰락이다. 노무현 정권시절인 ‘2004.8.31에 발표된 대학구조개혁방안’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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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률 저하로 올해 8만명이었던 초과 정원(입학정원-입학자)은 2009년 9만5천명, 2018년 12만명, 2021년22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교육부는 예측한다”.(한겨레 신문 04.8.31기사)
이는 다시 말해 지방대학의 학교운영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지방대학에 신입생들이 오지 않기 때문에 주로 학생 등록금수입에 의지하는 영세 사립 대학교재정이 부실화되고 이는 다시 대학들 간의 인수합병과 퇴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극단적인 조치를 초래하고 있다.
이런 관계에서 지방대 교수들은 강의 및 연구라는 교수 본연의 일보다는 주로 신입생 모집 광고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는 다시 말해 각 고등학교를 방문해서 대학입학 예정 학생들을 자기 학교에 유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고등학교 교문 앞에는 ‘교수 및 잡상인 사절’이라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가구의 계층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계층간 뿐만 지역간 수준의 차이도 점점 벌어지는 것 같다. 특히 교육 시설과 여건에 있어서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고향(부산)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부산의 학부모들이 서울, 특히 강남에 자식을 보내 공부시키느니 차라리 해외에 유학을 보내겠다는 말들을 한다는 것을 알고 쇼크를 먹었다. 즉 강남에서 학원 보내는 것이 해외에서 유학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다. 또 어떤 상당히 잘 사시는 부산의 한 대학교수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목동에 작은 아파트(14평)를 하나 장만해 주었는데 거의 2억 가까이 되는 거금을 투입하고 난 뒤 지금은 빚 때문에 고민하신다는 말도 들었다.
부산은 그래도 한국 제 2의 도시인데 거기서도 이제 서울과의 수준차이를 지각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면 다른 작은 지방의 도시나 농어촌은 얼마나 큰 괴리를 느낄 것인가? 알다시피 지방 대학에는 졸업생들은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고 이제 신입생도 잘 오지 않는다. 어떤 여학생은 "후지고 비전 없는 지방대학" 이라는 다소 지나친 표현을 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현재 한국사회의 엄청난 모순, 즉 지방과 서울의 격차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이 구절은 지방대학을 무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는 지방대학 사람들은 자기모멸에 빠질 것이 아니라 교육개혁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한다. 필자 역시 지방대학에서 강의한 강사로서 우리 학생들이 당하는 무시와 박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국가주의, 평등주의)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독일의 경우 지방이니 수도니 하는 구분이 없다. 그리고 도대체 출신 대학이니 동문이니 하는 개념도 없다. 거기서 모든 대학생은 진정으로 하나이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를 2-3 번 바꾸기 때문에 자기 모교의 정체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연세대 혹은 고려대 같은 각 학교의 정체성(identity)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국민들 활동의 모든 것이 자녀교육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시골이나 지방을 떠나 물가나 땅값이 비싼 서울로 자꾸 모여드는 이유도 자식 교육 잘 시키기 위해서이다. 정부도 지역간의 불균형을 없애기 위하여 그간 산업이나 행정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실효가 없었고 인재들은 자꾸 서울로,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다. 어떤 교수님은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밀리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필자에게 (직업문제로) 지방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충고해 주셨다. 이 문제는 결국 교육제도의 개선으로 밖에는 풀리지 않는다. 필자는 한겨레 『왜냐면』2002. 3,19 일자에서 (전)대학의 국립화를 주장했었고 그 가능성을 원론적으로 타진했다.
지금 같은 대학, 고등학교의 자율화 혹은 교육시장의 개방 등의 시장교육주의는 결코 교육의 소외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유인종 전 서울시 교육감이 서울에서 자립형 사립고의 허용을 막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보수 언론들은 선동적인 정치, 안보 이슈가 없으면 지면에 국가경쟁력과 (미국식의) 교육제도 도입을 외친다. 그러나 필자는 남북 통일 이전에 우선 남한의 지역적 통일을 요청한다. 이제 문제는 영호남의 지역갈등이 아니라 서울-지방 간의 극심한 문화적, 교육여건적 차이이다. 몰락하는 지방대학들을 방치하고 거기에 대한 대안이 겨우 대학간의 통폐합이나 퇴출 같은 소극적인 방법만을 취한다면 가뜩이나 문화적, 교육적으로 열등감을 지닌 지방은 더욱 쇠퇴의 길에 가속을 밟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교육의 평등이 요구된다. 이 것 하나만 되면 다른 경제, 재정적 지역 발전 계획은 불필요하다. 사회통합, 이것은 전적으로 교육의 공평한 기회부여에 달려 있다. 이 것을 위해 필자는 강력한 교육의 사회주의 그리고 국가주의를 요청한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것은 대학입시를 위해 내신의 비중을 높이고 수능의 점수제를 폐지하며 그 대신 수능의 9등급제를 명령하는 ‘04.8.26 대학입시제도 개선안’은 수험생 변별력을 위해 대학별 선발고사, 예를 들면 논술, 구술 &면접의 비중을 높이도록 제시하고 있는데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대량의 획일적인 수능시험보다 대학별 논ㆍ구술 시험에서 지방고등학생들은 서울지역 학생들보다 훨씬 불리하게 된다는 점이다. 각 대학마다 논ㆍ구술 시험 방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방 학교에서 그 많은 입시정보를 일일이 다 참조하고 대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시험의 정보에서 지방학생들은 엄청난 불리한 여건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지식과 정보의 격차이다. 따라서 결론은 모든 교육을 국가에서 책임지고 감독하는 독일식 내지 북유럽 방식의 제도의 도입이 절실한 시점에 왔다는 것이다.
4-6. 고교등급제
최근 고교등급제 문제로 교육은 다시 열병을 앓고 있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비강남권 지역 학생들에게 학교별 차별 및 특혜를 주고 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올해 일차 수시모집에서 연세대의 경우 비강남지역의 학생들은 내신성적이 좋아도 1차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반면 강남지역이나 특목고 학생들은 내신이 나빠도 합격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연세대 의대의 경우 합격 12명중 강남고교 학생 11명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일반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한결같이 차별대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립대 경영자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고교간 격차의 대입반영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조선 8.29).
사립대 운영자들은 주어진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대학의 경쟁력이 우수한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행의 평가제도 하에서 강남지역이나 특목고 학생들의 실력이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문제는 학교별, 지역별 실력의 차이라는 것이 결국 경제력과 사교육의 정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종속변수라는 점이다. 사교육을 통한 실력향상의 거품은 이미 몇몇 대학에서 실증적 조사를 통해 상당히 알려진 바 있다. 단적인 예로 최근 서울대 신입생들의 학력저조를 들 수 있다.
사태가 이럴진대 오직 현행 입시제도를 기준으로 하여 발생한 학교별 혹은 학생별 성적 차이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한국 명문 사립대학 지도자들의 교육철학이 심히 걱정된다.
교육은 인간의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꺼집어 내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최고로 발휘시켜 훌륭한 인물을 키우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교육만을 교육의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미국의 위대한 교육철학자 듀이(J.Dewey)는 제도화된 학교교육을 “형식적 교육(formal education)”이라고 했다. 이는 사람이 학교에서도 배우지만 학교를 떠난 후에도 평생 스스로 학습하는 존재이고 또 학창시절에도 학교뿐만 아니라 밖에서 더 많은 교육이 일어난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제도화된 형식적 학교만을 유의미한 교육으로 간주하고 이를 사회진출이나 성공의 측도로 삼고 있기에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대 경영자들이 한결같이 가시적인 현상만을 토대로 해서 온 국민의 분노를 덮어쓰는 학교등급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망국적 사교육과 학벌주의라는 실증적 현상,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결국 교육자들이 그렇게 미래를 보는 눈이나 개혁적, 비판적 관점 없이 맹목적으로 주어진 현실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미래는 이래서 정말 어둡다. 이들은 다시 말하면 성공지상주의, 시장지상주의 그리고 목적지상주의에 빠져 부정의 정신을 상실하고 도구적인 이성만을 신뢰하고 따른다. 비판이론가 마르쿠제(M.Marcuse)가 지적하는 현실 긍정의 일차원적 인간(One-Dimensional Man)이 우리사회를 지배한다. 이는 교육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한국 사회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교육자들의 자기 혁신이 무엇보다 시급한 시점이다.
4-7. 조기 해외유학, 기러기 아빠
현금의 우리 사회에는 위에서 열거한 교육 내지 학습의 소외 현상과 또 다른 의미에서의 소외 현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적극적인 소외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여기에 속하는 사선들이 이른 바 교육 이사와 해외 이민, (조기) 유학, 조기 해외연수 그리고 기러기 아빠 등이 있다.
이런 현상은 아이들이 한국의 학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더 좋은 교육을 통해 자녀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는 부모의 (과잉) 책임의식에서 발생한다고 하겠다.
이런 의식은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되든지 우리 아이만 잘되면 된다” 라는 집단적‐가족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족 이기주의를 반사회적(反社會的), 비애국적(非愛國的), 반민족적(反民族的) 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함부로 매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나 사회가 자녀의 앞날을 책임지거나 보장할 수 없다면 부모가 나서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선 자기를 보존해야 한다.
재미있는 얘기로 필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국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던 필자의 친구는 “너는 애의 장래를 위해 거기(독일) 남아 있어야 했었어” 라고 필자를 강하게 질타했었다.
그리고 독일에서 사귄 친한 이웃이 필자에게 “너는 왜 귀국하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독일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데?” 라고 물었을 때 필자는 웃으며 “나는 애국자다” 라고 말했었다.
과연 그렇다. 필자는 애국하기 위해, 이 나라의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귀국했다. 만약 그럴 가능성, 즉 필자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한국의 입시지옥이 바뀔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아마도 필자는 독일에서 귀국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은 교육 여건이 한국에 비해 가히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는 미국처럼 엘리트 사립 유치원이니 초ᆞ중ᆞ등학교도 없고 하바드니 옥스포드니 하는 명문 대학도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독일은 교육여건이 좋다, 즉 명문대, 일류고 등 특권적인 학교가 없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다. 교육천국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이다. 이는 교육이 출세나 돈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 대신 독일에는 유명한 학파 혹은 저명한 교수 등은 있다. 즉 학교라는 울타리보다 거기서 활동하는 학자들이나 연구소나 교육평가의 비중으로 작용한다.
이게 바람직한 교육 평가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중부에 있는 빌레펠트 대학(Universität zu Bielefeld)의 경우, 우리에게는 그 대학이 다름이 아니라, “시스템 이론”을 창조한 저명한 사회학자 루만(N. Luhman)이 거기서 정년퇴임 때까지 25년 간 사회학이론을 가르치고 연구했다는 사실만으로 벌써 충분히 유명한 대학이 되었다.
그런데 빌레펠트 대학은 한국의 서울대 같이 특별한 대학이 아니라 여느 다른 독일대학과 차이가 없는 보통 대학들 중의 하나이며 오히려 규모는 작은 편에 속한다. 우리도 특정 학교라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학자라는 개인 혹은 연구소 혹은 학파라는 연구 집단이 존중되는 교육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식 자본주의, 개인주의 교육의 영향과 전통적 과거주의, 유교주의 문치주의 등이 결합함으로써 학벌이라는 흉측한 괴물을 배출하고 말았다.
명문고니 일류대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학부모들과 아이들에게는 편안한 날이 없다. 좋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가히 살인적인 교육 전쟁이 발발한다. 명문학교와 더불어 돈과 지식이 동일시되고 사회는 아이들에게 극심한 교육 경쟁을 강요하게 된다. 그 음악을 제발 틀지 마세요, DJ!
좀 더 나은 교육 여건을 위해 한국을 떠나는 이른바 탈한국(脫韓國) 러시가 TV에서 소개될 때, 가진 게 없어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는 돈 없는 민초(民草)들은 말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제는 한국에 남아 있는 게 무슨 천형(天刑)처럼 느껴진다.
이런 문제가 신문지상에 많이 소개되어 특별히 이 책에서 다룰 필요가 없지만 한국 교육의 총체적 소외 라는 현상을 규정하기 위해 부득불 여기서 서술을 한다.
이른바 조기 유학, 해외연수를 보내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들이다.
그들은 현금의 한국의 학교 교육제도 혹은 사교육 등에 불만을 느끼기 때문에 어린 자녀를 해외로 보내는 것이다.
‐ 조기유학의 원인 분석 ‐
한국 사회의 좀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조기에 해외에 보내는 이유들을 좀 자세히 분석해 본다면 이런 사정이 발견된다 :
① 첫째 지나치게 경직화한 한국의 교육제도가 조기 유학을 부른다. 예를 들면 현행의 강제적 평준화 때문에 학생들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학교에 배정되었을 때 부모나 학생은 유학을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미션스쿨의 경우 종교 문제로 학교와 개인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그 다음은 학교 가는 거리나 학교의 명성등에 대해 학생측이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한 신문 사설은 “교육 선택권 없으니 海外로 갈 수밖에” 라는 글을 썼다.
② 둘째 이유는 한국의 극심한 사교육 현상과 고액의 사교육비 문제이다. 자녀를 해외에 유학 보내는 것이 한국에서 비싼 사교육비 내면서 교육시키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힌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리고 사교육은 근본적으로 입시위주의 교육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의 살인적인 입시교육, 입시지옥이 조기유학, 한국 탈출을 야기하는 것이다.
③ 셋째, 공교육, 즉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이 조기유학을 부추긴다. 가령 영어 교육의 경우 한국에서 십여년 간 영어를 공부하지만 영어 발음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한국의 교육계의 치욕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공부하면 영어라도 하나 제대로 건진다는 계산을 한다.
그리고 한국의 고등교육 역시 극히 부실하다는 사실이다. 즉 대학의 연구 수준 혹은 강의 수준이 국제적으로 보아 한참 아래에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의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하는 국립 서울대의 경우 그 학문적, 교육적 역량이 세계 50위 밖이라는 것이 여러 번 지적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공교육 부실이란 다른 무엇보다 대학교육의 부실을 말한다.
한국 대학의 수준이 그렇게 낮은 이유는 복잡하겠지만 필자는 대학 교수들 간의 경쟁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교수들의 학문적 경쟁 부재의 원인은 대학의 전근대적인 지배구조, 운영구조 때문이다. 혹자는 대학의 예산 부족, 정부로부터의 재정 지원부족 등에서 한국 대학의 낙후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 역시 사실이기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학의 운영 구조의 낙후성”에 있다 :
즉 “대학의 운영이 미국식의 민영화내지 시장주의도 아니고 독일식의 관료주의도 아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중세적 봉건주의 구조라고 해야 한다. 즉 교수들은, 철밥통 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번 고용되면 평생 직업과 봉급이 위협 받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다른 직장처럼 상(償)도 없고 벌(罰)도 없으며 특별 보너스나 감봉처분도 없다. 그리고 회사 직원이나 공무원과도 달리 전혀 교수들은 상급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다. 그러니 한번 교수가 되면 특별히 잘 살지는 못해도 평생 고인 물처럼 천하태평으로 지낼 수가 있다.
사회적으로 볼 때는 힘없고 보수도 높지 않는 교수 직업이지만, 그들은 그러나 자기 영역에서는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전공분야, 전공 학과에서는 거의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고 석ᆞ박사 생들과 시간강사의 생사여탈(生死與奪) 의 권리를 지닌 지방 영주로서 군림한다. 이런 봉건적 지배구조가 대학을 중세적 인권유린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암흑지대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학의 봉건적 운영구조는 학벌주의 그리고 입시위주의 교육제도와 결부되어 대학을 거의 절름발이 상태로 만들었다.
이런 폐쇄적 고등교육의 구조는 또한 대학 사회의 비민주성, 권위주의 등과 연결되고 또 다른 한편 비리, 불법의 온상으로 전락한 사학재단의 현주소를 암시하는 것이다. 대학의 비리, 부실, 인권유린 그리고 낙후성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더 상세히 분석을 해야 한다.
④ 넷 째 자녀의 학교 성적이 나쁜 경우이다. 다른 이유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자녀를 조기에 해외로 보내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자녀들이 한국의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이 나빠 그런 성적으로는 도저히 좋은 상급학교에 진급할 수 없을 때 부모들은 차라리 해외에서의 학습을 고려한다. 이는 일종의 현실 도피성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아는 한 교수는 솔직히 ‘자기 아이가 국내 학교 성적이 부진하여 조만간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못하던 아이들이 외국에 나가면 더 힘들어진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 심각한 정신적, 문화적 갈등과 고통을 초래하다, 따라서 아이들이 방황하고 탈선하기 쉽다. 하물며 유학의 목적인 학업까지 힘들어 진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린 자녀를 해외에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는 단순히 교육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과도한 유학비 지출로 인해 국가경제를 좀먹고 가정을 파괴하는 부정적인 사회현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일보 2003.2.19일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1999년 12만170명이던 대학 이상 유학생(어학연수 포함) 수는 2001년 들어 14만9933명으로 늘었으며, 작년에는 15만5327명까지 올라갔다.
1998년 1562명이던 초·중·고생 조기유학도 1999년 1839명, 2000년 4397명, 2001년 7944명으로 급증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작년 조기유학생 수는 아직 공식통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교육 전문가들은 추세로 볼 때 1만5000명 가까이 올라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유학생과 조기유학생이 해외에서 쓴 돈은 1998년 8억2970만달러, 2000년 9억5780만달러, 2001년 10억7000만달러, 2002년 14억2610만달러로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매년 하반기 지출 규모가 더 커지는 점으로 볼 때 올해에는 쉽게 2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박중현기자 jhpark@chosun.com ) (방현철기자 banghc@chosun.com )
그런데 다른 신문 기사를 보니 작년(2002년) 작년 유학경비 5조7천억원으로 교육부예산의 25%를 차지했다고 한다. 유학과 해외연수는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여 가정의 존립을 위협하고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정신적 희생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이처럼 엄청난 외화 유출을 야기한다.
그런데 국내 신문들은 이구동성으로 조기유학을 막기 위해서는 교육시장을 개방해서 국내에서도 외국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질 높은 교육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중앙일보 인터넷판 2003년 10월 28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
(…) 이와 관련해 필자는 하루빨리 대학교육이나 성인교육 시장을 외국에 개방해 국내에서도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질 높은 교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절실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나 교육관련 단체들이 서로 ‘힘겨루기’만 계속한다면 해외유학이나 고급인재의 해외유출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필자가 말하는 대로 국내의 교육제도를 개선하지 않고 무조건 외국의 유명 학교를 수입한다면 국내 교육시장은 아마 거의 외국 기관에 의해 잠식될 것 같다. 이는 마치 요즘 한국의 대기업, 금융 기관들이 대거 외국 자본에 팔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기업이나 은행과 달라 교육은 한 국가와 민족의 얼과 혼을 형성하는 일이고 또 이를 담보로 민족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는 민족의 자존과 독립 그리고 복지의 실체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 2003.11.18) 에 실린 박성주/KAIST 테크노 경영대학원장의 글 “교육 태스크포스팀 만들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만악의 근원' 전락한 교육 … 과학적 진단과 처방 절실1960년대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잘살았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필리핀에 가면 엄청난 빈부 격차와 낡은 차량들로 아수라장인 길거리를 보게 된다. 잘살던 나라가 왜 이렇게 됐을까?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어느 필리핀 인사의 얘기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초기 이민시절 교포들이 하와이에서 피땀 흘려 고생하며 어렵게 번 돈으로 모국에 대학교(인하대)를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필리핀에서는 유력인사들이 자제들을 모두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교육시키고 스스로 인재를 키우는 능력을 저버렸기 때문에 이 모양이 되었다. 사회의 리더들이 오히려 미국의 속국이 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 ”
그리고 교육시장을 해외에 개방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우선 국내에서 교육 선택권, 학교 선택권을 국민들에게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조기 유학의 원인 중 ‘①첫째 지나치게 경직화한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한 해결책은 공교육에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굳이 해외 개방을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다루겠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그 당시 우리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던 일본 교육을 마다하고 굳이 원초적인 민족 교육 운동을 외친 것은 바로 조국의 독립 때문이었다. 설령 기술이나 이론 혹은 지식의 수준이 높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교육은 결국 민족혼을 말살하고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 논리로서 아직 주체성이 정립이 안된 아이들을 조기에 해외 유학 보내거나 아니면 외국의 교육기관들이 한국의 교육시장을 마구 잠식할 때 우리는 필리핀의 전철을 밟아 퇴보하든지 아니면 조만간 다시 한 번 국치일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대 같은 국제화의 시대에 민족이나 국가 없이도 뛰어난 개인들이 온 지구를 돌아다니며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바라는 부모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하라. 그런데 어린 나이에 조국의 수준이 낮다고 조국을 떠난다면 그 아이는 조국에 대해 자부심은 거의 없고 조국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며 종내 조국을 증오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 나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결국 자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변하게 되고 이는 그 아이 자신을 위해서도 엄청난 손실로 나타난다. 따라서 국적 없는 교육, 오직 이기적인 교육, 혼자 잘 살겠다고 해외로 떠나는 교육은 자기 모순에 빠진다.
물론 입시지옥이라는 한국의 교육상황이 결코 바람직하다는 것은 안다. 아이들이 우선 죽을 지경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사는 법을 배우고 적응하면서 제도를 개선해야지 불쌍한 다수의 학생들을 버려두고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나 버린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다.
차라리 워낙 가난해서 생계를 벌기 위해 외국으로 이민가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살만하면서도 자녀의 미래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부모의 욕심으로 해외에 보내는 것은 개인으로 보나 공동체로 보나 결코 이득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필자 역시 유학을 갔다 왔다, 그러나 나이가 34세에 갔기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국가의식, 민족의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선진국에서 무언가 하나 더 배우더라도 이는 언젠가 귀국하여 조국의 개선과 발전을 위해 이용한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것이지 나 혼자 잘살아 보자고 그런 경우는 없었다. 하여간 필자의 경우는 그렇다, 즉 내 민족 내 동포 사랑과 무관하고 오직 나만을 위한 유학이나 공부는 도무지 의미가 없었다.
4-8. 조기 유학, 기러기 아빠를 막는 대안 – 학교 선택권 부여
위에서 인용한 조선일보 2003.2.19일 기사의 뒷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이같은 유학과 해외연수 붐은 ‘외화 유출’의 폐단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정 파괴’ 현상까지 일으키고 있다. 아내를 딸려 자식을 조기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 가장이 월급 대부분을 유학 및 생활 비용으로 송금하고 자신은 국내 단칸방에서 피폐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하지만 유학·연수를 ‘외화낭비’라고 비난만 하는 태도로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의 부실한 공교육, 천문학적 액수의 사교육비, 곳곳에 널린 비교육적 환경, 비효율적인 영어 교육 방식 등을 해결하지 않는 한 누구도 해외유학과 연수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경제적, 가정적 피해를 가져오는 조기유학과 해외연수를 막는 방법으로 신문들은 한결같이 교육기장을 해외에 개방해서 국내에서도 유명한 외국 대학이나 대학원 혹은 고등학교까지도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잘못된 분석으로 간주하고 우선 국내의 학교교육, 공교육에 자유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즉 개인에게 학교선택의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학원교육에 대한 공교육의 개선책이기도 하다. 공교육에 경쟁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사교육 방지와 조기유학 방지의 2중적인 효과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제목: 경쟁하지 않는 한국의 공교육에 대하여
한국에 사교육이 활발한 이유의 하나는 사교육 기관들, 즉 학원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교육 기관들은 여기에 비해 너무나 침체되어있고 경쟁이 없다. 이것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거의 비슷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대학입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고등학교의 경우 이들과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사설학원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력과 비교가 되니 더욱 학교 간의 경쟁이 없고 따라서 그 분위기는 침체되고 생기가 없다. 학생들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을 깔보고 비웃는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이고 학원 선생님이 때리면 그것은 사랑의 매라고 간주한다.
10.16일자 조선일보 가사를 보니 “학교가 ‘학생이 모르면 내가 죽는다’는 각오로 가르칠 수 있을까요.” “학원은 ‘모르면 알 때까지 가르친다’는 적극성이 있습니다.” 라고 학부모들은 학원의 적극적 노력을 치하한다.
그리고 필자의 친구 말을 들으면 학부모 면담 시에 학교 선생은 한 학생에 대해 20분 밖에 말할 것이 없는데 학원선생은 동일한 학생에 대해 두 시간을 말하고도 더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이러니 학교가 학원에 도저히 따라가지를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행 한국의 공교육 부실이 공교육 자체의 모순으로 보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민간의 학교설립을 자유롭게 하여 경쟁력 있는 교육을 시키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조선일보와 한나라당 그리고 현 정부 고위 관리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본인의 생각은 이들 기득권층의 공교육에 대한 이해가 극히 편협하다는 것이다. 가령 독일 같은 나라의 경우 전체 교육이 국가주의를 취하고 있지만 학교들간, 교사들간 혹은 교수들간의 경쟁은 치열하다. 특히 본인이 직접 체험한 바 있는 독일의 대학 교수들의 학문적 경쟁력은 피를 말릴 정도로 치열하다. 따라서 한국의 학교들의 경쟁력 부족은 공교육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적인, 즉 잘못된 공교육이 가지는 특수한 문제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미 여러 번 강조했지만 한국의 공교육은 자유가 없다, 즉 학생들이 자기가 다니고 싶은 학교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것이 현행 학교교육의 가장 큰 문제이다. 이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강제적 학교배정이 고등학교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적 이유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만약 강제적 학교배정을 중단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학교 선택권을 부여할 때 엄청난 혼란이 올 것도 미리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선택의 자유를 실시해야 한다. 이것이 헌법에 일치하는 교육의 자유이고 권리이다. 물론 그 이전에 모든 교육기관에 평등한 국가적 지원을 해야 한다. 학교 선택의 자유! 이 하나만 제대로 실시하면 공교육이 경쟁이 없다는 말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릴 것이다. 독일의 경우 초등학교 취학 시부터 학부모는 아이가 갈 수 있는 여러 학교들을 미리 방문하고 숙고하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항상 편입학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이러면 교육 공무원들도 머리를 싸매고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연구한다. 그리고 교사들에게도 정한 고정급 외에도 학생지도 수당을 성과급으로 지불하면 교사들도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문제는 현행의 강제적 학교배정, 학급 배당 및 담임 교사 제도 등 획일적 교육제도이다. 그리고 한 학교에 취학아동이 오지 않으면 그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니 교장이하 모든 학교 담당자들은 자연히 경쟁심을 가지고 타학교에 뒤지지 않기 위해 분발하는 것이다. 공교육이나 교육의 국가주의 혹은 교사의 관료주의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운영의 묘를 이용하면 이처럼 경쟁과 높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굳이 미국식의 명문 사립학교(자립형 사립고) 없이도 국가주의 학교제도를 통해 교육과 학습의 인센티브를 높힐 수 있다. 결론 국가주도의 교육과 경쟁은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 문제는 현행 한국의 지나친 호봉제, 강제적 학급 편성, 강제적 학교배정 등 잘못된 행정 편의주의이다. 교육과 학습의 자유를 달라! 바꿔야 한다.
이처럼 국내 학교제도의 모순을 우선 해결할 수 있다면 외국의 저명 교육기관이 국내 교육시장에 침투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그렇지 않고 국내의 모순을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외국의 교육기관이 무차별 유입된다면 위에서도 한 번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교육 시장은 마치 IMF 이후 한국의 금융시장이나 주식시장이 그런 것처럼 외국 교육자본에 의해 침식당할 것이다, 즉 이는 교육의 IMF라고 할 것이다.
4-9. 부동산과 교육
4-9-1. 대한민국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그의 청년 시절(1802년) 독일의 헌법에 대하여 쓴
논문 (Verfassung Deutschlands)에서 “독일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다” 라고 썼다. 그 의미는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껍질에 쌓여 있으면서 그 내실은 지방의 영주들이 나라를 분리하여 지배하는 봉건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에는 국민들의 자유나 평등이 없다. 따라서 헤겔은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국민의 통일성이 없는 그런 조국을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라는 비관적인 수사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이후 한국도 부동산 경기는 한풀 꺾였다. 그러나 지난 2-3년 동안 우리나라의 부동산, 아파트 경기 과열은 극심하여 전국을 부동산 열기로 몰아갔다. 아래의 글은 그 당시 쓰여진 글이다. 따라서 다소 현실감은 떨어지나 그간의 한국의 상태를 공부한다는 의미로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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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동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이 나라에 법과 질서가 있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아파트에 미친 나라이다. 검단 신도시 개발, 과천 지역 아파트 가격 한 달에 5억 폭등, 건전한 시민들 내 집 마련의 절망! 등
실제로 이와 관련이 있는 시민들의 분노와 당혹감, 절망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노무현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아파트값을 억제하겠다고 틈만 있으면 강조했지만 서울-경기 지역의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노정권 들어선지 3년 반 만에 100% 이상 인상되었다고 한다.
“부동산정보업체인 닥터아파트는 2003년 2월부터 이달 8일까지 재건축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서울 경기 인천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 653개 평형의 시세를 조사했다. 분석 결과 이 기간 이들 아파트의 평당 평균 매매가는 1373만 원에서 2871만 원으로 109.1% 올랐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34평형은 5억6500만 원에서 12억7500만 원으로 7억1000만 원(125.7%) 올랐다”. (동아일보 11/13일자)
대치동 은마 아파트 34평형을 소유한 사람은 3년 반 사이에 무려 7억을 번 것이다. 이런 불로소득의 증대가 일반 시민들의 생활감정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도대체 일반 국민들이 무슨 수로 1년에 2억씩 벌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가난한 서민들과는 무관한 이야기이겠지만 번듯한 직장을 가진 소위 중산층 가정에는 아마도 핵폭탄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가령 수원에 사는 삼성전자의 ㅈ 부장의 경우도 그러하다. ㅈ 부장과 그의 부인은 땅 투기를 할 줄 모르는 성실하고 근면한 중산 시민들이다. 그러나 그 부부는 몇일 전 추병직 건교부 장관이 검단 신도시 개발 소식을 흘리자마자 야기된 부동산 과열 경기로 인해서 거의 가정 파탄에까지 갈 뻔한 위기를 맞이했었다. 가만히 앉아서 누구는 몇 억을 버는 데, 우리는 뭐했느냐는 자조와 분노의 어두운 핏빛이 그의 얼굴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 외에도 ‘아프트 값이 불과 한 달에 1억이 올랐네 5억이 올랐네’ 하는 이야기도 사람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한 달에 1 억원은 커녕 1백만원도 저축할 수 없는 서민들에게 아파트값 상승이야기는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와 같다. 그런 엄청난 돈과 집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種)의 사람들일 것이라는 상상이 된다. 우리는 몸만 대한민국에 의탁하고 있지 국가의 통일성과 국민들의 동질성은 이미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국민의 평등성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청년 헤겔의 말처럼 ‘대한민국은 이미 국가가 아니다’. 이런 사회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획일적인 평등주의, 사회주의로 복귀할 수도 없다. 시장과 자본의 활동을 부자연스럽게 막을 수는 없다.
시민단체들이나 정부는 아파트 원가를 공개하거나 후분양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떠든다. 혹은 정부자금으로 아파트의 가격의 30%를 떨어뜨린다는 소문도 있다. 토지공사나 주택공사가 땅장사를 심하게 해먹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주택담보 대출을 제한하고 금리를 높인다는 말도 한다. 또는 아파트 가격 상한제를 다시 도입한다는 말도 들린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금 비싼 값에 집을 샀다가는 낭패를 면할 수 없다”라고 국민들을 경계한다. 국민들은 정부의 부동산 시책을 믿지를 못한다.
4-9-2. 수도권과 지방의 다른 이해관계
2006년 10월 27일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서울 근처에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발표한 이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또 한 번 금이 갔다. 한국의 대표적인 중앙신문사인 조ㆍ중ㆍ동은 이를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십자포화를 터뜨려 가뜩이나 취약한 노무현 정부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시장의 흐름을 정치가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체계이다. 수도권이나 강남에 주택의 수요가 많으면 이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공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말인즉 맞다. 그래서 그간 입을 열지 못했던 온갖 경제학자니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시장을 억압하겠다는 좌파적 오만을 버려라”라고 외치고 다닌다. 필자 역시 이들의 원론적 주장을 반박할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의 맹점은 수도권이나 강남만이 대한민국의 전부인줄 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노무현 정부의 무능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노무현은 정권의 과제를 지방분권과 국토의 균형적 발전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공사나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한사코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강남 아파트 값은 반드시 잡겠다고 의지를 결연히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근시안적인 정책이었다.
현금의 부동산 대란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그간 8차례나 굵직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참여정부는 물론이고 조ㆍ중ㆍ동이나 각종 경제학자들, 시민단체들 혹은 한나라당 역시 여기에 대한 책임 있는 대안이 없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전의 ‘남서울 교회’ 그리고 지금의 ‘남서울 은혜교회’를 담임하는 홍정길 목사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라고 종종 말했다.
그런데 시장의 흐름을 왜곡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동산의 시장원리를 부르짖는 조ㆍ중ㆍ동이나 각종 경제학자들과 달리 지방의 신문들은 현금의 부동산 광풍과 그 해법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 다시 한국이 얼마나 분열된 사회인가를 알 수 있다. 지방의 여론은 서울 주변의 신도시 개발을 반대하고 있다. 즉, “수도권의 빗장(규제)을 풀면 지방은 쪽박”(충청투데이2006/11/11) 이라는 구호가 하루 사이 아파트 가격이 달라져 가는 수도권과의 상반된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 중앙의 메이저 언론들은 이런 아이러니를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수도권 주민들의 이익만을 반영하고 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이런 상반된 견해를 모두 반영하는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그토록 욕을 들어먹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정부 역시 그런 이해를 고려하기에 수도권 개발과 강남 재건축 시장을 그렇게 억제해온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를 따르면 부동산 문제는 노무현의 무능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적 모순이 그 원인인 것이다. 이는 마치 IMF 위기가 비록 김영삼 정권 시절에 일어났지만 김영삼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두 역사적인 악순환과 오류의 축적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김영삼이나 노무현이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더 멍청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문제는 그들의 지성이나 이해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부동산 문제에 관해 미리 필자의 결론을 말한다면, 이는 부동산 자체의 문제, 즉 부동산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문제로만 볼 때, 결코 이를 풀 수 없다. 이는 교육제도의 개선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즉 교육의 평등, 기회균등을 철저히 실행하고 경제규제는 풀자는 것이다. 이를 필자는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즉 공화주의란 교육의 국가주의와 경제의 시장주의의 결합을 말한다.
그런데 그토록 심하게 벌어진 중앙과 지방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를 교육 하나로 해결한다고 믿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지 모르나 필자는 문제의 핵심을 거기 있다고 믿는다.
대전참여자치연대 등 전국 25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수도권 과밀반대 전국연대(가칭)’준비위가 10일 충남도청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도권 규제완화 저지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현종 기자 (충청투데이 2006/11/11)
4-9-3. 공화주의 : 수도권과 지방의 공생전략
위에서 필자는 교육은 국가적으로 규제하고 경제는 자유로 하자는 것을 공화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거기 하나 더 필요한 것은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공화주의란 좀 더 심하게 말해서 교육의 사회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사회주의란 현금의 한국의 평준화 제도와는 다르다. 이는 독일의 학교 제도에서 보는 것처럼 국가(공동체)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개인은 자기 취향에 따라서 학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필자의 교육사회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교육의 시장적-사회주의 이다. 교육의 수요와 공급을 획일적인 배급이나 중앙통제적인 계획이 아니라 교육의 필요자인 국민과 교육의 공급자인 국가가 서로 시장 기능을 통해서 매개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지방이 낙후한 까닭은 경제나 공장 혹은 산업 시설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이는 역대의 정부가 항상 유념해온 것이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역사에서 지방의 공업이나 농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 정부가 어디에 있는가? 다들 지방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눈물겹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실패에서 보는 것처럼 역대 정부의 지방 살리기는 대부분 실패였다. 지방에 공장을 짓거나 산업 단지를 만들어도 들어갈 사람이 없다. 그 대신 서울에서는 사람이 넘쳐난다.
오늘 날 산업은 교육과 밀접한 연결을 가진다. 소위 지식과 정보의 시대이다. 자본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적 자원이다. 인재의 확보가 초일류 기업의 생존조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방에는 좋은 학교도 없고 인재도 없다. 머리 좋은 지방 학생들은 모두 서울로 직행한다. 서울은 지방의 인재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다.
노무현은 행정부와 각종 정부관련 기관을 지방에 옮김으로써 국가의 균형 발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은 다르다, 수도 기능의 일부를 지방에 옮기는 것보다 차라리 서울대 하나를 지방에 옮기는 것이 낫다.
다시 말해서 서울에 좋은 대학들은 다 있고 서울-지방 간의 교육 차이는 점점 벌어져 온 것이다. 결국 교육의 독점이 서울의 독점 수도권의 비대화를 가져온 것이다.
노무현은 이런 수도권과 서울의 과밀화, 비대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수도를 지방으로 옮기니 지방에다가 신도시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고 우리는 그의 그런 진정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은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아무리 동기가 선하다고 해도 결과가 악하면 그 일은 잘못된 것이고 역사의 실패로 기록된다.
노무현이 의도한 국토의 균형 발전 구상은 강남지역 건축 억제 혹은 강남 수도권 규제나 공장총량제 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교육의 평등주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필자가 꿈꾸는 교육공화국이다.
필자의 교육공화국 구상 역시 엄청난 문제와 어려움을 야기하지만 하나의 삽화만을 생각하면 필자의 이 구상에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혹은 강남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녀 교육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전국 어디서나 교육 여건만 동일하고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가능하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굳이 공해가 심하고 땅값 비싼 강남, 서울, 수도권에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해방이후 서울로, 서울로만 집중하는 인간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부동산 문제의 원인은 교육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박정희가 강남을 개발할 때, 먼저 경기고니 서울고니 하는 명문고들을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긴 것이다. 이런 국민의 심리를 알기에 이명박도 강북개발을 위하여 강북에 특목고를 설치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고 노무현도 판교에 학원단지를 유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얄팍한 정치적 술수로서 학교문제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학교의 수준을 전국적으로 평등화함으로써 사회통합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국토의 균형개발을 원칙적으로 교육에 넘긴 다음에는 경제는 문자 그대로 시장의 권위에 일임할 수 가 있다. 경기도의 경우 지역규제만 풀린다면 4만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이 당장 가능하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경제가 그렇게 어렵고 청년 실업이 높은 이유는 기업에 자금이 없거나 기술력이 낮아서가 아니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 때문이다. 불필요한 규제만 풀리면 한국의 경제는 활력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 규제의 목적 역시 선(善)을 지향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이런 선한 목적을 위한 통제, 규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불필요하게 되는 조건이 있다. 교육의 균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善)과 선(善)의 투쟁이 비극이다”라고 했다. 노무현이나 그 전의 대통령들에게 부족한 것은 착한 의도나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인식의 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메이저 언론의 문제는 교육도 자유화하고 경제도 자유화하라고 강변한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국토를 분열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국민의 통일성, 사회적 통합을 의미한다. 이 둘 다 필요하다. 한국의 메이저 언론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수도권은 전국을 빨아들여 거대한 괴물이 될 것이다.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남한 사회는 이제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들의 구조로 변할 것이다. 강남에서 멀어질수록 낙후한 지역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나 조ㆍ중ㆍ동이 부르짖는 시장원리와 노무현의 국토균형발전을 종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필자의 (교육) 공화주의이다.
그리고 공화주의에서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은 통일정책이다. 통일의 이념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절충이 아니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금의 북한의 김일성왕조, 절대주의 국가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현재의 교육제도, 입시제도를 바꾸어야 할 이유는 또 많이 있다. 그 요점은 현행의 입시위주의 암기식, 주입식 교육이 인재의 창의력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토론하였다. 지나친 사교육과 조기유학, 기러기 아빠 등의 문제도 한국 사회의 통증을 유발하는 예리한 문제들이다.
곧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그러나 대권주자들의 시국문제 정책은 모호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많다. 가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한강과 낙동강을 관통하는 거대 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국가발전을 위한 자신의 과제, 사명(mission)으로 삼고 있다. 이는 박정희식의 토목국가 구상의 반복에 불과하다. 21세기는 그런 대 토목 사업으로 국운을 좌지우지 할 수가 없다.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는 국가의 체질 개선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국가 체질은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 등을 외치는 신자유주의 밖의 것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물어 볼 것도 없다.
필자가 외치는 교육 공화주의 운동도 조만간 가시화될 것으로 믿는다.
경제 문제, 청년실업 문제, 부동산 문제 등의 심각한 문제들이 모두 교육 문제라는 핵심 고리에 걸린 현실이 바로 한국 사회이다. 여기에 대한 통찰력이 더욱 절실한 때이다.
4-10. 정답주의 교육의 폐단
한국의 교육은 정답만을 요구한다. 특히 대학수능시험은 철저한 객관식 시험으로서이는 1%의 오류도 인정하지 않는다. 점수 1~2점 차이에 학생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된다. 학생들에게는 완벽이 요구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완벽을 지향하는 교육을 수십년동안 받아온 한국의 어른들은 왜 그렇게 무능한 것일까? 서울대니 사법고시니 하는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세상에 나온 사회의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무능한 것일까? 외환위기는 왜 터졌고 또 왜 88세대니 하는 청년 실업자들이 이 나라에 우글거리는 것일까?
4-10-1. 공부만능주의
우리 나라의 지나친 입시위주의 교육과 이를 위한 성적 압박의 폐해에 대해서 신문 지상과 각종 매스콤을 통해서 많이 인지되어 왔다. 그런데 학교문제와 관련된 그런 매스콤의 기사는 주로 극단적인 아동들의 피해상황만을 보고해 왔다. 가령 하루 14시간 이상 공부해야 하는 초등학생이 공부 부담을 견디다 못해서 자살한 이야기나 혹은 수능 시험을 치다가 시험장을 빠져나와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자살한 이야기 등이었다. 또는 성적 경쟁, 시험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적으로 여기는 살벌한 교실 풍조나 왕따, 학교 폭력 등도 지나친 성적 경쟁과 공부만능주의가 몰고 온 폐단들이었다.
이런 끔찍한 입시 지옥의 폐단과 더불어 주목을 요하는 다른 교육과 학생들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거의 인지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 하나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벙어리 교육의 폐단이다. 이는 소위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현상인데, 언어 표현력과 발표력이 극히 위축된다는 사실이다.
4-10-2. 오류를 용납하지 못하는 교육
요즘 초등학교 시절에서부터 지나친 성적 향상과 선행 학습 혹은 입시위주의 학습을 많이 실시한 결과 아이들의 발표력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 발표는 단순한 이야기를 포함하여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대화와 표현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런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으나 필자가 볼 때에는 학교나 학원 같은 곳의 수업이 지나치게 정답을 중요시하고 오답을 기피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본다. 즉 오류에 대한 공포심이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소심하게 성격을 형성하게 한다. 가령 중간고사나 무슨 시험을 보고나서 아이가 정답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경우 “너는 아는 것도 틀렸다”, 혹은 “조금만 주의했다면 맞추었을 것을 …” 이라고 실망한다.
사실 시험 문제가 다 똑 부러지게 명백한 답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언어 영역의 경우나 인문 사회 과목들은 선다형으로 정오(正誤)를 가릴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이런 경우 학생들에게 오답이란 극히 나쁜 것이고 그런 실수를 한 자신에게 경멸감과 자괴감을 야기한다.
이런 과정이 교육현장에서 몇 십 년 식 되풀이되다 보니 교육의 중요한 요소인 실수나 오류는 끔직한 죄악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람은 실수나 오류를 통해서 배운다. 시행착오(trial and error) 는 인간의 자기 성장과 발전의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기의 인간에게 실수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하고 실수하더라도 이를 용납하고 그 대신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우리 나라의 학교와 사회는 오류를 죄악시하고 이를 <발생하면 안 되는 것> 혹은 <공부 못하는 바보> 등과 같은 개념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런 오류와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교육 풍토는 거시적으로,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초래한다. 그 중 중요한 것들이 모험심과 창의력의 결핍이다.
4-10-3. 창의성과 모험심은 오류를 전제한다.
지나치게 정답을 요구하는 학교 교육과는 달리 사회 생활은 모험과 창의성을 요구한다. 이는 비단 개인적인 삶의 결정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기업가 정신, 책임감, 벤쳐 정신을 위해서도 창의력과 모험심 그리고 결단력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모험 없이 이익 없다( No risk, no return) 라는 자본주의-시장 발전을 위해서도 모험심과 창의력은 생존의 필수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현행의 학교 교육,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런 사회적, 경쟁적 생존의 조건과 심각히 불일치하는 제도이다.
모험이나 창조는 항상 오류와 실수를 전제한다. 항상 답을 알고 있다면 모험이나 창조, 생산력의 향상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폐습을 우리는 교과서주의, 혹은 정답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한 때, 세계 경제의 2인자로서 아시아를 대표한 일본의 경제 침체 역시 그들의 입시위주의 교육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이 때문에 새로운 일을 못하게 하는 폐습은 개인적인 생활이나 국가적인 생활 모두를 해치는 악덕이다.
4-10-4. 객관식 평가와 표현력 저하
그리고 다른 문제는 성적이 나쁘거나 공부를 못한다고 알려지면 주위로부터 고립되는 학습 분위기이다.
사람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고 자라나는데 지금의 학교, 학원 분위기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지나친 입시위주의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암기식, 주입식 공부가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학과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응용문제를 잘 푸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교육 활동의 절반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이를 다시 논리적-개념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보통 서술형 문제나 논술 혹은 구두시험 등으로 평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여건은 이런 평가 방식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선다형 혹은 객관식 시험으로 성적의 평가가 이루어진다.
여기에 비해서 서구의 모든 나라들은 소위 주관식 시험( 서술형, 논술형, 구두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의 학습성취도를 평가한다. 객관식은 평가의 보조 자료로 활용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주입식의 교육의 강압 하에 많은 아이들의 인간성이나 개성 혹은 창의력 등이 개발이 되지 않고 억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명문대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소신이나 혹은 학문적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나 학원 등의 수업은 거의 벙어리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수업이 지식을 이미 갖춘 선생님이나 혹은 지식의 창고라고 할 수 있는 교과서, 교재를 절대적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그런 지식을 빨리, 정확하게 흡수하고 또 응용문제를 풀 수 있는가 하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
물론 영어 같은 과목은 말하기나 쓰기를 하지만 한 사람의 기본적인 사고와 논리는 모국어 활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런 입시위주의 학습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자유와 독립성, 책임감과 표현력의 발전에 심대한 장애를 초래한다. 그리고 또 그런 학과 공부의 부담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단히 무거운 편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학부모들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유명한 교육철학자 루소가 말한 것처럼 어린이의 교육은 극히 조심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치기 전에 아이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또 학습이나 공부는 무거운 부담이 되면 안 된다고 위대한 교육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어린이의 교육은 놀이와 같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는 “억지로 배운 지식은 결코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다”라고 하면서 자유로운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런 교육의 현실과 이상의 딜렘마를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것 중의 하나가 토론. 논술 학습이다. 토론, 논술 혹은 작문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런 맥락에서 최근 강조되는 토론, 논술 학습은 현재 입시교육과 주입식, 암기식 위주의 학과목 수업의 폐해에 대한 치료제이다.
4-11. 수능 시험에 즈음하여
또 다시 수능시험의 시간이 다가 온다. 신문에서는 벌써 D 데이를 카운트하고 있다. 이는 마치 전국적인 규모의 시한 폭탄에 설치된 시계의 째각이는 소리 같이 거의 모든 매스콤을 통해 그 긴장과 초조함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 같다. 대학 수학능력시험(SAT)이 실행되는 D-day에는 비행기도 대한민국 상공을 함부로 날지 못하고 온 공공기관과 도로교통의 체계가 모두 수험생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조정된다. 이날은 60만 명 이상이 한꺼번에 시험을 보는 국가적 대행사이다. 이는 아이들이 12년에 걸친 학교교육을 총결산하는 날이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 30-40년 정도의 나머지 인생의 성패, 그리고 사회적 진출이 가름되는 그야말로 필사적인 경주의 날이다. 이런 나라는 아마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나 한다.
그간 많은 문제를 안고 계속적인 개선 방안이 나왔지만 아직 수능시험의 근본적인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간 제기된 수학능력시험의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구한다는 취지로 다시 노력을 기울여 본다. 그리고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입시경쟁과 학벌주의는 한국 사회발전의 발전의 암적인 존재이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한 교육 개혁의 차원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의 중대한 철학적, 역사적 모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교육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원한 인식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4-11-1. 고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평등
벌써 교육계와 정치계 그리고 우리 나라의 모든 영역에서 교육문제의 모순을 지적해 왔다. 그 중에서도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수능시험과 이에 직결된 대학입시 그리고 또 이에 연결되는 학벌주의와 대학서열화의 문제점들이다. 필자는 이런 일련의 한국사회의 특유한 문제를 단순한 교육의 문제로 볼 수 없다. 이는 한국의 전근대성과 비민주적 본질을 나타내는 우리 사회의 근본과제이다. 다시 말해 학벌주의와 입시지옥은 한국이 겉으로는 인간의 자유, 평등 그리고 인권의 존엄성에 기초한 민주화 사회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존중되고 인간들 간에 평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아직 엄청난 역사적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구의 철학과 학문 그리고 인권과 자유 쟁취의 역사를 공부할 때 마다 더욱 깊이 느끼는 것이 아직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에는 국민들의 인식과 가치관의 성숙성이 너무나 미흡하다는 사실이다.
우선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이스의 경우 이 나라와 그 민족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평등성이라는 기초 위에 정립된 민주주의 문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양의 역사가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의 황금기를 지나 중세 봉건주의로 다소 쇠퇴한 듯이 보이지만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민주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1261b) 모든 시민들은 자연적으로 평등하므로 - 그리고 또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관직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 이건 간에 모든 사람들이 관직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이유도 있으므로 - 이러한 이상이 불가능할 때에는, 동등한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관직을 떠나고, 관직을 떠나서는 모두 같은 지위를 갖는다는 식으로, 그것을 모방하거나 그것에 근사한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
물론 고대 그리이스나 로마 사회에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민주주의 혹은 공화정치가 근대의 민주주의와는 시행의 범위가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는 것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기는 하지만 고대 서양사회는 시민들의 자연적인 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고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가 아주 상식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과두정치(참주정치)나 군주정치 등이 그 당시에도 있기는 했으나 그 역시 민주적인 토양을 완전히 해체하는 바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서구문명이 근대에 와서 만인평등,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다시 부활시킨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중국의 문화는 孔子이래로 군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오직 군주의 자질과 덕성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비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괜찮다. 언제 한번 동양문화권 혹은 중국 문화권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민들의 자연적인 평등”이라는 생각에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여 본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이런 비민주주의적인 전통에서 數千 年을 살아온 한국인들 및 중국 문화권의 민족들이 근대 이후 서구 민주주의를 주로 정치의 형태로만 이해하고 이를 독재정치에 대한 대립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라고 일컫는 정당정치니 국민투표니 하는 정치적인 절차는 민주주의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이런 정치적 도구로서의 민주주의가 그렇다고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고 단지 그런 것은 ”시민들의 자연적인 평등”이라는 위대한 상식의 기반 위에서 비로소 그 알맹이를 거두는 상부구조라는 점이다.
그러한 “시민들의 자연적인 평등”은 동시에 “시민들의 자연적인 자유”라는 사상을 함축한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이스 시민들은 서로 평등하므로 관직의 배분에 있어서도 자연히 지배와 피지배자가 선천적으로 구별되는 신분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관직에 참여하고 (...) 동등한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관직을 떠나고, 관직을 떠나서는 모두 같은 지위를 갖는다는 식으로” 권력과 정치의 기본 구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빈부의 차이가 정치적인 기회균등을 말을 수 없었다. 즉, 가난한 시민에게도 정치참여와 관직의 수여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달리 생각하면 모든 그리이스 시민들은 그 능력과 자질에 있어서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필자가 교육문제를 풀기 위해 고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를 먼저 해석한 것은 현재 한국 사회 구조적인 모순의 핵심은 교육의 모순이라고 보기 때문이고 그 올바른 해명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인식을 바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적(現象的)인 문제를 임시적으로 고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한국의 치부를 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이스의 민주주의에서 배우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가치는 정태적인 측도(수능 점수 혹은 졸업대학의 서열)에 의해 결코 단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능력과 가치는 졸업 후에 점점 변화되고 발전된다. 그리고 ‘시민들의 자연적인 평등’의 사상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과거나 환경과 관련 없는 기회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또한 개인의 능력과 가치를 그 자체로서 존중하고 다른 몇 가지 기준에 의해 함부로 판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4-11-2. 동양의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과거제도
학벌주의 그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있는 하나의 -별로 좋지는 않는- 사회적 관행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벌주의 혹은 고교등급제가 그토록 문제인 이유는 한국에 그런 희랍적인 상식 - 모든 시민들의 타고난 자유와 평등 -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한국이 몇 천년동안 주로 중국의 이상 즉, 王道政治만을 우러러 보고 그런 테두리 내에서 중세이후에는 과거제도라는 국가시험이 유일한 출세의 등용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현재의 학벌주의 및 입시지옥이라는 인권침해의 유산은 위의 두 가지 전통적인 요소에서 유래한다.
전통적인, 비민주적인, 신분적인 사회의 구조적 특질은 인간의 발전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다. 이런 사회 구조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 이런 사회는 칼 포퍼가 말하는 일종의 닫힌 사회(closed society)이다. 출생부터 한 인간의 성장과 발전의 한계가 결정된다. 그러니 거기서는 인간의 능력(ability)과 가능성(possibility)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층 농민이라면 그는 평생 농사만 지으면 된다. 봉건적 신분사회, 계층사회는 개인이 노력하거나 무언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면 이를 불온(不穩)시 한다. 이는 기존의 사회질서를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봉건적 폐쇄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치와 한도가 출생의 시점에서 이미 결정된다. 인간의 소질계발이나 발전 혹은 성장 같은 단어는 이런 사회에서는 터부(taboo)시 된다. 다시 말해 전통적 신분사회는 현대와 같은 무한한 경쟁과 발전의 사상은 불필요했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비민주적인 사회의 인간결정론이다. 즉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정태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닫힌 사회는 이처럼 정태적(static)인 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이 거의 없다. 즉 계층간의 신분간의 이동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요즘 흔히 말하는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열린 사회(open society)는 동태적(dynamic)인 사회이다. 후자는 개인의 활동을 변화와 발전의 관점에서 추적한다. 개인은 그가 태어난 가문이나 계층 혹은 신분등과는 관계없이 오직 그의 실력과 그가 쟁취하는 업적에 의해서만 평가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분석해 볼 때, 그것은 겉으로는 열린사회, 민주사회 혹은 동태적인 사회처럼 보이나 속으로 보면 아직 닫힌 사회, 봉건사회 그리고 정태적인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와 그 평가는 정태적인 판정, 예를 들면 출생 시점의 가정의 상태나 혹은 그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사한 과거시험이나 수능시험 같이 어느 시점에 처한 한 인간의 상태에 의해서 그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벌주의와 학교서열주의는 개인의 가치에 대해 정태적인 평가를 행하는 제도이며 이런 사회는 개방사회가 아니라 폐쇄된 닫힌 사회 곧 비민주적이고 신분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의 머리를 죄는 놋쇠로 작용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아니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입됨) 과거제도는 비민주주의 사회, 군주주의, 왕권사회에서는 그런대로 합리적인 평가제도였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신민(臣民)의 한계라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고대 그리이스의 시민적, 민주적 평등의 이상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공평한 배분과 관직의 순환제도, 이것은 실로 전무후무한 역사적 성취였다. 왕(王)이 없는 정치제도가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이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언제 한번 왕과 신하의 차이가 보직의 순환으로 생각될 수 있었는가? 이런 것이 또한 오늘 날의 선거제도이다. 즉 대통령 역시 그 직위를 벗어나면 아무런 특권이 없다는 점이다.
비록 고대 그리이스처럼 시민들이 관직을 교대로 행사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과거제도는 실력에 의한 관직 배분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대단히 훌륭한 제도였다. 그러나 현대의 과거제도라고 할 수 있는 수능시험과 학벌제도는 현대 산업사회의 무한 경쟁 체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시스템이다. 이들은 통틀어 정태적인 평가이다. 즉 한번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했기에 그 사람이 평생 좋은 평가를 받고 또 이에 상응하는 직책을 가진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 그리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무식한 제도이다.
현대 우리 사회는 미증유(未曾有)의 혼란과 결핍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모두가 동의하는 점은 이런 국가적인 환란을 극복할 인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자본이 없어서 우리가 가난한 것이 아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아직 봉건시대의 잔재에 불과한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고 국민의 의식 역시 불합리하고 무지몽매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지도자들의 무지(無知)와 비도덕성이 이런 제도적, 국민적 파탄을 부채질하기 때문에 더욱 비극은 가중되고 있다.
4-11-3. 공부와 놀이
위에서 필자는 한국 민족의 역사적 형성과정에서 시민적 평등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의 확신 그리고 개방적인 사회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아직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많이 폐쇄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는 물론 해방이후의 잘못된 미국식의 교육제도를 수용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제도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미국식의 단선적 학교제도를 독일식의 복선적 학교제도로 바꾸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다른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입시위주의 수능위주의 교육제도의 병폐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것이 사람이 가진 창조적인 자기학습과 개발의 천성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요즘 경영학이나 미래학 관계의 책과 이론들을 보아도 우리 나라 학생들의 강제된 열심과 공부가 얼마나 해로운지 알 수 있다. 요즘의 풍조를 보면, 경쟁력있는 국제적인 기업들은 부지런함과 열심보다는 창의성과 유희적인 마인드를 추구한다. 경영자들은 부지런한 일꾼(worker) 보다는 노는 사람(player)이 더욱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업들은 직장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지는 것을 피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벼운 노는 분위기에서 창의성과 예술성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유희적 본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는 충분한 휴식과 여가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코닥(Kodak)같은 기업들은 회사 안에 장난감, 비데오, 각종 오락기구들을 갖춘 ‘유머 룸(humor room)’을 설치해 두고 있다고 한다. 이런 데서 세계 최고의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과 창의성이 개발된다. 이게 그토록 생존 경쟁이 치열한다는 다국적 기업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학교, 학생들의 분위기를 보면 그와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대학 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과 필사의 노력 - 이것이 한국 교육의 현주소이다.
플라톤 역시 어린 아이들에게 교육은 유희처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치열한 입시위주의 학습을 비판하는 여러 가지 논변들이 있었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시간적 여유 없이 오직 강압적인 학습으로 몰아가는 교육제도는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중대한 결함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입만 뻥끗하는 인적자원의 중요성과 창의성, 그러나 그것은 여유와 즐거움과 호기심의 협력이 없으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학생의 경쟁력이라고 부추기는 한국의 보수언론의 교육관을 비판한다. 또한 현재와 같은 입시지옥의 체제하에서도 아이들의 학력 향상만을 요구하는 일부 교육감들과 교육당국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한다.
학생들에게 놀게 하고 자발적인 호기심과 탐구 정신을 일깨워 주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진정한 개인적, 국가적, 사회적 경쟁력은 살아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이기고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얻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 자유와 시간을 충분히 줄 수 있는 제도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공부가 아니라 노는 것이 경쟁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부지런히 수능 시험의 폐지와 독일식의 고등학교졸업시험(아비투어) 제도의 도입을 역설해 왔다.
올 해 또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이 심리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할지 심히 걱정이 된다. 수능 시험 장에서 바로 퇴장하여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는 학생들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 가운데서 성숙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4-12. 영어 열풍과 외국어 학습의 비효율성
4-12-1. 특목고 입시와 영어열풍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잘되는 장사의 하나가 영어 학원일 것이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영어 교육 시장은 해마다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사교육 열풍은 이제 조기영어 교육열풍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특목고 입학의 조건을 위한 영어 사교육의 흥행이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수원, 용인 지역에 새로운 외국어고가 설립되면서 이 지역의 학부모들과 사교육시장은 벌써 크게 요동치고 있다.
▲ 수원에 상륙한 특목고 열풍. 한 영어학원이 14일 아주대에서 개최한 ‘특목고 입시전략 설명회’장은 500여명의 학부모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참석해 열기를 실감케 했다. <수원일보 10/7일자>
이런 입학시험과 관련된 영어 공부가 치열하고 또 대학에서도 영어로 강의를 하는 곳이 늘어 가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느끼는 하나의 문제는 그렇게 영어, 영어 하면서 유아들까지 공부를 강요하는 나라의 영어실력이 대단히 낮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이 그렇지만 투자에 비한 산출의 비율이 심각하게 낮은 분야가 영어이다.
영어 학원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곳이 한국이다. 영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가히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고 거의 본능적이면서, 맹목적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미국 문화에 대한 필요와 동경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4-12-2. 영어 교육의 비효율성과 부적절성
무엇보다도 영어를 그렇게 오래 배우고 또 배우지만 한국인들 혹은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토익 시험을 거의 만점 받고도 미국대학의 수업을 듣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한국의 모든 영어 교육이 오직 시험을 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영어 혹은 외국어 학습은 철저하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작은 노력을 해도 많이 배우고 또 그 실력이 높다.
예를 들어 네델란드 같은 경우 영어에 대한 의존성은 한국보다 높다. 우리는 그래도 IT 분야나 철강, 자동차 등에서 실물경제의 경쟁력이 다소 있지만 네델란드는 그렇지도 못하다. 따라서 네델란드인들은 해외 무역 중개나 국제 교역을 통해서 먹고 산다. 따라서 그 나라에는 영어나 다른 외국에 대한 강박관념이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하다. 그래서 네델란드인들은 거의 2~3개 외국어를 한다. 그들은 국민들의 외국어 실력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있다.
필자가 독일에 체류할 때, 네델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연히 독일어로 소리를 쳤는데, 주위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고 필자에게
독일어로 정보를 주었다. 국제적 빈도가 낮은 독일어에 대한 지식이 그렇다면 그 나라에서 영어에 대한 이해력이 얼마나 높겠냐는 것이다.
우리 역시 외국어나 영어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그렇게 중요하다면 유치원부터라도 그런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어열풍은 허장성세라는 면이 강하다. 네델란드나 작은 유럽의 나라들처럼 외국어 학습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있지는 않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의 모든 영어학습이 점수 올리기 위한 것이다. 실용적인 학습은 거의 없다.
스위스같은 관광과 여행의 나라에서는 많은 학생들은 주로 토산품의 판매나 여행객 유치를 위한 철저한 회화중심의 실무영어를 배운다.
그런 나라들에서 택시 기사들은 모두 손님의 질문에 답하고 안내할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반면 우리는 토플이니 토익이니 하는 english test 점수를 더 받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학교에서의 영어공부도 시험위주의 공부를 하게 된다.
필자 역시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바 있지만 아직도 그렇게 영어 실력이 좋지 못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영어학습이 외부적인 강요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어는 필자의 내부적인 욕망과 필요성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독일어 실력은 대단하다(독일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