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순 살 소녀
2021. 12. 25
박 미 정
“세 번째 스무 살 소녀, 그녀의 설렘을 니들이 알아?”
그녀는 두 번째 스물의 나이쯤에도 소녀였고, 그 훨씬 이전인 첫째 스물에도 소녀였
는데 이건 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 속의 브래드 피트도 아니고.
둘째 딸아이가 이미 소녀가 되어가는 때, 함께 소녀로 남고파 마흔의 소녀였을 무렵
부터 어설픈 취미로 블러그와 홈피에 일상을 두들겨 저장하며 살아왔는데 십수 년
전 어느 날부터 이야기들을 뱉어내던 그 습관이 멈춰버린 후,
‘아! 나는 이야기꾼은 안 되겠구나!’
오래되어 빛바래고 시절을 놓쳐버린 소설책처럼 그 작은 마음을 내려놓고 밥벌이 통
속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소소한 가정사에 일희일비하는 아낙네로 살면서 바쁠 때
는 설렘, 소망, 꿈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고 우아한 백조로 살아 보려는데 마음의 온도계는 저 북극
동토에 칩거해 봄이 찾아올 기미가 없고, 황무지로 변해 버린 마음은 울퉁불퉁 자갈밭
이 되어 알 수 없는 강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다시금 심장의 뜨거움을 느끼고픈 간절함에 송파여성문화회관의 문을 두드려 사진
찍기부터 등록을 했는데 하필 코로나로 인해 강좌 개강일이 늦춰진다는 문자를 받고
실망감을 추스르며 다시 사이트를 열었다가 「야, 나두 작가 될 수 있어」 에세이 출
간 프로그램 참여자 모집의 작은 웹 창을 보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란...... 그 순간 40
여년을 한쪽으로 내려놓은 나의 버킷 리스트 중 1번을 해볼 수 있다는 기쁨에 담당
자께 문의하고 접수 일을 애타게 기다려 자기소개와 비슷한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자
판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떨리고 가슴이 쿵쾅쿵쾅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날보다 더 심
하게 요동을 쳐 심장이 달아날까 붙잡는 애씀까지 필요했다.
발표를 기다리는 몇 날은 얼마나 긴 시간이었던가!
‘당선되었을까?’
‘아냐, 떨어졌겠지’
‘요즘 친구들은 얼마나 재치 있는데’
그래~ 평생 쳐다보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 조상 꿈이 좋다고들 해서 핏덩이
때 부터 흰머리 나부끼는 지금까지 처음으로 거금 만 원을 주고서 구매하였던 로또복
권도 꽝, 되었었는데 뭘!
기다림에 익숙지 못한 조급함은 하루 두 번씩이나 전화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예순
살 소녀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담당자의 얘길 듣고서 가슴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기
뻐 날뛰며 인생 동반자인 그 남자에게 전화로 알리고 딸에게도 알리고 그것도 모자
라 무뚝뚝한 아들에게는 가족 단체 톡, 방에다 엄마의 기쁨을 알렸다.
며칠을 꿈꾸듯 지나치는 시간속에, 10월 18일 월요일 이른 아침 9시 11분, 낯선 번
호의 모바일 호출,
“박미정 선생님이신가요?”
“그런데요, 이런 전화 필요 없습니다.”
“여기 송파여성문화회관입니다.”
아불싸, 하마터면 보이스 피싱인 줄 알고 수신 거부 누르려다 송파 여성문회회관이라
는 말에 네, 네, 네...를 연속으로 대답해야 했다.
첫 강의를 기다리던 며칠은 또 어땠는가!
강의를 맡아 주신 작가님을 어떤 분일까?
함께 공부할 학우들은 또 어떤 분들일까?
매일 매일 매 순간이 온통 송파여성문화회관 생각으로 가득했다.
10월 20일 저녁 7시 첫 수업을 기다리던 나의 모습은 어땠는가!
참으로 어여쁜 예순 살의 소녀였다. 작가님의 소개받는 순간부터 부풀어 오른 풍선이
뻥~터질 것처럼 그녀의 가슴이 그랬다. 혹여 작가님의 강의 하나라도 놓칠세라 맨 앞
에 앉아 눈은 노안까지 쫓아내고 노트에 필기해가며 듣는 예순 살의 소녀의 심장은
영락없는 열여섯 살 소녀, 그것이었다. 날마다 해야 하는 과제도 부담과 함께 설렘이
다. 십여 년 만에 접속한 네이버 카페는 하루에 몇 번씩 들락거리고 함께하는 이들의
과제를 보면서 입가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들의 재치 넘치는 과제들을 보면서 댓글을
안 달고는 못 배기고 기어이 주책스러운 몇 마디를 남기고 만다.
지금, 이 순간 예순 살 소녀의 모습은 어떤가!
늦은 야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주방 쪽 식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오랜만에 라디
오까지 켜고서 작가님의 강의 때 휘갈려 써 놓은 노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읽어
가는데 돋보기 속, 예순 살 소녀의 눈은 저기 평창 암반대기에서 올려다 본 하늘의 별
보다 더 반짝인다.
얼마 만인가!
이 늦은 야심한 밤에 노트 필기를 해가며 공부를 하고 교보문고에서 사 온 에세이를
읽고 있는 모습은 10대 때 시험 기간이 아니면 해 본 경험이 없는 모습이다.
며칠 전에는 또 어땠는가!
엊그제 강의에서 작가님이 예를 들었던 김훈 작가의 <라면을 끓이며> 라는 책을 사
러 잠실의 교보문고로 갔는데 딱 한 권 남은 책을 오늘 누군가 사가 버려 재고가 없
다는 직원의 말에
“혹시, 조태진 님이? 박들음 님? 강하영 님이? 김진옥 님이?”
것도 아님,
"'빨강 다라이'를 쓴 솜씨가 보통 이상이던 나보다 몇 배는 더 젊고 앙큼하게 이쁜 여
우같던 그녀?“
이 책을 사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또 한 권의 책 이슬아 작가의 <나는 울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된다>라는 책을 사서 나오는데 새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그녀 품에
꼭 안겨 있는 책은 숨을 못 쉴 듯 답답했으리라.
첫 개강 때 스텝들이 나눠 준 송미경 작가와 함께 하는 에세이 출간 특강 「야, 나두
작가 될 수 있어」라는 인쇄물이 붙여진 흔하디 흔한 노트도 아까워 쓰질 못하고 있
다. 펜도 마찬가지다. 박미정 이름과 하트 모양을 그려 테이프로 붙여준, 이 세상에
서 딱 한 자루뿐인 펜인지라 아직도 사용을 못 하고 아끼고 있다.
엊그제 수업은 또 얼마나 재미났었는가.
네 줄로 나누어진 책상에 앉아 뒤통수만 보고 강의를 들으려니 네이버 카페에서 매일
본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지 못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모처럼 디귿 모양으로
책상 배치를 바꿔 수업을 듣다가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를 어째...... 세상에나, 세 번째
스물의 소녀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게 아닌가. 내 딸보다 더 어린 스물아홉부터 서른 일
곱, 마흔 , 마흔 여덟, 서른 대와 마흔 대가 대부분이라 의기소침해 있는데 저 멀리 앉
은 화미님께서
“언니! 저도 있어요, 언니랑 비슷해요.”
‘언니’라는 호칭도 기분 좋았지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적은 화미님이 비슷한 나이라면
서 ‘언니’라고 불러주니 기분이 째질 듯 좋아서 속으로 ‘히히’ 거렸다. 예순 소녀와 비
슷한 나이대인 박들음 님이 있어서 또 얼마나 반갑던지. ‘히히히’
“세 번째 스물 소녀와 함께 공부한 에세이 반 학우들!
잘 들어요, 절대로 ‘이모’나 ‘아줌마’나 ‘할머니’는 사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