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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식 소총(일본, 1939년)
아리사카 소총 시리즈 중 말기에 나온 유형이다. 1939년(황기 2599년)에 제식 화기로 지정된 후 1941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일본군의 볼트액션 소총이다. 이름의 유래는 채용 연도인 황기 2599년이다. 후술할 99식 단소총과 구분하기 위해 99식 장소총이라고도 부른다.
기존의 38식 소총의 화력 문제가 대두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경을 7.7mm로 확대하여 개발한 소총이다. 대구경화로 인해 중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인 체격으로는 지나친 부담이 가해진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길이를 단축한 것이 99식 단소총이다. 시험 제작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생산 수량은 많지 않다. 일각대와 대공 조준기는 이 형태에서 이미 존재했다.
사용 탄약의 경우 대다수의 파생형은 7.7x58mm인데 해군형은 독자규격을 사용했다.
기존의 6.5mm탄과는 다른 구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99식 소총의 정식 개발에 앞서 7.7mm 구경 소총의 연구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나고야 육군공창과 코쿠라 육군공창이 관여하였다. 일각대가 나고야 공창이 내놓은 안이었고 부품 간소화로 양산과 호환을 꾀한 것이 코쿠라 공창이 내놓은 안이었는데, 제식 채용 때는 양측의 장점을 절충 취합해 만들어졌다.
어쨌든 99식은 당시 사용되었던 모신나강, 리-엔필드, 스프링필드등의 볼트액션식 소총에 비해 성능상으로 딱히 후달리는것은 없었으며 일본군이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보병 총기로 평가받고있다.
99식 소총 문단에서 설명된 대로 38식 소총을 단순히 대구경화한 물건은 당시의 일본인 체구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단축이 필요했다. 당시 세계적 추세는 소총과 총검의 길이 단축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병전을 중시하여 길이에 집착하던 일본 군부였지만, 인간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하게 된 결과물이 99식 단소총이다. 사실 99식 소총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쪽을 말한다.
특징으로는 장소총과의 공통점인 일각대, 대공조준기 외에도 개머리판이 상하 접착식으로 제작된다는 점이 있다. 총기 멜빵고리의 위치도 변경되어 기존의 총신 하부에서 총신 좌측으로 옮겨졌다. 총열 상부의 금속이 노출되던 것도 목제 부품으로 대부분 덮인다.
99식부터는 프레스 공법이 도입되어 규격이 안맞는다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에초에 프레스 공법으로 규격이 어긋나게 만드는게 더 이상한 일이다
장소총을 포함한 극초기형은 앞서 말한대로 세심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총 주제에 일각대(…)도 있었고, 對항공기용 조준기(…)도 있었고, 모래 등이 들어가지 않게 약실 근처에 가드가 있는 등 여러가지 부속품들이 달렸다. 하지만 그 효용성은 심각할 수준으로 없었는데, 일각대는 정작 해당 물건이 필요한 엎드려 쏴같은 동작을 취할 때 총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고, 대공용 조준기는 애초에 볼트액션 소총이 비행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므로 장식품이었다. 심지어 약실에 있는 가드(遊底)는 장전시 소리가 더욱 크게 나게 되는 것과 가끔 노리쇠가 가드에 걸려 장전불가가 된다는 등의 총으로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던 데다가 생산성이나 효율 문제까지 겹쳤다. 그래서 늦어도 단소총 중기형에는 모두 사라졌다. 여담으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의 99식은 약실 가드가 없는 거 빼면 전부 초기형의 모습이다.
그래도 대전 후반의 개판수준의 상태만 아니면 3배정도의 장약을 넣고 쏴도 총기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 내구성도 가지고 있고 독일이랑은 다르게 대채품도 없고 소총 생산시설에 큰기술을 요하는게 아니라서 그나마 어느 정도 품질은 유지됐다.
이후 단소총의 개발진은 호와 공업에 재적해 있다가 64식 소총을 개발하기도 한다.
양대 세계대전 동안 줄기차게 써먹은 일본군의 주력 볼트액션 소총 시리즈.
당시 육군 포병 공창에 소속되어 있었던 아리사카 나리아키라 (有坂成章)가 개발해서 유판아리사카 총으로 불린다.
사용 탄약은 30식, 38식이 6.5×50mmSR, 99식이 7.7×58mm.
처음 개발 당시엔 6mm, 6.5mm, 7mm를 만들어 시험한 결과 6mm는 총열 만들기가 힘들고 7mm는 일본인에겐 너무 강한 총알이라 반동이 세다고 판단해서 6.5mm를 골랐으나, 중일전쟁에서 88식 소총(한만식)과 24식 소총(장중정)의 7.92mm탄과 할힌골 전투 때 모신나강의 7.62×54mmR의 강력한 위력에 데이면서 아리사카의 위력부족을 실감하게 되었다.
30식, 38식, 99식은 각각 메이지 30년(1897년), 메이지 38년(1905년), 쇼와 14년(1939년)에 만들어졌다. 99식이 14식이 아니라 뜬금없이 99식인 이유는 1939년이 초대 덴노 진무를 기준으로 한 황기 2599년이기 때문이다.
38식 소총은 처음 사용된 시기 러일전쟁, 이전까지 사용하던 무라타 소총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다른 볼트액션 소총들에 비해 명중률이 좋고, 특히 조작감이 좋다는 평가를 얻었으며 부품 수도 대폭 감소하여 양산에도 유리하였다. 길이가 긴 편이라는 모신나강보다 길이가 길어 휴대가 불편하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긴 총열 내에서 장약이 충분히 연소할 수 있어서 총구화염이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일본군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전쟁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워버리면서 필요한 소총 숫자가 급증하자, 1939년 사용탄을 바꾸어 위력을 강화시키고, 기존의 절삭 가공 대신 프레스 가공 공법을 사용하여 생산력을 높인 99식을 개발해 추가 보급했다.
다른 사용탄에 의한 군수 소요 증가라는 문제를 일으키긴 했으나, 보급 자체는 엄격하게 구분시켜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이탈리아군은 사용탄도 다른 제식 소총을 마구잡이로 보급해버려 큰 혼선을 빚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 설령 섞인다 해도 6.5×50mmSR과 7.7×58mm 탄약의 크기 차이는 꽤 컸기 때문에 애초에 약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탈리아의 6.5×52mm탄과 7.35×51mm탄은 서로간의 차이가 매우 적어 구분이 힘들었고(가운데가 6.5mm, 오른쪽이 7.35mm) 차이가 너무 미미해 다른 약실에 장전하는 것도 가능해서 총기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런 점에선 일본군이 관리를 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급 편의상 본토와 그에 가까운 병력, 귀환 병력 등에 먼저 99식을 지급했고, 이것이 오히려 모자란 위력 때문에 2선으로 돌려져야 했던 38식이 최전방에서 굴려지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개중엔 38식이 반동이 더 적어 다루기가 쉬웠고 명중률도 좋았다던가, 전시가 아니었던 때에 생산되었던 물건의 품질과 신뢰성이 전시의 혼란한 와중에 생산된 물건보다 더 좋아서 등의 이유로 38식을 선호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부분이 38식에 대한 불만이 만만찮아서 개발한 게 99식임을 생각해보면 이건 크나큰 전략적 실수다. 이런 최전방 병력의 화력부족이 일본군의 패착을 더 앞당겼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최전방 화력부족에는 기관단총과 기관총 개발/보급을 소홀히 했던 점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놀랍게도 본격적으로 총열에 크롬 도금을 도입한 최초의 총기다.
2. 문제점
다루기 쉽고 명중률이 높았으나 동시기 타국의 소총에 비하면 위력이 상당히 약했다. 38식의 사용탄인 6.5×50mmSR 아리사카의 운동에너지는 2666J이었다. 그 덕에 반동이 적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곤 하나, 일본군 내에서조차 많은 이들이 위력 부족을 토로하며 불만을 표시했고, 그에 따라 강화형인 99식이 나왔다. 그러나 그 99식의 탄약인 7.7×58mm도 여전히 빈약한 3150J에 불과하다.
아리사카의 탄약도 2~3000J의 충분히 살상력이 보장된 위력을 갖췄다. 200J 급의 운동에너지를 갖춘 권총탄도 사람을 죽이기는 충분하고 아리사카의 경우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양, 사슴, 흑곰을 잡는데도 충분히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위력의 부족이 단점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전장의 환경이다. 당시에 일본군이 활동하던 중국 등지는 미개척 지역도 매우 많았기에 건물 밀도도 매우 낮고 넓은 개활지도 상당히 많기에 탄약의 위력이 줄어드는 장거리에서도 안정된 살상력이 보장된 고위력 탄약이 중요했다. 그런데 동시기에 사용되었던 타국의 소총들의 위력은 4,000J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장거리에서 사격을 주고받을 경우 아리사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미국인들 조차도 30-06 스프링필드 탄의 반동 등을 확실히 강하다고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럼에도 현대인보다 더 신체적인 조건이 떨어지는 옛날부터 그런 탄종을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은 전장의 환경이라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대에선 고성능 화약과 함께 탄자 자체의 기술력을 개량하여 소구경도 장거리에서 충분한 살상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당시에는 현대에 비교해서 화약도 저품질이고 탄자를 다루는 기술력이 다들 낮았으므로 당연히 운동에너지가 세면 장땡이었으니 운동에너지가 다소 낮은 편이었던 아리사카 탄약의 위력은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당장 운동에너지가 차이가 거의 없었던 수준의 6.5x52mm 카르카노 탄약을 비롯해 다른 6.5mm 탄약들 조차도 중장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다른 탄약으로 대체된 것을 보면 이미 아리사카의 위력 부족은 확실했다. 단순히 타국의 탄약들의 에너지가 강하니 아리사카가 위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잊지 말자, 야지에서 정규군 간의 격돌이 주를 이루던 2차대전 당시의 교전 거리는 게릴라/테러리스트와의 시가전이 주를 이루는 현대전 보다 훨씬 멀었고 그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고위력 탄약을 개발해서 장기 채용한 것이다.
게다가 다소 결과론적인 소리지만, 애초부터 위력이 충분했다면 내부에서도 위력에 대한 불평과 탄약의 개량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의 일본군에게도 아리사카 탄약의 위력 부족은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단, 오해는 하지 말 것이 근거리에선 맞추면 죽일 정도로 확실히 살상력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당시 모든 6.5mm 탄약들이 가지는 공통점이다.애초에 총인데 당연히 죽지
위력이 약했던 38식이 발목지뢰와 같은 효과를 발휘해서 특유의 저위력으로 인해 사살이 아닌 부상을 일으켜 해당 인원을 후방으로 인도하는데 필요한 인원 수만큼 전투병력을 깎아먹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기록도 있으나, 저위력 총탄과 발목지뢰의 전투력 감소 효과엔 큰 차이가 있다. 둘 다 전장에서 부상자+후송인력을 후퇴시켜 전투력을 깎아먹는 건 동일하나, 발목지뢰는 여기에 더불어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들어 영구적으로 전투병력에서 퇴출시키고, 트랩이라는 점에서 전투인원에게 불안감과 경계심을 일으켜 정신적인 피로를 유발하며, 여기에 더불어 사기 저하까지 일으킨다.
하지만 총알은 이런 부상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총상을 입은 인원들은 손이나 발목을 맞고 잘려나간 게 아니라면 치료 후 전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력 감소는 일시적일 뿐이고, 총상은 '전장'하면 필수로 떠올리는 부상이라 병사들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기에 정신적 충격이 덜하며, 총상에 당했다는 것은 곧 복수할 적도 그곳에 있다는 뜻이라, 부비트랩보다 사기 저하가 훨씬 덜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일본군은 이걸 의도하지 않았다. 총 없으면 칼로, 칼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던 누구의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카미카제나 반자이 어택 같은 전술 같지도 않은 일본군의 대표 전술들은, 실제 효용은 접어두더라도 적을 철저히 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더 퍼시픽에서 묘사된 것처럼, 의도적으로 의무병을 노리는 사기 저하성 전술도 명령하고 이행했으나 이도 결국 사살 전술이다. 애초에 군용 총탄의 목적이 사살이지 부상만 일으키는 게 아니란 걸 감안하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총 성능 문제는 아니지만 전략적으로 문제였던게 아리사카 38식과 99식는 사용하는 탄환이 달랐고, 덤으로 해군 전용탄이 또 하나 있었다. 거기에 소총 탄약과 분대/소대의 기관총 탄약이 서로 호환되지 않았다. 당연히 소총 탄약이 2+1+@종류라는 사실은 보급 장교와 병사들을 박터지게 만들 상황이었고, 전용탄이 나눠져 있으면 탄약 공장이나 생산 라인도 똑같이 나눠야 하니 생산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어, 가뜩이나 탄약이 부족한 일본군에게 아리사카의 전용탄은 큰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나마 평시라면 전력강화 한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99식 소총이 개발되는 39년은 중일전쟁으로 생산하는 41년은 태평양전쟁으로 총력전 상황에서 생산효율을 말아먹는 짓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전쟁 말기에는 또 전용탄을 만드려고 시도했다 이쯤되면 일본군의 종특인듯
• 당장 이탈리아는 평시에 7.35mm를 쓰는 M38을 개발했다가, 2차대전 때문에 생산을 중단하고 6.5mm로 회귀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도 돌격소총의 시초인 혁신적인 StG44를 처음에 반대했던 이유가 전용탄을 쓴다는 사실이었고, 생산을 허가한 이유도 불법 생산물이 전선에서 엄청나게 유용해서 병사들의 요구 때문에 들어준 것이다. 이때도 기존탄을 쓰라는 식으로 호환성을 챙겼다(무시당하긴 했지만)
3. 오해와 왜곡
처참한 일본군의 모습과 전후 해군선옥육군악옥론의 대세로 인한 과거 일본 밀덕계의 일본 육군에 대한 폄하가 1990년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아리사카는 실제와 틀린 오해들이 굉장히 많은 소총이 되었다.
이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서술하는 성향이 강했던 리그베다 위키에서 시작된 문제점으로, 리그베다의 저명성 또한 이 오해를 널리 퍼뜨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리그베다가 망하고 난 뒤엔 나무위키가 이 역할을 물려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무위키는 리그베다 위키의 문서 대부분을 그대로 흡수해 기반을 마련하고 성장한, 사실상 직계 후손이라고 봐야하는 위키기 때문. 거기다 갈수록 나무위키의 유명세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아서 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원래 아리사카의 왜곡이 퍼진 기반 자체가 일웹이니 "일본인들이 자기 물건 가지고 그랬으니 맞을 것이다."라는 고정관념까지 박혀 이런 오해가 더더욱 퍼지게 됐다.
그리고 무라타 소총과 아리사카의 혼동으로 인해 무라타의 단점들이 아리사카의 단점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 역시 있다.
다음은 널리 퍼진 오해들.
• 국화무늬를 수공예로 새겼다?: 아리사카는 국화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데, 이게 수작업이라는 소문이 한국 웹상에 널리널리 퍼진 관계로 나무위키는 물론이고, 심지어 네이버 캐스트 서술에서조차 수작업을 통한 국화무늬 각인을 사실로 서술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으로, 진짜 수작업으로 새기는 경우에는 고위 관료 내지는 부자들이 개인이 따로 장인들한테 돈 주고 주문한 장식용이나 그런거고, 양산형의 경우애는 실제로는 국화 문양을 찍어내는 도구가 있었다. 각국에서 총기에 각인을 찍어내듯이 찍어넣은 문양이라는 것. 숙련공이라도 여러 명이 같은 문양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새겨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숙련공을 징집하고 그 자리를 비숙련 노동자로 때운 병크를 일으킨 일본군에서 수공예로 똑같이 무늬를 새기는 게 가능할리가.
또한 국화무늬를 지우는 것은 무기를 버리는 상황이 되었을 때 노획 방지를 위함이 아니다. 대전 이후 미군이 수거한 아리사카 상당수가 국화무늬가 지워진 것은 미군정 기간 동안 천황의 상징이라고 해서 국화무늬를 지웠기 때문이지, 노획당할 것 같아 일본군이 지운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현재 미국 컬렉터들 사이에서 국화무늬가 있는 아리사카는 없는 아리사카보다 비싸게 팔리고 있다. 그리고 덧으로 국화무늬를 수공예로 새기고, 수공예로 아리사카를 만든 경우가 있기는 있었는데, 이거는 실전을 위한거는 당연히 아니고 높으신 분들을 위한 모형이거나 전후 수집가들을 위한 레플리카들이라고 한다.
• 기본 설계가 나쁘다?: 99식은 특히 약실이 튼튼하여 정량의 3배의 화약이 들어가도 버텨내는 수준이었다. 정량 3배의 화약을 넣는 실험을 한 사람은 줄리안 해처(Julian Hatcher, 1888~1963)라는 사람으로, 전직 미 육군 소장이자, 총기 전문가인데, 헷쳐는 아리사카를 2차대전 당시 사용된 소총 중 가장 튼튼한 소총으로 평가했다. 특히 99식은 약실이 두꺼워 압력을 견디는 부분에 있어서는 스프링필드 소총보다 안전하다고 말했다. 또한 99식 소총의 약실에 권장 약실압력의 3배를 가했고, 99식 소총은 멀쩡했다. 99식 소총의 튼튼함은 유투브 영상 등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 영상을 참고하자. 참고로 총구가 꽉 막혔을 때 사격하면 화약의 압력이 빠져나가질 못해 총 전체로 확산된다. 이러면 대개 총이 폭발하는데, 이런 와중에 총열만 손상되고 끝이라면 내구성이 엄청 좋은 것이다. 즉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면 부서진다느니 하는 내구성이 약한 총이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당시 볼트액션 소총 중 내구도 만큼은 최상급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38식이 좋지 않냐 하면, 38식은 대전 기간 중 생산된 볼트액션 소총 중 노리쇠가 가장 튼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노리쇠가 카르카노보다 뻑뻑하다? :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아리사카 사격 영상에서 뻑뻑한 노리쇠로 고생하는 영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그 카르카노도 후기형에선 개선되었다. 관리가 엉망이면 최신 총기도 조작이 뻑뻑해진다. 전쟁 후반기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총기에서 이 현상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총력전에서 패전이 임박한 국가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아리사카만 까일 이유는 없는 것.
• 날씨가 추워지면 고장나기 일쑤였다? : 그렇지 않다. 차라리 99식이 그랬다면 모를까, 만주 지역에 최적화된 설계를 했던 38식이 추위에 고장나기 일쑤였다는 주장은 그냥 허구다. 진짜로 그랬다면 일본군은 적백내전의 러시아에 개입도 못 했다. 가장 결정적인 반박 증거는 그 러시아에서 이 아리사카를 대량 수입했다는 것. 1차대전 당시 스키 부대까지 운용했을 정도로 추운 곳에서 싸웠던 군대가 추위에 약한 총기를 살 이유는 없다. 추위에 약한 총기는 그 이전 제식 소총이었던 무라타 소총으로, 무라타 소총이 만주 지역에서 빠르게 아리사카로 교체된 이유 중 하나가 아리사카가 무라타보다 추위에 강하기 때문이었다.
• 표준생산 규격이 없어 총이 중구난방으로 생산되었다? : 부분적으로 맞다. 38식은 그러하나 99식은 아니다. 99식 소총은 표준화된 측정기구와 생산방식, 품질관리하에 양산되었다. 때문에 완전 수제품인 38식과는 달리 99식은 규격화 안 하는 게 불가능했다.
• 총신이 개런드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면 부러졌다? : 애초에 사람이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는데 부러지는 수준의 강도면 제식 소총으로 사용할 수 없다. 개머리판이 약해서 내리치면 부러졌니 어쩌니 하는 것도 대전 말기 나무 조달이 되지 않아서 건조처리도 안 한 삼나무로 만들었던 아리사카 소총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아리사카는 졸참나무나 떡갈나무를 사용했다. 이들은 전부 참나무에 속하는데, 참나무는 목재 중에서도 단단한 하드우드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3등급에 속한다. 제대로 만들어진 아리사카의 목재 부분은 별 문제가 없었다는 것.
• 강선이 제대로 안 파였다? : 강선도 제대로 안 파였다고 까이기도 하는데, 너무 써서 강선이 닳았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정품 아리사카 소총의 총열은 생산될 때 8000발을 사격할 수 있는 내구도를 갖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총열 내구도를 더 늘리기 위해 메트포트형 강선을 파고 오스트리아에서 총열 제조법을 교육시켜 왔다. 물론 전쟁 말기에 급하게 생산한 저질품들 중에서 총열 강선이 제대로 안 파인 총이 있었을 수는 있다.
• 탄이 자주 걸린다? : 유튜브 구경하다보면 탄이 종종 걸려서 애 먹어서 '제식 소총 주제에 탄이 왜 이리 걸리나.' 싶겠는데 이 문제는 총알 문제라고 봐야 한다. 급하면 1분 47초부터 보자. 사실 이런 걸림 현상은 어느 총기든 발생할 수 있다. 애초에 총기 자체가 매우 민감한 물건이기 때문에 제대로 관리 안하거나, 탄약이 불량이거나, 노후화가 심하게 되었거나, 미세 부품이라도 조금 부서지면 쉽게 고장 날 수 있다.
• 대전 말기 품질이 떨어지는 상황 부각 : 다른 일본 무기와 마찬가지로, 타 국가 무기와는 달리 묘하게 대전 말기 품질이 떨어지는 상황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분명 일본이 대전 말기 똥줄타기 시작하면서 저품질의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똑같이 패전 직전에 몰렸을 때 품질이 저하된 Kar98k의 서술에 비하면 유달리 질이 저하된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전문가는 대전 말기 생산된 제품끼리 비교하면 아리사카가 오히려 마우저 사의 소총보다 뛰어남을 말해 주고 있지만 어느 형식인지는 구체적으로 지목이 안되어있다. 만약 비교대상이 VK계열이라면 당연히 아리사카 만세를 외쳐야 한다(...). 물론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민돌격대용 총기가 나올 시점이면 일본은 총대신 죽창을 쥐어주었으니 비교 불가겠지만...
종합하자면 아리사카, 특히 웹상에서 아리사카라고 하면 주로 칭해지는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2차대전 당시의 볼트액션 총기 중 일방적인 불량품이 아닌, 꽤 좋은 수준의 품질을 갖춘 총기라고 할 수 있다. 아리사카의 성능이 안 좋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은 대부분 적대적 반응에 의한 까내리기거나, 불량품의 사례를 전체로 확대 적용시켜 판단한 게 원인인 것이다. 또한 아리사카란 명칭 자체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38식과 99식 외에 다양한 일본 제국의 볼트액션 소총을 전부 포괄하는 단어라, 한 종류의 문제점이 곧 아리사카라 이름 붙여진 소총 전체의 문제점으로 오해받기 쉬웠다.
총의 성능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나, 국화 문양을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복날 개 맞듯 쳐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일본군의 병영부조리에 관해 안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기도 하지만 딱히 물증은 없다. 참고로 총기관리 부실로 구타를 했다는 증언은 있으나 통상적인 얘기인지 아니면 국화 관련 문제인지는 불명.
한국과 얽힌 일이 좀 있는데, 일단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한제국군을 상대로 30년식을 사용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은 물론 북측 조선인민군도 초기에는 일본군이 놓고간 38식, 44식, 99식을 많이 썼으며 6.25 전쟁 때 경찰공무원, 학도병, 남로당 찌꺼기 빨치산, 보도연맹, 2선급 부대들에게 다수 사용되었다. 심지어 중공군에서 북한군으로 편입된 일부 사단의 경우 모신나강 보급이 늦어서 서울 점령 때까지 99식을 주력으로 사용했다는 증언도 있다.
일본이 점령했던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독립전쟁을 할때 많이 썼다. 또한 제1차 중동전쟁때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이 38식을 일부 사용했다. 영국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동에 38식을 뿌린 것이 그때까지 남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핀란드군에서 38식을 저격용으로 도입할 것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1차대전 당시 소총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현물 차관식으로 조달받은 소총 일부가 핀란드에도 흘러들어간 것. 하지만 최종적으론 더 강력한 탄을 쓰는 모신나강을 채택한다.
값도 모신나강보다 비싼 놈이 성능도 그닥이라, 일본군 무기를 일부러 소장하려는 콜렉터 사람들 말고는 별로 사가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라 상당수의 C급에는 강선도 제대로 안 파져 있다는 얘기도 써져 있었는데 이것도 추측이나 예전 상황을 현재에 맞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서술하여 오류가 발생한 사례. 평균적으로 모신나강이 더 저렴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는 총의 상태에 따라서 다르다. 모신나강은 대체로 270달러에서 320달러 사이에 가격대에 형성되어 있으며 아리사카는 100달러 대의 물건도 있지만 높은 가격은 600달러대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모신나강도 희귀한 버전이거나 상태가 최상급이거나 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경우 500달러 이상까지 가격대가 올라가며, 아리사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650달러 등 고가를 받는 38식 소총의 상태를 보면 초기생산품에 사격을 하지 않은 신품에 국화문양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등 최상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저가를 받는 아리사카의 상태가 안 좋다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255달러 정도를 받는 아리사카 중에도 국화문양이 그대로 남은 놈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Kar98k 역시 250달러에서 800달러대까지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세계대전 당시의 볼트액션 소총들은 가격대가 다 비슷하다고 보는게 더 맞다.
그런데 그 모신나강의 본국인 러시아가 이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했었다. 원인은 소총 부족과 열악한 공업능력. 제때에 필요한 양의 모신나강을 생산할 수 없어서 그 자리를 타국의 무기들을 수입해 해결했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이 자국의 윈체스터 M1895를 대량으로 판매해 짭짤한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38식 아리사카를 수입한 것도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 이 밖에도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영국에서도 사용하였다.
첫댓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모두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으로 부터 노획한 소총, 탱크, 대포 및 각종 화기를 미군이 배에 실어서 제주시 앞바다에 수장했습니다. 그래도 일부 숨겨진 무기가 남아 4.3 항쟁에 쓰였지만 탄약등이 보급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