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난·작품 소회 담아 딸에게 쓴 100쪽 분량 편지·유화·드로잉·서류·판화 등 김환기 희귀자료 다수 확보
'자고 새면 붓을 든다… 이 무슨 지독한 형벌인가. 오늘도 자잘한 수채화를 십수 장 그렸다. 이 지독한 형벌이 내 인생에 구원의 길처럼 돼 있으니 죽자사자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 추상회화의 거장 김환기(1913~1974)가 1964년 2월 28일 미국 뉴욕에서 당시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일련의 뉴욕발 편지는 장녀 영숙 내외에게 보낸 것만 40통에 달하고 낱장 분량은 100쪽이 넘는다. 이 같은 김환기의 미공개 서류·드로잉·유화 등이 대거 확인됐다. 23일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최근 유족으로부터 미공개된 김환기의 희귀 자료를 다수 확보해 아카이빙과 연구 작업을 진행 중"이라며 "김환기 미술의 정점인 점화(點畵)에 대한 서술 등이 담겨 김환기 예술사를 조망할 수 있는 중요 자료"라고 했다. 미술관 측은 향후 대규모 김환기 회고전 개최를 검토 중이다.
◇"명랑한 정신력을 잃지 말라"
흔히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로 불리는 김환기지만 편지에는 살기 위해 그려야 했던 생활의 고난이 절절하다. '생활에 쪼들리는 정상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고단하기만 해서 그전처럼 일을 못하겠구나.' 돌아가신 모친에 대한 마음도 밝히고 있다. '가을 잔디에 덮여 있는 어머님의 묘가 눈에 선하다. 외롭게 바람 속에 누워 계신 할머니가 불쌍해 죽겠다.'(1964년 9월 27일) 조수 없이 작업했던 그는 그러나 딸에게 궁핍을 뚫고 나오는 첨예한 정신을 당부한다. '명랑한 정신력을 잃지 말라. 그리고 열심히 일하라.' 김환기의 사위이자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 한국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1928~2007)이 1973년 누명을 써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자 '예수와 사육신과 이순신'을 떠올리라며 위로하는 등의 방대한 개인사뿐 아니라 뉴욕 시절 시작한 점화 작업에 대한 소회 등도 담겼다. 미술관 측은 "가지런한 푸른색 글씨로 채워진 종이는 그가 뉴욕 시절 완성한 푸른색 전면 점화 시리즈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문기(文氣) 감도는 초기 유화
이번에 확인된 자료 중에는 1950년대 드로잉과 판화가 다수 포함돼 있는데, 특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1954년작 '과일'(개인 소장)과 함께 미공보원(USIS) 화랑 개인전 당시 출품한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김환기의 사진이 이색적인 연결고리를 이룬다. 90×90㎝ 크기의 이 유화는 회색 바탕에 13개의 알록달록한 과일이 널려 있고, 그가 즐겨 사용하는 푸른색이 쟁반의 형태로 그림 가운데 있다. 미술관 측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정물의 배치와 여백의 활용 방식이 서양적 정서와 구별되는 문기(文氣)를 풍긴다"며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이 과일 정물화가 놓여 있다"고 했다. "김환기 예술의 정점은 점화지만, 그 점화가 끊임없는 변신과 자기 극복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설명이다.
◇김환기는 계속된다
올해는 김환기 45주기이자 환기재단 설립 40주년을 맞는 해다. 환기미술관은 세 차례에 걸친 특별전을 진행하고, 경남권 첫 김환기 전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