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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0 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이사2,1-5 로마10,9-18 마태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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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선포의 삶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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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9주일 전교주일로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선 어제 쓴 ‘꽃이 별이다’라는 자작시의 소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자들의 숙소 앞뜰에 무수히 피어난 국화꽃 노란 작은 꽃송이들을 보는 순간
‘꽃이 별이다’라는 생각이 들며 떠오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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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별이다/땅이 하늘이다.
땅위/무수히 떠오른/노란 작은 들국화 꽃무리들
땅에서도/하늘로/하늘의 별로 살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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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땅에서 하늘로, 하늘의 별들로 살아가는 이들이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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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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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한 이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살 집이, 할 일이, 쓸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할 일은 복음 선포의 일입니다.
복음 선포의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며
이 일에 충실할 때 부수적인 것들은 저절로 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분명한 약속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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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부수적인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란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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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음 선포의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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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느님을 찾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찾아
주님의 가르침을 배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깊게 또렷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자기를 알 수 있고 하느님을 모르면 자기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오늘날 정체성의 위기는 바로 하느님을 찾지 않아 자초한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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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복음 선포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삶이 우선이요,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1독서에서 이사야가 환시 중 받은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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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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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주님의 산 불암산, 하느님의 집 요셉 수도원을 찾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은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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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주님의 집인 성전에 인도하는 것 역시
좋은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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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주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인들은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주님을 체험하면서
성장, 성숙되어 가야하는 유동적 실재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끊임없이 주님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충전할 때
복음 선포를 위한 튼튼한 기반이 마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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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평화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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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를 불문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공존공생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하느님입니다.
이사야서를 통해 평화의 이상이 참 아름답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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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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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꼭 성취되어야 할 평화의 비전입니다.
‘죽임의 도구’가 ‘살림의 도구’로 변화되는 평화로운 사회는
바로 하느님의 꿈이자 예언자들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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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 모두를 파괴하고 죽일 수는 무기가
살림의 도구, 평화의 도구, 농사의 도구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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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재판관이자 심판관이신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미사의 주례자이신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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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 이런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친히 우리에게 평화를 선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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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평화를 갈망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시대입니다.
하여 십자로 예수 부활상 아래 돌 판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에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이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제가 보속 처방전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구절도 평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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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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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물인 평화에 대한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해, 또 삶으로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께 응답할 때
하느님은 풍성한 평화의 축복을 주십니다.
평화로운 삶, 평화로운 공동체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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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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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공동체의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진행형입니다.
나와 공동체의 복음화와 더불어 이웃을 향한 구체적 선교의 복음화가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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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 교황에 따르면 복음화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의 힘으로 인류를 내부에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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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명은 복음화에 따른 내적혁명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복음화에 의한 혁명은 영원한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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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가 모든 이들을 제자로 삼기 전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제자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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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성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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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공동체에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장엄한 약속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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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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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충실한 공동체와 개인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에 이은 주님의 결정적 답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은 사라져 평화로운 빛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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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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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교회 따로 가 아닌 교회가 바로 선교입니다.
관상과 선교가 따로 가 아닌 관상이 바로 선교입니다.
세상에 앞 문 활짝 열고 찾아오는 이웃들을 환대함이 선교이지만,
할 수 있는 한 밖으로의 파견선교도 필요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말씀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떠나시며 남기신
최후의 유언이자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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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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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선교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개선주의(凱旋主義)의 선교자세나 우월감의 소산인 시혜의식의 선교는 금물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끝없는 인내와 겸손의 사랑, 그리고 분별의 지혜로,
공존의 평화를 지향하며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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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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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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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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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 2,1-5
제2독서 로마 10,9-18
복음 마태 28,16-20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신학생 모임과 직원 연수로 인해 2박 3일 동안 자리를 비웁니다. 10월에는 자주 자리를 비워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에도 또 자리를 비우거든요. 아무튼 새벽님들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면서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의 10퍼센트만 쓸 수 있다면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7퍼센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나는 못해. 나는 재주가 없어. 이것이 나의 한계야.’ 등등의 말로서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의 1퍼센트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어느 정도 활용하고 계십니까? 혹시 자신의 잠재능력 1퍼센트도 활용하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 더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능력을 발휘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떤 부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요. 어렸을 때에 천재 소리까지 들은 애라니까요.”
이 부모가 보기에는 자신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공부만 열심히 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자녀의 생각입니다.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제가 제 몸은 제일 잘 알지요. 저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안돼요.”
누가 맞는 것일까요?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 온 부모의 생각이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몸은 자신이 제일 안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녀의 말이 맞을까요?
부모가 보는 것처럼 분명히 이 아이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안 된다고 말하면서 포기하는 이 아이의 모습에 부모는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 신앙인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주님의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할 수 없다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해서 어떻게 전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 말씀처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우리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능력이 없어서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발뺌을 빼지요. 특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지어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요?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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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2013. 10. 20.)(마태 28,16-20)
<복음화, 세속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또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음만' 가지고 갔습니다.
제자들은 빈손이었으니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는 줄 것이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 즉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성전 앞에서 구걸을 하던 어떤 장애자가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를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사도 3,3)."
그 장애자는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몇 푼의 돈을 청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사도 3,6-7)."
베드로 사도의 말은 '돈이 없으니 그 대신에 다른 것을 주겠다.'가 아니고,
'돈보다 더 좋은 것을 주겠다.'입니다.
이 내용에서 중요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말입니다.
몇 푼의 돈보다, 또 장애를 고치는 것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사도 3,16)."
만일에 그 장애자가 자기 몸이 나은 것에만 만족하고 사도들 곁을 떠났다면,
그것은 몇 푼의 돈을 받고 떠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몸을 고친 뒤에도 사도들 곁을 떠나지 않았고,
사도들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을 때에도
사도들 곁에 있었습니다(사도 4,3.14).
아마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받았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출해서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사람 낚는 어부' 라고 표현하신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딴 세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저쪽 편에 있는 사람을 빼내서 이쪽 편의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최소한 몇 명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해진 할당량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활동을 마친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몇 명에게 복음을 선포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면서
각자 얼마를 벌어야 한다고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 두 종이 칭찬을 받은 것은 그들이 번 돈의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종이 혼난 것은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넓은 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나의 방이지만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밝은 방과 어두운 방으로 따로 구분되고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은 밝고,
촛불이 없는 곳은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다 초를 들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촛불로 옆 사람의 초에 불을 붙여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촛불을 켜게 된다면
그 방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찬 밝은 방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초의 불을 끄기 시작해서
모두가 다 촛불을 꺼버린다면, 그 방은 완전히 암흑이 될 것입니다.
촛불을 켜는 것은 '복음화'입니다.
촛불을 끄는 것은 '세속화'입니다.
교회의 임무는 세상의 복음화입니다.
만일에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세속의 영향을 받아서 물들어버리면(세속화 되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촛불을 끄는 일이 됩니다.
교회는(신앙인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는데, '삶'이 복음적이지 않다면...?
자기는 불이 꺼진 초를 들고 있으면서
남에게 촛불을 켜주겠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전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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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과 선교 >
2006년 나와서 큰 히트를 쳤던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뚱뚱하고 예쁘지 않은 ‘강한나’란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외모 때문에 사랑도 못해보고 무대 뒤에서 가수 대신으로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 없는 여자가수입니다. 그녀는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이용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우연히 한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한나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외면합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감독에게 이용당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성형수술로 예뻐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가수가 되어 인기도 올라가고 감독의 사랑도 받게 되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진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병이 있는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해야 하고, 친구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강한나인데 감독이 좋아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제니란 이름의 가수인 것입니다. 한나는 감독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첫 콘서트 때 한나의 아빠가 또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더 이상 아빠를 외면할 수 없었던 한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전 제니가 아니에요. 저는 한나에요, 강한나. 강한나는 되게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 뒤에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곤 했어요. 그래서 저 수술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그렇게 해서 이뻐지니까, 이렇게 노래도 하고 사랑도 해보고 제니가 돼서 정말 행복했었는데. 근데 미안해요. 내가 망쳐버렸어요. 내 친구도 버렸구요. 아빠도 버렸구요. 나도 버렸어요. 지금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하나도요. 강한나, 보고싶다.”
그러면서 정말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린 아빠를 품에 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입니다. 정체성은 나의 원천을 찾음으로써 세워집니다. 이제 사람들은 제니를 잊고 강한나를 사랑해줍니다. 물론 감독도 강한나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야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가 확실해야 ‘너’가 확실해지고 ‘나와 너’가 확실해야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관계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 애매하면 상대방과의 관계도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가 군의관으로 있을 때 자해를 하는 한 청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툭하면 면도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득 어두운 우주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너무 두려워서 면도칼로 배를 그어요. 통증이 오고 새빨간 피가 팍 솟으면 그 순간에 마음이 진정돼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오면서요.”
정체성이 온전히 성립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우주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느낌,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에게 키워진 늑대인간 아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늑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체성을 지닌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몇 년 새에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늑대가 인간과의 통교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오는 정체성의 갈등을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해를 하는 것도 내가 사람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제니가 한 것처럼 자신의 부모님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신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성의 방황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동물이 자신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만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부모님을 인정하면 비로소 인간이 되지만,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수준에서 관계 맺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 개봉한 ‘그래비티(중력)’란 영화가 있습니다. 딸을 잃은 아픔으로 지구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오던 주인공, 그 여인은 공기도 없고 중력도 없는 지구 밖 세상에서 사고로 인하여 우주미아가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지구에 살고 있더라도 아무 의미 없이 누구 한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우러 옵니다. 물론 그녀를 돕다가 그는 죽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녀의 꿈에 나타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도록 힘을 줍니다. 결국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지구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처음 딛는 발걸음은 예전의 무의미한 걸음이 아닙니다. 비로소 중력을 느끼고 발이 땅에 닿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땅에 키스를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나의 근원이 지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는 참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의 원천인 하느님과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무중력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니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부끄러운 아버지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온전한 강한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끌림을 받아들임이 곧 중력이고, 그 중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온전한 관계도 맺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줄 알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비록 무중력 상태에 있지만 실제는 뿌리가 확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다시 하느님 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의 이유를 가르쳐 준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나의 원천을 부정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육신을 받고, 영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끌어안을 때 비로소 강한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누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해야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즉 선교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왕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뒤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전후 기도를 잘 하십니다. 그분은 그것만 제대로 해도 많은 이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분은 옷가게를 운영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찬미예수님!’으로 인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성당에 대해 물어보고 그렇게 입교시키는 분이 일 년에 적으면 10명, 많으면 3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주반지를 끼고 경기에 출전했던 김연아 선수나, 자신이 성당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김태희, 또 오진혁과 기보배 양궁 커플 들. 이들은 밖에 나가 선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두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내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한 무중력 상태에 있는 불편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을 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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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감당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전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그만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 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씀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보를 어디서 그리 자세히 파악했는지 의문이 갈 정도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내용은 꿰뚫고 있고 배우나 연예인의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씀을 그저 귀로 듣는 것 뿐 아니라 행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어느 구역은 초대교회공동체의 삶을 살기로 하고 노력했습니다. 서로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고 도왔습니다. 어떤 구역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 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는 ‘복음’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선포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여러분의 발걸음이 늘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예수님,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잘 모심으로써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 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 하고 있고, 부유해 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영세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영세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판의 꽃들, 과일 나무도 일 년에 한번은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일 년에 한번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우리 성당 안내지를 한부 이상 이웃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도 좋고, 아내도 좋고, 친구에게도 좋고 누구에게든 전해서 하느님에 관해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당 초대신부이신 임가밀로 신부님께서는 프랑스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사제로 1893년 5월27일 화창한 성모성월에 사제품을 받고 1893년7월19일 프랑스 파리를 거쳐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베트남, 홍콩을 지나 기나긴 항해 끝에 인천항 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가 1893년 9월12일 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입에는 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달고 사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발길이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었고 여기서 많은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길이 이웃을 향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구원을 허락하신 신앙의 삶이 복되다면 그것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부모와 함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 살짜리 꼬마가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나중에 신부가 되고 싶어요!”.“그래? 좋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당에서 지루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서서 떠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이렇게 하면 나도 전교할 수 있다
전교 잘하는 법 10가지
“전교는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전교는 잘하는 사람만 잘되더라.” 모범적 크리스천 중에서도 전도만 하려면 몸이 움츠러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한편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됐으면서도 무서운 기세로 전교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
①자신이 하려고 말라
“저는 내성적이라…”“성경을 잘 몰라서…” “교회 다닌지 얼마 안돼서…” 등 변명은 모두 ‘전교를 자신이 한다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교의 도구가 될 뿐 그 과정은 100%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 이를 깨달으면 담대하게 나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쓰고자 하십니다.
②등잔 밑에서 우는 영혼 발견하기
가까운 데서부터 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전교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아는 사람부터 전교해야 하는 이유는 “전교는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상전교도 좋지만 한 사람이 제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가까이서‘멘토(영적 스승)’가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전교입니다.
③보고 또 보고
전교에 있어 자주 대면하는 것 만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전교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끈질기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출근시간마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칠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출근해서 자기가 맡고 있는 학생을 위해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 기도해 주고 있다고 말해준대요. 말썽피우는 사람이 확실히 줄어든대요. 기도하며 얼굴을 익힐수록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④칭찬으로 시작하라
“한결 젊어 보이십니다.” “이 식당 물맛이 끝내줍니다.” 등 칭찬으로 대화를 열어야 합니다. “칭찬은 젓가락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물론 마음속으로는 흉을 보면서 겉으로만 칭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칭찬거리를 찾다보면 결국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럴 때 진심으로 전교하려는 열의도 생깁니다.
⑤겸손은 유일한 밑천
“전교한다는 사람이 뭐 그렇게 거만해? 맨 날 자기 잘사는 얘기만 하고…” 전교를 하다보면 ‘당신이나 잘하세요’라는 눈길을 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대에게는 자세를 더 낮추는 것이 방법입니다.
⑥성격과 기질을 알자
막무가내식 돌진이 예상외의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상대를 알고 접근하는 것이 한결 효과적입니다. “사람들이 일단 예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파악하면 좋습니다.‘뜨겁게 믿을 사람’을 위해서는 소리 내어 기도해주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꼼꼼하고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등 전략을 세웁니다.
⑦교회와 상호 협력하라
대상자를 교회에 자리 잡도록 도와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례에 참여하고 신심단체를 소개해 주고 활동의 모습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혼자보다는 함께입니다.
⑧전교자는 곧 그리스도의 거울
그리스도인이 모두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눈에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비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교하는 사람이 푸념을 늘어놓거나 다른 이의 흉만 본다면 복음이 전해질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너무 좋습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가치관과 변화된 삶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⑨내가 먼저 성령을 체험해야
전교를 왜 하는지 모르고 신앙에도 확신이 없는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전교에 있어 어떤 노하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을 통해 거듭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을 꼭 체험하겠다는 열정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삶 자체가 전교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성령이 담긴 그릇’이 되도록 기도와 말씀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미사 참례하여 자주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⑩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라
나는 물론 “대상자가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전교하려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다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전교에 나서면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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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전교’라 하면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협박성 외침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교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피부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약국들 가운데 피부약이 좋기로 소문난 약국에서 지은 약을 발랐더니 며칠 만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그 약국을 자주 추천하였습니다. 전교도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 살아가는 데 뿌리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예비 신자 환영식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신부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는지 들어 보는데, 한 예비 신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성당 앞에서 10년째 슈퍼마켓을 운영해 온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아왔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할 때만 해도 신부님은 ‘아, 우리 교우들의 모범적인 모습에 감동받았거나 누구의 권면으로 오게 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자가 10년 동안 우리 가게를 찾아 주었는데, 단 한 사람도 저에게 성당 가자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겨 직접 제 발로 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본당 신부님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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