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지리산 천왕봉 등정
천왕봉에 처음 오른 것은 1962년 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다. 곰이나 멧돼지 만날까봐 호신용으로 나는 허리에 닛뽄도 찼고, 철수는 도끼를 등에 메었다. 하나는 바이킹이고, 하나는 사무라이 였다. 신발은 군대 웍화고, 바지는 청바지였다. 배낭도 우비도 없었다. 요즘같이 지정등산로가 없었다. 등산로 표시도 없었다. 가다가 산길이 없어져 버리곤 했다. 대원사 쪽에서 오른 기억이 난다. 어떤 절벽 밑에서 이슬 피하려고 나무를 쳐서 대충 위는 가리고, 칼과 도끼를 옆에 놓고, 모닥불 피우고 비박을 했다. 천왕봉은 답사했지만, 어느 쪽으로 하산했는지는 오래 전이라 기억에 없다.
두번째 오른 것은 63년 겨울이다. 63년에 대학 합격 발표 본 후다. 처음 대학 뺒지를 달고 자랑삼아 진주 밀림다방에 나갔다가, 뒤에 LG 씨름 감독한 이중근을 만나 한겨울 산행 감행한 것이다. 두번째도 군대 야전잠바와 월화가 전부였다. 배낭도 없었다. 법계사 코스였는데, 눈은 우리 허리께까지 쌓여있었다. 눈길이라 시간은 지체되고, 길 잃고 헤매다가 밤이 되었다. 칠흑천지에 눈바람은 부는데, 몸은 눈 속에 허리까지 빠지고, 체온은 식어갔다. 웍화 속에 스민 물은 슬슬 얼어붙고, 면장갑 낀 손도 꽁꽁 얼어붙었다. 여기서 얼어죽는구나 할 때다. 캄캄한 산 속 저멀리 능선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사람이 등불을 들고 이리저리 산중을 비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깊은 산중에 사시는 분은 산속에 조난자가 있을까해서 밤에 이렇게 등불로 빈 산을 비춘다고 했다. 법계사 보살님이었다. '여보세요!' 우리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음 이었다.'누구요? 거기 사람 있읍니까?' 이 대답 하나에 우리 네 목슴은 살아났다. 보살님이 해주신 따뜻한 쌀밥 얻어먹고, 썰썰 끓는 장판바닥에 얼어붙은 엉뎅이를 녹작지근하게 녹여 살아났다. 이튿날 아침, 은혜를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총각들은, '썰피까지 갖춘 부산대 산악팀도 여기서 하산했으니 돌아가라.'고 보살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 일대는 쌓인 눈이 사람 목에까지 찰 정도였다. 손바닥 보다 큰 곰발자국도 군데군데 찍혀있었다. 만약 곰을 만났으면 우린 끝이었을 것이다. 법계사로 내려오니 보살님이 보이지않았다. 산을 한참 내려와서야 보살님을 만났는데, 보살님은 동네 청년 구조대를 만들어 우리를 구조하려고 올라오고 있었다.
세번째 산행이 이번 산행이다. 50년 세월 후딱 지나간 것이다. 중장년을 서울서 보낸 후 백발 노인 되어 지팡이 짚고 온 것이다. 두류동에서 자고, 7시 20분 첫 셔틀버스로 학습원 가장 짧은 코스로 올랐다. 여기서부터 노인 산행이 시작됐다.
산에 가서 하루 종일 물가에 앉아있어도 탓 할 이 없다. 약수도 한모금 마셔보고, 시원한 물에 얼굴도 씻어봐야 한다. 폭포와 쏘도 눈여겨 보고, 물에 비친 바위와 나무와 흰구름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조용한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 듣고 차나 시주(詩酒) 즐기는 운치도 잊어선 않된다. 산은 도시의 출근길처럼 바쁘면 않된다. 처음 할 일은 바위에 느긎히 앉아 한참 단풍 든 산을 바라볼 일이다.
그 다음은 청풍을 즐기며 '소리'를 즐겨볼 일이다. 마침 최상호군이 대금을 갖고 왔다. 그의 <청성곡>은 참으로 청아하다. 맑은 소리가 소소히 떨어지는 낙엽 소리와 잘 어울린다.
계곡에 내려가 물가의 바위 위에 잠시 누워보았다. 물소리 싫컷 듣는 것도 산에 오는 이유다.
대채로 산에 가서 갈 길을 잊은듯 나무의 수형과 뿌리 모습에 반하여 한가히 살펴보는 습관도 바람직 하다.산의 나무를 감상함에는 먼저 뿌리를 보는 것이 좋다. 천인단애에 솟아, 암석에 끼이고, 빗물에 씻긴 나무가 노목이 되면, 흔히 뿌리를 노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벗어난 선인이 여윌대로 여위고 나이가 늙어서, 근골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것과 같아서 운치가 있다. 낭떨어지에 난 것, 돌 위에 난 것, 비스듬히 굽어 바람 타고 다니는 선인(仙人)같은 것, 물결 밟고 다니는 신녀(神女)같은 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 하나하나 손뼉을 치며 넙적다리를 치면서 득의(得意)하여 구경하는 것이 좋은 취미이다. 이런 기목(奇木)들은 어떤 호사가가 아무리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구하려해도 얻지못할 나무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양사언의 시조를 읊어 보았다. 한가하면 맘이 편하고, 편하면 흥이 난다. 노닥거리는 새 어느새 법계사 7백미터 밑에 도달했다. 이곳은 나도 이장군도 50년 만 이다. 그도 60년대 사관생도 시절 몇번 종주한 이래 처음이다.
법계사의 3층 석탑 바라보니 옛날 감회가 솟지않을 수 없다.
법계사서 천왕봉 구간은 바위가 많다.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좋은 산은 반드시 좋은 빼대를 지니는 법이다. 미원장(米元章)은 기묘한 바위를 보면, 기뻐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절을 받을만 하다' 하고 예를 갖추어 절하고, 매양 석우(石友)라고 불렀다 한다. 만장같은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천년 세월을 느껴봐도 좋고, 바위 이끼의 고색(古色)을 감상해도 좋다. 청태(靑苔) 속에 피어난 가날픈 풀꽃을 감상하거나, 달빛 비친 바위를 보며 시상(詩想)에 잠기는 것도 좋은 취미이다.
이 구간은 거의 70도 각도의 급경사다. 사람들은 흔히 여길 '깔딱고개'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를 그냥 아무 생각없이 용을 쓰며 기어오르기만 해서는 않된다. 높은 9층탑을 참배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 돌계단은 지리산 마고선녀(麻姑仙女) 신전 올라가는 신성한 계단이다. 자세히 보면 바닥에 청석이 많다. 청석과 오석은 연마하면 광택이 난다. 둘 다 귀한 돌 이다. 법화경에는, 금,은, 파리, 마노, 유리, 산호,거거(車渠)를 칠보라 부른다. 청석은 가공하면 칠보와 다름없다. 영국, 덴마크, 스페인, 모르코 왕궁을 가보면, 그 어디에도 세련된 푸른 청석으로 만든 궁전은 없다. 마고선녀처럼 세련된 궁전 취향이 없다. 선녀는 아마 머리에 비취로 만든 비녀를 꽂고, 손에는 은가락지를 끼고, 이 궁전을 우아하게 거닐었을 것이다. 지금 영국이나 덴마크의 왕녀가 그처럼 기품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돌계단을 올라갔다.
정상에는 안개가 가득하였다. 선녀의 의중이 짐작되었다. 산이 미인이라면 안개는 미인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다. 산의 아지랑이처럼 신비로운 것은 없다. 산을 볼 때는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푸른 산에 백운이 걸치어 층을 이루어 산을 가로막고, 구름이 열린 곳에 창천(蒼天)이 나타난 모습을 운산(雲山)이라 하고, 나무가지 사이에 안개 덮힌 것을 운초(雲梢)라 한다. 이런 것들을 감상해야 한다. 선녀는 이런 신비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많아 <천왕봉>이란 글씨 새겨진 돌 앞에서 사진 찍기 힘들었지만, 겨우 옆의 색씨에게 부탁해서 찍었다. 어쨌던 마음 그리 흐믓할 수 없었다.
골짝골짝 영험한 약초와 산나물로 민초의 생명을 구해주시는 은혜로운 마고할머니, 넉넉하고 부드러운 품으로 사나이 가슴에 웅지와 덕을 함께 심어주신 지혜로운 마고할머니, 지리산의 산신령이 할배가 아니라 자애로운 할매임이 새삼 고마웠다. 동행한 이군이 처음 장군 진급했을 때는, 하동군수가 인근 세군데 면장을 대동하고, 총무과장 시켜 돼지를 두마리 잡고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지리산 밑 하동 산청 안의 거창에서 장관, 국회의원, 대학총장이 줄줄이 나온 것 다 마고할매님 덕이 아닌가. 나는 두 손 모아 고마운 분께 감사인사 드렸다.
하신길도 좋았다. 천왕봉 가파른 바위 틈은 수형이 멋진 철쭉나무 분재 천지다. 모두 마고선녀가 직접 물 주고 가꾼 것이다. 그렇게 신령스러울 수 없다. 저 연분홍 철쭉의 꽃빛은 수줍은 산골처녀 뺨처럼 순하고 고운 빛 아니던가. 고산지대의 땅딸막한 구상나무 잣나무도 그렇게 굳세고 푸를 수 없다. 산봉우리를 하얗게 덮고 올라오는 운해는 그리 청초할 수 없다. 한계단 내려와서 철쭉을 보고, 한계단 내려와서 구름을 보고, 한계단 내려와서 바위의 푸른 이끼를 감상했다. 잘 구경하고 하산 서둘다 발목 다치는 일은 성급한 사람들 이야기다. 마냥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하산하니 그 참 신기하다. 등산객 4시간 거리를 우리는 10시간에 다녀왔는데, 어둠 직전의 학습원에 닿으니, 마지막 6시 셔틀버스가 딱 우릴 기다리고 있다. 수미일관 원더풀 산행이었다.
첫댓글 대선배님의 천왕봉 마지막 정상을 오르시는 감성... <이 구간은 거의 70도 각도의 급경사다. 사람들은 흔히 여길 '깔딱고개'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를 그냥 아무 생각없이 용을 쓰며 기어오르기만 해서는 않된다. 높은 9층탑을 참배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 돌계단은 지리산 마고선녀(麻姑仙女) 신전 올라가는 신성한 계단이다>... 지금까지 그냥 힘들게 오르기만 했었던 자신의 경솔함에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50년만에 오르시는 그 벅찬 감회가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해서 자신이 미냥 지리산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Ultra Super Fantastic 한 지리산 산행기!!! 감명 깊게 정독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금년 가을 지리산 사진 중 사이바님 사진이 장원감 입니다.
다친 다리는 반드시 병원 가서 잘 진료 후 등산 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50년 만의 지리 천왕봉 등정을 감축하옵니다. 제가 49세에 처음 천왕봉에 올라 49년 만에 처음 오른 지리 천왕봉이라 무척 감격해 했는데 선배님의 감격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군요. 지리산 천왕봉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느끼게 주는 선배님의 명품 산행기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50년 전의 상황을 어쩜 이리도 생생하게 전달하시는지.. 그날 그 보살님이 안 계셨더라면.. 그 악조건 하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천왕봉 등정을 하신 것하며 모처럼 아름다운 산기를 접하며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고요 감사합니다.
내가 방장님 싸이트에 와서 지리산 등산기들 보면서 뽐뿌질을 받아서 간 것 입니다.
항상 지리산 아랫도리만 돌다가 이번에 소원 하나 풀었습니다.
확실히 사람마다 산에 오르기는 하지만 그 산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느낌은 무척이나 차이가 많이 나는것 같습니다.
핵심적인곳을 설명하며 그 산을 풀어나가는 모습 저로서는 아직 많이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해주시는것 같기도 합니다. 잔잔한 대금소리와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대해 좀더 공부를 한듯 감사한 마음전하면서 물러갑니다.ㅎ
법계사 천왕봉 구간은 다시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그 푸른 청석의 의미도....고산철쭉의 의미도.....
거긴 마고선녀가 거닐은 신전이요, 멀리서 보면 9층탑 입니다.
존경과 감사의 염으로 일독하고 갑니다
세상과 삶을 참 좁고 빈약하게 사는 후배의
눈을 개안케 해주사 다시 감사 드림니다~~♥
항상 좋은 등산기와 함께 좋은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이수영. 사이바 후배님 사진과 함게 난테님 사진도
간혹 가져갑니다. 지리산을 주제로 한 글을 모아 책으로 낼 때 사용할려는 것이니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연륜의 격과 더불어 깊은 내공에서 우러 나온 산행기, 이렇게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지리산학(?)을 꿈꾸며 발품만 팔고 있는 저에게 등불 같은 산행기이고 산행 모습입니다.
법계사 천왕봉 구간, 번잡한 날을 피해 올라보고 싶군요.
감사 드립니다. ^^
지리산 등산에 있어서는 저의 선생뻘인 동자께서 천왕봉 근처의 오석과 청석을
자세히 한번 살펴봐주시면 더 의미 깊을 것 같습니다.
먼저 감동을 먹습니다. 산행기에 묻어나는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존경을 표합니다. 후배들에게 귀한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여기 산님들의 지리산 사진에 항상 감동을 먹습니다
경륜과 박식이 묻어나는 산행기입니다. 지리산에 울려퍼진 청성곡의 대금소리는 과연 천상의 울림이 아니었을까요?
50년 만의 지리산 감회가 새로웠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희식 선생님! 늙은이가 막걸리만 잘 먹지 산은 왕초보 입니다. 어쨌던 여기 산 선배님들 덕에 천왕봉 올라 동기들에게 자랑 좀 했습니다.
산 뿐아니라 일상사에서도 김현거사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선생님! 山에 사람 人자를 보태면 신선 仙 이지요.
그래서 산사람들은 인사도 친절한가? 항상 생각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75년도 지리산 단독산행이라면 대단한 것이지요.더구나 산 입구에서 어두워지는데 법계사로
등산 하신거라면 아마 대단한 뱃장과 체력을 가지신듯 합니다. ...
천왕봉 등정을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도인이십니다.
분위기와 소리가 함께 어울리니 너무 좋습니다.
김현거사님 항상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산에 있는 시간은 모두가 착한 도인이 되지요.
항상 산을 사랑하시니.... .
지리산 정기를 가득 담아 오심을 진심으로 드립니다. 아름다운 산행기에 감동을 먹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님! 제가 아마 산님들의 졸짜 쯤 될 터이지요.항상 산을 좋아하여 여기 와서 배우고 갑니다.
거사님 처럼 멋있게 늙어가고 싶습니다만 아무나 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후학들의 귀감이 되십니다.
산을 사랑하시니,틀림없이 저보다 더 넉넉하고 품위있게 늙어가실줄 믿습니다.
거사님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글이 하도 좋아, 제 블로그와 제가 속한 부산등산학교OB 카페에 이 글과 사진 두 장을 게시하였습니다.
사전 허락을 받지 않은 점에 대해 죄송합니다.
당장이라도 내리시라면 그리 하겠습니다.
혜량하여 주십시오.
등산학교 ob팀이라면 저한테는 존경의 대상 입니다. 산 좋아하시는 분들께 소개된다면 저야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