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 큰 길에서 한 골목만 안으로 들어서면 모르는 글자의 간판들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쌘딩, 빠우, 빠킹, 프레스...일본어인지 영어인지 알수 없는 기술용어들이 낯선 객을 맞는데요. 조금 전 내가 걸었던 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같네요.
손으로 쓴 작은 간판들이 우굴쭈굴 세월을 얹고 옹기종기 잘도 붙어있네요. 그 위로 얼기설기 지나가는 수많은 전깃줄들이 축 늘어져 누수를 막기 위해 지붕을 덮은 먼지 가득한 천막들 위에 아슬아슬 걸쳐있습니다. 겨우 한 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골목들은 막힌 듯 끊어진 듯 구불구불 이어지며 마치 흑백텔레비전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이곳이 바로 을지로4가 철공소거리 일명 ‘철의 거리’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남산 주변 일본인에게 생필품을 대기 위해 만들어 진 을지로4가역 철공소거리. 한국전쟁 후에는 산업의 중심역할을 하면서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때는 호황기를 누렸는데요. 나름 철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여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게 일했던 거리였다지만 지금은 참 조용합니다. 아니 삭막하기까지 합니다.
경기불황에 철거사업에 재개발 논의와 함께 서너 집에 한집 꼴로 셔터 문은 내려져있고 문을 연 가게들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하네요. 덕지덕지 기름때 묻은 장갑들만이 가지런히 널려 손님을 기다리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막다른 골목인줄 알고 돌아서니 또 다른 골목이 나옵니다. 마치 동화속 미로길을 걷는듯한데요. 마침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골목이 하도 좁아 한쪽으로 비켜서기도 어려운데요. 할머니께서는 뭘 그렇게 찍냐고 말을 건네시네요. 사라져가는 골목을 남기고 싶다고 하자. 이 골목에 사신지가 60년이나 됐다고 하시며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으십니다.
저 집은 적산가옥이야. 저 집도 저 집도
할머니가 지팡이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그러네요. 여기저기 지붕에 천막이 덮어 모를 뻔 했는데 집의 형태가 적산가옥 맞네요. 일제 감점기때부터 이 거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의 흔적들입니다. 한참을 서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아마도 할머니는 이야기 상대가 그리우셨나봅니다.
누군가 불쑥 나타날까봐 빨랐던 내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는데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어쩌면 이 골목도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답니다. 점심때가 되었는지 점심배달을 나가시는 아주머니의 머리위에 한 칸 두칸 무려 세 칸의 쟁반들이 묘기 같이 얹혀있습니다. 싸고 맛있는 밥집도 알려주시네요.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설치미술을 전공하는 두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졸업작품을 만들러 왔다고 하는데요. 미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코스라고 하네요. 선배들 중에는 이곳에 작업실을 차린 분도 많다고 합니다.
문득 이곳은 어쩌면 새로운 변신을 하기 위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커피는 세운상가다리 위에 요즘 핫한 호랑이 커피집을 추천해주네요. 젊은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이 거리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집니다.
을지로4가역 철공소거리의 시계는 다른 속도로 느리게, 느리게 그날을 회상하며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주인과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며------ 오래됨과 새로움, 느림과 빠름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공존하는 거리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좀 더 자세히 돌아보고 싶다면 '을지유람'을 추천합니다. 중구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이 투어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꿈을 실현했던 특화골목투어인데요.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 3시 을지로3가 지하철 3번 출구에서 만나 해설사와 함께 2.74Km의 을지로 특화골목을 약 2시간에 걸쳐 돌아보는 것으로 4인 이상이면 전화신청이 가능하다고하네요. 단 8월 혹서기와 12월-2월 혹한기는 휴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