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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no.8 in E flat major
'Symphony of a Thousand'
말러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
Gustav Mahler
1860-1911
Sir Georg Solti, cond
Chicago Symphony Orchestra
말러 교향곡 8번은 음악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관현악 편성과 수많은 합창단원을 필요로 하는 교향곡으로, ‘천인 교향곡’이란 부제는 초연 당시 그 엄청난 규모를 보고 공연의 기획과 흥행을 맡은 에밀 구트만이 말한 후로 붙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1910년 9월 12일에 이루어진 뮌헨 초연에는 합창단 850명, 독창자 8명, 171명의 연주자 등 10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네요.
실제로 필요한 인원을 한번 계산해 볼까요? 현악은 바이올린1, 바이올린2,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를 대편성에 통상적으로 기용하는 숫자인 8-7-6-6-5 풀트(1풀트 2명)로 쓴다고 가정하면 한 62명 정도 계산이 나오겠네요. 현을 제외한 파트는 피콜로 2, 플루트 4, 오보에 4, 잉글리시 호른 1, E플랫조 클라리넷 1, 클라리넷 3, 베이스클라리넷 1, 바순 4, 콘트라바순 1, 호른 8, 트럼펫 4, 트롬본 4, 튜바 1, 별동대 브라스 7, 팀파니 2, 타악기 주자 서너 명, 하프 2, 만돌린, 피아노, 첼레스타, 하모니움(풍금), 오르간이니까 대략 57명 정도 나오고요. 그러니 오케스트라는 120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일반적인 교향악 콘서트홀이라면 독창자 8명과 어린이 합창단, 혼성 합창단 2군을 합쳐도 총 300여 명 정도면 말러의 거대한 스케일을 펼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물론 규모를 키우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되기도 합니다. 스토코프스키가 교향곡 8번을 미국 초연했을 때 말러 초연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인 무려 1068명이 동원되어 세를 과시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트 페스티벌에서는 1000명이 넘는 인원으로 공연되었고, 2001년 바젤에서는 700여 명의 성악과 200여 명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보조 연주자 150명과 함께 10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000명까지는 아니지만 꽤 많은 인원이 연주에 참여한 공연이 있었습니다. 2007년 한중 수교 15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상하이 심포니 공연 때에는 170여 명의 오케스트라와 260여 명의 합창단이 무대를 가득 메웠죠. ‘리허설 한 번에 생수 800통, 김밥 700줄’이라는 코믹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초연은 1978년 홍연택 지휘로 국립교향악단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졌습니다.
말러 교향곡 8번은 바그너 이래로 팽창일로를 걷던 후기낭만 음악의 정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은 결과적으로 독일-오스트리아 교향곡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거대 편성의 대곡은 볼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베토벤에서 브람스로 내려오던 교향곡의 위대한 전통은 해체와 축소의 내리막길을 치닫게 되었죠. 물론 말러 교향곡 8번이 서양음악 사상 가장 거대한 음악이면서 동시에 가장 섬세한 음악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텍스트로 하는 2부에는 흔히 ‘별사탕 악기군’이라 불리는 하프, 피아노, 하모니움, 첼레스타가 영롱한 사운드를 펼치며 실내악에 가까운 음향을 선보입니다. ‘매크로(Macro)’와 ‘마이크로(Micro)’의 조화야말로 교향곡 8번을 이해하는 핵심이자 열쇠입니다. 곡 중간에 작고 미묘한 음색을 선보이는 만돌린이 등장하고 ‘신비의 합창’은 속삭이듯 매우 작은 음량으로 시작합니다.
말러는 이 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작곡했던 교향곡은 모두 이 작품에 대한 서곡 아니면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의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주관적인 비극을 다룬 것이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위대한 영광과 환희를 표현했다."
작품의 구성
이 교향곡은 크게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2부는 아다지오, 스케르초, 피날레의 3부분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4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제1부에서는 마인츠의 대주교 프라바누스 마우루스의 라틴어 찬가 ‘주여 오소서’를 텍스트로 사용했고, 제2부에서는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를 텍스트로 사용했다.
제1부
라틴어 찬가 ‘주여, 오소서’(Veni creator spiritus)를 텍스트로 삼음우선 저음악기와 오르간으로 시작되며 이어 합창이 ‘주여 오소서’라고 우렁차게 노래한다. 이어 금관악기가 이 주제를 받아 2중 합창으로 주제를 이끌고 가면서 ‘주여 오소서, 주께서 만드신 우리들의 가슴속으로’라고 노래한다.
제1주제의 소재에 의한 경과구가 가장 센 소리에서 가장 여린 소리로 잠잠해진 다음 소프라노가 ‘하늘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노래하면 각 성부의 독창자들이 그것을 받아 노래하고 이어 합창도 가담한다. 관현악만으로 시작되는 전개부에서는 새로운 동기가 도입되며, 행진곡풍의 리듬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제1주제에 나타났던 두 개의 동기가 교묘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윽고 합창이 제1주제를 변형하여 노래한다. 한껏 고조되었던 이 부분이 차츰 부드러워지면서부터 제2주제의 소재도 나타난다. 이어 독창자들이 ‘당신의 불길은 우리를 불태우시고, 당신의 사랑, 우리 가슴 가득 채우시네’라고 노래하면서 정열적으로 고조되어 가는 한편 제2주제도 취급된다. 그런 다음 합창이 가세하여 제2주제에서 유도된 새로운 선율에 의해 코랄풍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면서 곡은 ‘적을 물리치시고 우리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소서’라고 클라이맥스를 구축해간다.
그런 다음 2중 합창으로 장려한 2중 푸가가 시작되어 ‘우리들로 하여 악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라고 노래한다. 마지막으로 ‘주여 오소서’가 소리 높이 불리어지고 곡은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에서는 제1주제가 재현되고 나서 독창자들에 의해 제2주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관현악만으로 종결부로 유도되어 말러풍의 대위법이 기교를 다하여 엮어져 나간다. 그때 어린이 합창이 시작되어 ‘아버지이신 주께 영광 있으라! 부활의 구세주께 영원토록 영광 있으라’고 노래한다. 그런 다음 동기가 자유로이 확대되는가 하면 축소되기도 하면서 장대한 클라이맥스를 이룬 채 제1부가 끝난다.
제2부
괴테의 ‘파우스트’ 2부 마지막 장면을 텍스트로 삼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포코 아다지오의 서주와 알레그로의 2-1부에서는 합창과 독창이 활약하고 2-2부에서는 주로 여성 독창이 담당하게 된다. 2-3부는 찬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2-1부(아다지오) 우선 포코 아다지오로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에 따라 저음현과 목관악기가 주요한 동기를 제시하고 그 동기가 교묘하게 활용되면서 진행되는 가운데 조용한 산과 자연 풍경이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루트가 새로운 주제를 연주한다. 그러면 금관악기가 그것을 이어받고 합창도 그에 가담하여 이제까지 제시되었던 소재가 조금씩 변화되면서 되풀이된다. 이윽고 바리톤 독창이 모데라토로 주제를 노래하기 시작하면, 베이스도 가세하여 신을 찬미하고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이어서 어린이 합창단이 마치 천사의 합창처럼 노래한다. 어린이 합창이 끝나면 관현악만으로 연주되다가 저음현과 트럼펫이 새로운 주제를 제시한다. 이윽고 스케르찬도로 변하여 금관악기가 강열하게 울리고, 속도가 느려지면서 천사들의 합창이 제1부의 전개부를 노래한다. 이렇게 해서 차츰 정화되어 가는 도중에 어린이 합창단의 성스러운 노래가 울려나온다. 그러면 테너가 새로운 선율을 도입하여 마리아를 찬미하고 그 선율이 변주곡 풍으로 전개되어 나가다가 제1부의 종결부에 이르러 하프와 피아노의 분산화음으로 제1부가 끝난다.
2-2부(스케르초) 하프의 맑은 소리에 이어 바이올린이 느긋한 표정으로 주제를 연주한다. 그러면 목관악기가 그것을 받아서 되풀이하고, 합창이 반주하듯 노래하며 여성 독창자들도 하나씩 그에 가담하여 곡은 카논 풍으로 전개되어 간다. 그런 다음 이 주제에 바탕을 둔 그레트헨의 죄를 뉘우치는 노래가 제2 소프라노로 불려진다. 이어 어린이 합창과 관현악이 주제를 전개해 간다. 그 다음 다시 어린이 합창이 등장하는데 이후 제2 소프라노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선율이 펼쳐진다.
2-3부(피날레) 마리아를 찬미하는 학자(테너)의 노래로 시작되며 합창이 반주한다. 그런 다음 부드러운 관현악의 간주에 이어 ‘신비의 합창’이 울린다. 이러한 정서가 차츰 고조되면서 클라이맥스를 이루어가고, 금관악기가 이 곡에 등장했던 모든 주제를 힘차게 연주하면서 숭고하고 장엄한 교향곡은 대단원을 맺는다.
말러는 1860년 보헤미아의 칼슈트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유대인이었는데 열넷 자녀 중 말러는 둘째였습니다. 4살 때 피아노 재능을 보인 말러는 10살 때에는 연주회를 열 정도가 되었습니다. 12살이 되던 해 프라하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을 못해 오래 다니지는 못했습니다. 1875년 15살에 빈 음학원에 입학합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우상이었던 바그너와 안톤 브루크너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되면 말러는 항상 브루크너의 뒤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갔습니다. 평생 말러는 지휘자로서 브루크너의 음악에 몰두하고 브루크너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1880년 졸업과 동시에 브람스가 주최하는 빈 베토벤 음악경연에 <비탄의 노래>를 출품했지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그너 풍의 이 곡의 심사위원은 브람스였는데 브람스는 바그너를 아주 싫어했다죠. 그러나 브람스는 훗날 말러의 지휘 솜씨를 높이 평가했고 말러를 빈 국립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추천합니다. 졸업을 했지만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말러는 그 후 10년간 유고슬라비아, 슬로바키아, 프라하, 라이프치히 등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지휘를 맡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교향곡 1번>입니다.
1891년 말러는 함부르크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말러는 위대한 음악 기획자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1892년 런던 무대에 선 함부르크 시립오페라악단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지휘자로서 말러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죠. 이 시기부터 작곡가로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여, 1893년 여름 이후 <교향곡 2번> ‘부활’, <교향곡 3번> 등을 작곡합니다. 그러나 지휘자로서는 훌륭했지만 악단원이나 가수, 극장 운영자들에게는 까칠해서 폭군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자 마르고 항상 해쓱한 얼굴의 말러는 앞뒤 가리지 않고 사표를 내고 맙니다.
구스타프 말러가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장면을 막스 오펜하이머(Max Oppenheimer)가 화폭에 옮긴 작품. 302x155cm의 대형 캔버스에 유화. 말러의 열정적이다 못해 광기어린 지휘모습을 잘 표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작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브람스의 추천이 주효했던 것인지 1897년 빈의 궁정오페라 단장이 된 것입니다. 말러는 당대 최고의 솔리스트들을 빈으로 초대했고 단원들에게는 하드트레이닝을 실시했습니다. 당연히 기존 단원들의 반발이 있었죠. 말러는 악보에 충실했던 지휘자였습니다. “음악가들이 악보에 최대한 충실하게 연주하도록 강요한 것이 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1902년 42살의 말러는 유명한 풍경화가의 딸이자 작곡가인 알마 마리아 쉰들러를 사귑니다. 열아홉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결혼을 하여 그해 말 첫째 딸을, 2년 뒤 둘째 딸을 얻습니다. 아내의 도움으로 더욱 힘을 얻은 그는 마이어니히에 오두막을 짓고 <교향곡 6번> ‘비극적’, <교향곡 7번> ‘밤의 노래’,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 등의 대작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결혼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말러는 알마를 돌보지 않았고 알마는 늘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알마를 유혹한 대표적인 남자가 아버지의 제자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입니다. 그녀의 첫 키스 상대가 클림트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교향곡 4번 앨범. 클림트의 ‘키스’를 패러디한 것이 재미있다.
드디어 빈에서 말러를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인 광풍이 불었고, 독재자 같은 그가 미웠기 때문입니다. 1907년 여름 큰딸이 디프테리아로 죽고, 상심해하던 말러에게 의사는 심장병 진단을 내립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해 10월 빈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끝낸 말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뉴욕 필하모닉 지휘자의 자리를 얻어 미국으로 향합니다. 이후 말러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지휘 활동을 하면서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9번> <교향곡 10번>(미완성)>을 작곡합니다.
5회에 걸쳐 두 대륙을 오가던 말러는 1911년 2월 21일 뉴욕 필하모닉의 카네기홀 콘서트를 마친 뒤 폐렴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요양을 위하여 빈으로 갔으나 그해 5월 18일, 51살을 일기로 세상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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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2일 말러 공연 오시는 회원들은 한번쯤 정독하고 오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실연으로는 보기 드물다는 <천인교향곡>의 실체가 놀랍습니다!
말러 8번 공연 가시는 모든 회원님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겠고 연말에 일복이 터진게 참 그렇습니다..
30일날 밤만 기다려야겠네요.
저는 그 날 산 속에 가 있을텐데.... 인생이 아쉬움 투성이에요. 작은 것 부터 큰 것까지, 즐거운것 부터 괴로운 것 까지.^^
우왓 감사드립니다. 정독하고 열심히 듣고 공연에 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