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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낼 존재가 못 됩니다. 다만 예수님이 다 받으신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평생 알아가면서 그 저주 속에 하나님의 사랑도 잉태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하나님의 저주를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저주 없이 나타나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히심 안에서 잉태된 자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출산을 할 때에 물과 피를 쏟는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찔려 흘리신 물과 피를 쑫으신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범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율법으로 가두셨어요. 로마서에선 모든 자를 불순종 안에 가두셨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긍휼과 심판을 함께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런 우리를 책망하시면서 그 심판과 긍휼을 알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사건, 말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라는 복음의 사건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알았으면 바로 천국 가면 되는데 죄있는 육신으로 굳이 몇 십 년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우리 성도의 인생 자체가 사건이란 말에요. 복음의 사건.
그래서 사도의 서신들은 모두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 그리고 심판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서신서들을 한 번 읽어보세요. 단순히 착하게 살기 구원받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가두어진 세상 속에서 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를 처절하게 체휼하라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저주를 성도의 삶에 실제화 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부어진 곳이 십자가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같이 떨어진 곳이 십자가였어요.
그런 심판과 긍휼, 저주와 사랑을 오해하고 그릇 가르쳐서 교회가 이렇게 사기꾼 집단이 되었습니다. 세상교회 자체가 사기꾼이에요.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기려는 것만 사기가 아니라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다 사기입니다 종교사기꾼. 심지어 요한계시록에는 사람의 영혼을 사고파는 곳을 이야기합니다. 상고들이 포도주와 비단 등을 사고파는데 그곳에는 사람의 영혼도 매매한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이미 세워졌습니다. 계시록의 기록대로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 에베소서에선 창세전 그리스도의 흘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의 완성입니다. 십자가가 영원 속에서 세워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십자가라는 목적으로, 언약의 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만 완성되는 창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아들들이에요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다면 모든 우주와 세상 만물과 인간까지 모든 피조물들은 먼저 있었던 약속에 종속이 됩니다. 약속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로마서의 기록대로 이 세상 만물이 모두 십자가 지신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있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한분 주를 위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까지도 주 예수를 위한 구원이에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모르고, 십자가에서 흘린 언약의 피를 모르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존재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자들은 그 주님과 상관 없는 죽은 흙들이 가는 지옥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 은혜 믿음 사랑 용서 긍휼 의와 죄 심판 모두 한 분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주 예수를 모르면서 이런 단어들을 백날 입에 올리는 건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랑, 다른 믿음, 다른 은혜 다른 영광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게 사랑이에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전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아들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자기 사랑 안에 갇힌 모든 인간은 사랑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사랑만 사랑이란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앞서 말씀드린 그 아들이라는 사랑을 모르면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에 대해 주와 함께 죽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죄가 그들을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편적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정상이 아닌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린 정상이 아닌 몸입니다. 이 정상이 아닌 몸 때문에 우리는 자아실현 자기증명이라는 정욕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자기 사랑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사치 향락 가옥에 가옥을 이어 자기 성을 쌓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시날 땅에서 쌓은 바벨이 온 세상에 퍼진 것이지요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바벨쌓기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그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랑을 모르고 사랑이 없는 모든 종교행위는 그 자체로 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주가 계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 털려나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아들(생명)을 받았으면 다 받은 거란 말입니다. 따로 챙겨가질 내것은 없는 거에요 그런데도 세상 교회들이 예수도 믿고 내것도 따로 챙겨 가지려고 하니까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사랑을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천국도 가고 세상에서도 고지에 올라서서 잘 살아보겠다는 게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개독교입니다. 내 몸뚱이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왜 간섭이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자유이며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가 자기 것을 만들면 빼앗고 허물어버리십니다. 성도 자신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적자아가 스스로 포기가 안 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럴 때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됩니다 (고후4:7-12)
성도는 태생이 다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궁에서 태어났어요.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선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궁과 연결되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는 동안 그 하나님의 탯줄로부터 모든 좋은 은사를 공급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께서 잉태하신 아들들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사는 동안에 고난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은 이것을 싫어하니까요. 나도 내 인생 좀 살자는 거죠. 성도들도 한 번씩 다 해보는 거지요. 입에서 이 말이 절로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 안에서부터 충돌이 일어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이런 내용으로 구원 이후의 삶을 설교 해야 하는데, 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예수,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성령은 없어요. 성령은 우리육이 하고 싶은 것을 책망하고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의에 대해서 늘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건으로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까지도 동원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힘을 축적해서 생존하려고 하는 정욕을 죽여내는 일을 그들 인생을 통해 반복해서 경험케 하시는 것을 히브리서는 아들 만들기, 징계(파이데이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 거에요. 예수님의 부활 안에 있는 성도는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상의 찌끼처럼 되고 세상의 패잔병처럼 되었다고 했어요. 그렇게 세상은 성도의 무덤입니다. 나의 나됨을 발휘하고 증명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상에 대해 잘 죽으면 됩니다. 안 죽으려고 끝까지 버텨도 하나님이 결국 죽여내십니다. 우린 다 창세전에 이미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자들이니까요 그것을 세상 사는 동안 계속해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도가 자기들의 노력과 자기들의 소유로 남들과 차별된 내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보려고 하는 것을 본문 2절에서 들포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 인간들의 자기 증명, 독립된 주체, 자기 가능성 위에 하나님은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구별해낸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저주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과 함께 나타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세상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저주를 유발하는 것이란 걸 세상 교회들이 모르고 있어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추기고 강요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하나님을 왜곡하면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 하는 악행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란들을 그곳에 집어 넣었다가 빼내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포도원을 가꾸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나름 열심히 가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지키고 제사도 지내고 했어요. 다만 그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도 열심히 만들어냈는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들포도를 만든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왔을 때 그 앞에 내어놓을 소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인 거지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발전 확장을 위해서 그들은 오래전에 예수를 버렸습니다. 예수 십자가복음을 정직하게 전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교회가 안된다는 것을 오랜 세월을 통해 알아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복음에다가 물 타기를 하고 성경에 자기들이 만든 부록을 첨가했습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 목사 말이 진리가 되다 보니 성경이 66권이 아니라 수백 권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세분화 하여 613개로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이천년 동안 종교기술자들의 어록까지 하면 수천 권은 될 겁니다. 고객들의 수요를 감안하고 취향을 존중해서 고객 서비스에 충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객의 환심을 샀을지는 몰라도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 복음은 땅속 깊이 파묻혀버렸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귀신들의 처소가 되어버린 이천 년 교회의 역사입니다. 앞으로도 그들에 의해서 수많은 괴물들이 생산될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서에서 말세에 나타날 불법한 자, 악한 자를 이야기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하나님이 사탄까지 사용하여 구원 받지 못할 자는 끝까지 예수를 못 믿게 하시는 겁니다.)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불의를 좋아한다는 것은 들포도가 입맛에 맞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밖에 있는 인간은 다 짐승입니다.)
사도는 우리더러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을 너희를 좋아할 것이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이런 현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즉 차별이 나타나자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왜 나는 아닌데 라는 하나님에 대한 살해의지가 아벨의 살해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 살해라는 dna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한 자의 나타남과 미혹의 역사가 있고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세상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에녹처럼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인해서 세상에서는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있어도 없는 자에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었는데 (다들 칠팔백살 살 때 하나님과 동핸한 에녹은 반도 못산 거에요 그게 에녹의 복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세상에서 보이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원래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으로 사라진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음자리입니다. 우리의 처음자리가 원래 하나님과 하나된 예수 안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처음 자리로 돌아간 것을 두고 세상은 보이지 않더라고 한 거예요.
성도는 에녹처럼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기대하지 마세요 세상이 보기에는 저런 불행이 있나 싶을 정도로 미말에 끌려가는 자들이지만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극상품 포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나’라는 우상과 동거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망의 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기 가치를 챙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가 극상품 포도가 아닌 들포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반드시 원하시는 열매를 만들어서 거두어 가십니다. 새피조물 속 사람을 지금도 자라게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그 영광의 자리로 끌고 가시는 거에요 우리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드는 순종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우리에게 원하는 열매이며 그 열매를 우리 안에 심으셨고 또 자라나게 하는 것까지 그분이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환경 어떤 방해가 있어도 그 열매는 오직 씨(약속)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않고 오히려 아들까지 죽인 포도원 농부들을 죽이시고 포도원도 헐어버려야 정상이건만, 하나님은 그들이 죽인 예수, 즉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삼아서 하나님의 집을 새로 지으십니다. 진짜 하나님의 포도원(하나님 나라)을 완성하신다는 말입니다. 자아실현의 집을 허무시고 예수의 십자가 은혜라는 터 위에 자기 성전을 지으십니다. 피로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가능성과 종교적인 열심과 철학과 윤리적 행위와 사회 정의 교회개혁 평등과 평화 박애등의 모든 아담의 공적들은 다 불타 없어집니다. 그 공적들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런 세상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그들에 의해 예수님은 다시 세상밖으로 추방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하나님의 집에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사르기 위해 잠시 보존된 세상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을 죄 아래 가두어진 세상 속에서 육신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묵시의 것을 바로 담을 수 없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세상살이는 신나고 행복할 수가 없어요 마치 발에 안 맞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불편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 장밋빛 인생을 위해 교회 나온 분들은 일찌감치 포기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예수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로 인해서 깨어지고 무너지는 자들 위에 하나님이 새 집을 건설하시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누가복음 20장)
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내가 지은 내 집이 깨지고 무너지는 아픔 그 하나님의 지극하신 돌보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영원전의 약속대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하나님의 그 사랑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면 충분하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 집 짓기 내 포도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죄인들인데, 이런 우리를 주께서 세상에서 끄집어내시고 강한 자를 결박하셔서 우리를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 주님 안에서 약속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이제 압니다. 우리가 그 은혜 가운데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는 자들로 잘 지어질 수 있도록 주께서 항상 붙들어 주시고 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지켜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잘 계시죠?
손주 많이 컸겠네요
주 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