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내 에세이
‘무엇을 베풀까, 어떻게 나눌까’
참좋은이들21 김향기 발행인
요즘 ‘나눔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 신문에서 전개하는 ‘재능 나눔’운동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고 이에 대한 토론의 장에도 진지한 열기가 넘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발제자는 ‘퍼네이션’시대가 왔다고 강조한다. 이제 ‘얼마를’ 기부하느냐보다 ‘어떻게’ 기부하느냐는 관점에서 즐겁게(fun) 기부(donation)하는 '퍼네이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 때, 아니 여러 차례 과연 내가 가진 자(부자)인가, 못 가진 자(빈자)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주로 물질(돈)을 기준으로 한 생각이었는데 결론은 후자였다. 그러한 생각의 연장 선장에서 몇 년 전 헌혈(4번 째)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이것이라도, 이렇게라도 해야지”하는 고뇌 가운데 행한,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취재 현장에서 보고 듣게 되는 미담의 주인공 혹은 ‘기부천사’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기부하면서 행복한 그들의 모습에서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중에는 자신이 (경제적으로는)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눔에 앞장서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마음의 부자’들인 셈이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이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여기에서 멀지 않다고 느껴진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을 먹고 자라며 사랑을 위해 살고 죽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가짐-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적극적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만들면서 필자가 부럽게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가 신경숙, 시인 김용택, 배우 김혜자, 연극인 손숙, ‘바람의 딸’ 한비야…, 이들은 모두 자기 저서의 인세 수입을 어려운 이웃이나 비영리 공익재단에 기부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보노라면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하는 자책감과 시샘이 들면서도 유쾌해 진다.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여겨지는 까닭은 글 쓰기의 재능이 뛰어나고 억세게 운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가슴 속에 따뜻한 사랑(惻隱之心)이 간직됐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형편이 된다고 누구나 주머니를 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지만 사랑을 나누면 몇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베푸는 사랑에 맛을 들인 사람은 주고 또 주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이런 경지가 되면 부모가 자식에 하듯, 베푼다는 의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 저리 만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그러한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찰이다.
그래서 일까, 경인년을 맞이하면서 왠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마음의 오지랖이 대단히 넓어져 각 분야에서 사랑의 에너지를 발휘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남의 나라로부터 도움 받던 처지에서 벗어나 세계적으로 국격과 국력을 자랑하면서 여러 나라에 도움을 줄 만한 천운이 임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야흐로 정(情)이 많은 한민족의 나눔의 정신이 세계화 될 시점에 이르렀다 싶다.
이러한 생각을 차분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토론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반추해 보고 싶다.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진 성품, 재능, 소유자산 등은 엄밀히 말해 내가 배타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적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정의론자 롤즈(John Rawls)의 표현대로 ‘공유자산’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나에게 주어진 이 행운을 누리는 대가로 이 사회에 대해 소정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부채를 상환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회적 연대주의의 입장에서 기부는 결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마지 못해 적선하는 시혜일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의미있고 고귀한 도덕적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 내 존재 자체가 종횡으로 얽혀진 사회적, 역사적 은덕의 결과체이니까. 그러니 사람은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더불어 살자면 주고 받아야 한다. 주고 받아야 존재를 위한 힘, 즉 유형 무형의 에너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 생명 창조의 법도이고 존재의 원리라고 한다면 ‘베품과 나눔’은 향후 진화된 인간들이 꾸려가는 성숙한 사회에서 자연스런 삶의 풍경이 되지 않을까. 요즘 새로운 종말론(?)이 유포되는 시점에서 가져보는 필자의 소망이다.
첫댓글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마음의 부자가 진정한 부자죠..잘 보았습니다.
그런 마음씀씀이들이 한 둘 늘어날수록 이터는 홍익재세의 세상이 되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