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 고은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그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 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 시집 <만인보> (창작과비평,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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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매도되었던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한 치의 주저 없이 글로써 진실과 정의를 알리려 했던 리영희 선생이 타계했다.
리영희 선생과 도타운 교분을 가졌던 고은 시인은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이라는 추모시를 트위터에 올렸다.
“그리도 불의에 못 견디고/ 불의가 정의로 판치는 것/ 그것 못 견디는 사람”이라며
선생의 행동하는 지성을 말했다.
한편으론 “옥방에서/ 레미제라블 읽으며/ 훌쩍훌쩍 울었던 사람/ 죄수복 입고/
형무소 1평 반짜리 독방에 어머니 빈소 차리고 울던 사람”이라고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을 전했다.
그리고 “환장하게 좋은 사람/ 맛있는 사람/ 속으로 멋있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
리영희 선생! 형! 형!” 흐느끼며 시를 끝맺었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으나 한때 '사상의 은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시대 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은혜를 베풀고 떠난 선생의 글을
책으로 처음 접한 건 ‘전환시대의 논리’였지만 그보다 <우상과 이성>이 더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의 글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라고 설파한 첫머리는
영원히 간직해야할 말씀으로 여겼다.
말씀들을 몇 번이나 접어서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주머니 밑창이 타지고 그 말씀들은 서서히 새나갔다.
선생은 훗날 책의 개정판을 낼 무렵
“우리 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거나
'넋두리'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내 망각의 소이인 일상의 고단함에 굴복한 무디어진 감각이 아니라
진실로 선생이 바라는 바대로 '우상'이 판치지 않는 세상,
정의와 진리가 보편타당해진 세상에서 이 책이 극복되는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하면서
한 시대를 진동시킨 사상의 풍운아 리영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 ACT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