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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산청/단성면] 목화, 백의민족의 시작을 알리다. 목화시배유지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134 13.01.24 10: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백의민족, 그 시작은 민생본의(民生本義)다.

산청 목화시배유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  055-973-2445

 

어디에 숨겨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활용했는지가 중요하지요.

개인의 영달을 위함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우당선생이 더욱 빛이 발하는 것입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길,

경남 단성나들목을 벗어나 우회전하면 처음 만나는 곳, 바로 '목화시배지'입니다.

산청의 목화시배지는 고려말 공민왕때 사우당 문익점선생이 목화를 처음으로 재배한 곳으로 선생의 공을 인정하여 1965년 일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붓두껍속에 목화씨를 숨겨 국내로 들어외서 산청땅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입니다. 목화로 인하여 국민생활과 경제발전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부 귀족만이 비단옷을 해 입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삼베나 짐승의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었습니다. 비단은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삼베는 겨울에 입기에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목화의 재배성공은 누구나 무명옷을 해 입을 수 있었습니다. 

목화의 영향력은 의복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획기적인 목면은 옷을 만들기 위한 물레와 가락, 날틀과 같은 면직기구의 생산발전을 가져 왔으며, 목화솜은 탈지면으로 지혈이나 환자들의 구급품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솜은 화약이나 초의 심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무명실은 노끈으로 활용되어 낚시줄, 그물과 같은 용품으로 활용되면서 그 사용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결국, 조선시대에 무명은 나라에서 세금으로 걷어들이는 품목으로 지정 되었고, 이는 화폐가치를 인정하여 통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내에만 적용 된것이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에도 주요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목화는 의생활에 혁명이었습니다. 무명과 베 위주의 옷과 이불이었으나, 면화이불과 솜의 보급은 우리나라의 일대혁신이 되었습니다.

 

  

사청 목면시배유지

 

 

 

목화는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목화(木花)', 또는 '면화(棉花)'라고 불리며, 온대지방에서는 1년생이지만 온대성 지방에는 다년생식물로 인도에서 기원전 2500년경에 재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목화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비식용 농작물입니다.

 

'산청 목화시배유지(木花始培遺地)'는 약 4,600평의 규모로 전시관은 430평입니다.

'면화시배사적지'와 함께 '문익점 면화전시관'을 중심으로 '효자비각,' '부민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효자각의 옆에 목화재배지와 전시관 맞은편 도로 건너편에도 목화재배지가 자리합니다.

중심공간인 '문익점 면화전시관'에서는 목화의 역사와 목화에서 옷이 되는과정, 목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과 우리 생활속의 목화 이야기와 함게 목화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 구성 됩니다.

목화의 발아에서부터 떡잎이 생기는 과정, ?이 맺히는 과정, 다래가 생기는 과정을 거쳐 목화솜이 피어날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며, 디오라마를 통하여 무명베 만드는 순서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씨앗기 > 활타기 > 고치말기 > 실잣기 > 무명날기 > 무명베기 > 베짜기의 과정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어 목화씨앗에서 부터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의복이 되는 과정을 간접 체함 할 수 있습니다.

'면화시배사적비(棉花始培事跡碑)'는 문익점 선생의 면화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965년 세워진 사적비입니다.

'부민각(富民閣)'은 문익점 선생이 돌아가신 후, 조선2대왕 정종은 선생의 공과 덕이 지극하다하여 '국장(國葬)'에 준하는 '예장(禮葬)'을 할 것을 명하였고, 태종은 '참지의정부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參知議政府事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로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내렸습니다. 뒤 이어 세종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補國 崇綠大夫 議政府 領議政)'에 추증하고 '부민후(富民侯)'로 추봉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의의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7칸의 집을 지어 주니 '백성을 부자로 만든 공'이라 하여 '부민각(富民閣)'이라 하였습니다.

부민각의 옆으로 자리한 '효자비각(孝子碑閣)'은 우왕2년(1376년)시묘를 중단하지 않고 초막을 지킴으로서 왜적마저도 감동 시켜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뜻의 '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표시를 하고 떠나 단성일대가 피해를 면 할수 있게 됩니다. 훗 날, 우왕9년(1388년), 이를 안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단성일대를 '효자리(孝子里)'라고 명했습니다.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은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 의피생민 후직동)이라는 시를 지어 삼우당 선생을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처럼 의생활에 혁신을 가져다 준 문익점 선생, 잊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배의 성공은 곧 자신의 부(富)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지만, 선생은 이를 전국에 전파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지요.

산청을 여행한다면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곳, 산청 여행중에 꼭 가보아야 할곳으로 '목화시배유지'를 추천합니다.

 

 

 

  면화전시관 건립기념비(좌)와

'삼우당문익점선생유허비(三憂堂文益漸先生遺墟碑)', '삼우당문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文先生棉花始培事跡碑)'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1329~1398)',

삼우당 선생의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부친 '경주사록 문숙선(慶州司錄 文淑宣)'과 모친 '조씨부인'사이에서 둘째아들로 경남 산청 강성현(江城縣)에서 태어 났습니다.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입니다. 부친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어려서 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2세에 '역동선생 우탁(易東先生 禹倬, 1263~1342)',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와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 '가정 이곡(稼亭 李穀, 1298~1351)'선생의 제자가 됩니다. 가정 선생의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이지요.

17세 되던해에 주씨 부인과 혼례를 올리고 2년 터울로 장남 '중용(中庸)'과 차남 '중성(中誠)'이 출생하였고, 차남이 태어 나던 해에 '경덕재(經德齋)'에 입교하면서 이름을 '익점(益漸)'으로 바꾸게 됩니다.

 

먼저, 정치적 입장의 문익점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공민왕2년(1353년), 정동성 향시(征東省 鄕試)에 목은 이색과 함께 급제 하였으며, 공민왕9년(13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의 부군수급인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을 거쳐 이듬해에는 성균관 학관인 '순유박사(諄諭博士)', 그 다음해에는 정6품 '승봉랑(承奉郞)'을 거칩니다.

그러던 공민왕12년(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 左正言)'으로 지내면서 공민왕에게 부정부패의 척결을 위해 원나라와의 관계를 신중히 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해 4월 '계품사 문하좌시중 이공수(啓稟使 門下左侍中 李公遂, 1308~1366)'의 세번째 서열인 '서장관(書狀官)'의 사신 자격으로 원나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원나라는 공민왕의 반원(反元)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에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忠宣王, 고려26대왕)'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려 합니다. 덕흥군은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원나라로 피신해 있었던 때 입니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하면서 친원세력인 권문세가들을 없애자 당시 고려를 배반하고 원에 머물던 '최유(崔濡, ? 1364)'는 공민왕 제거를 모의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삼우당 선생은 11월 원나라 황제에게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 수 없음을 상소하였고, 그 해 11월 운남행성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그 때 원나라에 머물던 사신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고, 그 중에 삼우당 선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삼우당 선생은 앞, 뒤가 맞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원나라의 외교단절을 주장하다가, 공민왕 폐위에 찬성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문제는 당시의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기록된 것입니다. 즉, 이성계에 반했던 인물들이 좋게 표현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암튼, 공민왕12년(1363년) 12월,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합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평북 정주군의 달천(撻川)에서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조선1대왕)'와 '최영(崔瑩), 1316~1388)'이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하고 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 그런데 당시 원나라의 사정은 열악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지요.

홍건적이 여기저기서 난리를 피우던 때 입니다. 

그리고 유배길에서 삼우당 선생은 목화를 알게 됩니다.

이것의 씨앗을 내 나라로 가져 간다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글들에서 보면 목화씨가 원나라에서는 수출입이 금지 된 금수품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당시 금수품목은 활, 화약등 무기들을 제작할 수 있는 재료들과 서적들 일부였다는 것을 본다면 목화는 반출 금지까지는 아니었던 품목이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하여 체계적인 관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목화씨는 삼우당선생의 붓두껍에 넣어 고려로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산청 시배유지 전시관

 

 

1366년, 원남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원나라로 복귀한 삼우당 선생,

이듬해 2월 부모봉양을 청원하며 환국을 합니다. 그러나 귀국과 동시에 덕흥군의 지지에 선생의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파직 됩니다.

결국, 관직을 사퇴하고 1364년 고향 진주로 내려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목화씨를 반으로 나누어 목화의 시험 재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삼우당 선생의 재배는 모두 실패하였고, 장인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만이 살아 남게 됩니다. 살아남은 목화가 꽃을 피웠고 씨앗 100여개를 얻었으며, 이를 다시 재배하여 성공하였습니다.

해매다 재배량을 늘린 삼우당은 향리의 사람들에게 목화씨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심어 기르도록 목화재배를 교육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술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 때 호나라의 승 려 홍원(弘願)이 정천익의 집앞을 지나다가 심겨진 목화를 보고 "이제와서 다시 본국의 물건을 볼 줄을 몰랐다."며 반가워 하였고, 이를 본 정천익은 그를 자신의 집에 물게 하여 목화에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자세히 알려 주었으며, 기구 만드는 법까지 알려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손자 '문영(文英)'은 면포짜는 법을 고안하였고, 손자 '문래(文來)'가 제사법(製絲法)을 발명하면서 물레를 개발하게 됩니다. 즉, 그의 이름을 따라 '문래'라 불렸던 것이 지금의 '물레'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서 목화가 널리 퍼졌고, 백성들의 의복은 기존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귀족내지 권문세도가들만의 전유물이 일반 백성들에게 확산 된 것이지요.

이렇게 재배에 성공하고 10년, 온 나라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1374년,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는데, 그 때 정도전과 정몽주와 함께 원나라에서 온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친원파인 권문세가들의 공격을 받아 청도군수로 좌천 됩니다.

그러나 우왕1년(1375년), 조정에서는 삼우당 선생을 불러 목면을 보급한 공로를 인정하여 '전의주부(典儀住簿)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선생은 모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 때 왜적이 침입했던 것입니다. 지나는 길목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모두 피난을 떠났으나, 선생은 홀로 남아 초막에 머물며 평소와 같이 곡(哭)을 하며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왜적들도 선생의 효심에 감동을 하여 나무를 다듬어 푯말을 세웠으니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뜻의 '물해효자(勿海孝子)'를 세워 마을 일대가 모두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은 조정에 알려 졌고, 이성게의 추천에 의해 우왕9년(1383년) 효자비를 건립하게 됩니다.

이 후 창왕1년(1389년)에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해 8월, '전제개혁(田制改革)'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이로서 이성계,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해 전개된 '사전혁파(私田革破)'에 반대를 하고 이색, 이림, 우보, 우현보등과 함께 이성계 일파를 반대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인 사헌부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공양왕2년(1390년) 8월,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직하였고, 그 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8조'를 올렸고, 11월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 갑니다.  

 

고향으로 내려온 선생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 자신의학문을 소신껏 펼치지 못한 안타까움,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한것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스스로 '삼우당(三憂堂)'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고, 태조는 사자를 보내 조정에 들것을 권유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하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선생의 고집을 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생에게 정3품의 벼슬을 내리고 봉록을 지급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정종2년(1400년) 2월, 노환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들여 온 면화는 일본인들이 많은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 후, 목화의 씨앗과 베를 짜는 방법등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일본은 그것을 상품화를 하였고, 하나의 기업이 대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어 냅니다. 즉, 우리는 삼우당선생의 민생주의로 인하여 온 나라 백성들이 횐옷을 입어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되었지만, 일본은 자본주의 사상으로 한 기업의 전유물이 됩니다.

당장의 이익을 멀리하고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킨 삼우당 선생, 선생에게 남은 것은 시배유지와 도천서원과 묘각 신안사재, 신도비각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산청고을의 여행길이라면 지금의 우리가 있도록 한 삼우당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부민각(富民閣)

삼우당 선생의 의의(意義)를 오래도록 기리도록 하기 위해서 7칸의 건물을 지어 부민각이라 하엿습니다.

 

 

 

 

'삼우당 효자비(三憂堂 孝子碑)'

삼우당선생이 모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 왜작이 침범하였습니다. 단성일경은 모두 피난을 떠나고 아무도 없었는데, 선생만은 편소와 같이 여막을 지키며 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왜적은 이러한 선생의 효심에 감동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뜻의 '물해효자(勿害孝子)'라고 써 세워 놓아 단성일대가 화를 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성계가 우왕에게 건의하여 마을 입구에 정려(旌麗)를 내리고 마을 일대를 '효자리(孝子里)'라고 하였습니다.

 

 

 

 

 

 

INFO...

산청 목면시배유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  055-973-2445

관람시간 :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관람요금 : 성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주차요금 : 무료 

 

 

 

by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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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26 19:31

    첫댓글 어릴적 목화밭에서 달작지근한 목화 를 따먹던 기억이 아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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