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저자 원재명(元在明 1763~1816)의 본관은 원주(原州), 호는 지정(芝汀)이다. 1790년(정조14)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01년(순조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종실록(正宗實錄) 편수에 참여하였고, 1804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었는데 다음은 그 기록의 일부이다. 원문 고전번역원,번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1804년(순조4) 10월 30일 맑음
성정각(誠正閣)에서 사폐(辭陛.신하가 국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림)하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배표(拜表.중국왕실에 보내는 표문을 사신에게 전함)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서 사대(査對.표문의 내용을 검토)하였다. 40리를 가서 고양군(高陽郡)에 머물러 묵었다.
새벽에 가묘(家廟)에 인사를 올리고 궁궐로 나아가 정사 김사목, 부사 송전,과 함께 성정각(誠正閣)에 입시(入侍)하였다. 상(上)께서 친히 하유(下諭)하기를, “삼사(三使,즉 정사ㆍ부사ㆍ서장관)는 무사히 잘 다녀 오라.” 하니 삼사가 동시에 일어났다가 부복(俯伏)하였다. 다시 하교(下敎)하기를, “저 나라에 머무는 동안 새로운 소식을 듣는 대로 탐지해 오라.” 하니, 정사가 답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통역하는 무리들의 실정 탐지가 엉성합니다만, 그들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하교하기를, “어느 때 강을 건너는가?” 하니, 정사는 “아마도 다음 달 20일 무렵일 듯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느 때 복명(復命.귀국 후 보고)할 수 있겠는가?”하니, 정사는 “내년 3월 보름에서 20일 사이일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 삼사에게 각각 환약 5가지, 부채 2자루,단목(檀木), 이엄(耳掩) 1벌을 내려주라고 하명(下命)하시니, 삼사가 일어났다가 부복하여 공손히 받았다. 차례대로 받기를 마친 뒤 물러가라는 명이 있어 물러나왔다.
삼사가 함께 명정전(明政殿) 뜰로 나아가 배표의(拜表儀)를 행하였다. 삼사는 따로 반차(班次.품계의 차례)를 마련하여 공립(拱立)하고, 백관(百官)들은 의례대로 예를 행하여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뒤 산호(山呼.임금에게 축하하는 뜻으로 부르던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황옥 용정(黃屋龍亭.가마 종류)에 받들고 돈화문(敦化門)으로 나왔다.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니 종인(從人)들이 모두 왔고, 전송하는 이들도 벌써 모여 있었다. 부사의 막차(幕次)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는데, 가인(家人)이 아침밥을 보내왔다. 대청(大廳)에서 사대(査對)에 참여했다가 물러나와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사람들과 전별주를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정사와 부사가 차례로 출발하여 나도 교자에 올라 출발하였다. 산 위의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바람도 스산하였다. 조카 규(圭)와 생질 이인태가 여기에서 작별을 고하고, 범(範)ㆍ주(周) 두 조카와 사위 민치승은 먼저 고양으로 갔다. 모화현(慕華峴)을 넘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전송하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작별을 고했다. 창릉점(昌陵店)에 이르렀을 때 이미 횃불을 밝혔고, 초경(初更.저녁 8시 무렵)에 고양군에 도착했다.
군수 자범(子範) 유한식(兪漢寔)은 병으로 인해 오지 못했으나, 제공된 저녁 식사가 매우 정결하였다. 겸인(傔人.청지기등 잡무를 맡아보던 사람) 이명철(李明喆)이 마침 도착하여 관아에 머물다가 와서 인사하기에, 군수에게 술을 좀 보내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더니, 답으로 밤에 큰 술단지 두 개를 보내 와서 제군들과 함께 몇 잔 흠뻑 마셨는데 술맛이 산뜻하고 시원하였다. 교리(校理) 송지렴(宋知濂)이 그의 부친인 부사(송전)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야(初夜.초저녁)였으므로,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 11월 초1일 맑고 따뜻함
40리를 가서 파주목(坡州牧)에서 점심을 먹고, 35리를 더 가서 장단부(長湍府)에서 말을 먹였으며, 다시 45리를 가서 개성부(開城府)에 묵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군수가 찾아와 만났다. 조카 주(周)ㆍ사위 민(閔)ㆍ김인철(金仁哲) 군ㆍ김익렬(金益烈) 군 등 여러 사람들이 작별을 고하였다. 파주목(坡州牧)에서 점심을 먹었다. 목사(牧使)인 오응상(吳應常)은 마침 한양에 올라가 있었다. 부사가 먼저 출발하고 정사가 뒤이어 출발하였는데, 임진강 기슭에 배를 정박해 두고서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강을 건넜다. 진장(津將.나루터를 지키는 관리)은 바로 정사가 총융청(摠戎廳)에 있을 때 장교(將校)였던 사람인데, 옛 대장(大將)을 위해서 배 안에다 송별연을 차렸으니 매우 기특한 일이었다. 강을 건너 동파점(東坡店)에 이르자, 조카 범(範)이 작별을 고하고 단산(湍山)의 묘사(墓舍)로 들어갔다.
장단부(長湍府)에서 말을 먹였다. 부사(府使) 성범진(成範鎭)이 와서 만났는데, 성주(城主)의 예(禮)로써 대하고, 출발에 임하여 두루 위로의 말을 하였다. 교리(校理) 이영로(李永老)가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횃불을 켜들고 말을 달렸으나,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밤 깊은 삼경(三更)이었다. 유수(留守)인 서미수(徐美修)는 임기가 다 차서 한양에 올라갔고, 경력(經歷)인 맹양대(孟養大)가 찾아와 만났다. 밤이 깊었는데 횃불꾼들이 모두 흩어져 버려서, 종인(從人)들 태반이 뒤처졌고 심지어는 말에서 떨어진 자도 있었다. 자명(子明)과 계명(季鳴)도 뒤따라 왔다. 책임을 물어 색리(色吏.지방 관청에서 행정 실무를 처리하던 하급 관리)를 가볍게 치죄하였다.
● 초2일 맑았다가 저녁에 흐려짐
70리를 가서 금천군(金川郡)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더 가서 평산부(平山府)에서 묵었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하였다. 청석동(靑石洞)을 나오며 보니 서문(西門)에 초루(譙樓.문루)를 새로 설치하여 수백 보(步)를 축성하고, 문에 ‘청석관(靑石關)’이라 편액(扁額)하였는데, 참판(參判) 서영보(徐榮輔)의 글씨였다. 이곳은 충분히 변방의 방어에 일조(一助)할 듯하였다. 선배들이 경영해 온 곳인데, 지금 유수가 시설을 만들어 첨사(僉使) 1원(員)을 두고, 객점(閭店) 30여 호(戶)를 지었다.
금천군에서 점심을 먹었다. 군수인 조용진(趙用鎭)과 금교 찰방(金郊察訪) 임희탁(任希鐸)이 와서 만났고, 해주 판관(海州判官) 송수연(宋守淵)은 편지를 보내왔다. 여기서부터 삼방(三房.삼사들이 묵는 곳)의 규례에 따라 청단역(靑丹驛)의 역마로 바꿔 타므로, 경기역(京畿驛)의 역졸(驛卒)들도 모두 돌아간다고 인사를 하였다. 겸인(傔人) 이대원(李大元)은 이곳에 이르러서 작별을 고하고 강남장사(江南庄舍)로 들어갔다.
길을 나서서 ‘회란석(回瀾石)’을 보았다. 회란석은 객사(客舍)의 남쪽에 있는데, 명(明)나라 사신 허국(許國.1567년 선조 즉위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이 쓴 세 자의 큰 글씨이다. 저탄(猪灘)을 건넜다.
평산부(平山府)에 도착하였다. 부사는 윤상중(尹尙重)이다. 곡산부(谷山府)에서 출참(出站)하여 지공(支供.음식 땔감 등을 제공함)하였고, 부사 윤치성(尹致性)은 편지를 보내왔다.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기악(妓樂.기생과 풍류)이 있었다. 서로(西路.한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길)의 인사(人士)들이 샛길과 굽은 길에서 반드시 사행의 안부를 물으려고 하여서 여기서부터 점점 더 북적거렸다. 한 사람을 물어보면 두세 명을 데리고 오고, 음식 한 상을 대접하면 서너 명이 작별 인사를 하고 가니 자못 향사(鄕社)에서 강신(講信)하는 것과 흡사했는데, 이르는 역참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주부(主簿) 정남수(鄭楠秀)가 마침 황주(黃州)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으므로, 와서 기다렸다가 하루를 묵었다. 그가 돌아가는 편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註:이하의 기록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