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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람미 여인의 사모의 노래
아 1:1-7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아 1:1-7 / 솔로몬이 지은 노래 중의 노래 2) [내 임금이시라면] (신부) 입맞춰 주세요. 임의 입술로 아, 포도주보다도 더 달콤한 임의 사랑. 3) 임에게서 풍겨 오는 아련한 그 향내 임의 이름 듣기만 해도 향내 나는 듯하니 아가씨들 임을 그리워한답니다. 사랑한답니다. 4) 나를 데려가 주세요. 우리 함께 손잡고 뛰어가요. 나의 임금님 어서 날 임의 방으로 데려가세요. 우리 함께 기뻐해요 즐거워해요 임 거기 계시오니. 나 기리렵니다. 노래하렵니다. 포도주보다 더 진한 임의 그 사랑. 하여 아가씨들 임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합니다. 5) [시골 처녀] (신부) 예루살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까무스름하더라도 아름답단다. 광야에 사는 게달족이 쳐놓은 장막처럼 까무스름하더라도 솔로몬 성전에 꾸며 놓은 휘장처럼 아름답단다. 6) 내 피부가 까무스름하다고 깔보지 말아라. 햇볕에 그을러 그렇단다. 오빠들이 포도원 지키라고 자기네 포도원 지키라고 을러 대어서 내 포도원을 그냥 놔둔 채 오빠들 포도원 지키느라 이리됐단다. 7) [양 치는 처녀] (신부) 나의 임, 가르쳐 주세요. 어디 계신지 임이 치시는 양 떼가 어디 있는지 한낮엔 양 떼가 어디서 쉬는지 말씀해 주세요. 다른 목동들이 치는 양 떼들을 따라 이 몸이 이리저리 헤매야 하나요?
신랑과 신부, 신부의 친구들인 예루살렘 처녀들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만 봐서는 누가 부르는 노래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남녀 간에 서로 존댓말을 쓰지도 않으며, 말투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으로 노래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1) 아가는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특별한 지혜와 영감을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4장 32절은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아가서는 그중 최고의 노래입니다.
신부가 신랑에게(2-4) 신부는 신랑의 입맞춤을 갈망합니다. 포도주도 육체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연인과의 입맞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3절의 기름은 향수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고귀한 향내는 신부를 설레게 했습니다. 이제 여인은 신랑인 왕이 자신을 그의 방으로 이끌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에서 갑자기 복수 1인칭 대명사인 우리가 등장합니다. 여기 ‘우리’는 예루살렘 처녀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한편 ‘너’는 신랑을 가리킵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신랑을 따라가는 신부의 기쁨에 동참하고, 이어지는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에서 이 말은 신부가 신랑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기 친구들도 신랑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매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신부는 신랑을 칭찬합니다.
신부가 예루살렘 처녀들에게(5-6) 게달은 유목민들로서 그들은 흑염소털로 장막을 세웠습니다. 신부는 자신의 검은 피부가 포도원에서 일했기 때문이라며, 피부로 자기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자기 모습이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신부가 신랑에게(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라는 표현은, 신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있는 곳에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얼굴을 너울로 가리고 다른 목동들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도록 있는 곳을 말해달라고 합니다.
적용: 당신에게도 가슴 뛰는 사랑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배우자를 향해 그 사랑을 회복해 보십시오.
사랑은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낭떠러지 끝에까지 가서 따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탕달<연애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적극적인 믿음과 고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 설 교 >
사랑의 기쁨
아 1:1-11 / 박봉수 목사
아가서는 성경 66권 중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야하기까지 한 에로스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늘 논란 거리였습니다. 우선 ‘과연 아가서를 성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즉 정경성의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아가서를 정경으로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즉 해석에 관한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이 아가서를 성경 66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책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가서는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이라는 유비적인 해석입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기쁨에 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운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 그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 그 안에서 맛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을 점입니다. 이 사랑의 기쁨을 맛보며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결혼식에 참여했다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가를 부르는 분이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란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장 폴 마르티니가 작곡한 가곡입니다. 그런데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뜨 피아프와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나나무스꾸리가 불러서 샹송처럼 알려진 노래입니다.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라진 별이여 영원한 사랑이여 눈물에 은하수 건너서 만나리
그대여 내 사랑 어디서 나를 보나 잡힌듯 멀어진 무지개 꿈인가.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실 제목이 사랑의 기쁨이지 내용은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결혼식에 와서는 사랑의 아픔을 축가랍시고 부르니 얼마나 민망합니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아닐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이 우리 인간이 겪는 사랑의 참 모습입니다.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보려 사랑을 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픔이요 맛보는 것은 슬픔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며 눈물짓고, 사랑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본문 아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참다운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참다운 사랑 안에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축가로 그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랑의 기쁨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두 건강한 남녀 연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시적인 대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두 연인이 주고받는 사랑의 고백 안에 저들이 맛보는 불같은 사랑의 기쁨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아가서는 어찌 보면 충격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바로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때이고, 남자가 쉽게 여자를 버릴 수 있던 때입니다. 이럴 때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고백도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한 마디로 키스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아가서는 왜 이런 충격적인 여인의 사랑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기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일반 여인들처럼 사랑 받기를 고대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큰 기쁨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고 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맛보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일전에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사모”란 모임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둔 남편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는 머리가 희긋희긋한 60대 남편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8년 또 어떤 분은 10년이 넘게 치매로 점점 퇴행되어가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아온 분들입니다.
아내는 외모는 벌써 다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곁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난처하게 만들고 짜증나게 만듭니다. 자기를 보고 “누구세요?”할 때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직장도 퇴직한 채 다 버리고 오로지 아내 뒷바라지에 헌신합니다.
어떻게 10년씩이나 그렇게 아내 곁을 지킬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생뚱맞은 대답을 합니다. “내 아내는 예쁜 치매에 걸려서 사랑스럽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뭐가 예쁘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점점 순수해 져갑니다. 조금만 슬픈 일이 있으면 울어버리고 조금만 좋은 일이 있으면 방끗 웃습니다. 그렇게 자기감정에 솔직한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 남편을 보면서 가슴이 뻐근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그 깊은 경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아내가 치매에 걸려 저리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일을 다 접고 아내 뒷바라지에 헌신할 수 있을까?” 마음이 묵직해 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기쁨”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더라도 그 사랑이 에로스적 사랑의 달콤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에로스적 사랑이 불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면 사랑의 기쁨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이 곧 사랑의 슬픔으로 변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고,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고, 교우를 사랑하고,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받는 기쁨
본문 5-7절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을 고백하던 이 여인이 갑자기 자기의 콤플렉스 이야기를 합니다. 5절을 보면 “내가 비록 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그리고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자기가 여자지만 포도원 지기로 일하다가 햇볕에 얼굴이 타서 예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남자들 앞에서 얼굴을 가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남자가 부릅니다. 비록 검게 탄 얼굴이지만 이 남자는 어여쁜 여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11절을 보면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여자의 고운 자태에 반해서 보석으로 치장을 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외모가 아름답지 않지만 그래도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 상담가 딘 마틴이라는 분이 아내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당신은 좋은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결혼하고 1년 정도 지난 아내들은 이 질문에 98%가 예라고 대답했고, 2년이 지난 아내들은 거의 절반인 56%만 “예”라고 대답했고, 결혼 10년이 지난 아내들은 겨우 6%만 자신의 남편이 좋은 남자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아내들은 무려 95%가 “나는 좋은 남자를 만났습니다”라고 답을 했답니다.
이 분이 통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부부가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하나가 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린다는 것입니다. 20년은 돼야 나 같은 것을 아내로 남편으로 믿고 함께 살아준 서로에게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랑 이야기 가운데 또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받는 기쁨”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달콤함이 있더라도 내가 예쁘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받는 자랑스러움이 있더라도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부부 갈등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데 왜 사랑해 주지 않는냐고 따지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 트러블이 생깁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사랑 받는다고 감사할 때 그 사랑은 기쁨이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영감 왜 불러”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영감과 할멈이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부르는 노래입니다.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뛰어놀던 씨암탉 한 마리 보았소? 보았지! 어쨌오?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 했군 잘 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여보 마누라! 뒤뜰에 매어놓은 송아지 한 마리 보았나? 보았지 어쨌오! 친정 집 오라버님 장사밑천으로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 했군 잘 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이 가사 내용을 잘 살펴보면 정말 잘해서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같이 속이 쓰린 것들입니다. 씨암탉을 잡아먹어 버리고 송아지를 친정집에 주어버렸으니 싸워도 한 참 싸울 일들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했으니 잘했다는 것이고, 또 그것을 잘했다고 해 줄 사람 당신 밖에 없으니 고마운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기쁨, 사랑 받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의 기쁨
이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이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사랑하며 맛보는 사랑의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기쁨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사랑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참된 기쁨을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야기입니다. 이분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성에 대해 강의하던 교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이요 모두가 부러워할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986년 8월 갑자기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라는 장애인 공동체의 사목(chaplain)이 됩니다.
이분이 이곳에서 한 일은 아담이라는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그를 깨워서 잠옷을 벗기고 욕실에 데려가 조심스럽게 면도를 해주고 목욕을 시킵니다. 그리고 옷을 골라 입히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아침을 먹입니다. 식후에 휠체어에 태워서 주간 프로그램 하는 곳으로 보냅니다.
매일을 이렇게 보내던 이분에게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 아담의 발을 씻어주며 섬기면서 그 아담 안에 또 다른 아담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자신이 아담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바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장애인 아담이 더듬거리는 말로 이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때 헨리 나우엔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놀라운 기쁨을 맛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그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 받는 기쁨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자신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받으며 그 안에서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 고백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거절하는 철 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 6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주바”와 “세마마” 즉 “버림 받은자”요 “쫓겨난 아내”였던 하나님의 백성을 “헵시바”와 “쁄라” 즉 “사랑하는 여인”이요 “결혼할 여인”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절한 사랑 고백입니다. 버림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사랑하는 여인이요 결혼할 여인이라고 고백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격 없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백하고 계십니다. 버림 받아 마땅한 저와 여러분을 향해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망극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을 깨닫고 눈물로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 큰 사랑 앞에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 받는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의 기쁨 안에 우리 삶의 더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아 1:1-17 / 이종윤 목사
아가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신약에도 인용된 바가 없습니다. 경건한 신앙에 관한 표현도 없고, 환상이나 직접적인 계시의 흔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욕망에 가득찬 젊은이들의 연서 같은 문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솔로몬의 1005개의 시 중에서 가장 귀한 시입니다. 교부들은 이 책에서 만물을 발아래 두신 그리스도가 하늘 나라의 신부를 만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가운데 아가서보다 더 많은 주석이 쓰여지고 해석된 책도 없을 것입니다. 아가서는 유대교에서도 기독교회처럼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난해한 아가서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신랑 예수님께 자신을 게달의 장막 같다고 말합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이들은 북아라비아 족속이며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베두인족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염소털로 만들어진 장막을 쳐서 사는데 이렇듯 더럽고 지저분한 것, 그것이 게달의 장막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가서에서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봐주고 계십니다.
Ⅰ.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사랑
2절에서 6절을 살펴보면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사랑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2절) 입맞춤, 즉 키스는 애정과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키스해주길 바라는 것. 많은 이들이 이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구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내게 오셔야 내게 입맞춤을 할 수 있으니 가까이 와달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 포도주는 세상적 기쁨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내적 교제를 체험한 성도는 세상적 쾌락보다 하나님 사랑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친밀한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또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Ⅱ.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8절에서 그리스도는 성도를 '내 사랑아'라고 불렀습니다. 9절에서는 술람미 여인을 바로의 준마와 같다고 했습니다. 준마는 빠르고 담대하며 단결을 잘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신속하고 활발한 봉사와 끊임없는 용기 그리고 신자의 단결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또 신부가 아름다운 장신구로 꾸민 것을 기뻐했습니다. 두 뺨, 즉 얼굴은 인격을 나타내며 목은 생명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머리털과 구슬꿰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게달의 장막과 같은 우리임에도 그 속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아름답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Ⅲ.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신자는 그리스도를 만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를 왕으로 섬기고, 값비싼 나도 향유를 부어 기쁘게 해드리면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고백해야 하며, 내 품의 몰약향 주머니, 즉 나의 생명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엔게디 포도원의 소벨화 송이, 즉 그리스도의 향기를 주신 그 분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비둘기의 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하고 순결한 것이 비둘기입니다. 주니이 우리를 비둘기와 같이 순결한 존재라고 불러주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16-17절에서 성도가 왕과 함께 할 침상이 언급됩니다. 그 침상은 푸르다고 나옵니다. 푸르다는 것은 평화와 안정을 의미하며 침상은 교회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평화와 안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그 집의 재료가 최고품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이 백향목과 잣나무처럼 신앙 인격이 견실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게달의 장막 같은 내가 솔로몬의 휘장같이 귀하고 사랑받는 성도가 된 것을 감사하고 그 길을 계속해서 겸손히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첫사랑의 신비
아가서 1:2-7 / 조덕영 목사
사랑이 전부다! 1. 첫사랑의 신비(아가서 1:2-7절)- 아가서 완결편
사랑이 전부다! 1
‘사랑 학교’ 제 1부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 가
“하나님의 신비롭고 놀라운 ‘사랑 학교’로 들어오세요!”
1. 첫사랑의 신비(아 1:2-7)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아가서 1장 첫 본문은 첫사랑(구애 단계) 단계의 사랑과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아 1:2-7)이 담겨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에 담긴 첫사랑의 아름다운 교훈을 살펴보자.
1) 첫 사랑은 갈망으로부터 온다(1-2절)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목마름 곧 희구로부터 시작된다. 단순한 목마름이 아니다. 행동적 갈망이 있다. 만남의 갈망이나 입맞춤의 갈망과 같은 육체적 갈망,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연인 간에도 어떤 갈망이 있다. 신앙적 목마름도 비슷하다. 믿음이 생기면 신앙적 갈망이 생겨난다. 교회에 대한 갈망, 하나님에 대한 갈망, 말씀에 대한 갈망, 기도에 대한 갈망, 신앙적 뜨거운 갈망이 생겨난다. 혹시 그런 타는 목마름이 있는가? 전도자, 선교사들은 예수를 전하고 싶은 갈망이 남보다 조금 더 뜨거운 사람들이다. 필자도 그 목마름을 따라 한때 기도원을 내집처럼 드나들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갈망함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도 사랑의 갈망으로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도 당연히 행복한 갈망을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2) 첫 사랑은 칭찬으로부터 시작된다(2-3절)
솔로몬의 사랑은 값진 포도주보다 낫다. 술람미 여인은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보다 솔로몬의 사랑이 더 귀하다고 칭찬하며 노래한다. 여기서 사랑은 히브리어 dodim(dod의 복수형)으로 아가서에 30회 이상 나오는 단어이다. 본래 이 말은 '끓이다'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갈망이 큼을 말한다. ‘네 기름이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값진 기름처럼 향기롭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연인을 칭찬한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다’고 칭찬과 존중을 담아 인격적 칭찬의 고백을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모든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극찬한다. 사랑하면 과장된 칭찬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첫 아기가 천재임이 분명하다고 과장된 찬양을 남발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의 칭찬은 유치해보이기는 하나 누구도 그 찬양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는 않는다. 누가 이런 찬사를 거절하겠는가. 여러분들도 한번 당신의 남편과 아내를 ‘당신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땅 최고의 선물’이라고 칭찬해보라! 창조주 하나님께 사랑 받아 하나님께 이런 칭찬을 받는 이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3) 사랑은 내밀한 기쁨이다(4절)
솔로몬은 침궁으로 술람미 여인을 끌어들인다. 침궁은 아주 내밀한 개인적 장소이다. 사랑에는 내밀한 기쁨이 있다. 사랑하면 사랑의 은밀한 고백, 은밀한 인도, 은밀히 함께함이 모두 기쁨이 된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입술의 노래로 태어난다. 사랑의 기쁨은 기쁨의 노래가 따르는 강한 정서로 승화되어 울려 퍼진다. 예수 믿는 믿음에 이런 내밀한 기쁨이 있음을 아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모르는 내밀한 사랑의 기쁨과 노래가 샘솟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알고 목사가 되려 했던 천문학자 케플러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외쳤다. ‘기쁨은 인생에 요소이며 인생의 욕구이며, 인생의 힘이며 인생의 가치이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에 대한 욕구를 갖고 기쁨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사랑하는 가정에서, 사랑하는 친구들 안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려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과 다른 더욱 큰 기쁨을 누리고 느껴보라!
4) 사랑하면 새로운 자신감이 생긴다(5-6절)
자신감은 자존감으로부터 온다. 술람미 여인의 피부가 조금 그을려도 괜찮다. 모든 것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서정주 시 ‘눈 오는 날’ 중에서!). 왕의 여인임에도 일하는 여인 술람미를 보라! 일하는 여인이 자신감이 넘치고 사랑 받는다. 사랑하면 가정, 직장, 교회, 하나님의 일에 자심감과 열심이 넘쳐나고 범사에 사랑받는다.
5) 사랑은 표현과 관심이다(7절)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대여’라고 씩씩하게 외쳐라! 참된 영혼의 중심으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라. 에릭 프롬은 자신의 유명한 책 「사랑의 예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은 관심이라 말한다. 사랑을 소중하게 여겨라! 사랑의 관심을 표현하라! 창조주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사람이다(요 3:16).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독생(獨生)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고 표현하셨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 시실리 섬에 두 고아원이 있었다.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풍부한 시설과 음식을 제공 받았고 한 쪽은 그렇지 못한 고아원이었다. 그런데 두 고아원의 유아 사망률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오히려 가난한 고아원의 사망률이 훨씬 적었던 것이다.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의 유아 사망률이 60%나 적었다! 그 원인이 밝혀졌다. 전쟁 중 세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극한 사랑(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6) 여기 창조주 하나님의 첫사랑을 보라(창세기 2장 4-14절)
(1)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사람!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대상을 향해 누군가 먼저 다가간다. 그래서 부모의 첫사랑, 짝사랑은 당연히 자녀이다. 짝사랑은 이렇게 누군가 먼저 하는 대표적인 사랑이다. 이것을 받아줄 때 서로서로 사랑이 시작된다. 그렇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피조 세계에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다. 안식은 하나님의 계명인 동시에 복이었다. 안식은 복을 주시고자 주신 계명이다. 안식 자체가 복이요 휴식하며 지키는 가벼운 짐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이야기를 마치신 후 다시 사람의 창조 이야기로 되돌아 왔다. 안식까지 마치시고 창조 이야기는 다 끝났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무엇을 더 이야기 하고 싶으신 걸까?
왜 사람이야기로 다시 돌아온 걸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대충 만드시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면류관이다! 동물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단순한 고등 동물들이 진화해서 원숭이를 거쳐 사람이 된 게 아니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만큼은 특별 취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하면 바로 인간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 첫사랑, 짝사랑이었다.
(3) 하나님은 첫 사랑에게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셨다(창 2: 4)
창조 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라는 명칭은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부르고 싶어도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던 것이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를 못하고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아도나이’는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커밍아웃하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다. 아기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미숙하지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않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내리 사랑’,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라고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4)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사랑으로 지으셨다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그루터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사람은 썩으면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생물과 분명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창2:7).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43:21)이요,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44:21)했고,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렘1:5)이다.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시139:16)하였고 악인도 '야차르'(왕하 19: 25)하였다.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5) 여기 하나님 사랑의 절정, 십자가를 보라!
모든 첫사랑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하나님의 첫사랑은 더욱 신비롭다.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망가지고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것을 소중하게 회복시킨다. 십자가 없이 인간의 참된 자존감 회복은 없다. 십자가를 만날 때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소중함도 회복 된다.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꽃 사람이여! 사랑하고 사랑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