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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kbs 드라마 '경성스캔들'의 팬픽으로 주인공들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사용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경성스캔들 갤러리와 인터넷소설닷컴외에는 연재되지 않는 소설이므로
무단 도용과 수정,배포를 절대금지합니다.
경성연애담
1930년대의 경성, 그 곳은 네온 사인과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환락의 도시였다. 진실은 변절과 배신에 가려진채, 은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퇴폐적인 경성, 그 속에서 네 남녀를 만나다.
"내기? "
"어. 내기! "
무슨 생각을 하고 내기를 제안한건지, 완의 눈은 반짝반짝 눈을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송주는 그닥 흥미가 가지 않는지 밋밋하게 대답했다.
"마작 같은 거라면 시시해. 지난 밤에 쌀 열섬 정도 땄거든 - "
송주가 손톱을 살피며 무심하게 말하자 완은 답답한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너와 나의 주종목! "
"주종목? "
송주가 전혀 감을 못잡겠다는 듯 되묻자 완이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에이씨! 선우완! 경성 최고의 카사노바! 차송주! 경성 최고의 기생! 둘의 공통점은 이성을
10분이면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
그제서야 송주는 감을 잡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특유의 뇌쇄적인 미소를 흘렸다.
"아-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내기를 하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내기를 하자.
음, 그러니까 연애라도 해보자는 건가? "
이윽고 송주가 요점을 뽑아서 말하자 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지 손가락을 맞부딪혀 튕겼다.
"그렇지! 음, 둘 다 대상은 지정해주는걸로 하고 그 대상을 공략하는거야.
정한 대상이 먼저 넘어오는 쪽이 이기는거지. 어때? "
완의 말을 듣고 있던 송주가 설핏 미소를 띄웠다. 위험과 도전을 즐기고 좋아하는
송주이기에 완의 제안에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흠, 괜찮은데? 그럼 그대가 먼저 대상을 지정해봐. "
"... 이수현. "
완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놓기라도 한것처럼, 별 다른 고민 없이 수현의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을 내뱉고도 무덤덤하게 술을 마시는 완과는 달리, 송주는 의외라는 듯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 진심이야? "
"그럼. "
"진정?" "
"진정. "
송주가 다시 한번 물었지만 완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유는? 그대는 그대의 절친한 친구가 내기 때문에 기생에게 놀아나는 걸 봐도
괜찮단 말이야? "
송주가 팔짱을 끼며 의아하다는 듯 말하자 완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글쎄- 하도 무덤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그 녀석에게도 삶의 활력소나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뭐, 그래도 차송주라면 넘어오지 않겠어?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디바인데? "
"음- 그 칭찬을 듣고 마냥 좋아해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
"왜? 경성 최고의 디바란 호칭이 싫어? "
"아니- 뭐랄까... 갑자기 복잡한 기분인데? "
송주는 가슴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 있는 완이 모르고 있는 사실, 그것은 송주와 수현이 오랜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송주는 수현과의 사이를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명빈관의 동기였던 시절, 그때가 수현을 처음 보게 되었던 때였다.
그 당시 학생이던 수현은 앳되어 보이지만 결의에 찬 모습으로 명빈관을 자주 들락거렸다.
송주는 동기였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스쳐지나가자, 잠시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차송주? "
과거의 추억은 완의 목소리에 빠르게 흩어졌다. 여름치고는 꽤 서늘한 바람이 송주의 옷깃을
스치자 과거의 기억은 더욱 빠르게 걷혀졌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를 다시 추억하며
곱씹고 싶은건지, 조금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송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
약간 화가 났는지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완이였다.
"..... 어? 어. 미안, 잠깐 딴 생각이 들어서. 미안해."
송주는 그제서야 완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가 정한 대상은 누구냐고- "
"아, 대상? 그 대상은 해화당 서점의 나여경씨. "
완과 다르게 송주는 꽤나 경쾌하게 이름을 말했다.
"나여경?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완은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이름에 얼굴을 찡그렸다.
"해화당 서점의 나여경, 몰라? 왜, 그대가 유학가기 전에 몇번 봤을텐데.
영랑이 글 공부 때문에 명빈관에 가끔 왔었던.. "
완이 여경을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표정을 짓고 있자 송주가 친절히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나.. 여... 경? "
완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완은 한번 본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명빈관에 자주 드나들던 여자라.
그리고 영랑이와 관련이 되어 있다.
완은 그렇게 연결고리를 이은 후, 명빈관에서 보았던 얼굴들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순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헤집고 머릿속에 나타난 한 여자.
반듯한 이마와 유난히 맑아 보이던 눈, 오똑한 코와 선홍빛의 입술.
다른 사람에 비해 작은 체구 때문에 여려보이는 인상을 지닌 여자.
하지만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어서 일까, 왠지 모를 강단과
강인함도 함께 느껴지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자, 잠깐. 설마? "
갑자기 완의 머릿속에서 여경의 얼굴과, 바로 몇시간 전 마주쳤던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의 머릿속은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 정오 1년 간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경성역에 첫발을 딛은 완.
열차에서 내린 그는 어린아이 같이 마냥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조국인 조선의 중심지인 경성.
사실 그가 조국에 터럭만큼이라도 보태는 일을 하는건 아니였지만,
사교계의 황태자인 완에게 경성이 그리운건 두말하면 잔소리이자 당연지사였다.
사실, 완에게 '경성'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건 송주였다.
하지만 송주와 완의 사이는 완의 정의로는 쿨한 쏘울메이트, 그러기에 송주를 향한
완의 감정은 우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완은 경성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송주에게 가리라 생각했다.
송주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서프라이즈하게 등장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차송주, 그 여인네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
하지만 완은 곧 생각을 다시 했다.
아니다. 눈은 깜짝 하려나?
"오, 오랜만에 밟아보는 조국의 땅. 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경성 공기의 상쾌함- "
경성역을 나와 경성의 거리로 접어든 완은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무향무색인 공기를 음미하기라도 하려는 듯,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시던 완은
결국 - 지나가던 달구지가 일으키고 간 흙먼지에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에이씨. 방금 전 말은 취소. "
한참을 기침을 하던 완은 모자를 벗으며 손을 내져었다.
"내리자마자 스타일 구기게- 에이씨. "
완은 양복을 털며 저만치 멀어진 달구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달구지는 아직도 탈탈거리며
흙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완은 달구지에 백미러라도 달린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될수 있는 한 매섭게 달구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한참을 달구지를 노려보던 완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은 분명 동경에서 보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건만, 완의 눈에는
유난히도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는 그렇게 하늘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던 완은 가슴 벅찬 감정으로 점차 시야를 넓혀 경성역 주변을 찬찬히
둘러 보기 시작했다.
1년 사이에 새로 생긴 상점도 있었고, 없어진 상점도 보였다.
그와 더불어, 조금 더 모던해진듯 한 경성은 그에게 설렘마저 안겨주었다.
"까르페디엠은 여전하군. "
완의 눈에 그가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 애용하던 까르페디엠이 보였다. 그는 웃으며
곧장 발걸음을 까르페디엠으로 옮겼다.
아직 한가한 낮이라 그런지, 비어있는 자리가 많았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
완이 자리를 잡고 앉자 까르페디엠의 여직원이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니까 깔피스나 한잔- "
완은 모자를 눌러쓰고 점잖게 대답했다. 완의 목소리를 들은 여직원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완의 얼굴을 보려는 듯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완이 피식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세상에나, 완이씨. 아니세요? 유학가셨다고 하시더니 돌아오신거에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
그제서야 완의 얼굴을 알아본 여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이렇게 반겨주다니 기분이 좋은데? 미스 다이애나는 더 날씬해지고 이뻐졌어.
오늘 머리 스타일도... 좋은데? "
완이 그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띄우며 여직원에게 답례의 말을 건넸다. 분명 이건
완의 인사치레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미스 다이애나라고 불린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가히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감사합니다. 그럼 깔피스, 곧 가져다 드릴게요. "
몇십초 뒤, 겨우 정신을 추스린 미스 다이애나는 돌아선후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잘 생겼담. 저 날렵한 턱선이라니-
근 1년만에 보는 완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는 미스 다이애나였다. 테이블에 분위기
잡고 앉아 있는 완은 그녀가 보기에 정말 완벽 그 자체였다.
선우완, 그를 거절할 여자가 있을까?
그녀는 다시 한번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잔을 꺼내었다.
동경 유학을 하고 온 탓일까, 그의 옷매무새에서 더욱 더 모던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한
미스 다이애나였다.
미스 다이애나가 완을 관찰하며 시간을 지체한 탓에 깔피스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긴 기다림 끝에 깔피스를 앞에 둔 완은 감격에 겨운듯 한 표정이었다.
"음, 이 맛이야."
완은 깔피스 한 모금을 마시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온 몸에 엔돌핀이 도는것 같군. "
완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중얼거렸다. 한창 여유를 부리고 있는
그때, 완의 눈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까르페디엠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한복, 혹은 양장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족히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가는 여자들은 눈에 띌 만한 차림을 한지라
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무리속에 익숙한 얼굴이 언뜻 보이는것 같자, 완은 여자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완은 곧 숨을 헉하고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다고 느꼈던 그 얼굴들은 완이 1년전에 지겹도록 보았던, 사귀었던 여자들의 얼굴이였다.
"에이씨. 어떡하지? "
완은 당황한듯 현란하게 새끼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올거라는 말은 분명 탁구와 가족들에게만 전하지 않았던가.
"......서,설마 탁구형! "
갑자기 든 생각에 완이 탁구의 이름을 외치며 일어났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하고 일을
벌일 사람은 탁구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를 지라시 기사에 우려먹을 생각일테지.
어떻게 이야기가 전달되었는지, 누가 협조를 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탁구와 따져볼 일이었고, 지금은 일단 도망가는게 상책이였다.
만약 지금 저 여자들과 맞닥뜨린다면.. 완은 더이상 상상 하기도 싫었다.
완은 급히 마이를 집어들고 슬금슴금 카운터로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갑을 꺼내들었다.
"어? 저기 저 사람, 완이 오라버니랑 비슷하지 않아? "
그 순간 완의 귀에 들려오는 말소리, 그 소리에 완은 일련의 동작을 멈추었다.
"완이 오라버니 맞는거 같은데? "
"아니야. 완이 오라버니 수트 스타일이랑 조금 다르잖아- "
"그렇지만 뒷모습은 영락없는 완이씨인데요? "
한 무리의 여자들은 그렇게 멈춰선 채로 제각기 평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 "
그리고 올 것이 왔다. 그 중 한 여자가 완에게 말을 건 상황이 발생한 것이였다.
완은 등 뒤에서 식은 땀이 나는것을 느꼈다.
이 상태로 돌아선다면, 그 뒤의 상황은 아까 언급했듯 더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완은 결심한 듯 맥고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몸을 살짝 돌리더니,
순식간에 여자를 밀치고 까르페디엠을 뛰쳐 나갔다.
"꺄악. 완이 오라버니다!"
"완이씨! "
"완이 오라버니! "
여자들이 완을 뒤쫒기 시작했다. 완은 뒤를 힐끔 보더니 아연실색을 하며 더욱 속도를 내었다.
미쳐버릴 노릇이군.
완의 머릿속에는 딱 그 생각 하나만 들었다.
그리고 얼마쯤 달리다 든 생각은, 이렇게 경성의 거리를 뛰고 있는 여자들과
도망가는 자신의 모습은 분명 경성 사람들의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릴 사건이 될 거라는
생각이였다.
완은 그렇게 눈썹이 휘날리도록 경성의 거리를 질주했다.
그 시각, 한 여자가 해화당이라고 적힌 서점에서 나왔다. 가슴에 신여성이란 책을 안고 있는
그 여자는, 사실 - 해화당 서점의 나여경이라 불리는 - 경성에서 꽤나 유명한 여자였다.
그녀는 한복집을 운영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올곧게 자란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립투사로 한평생을 조국을 위해 몸바치다가 결국 그녀가
어릴적에 만주땅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버지를 여의고도 얼굴에 그늘없이
밝고 씩씩하게 자란 터라, 그녀는 동네 어른들에게 신붓감으로는 제격이라는 말을 줄곧
들어왔다.
하지만 경성의 젊은이들은 그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경성의 젊은 세대들이 모던함을 추구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꿋꿋히
한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복을 입은 그녀에게서 단아하면서도 왠지모를 강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녀의 얼굴은 심각해보였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무언가 결의에 찬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완이씨! "
"완이 오라버니!"
그 순간 여경의 상념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앙칼진 여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였다.
여경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완? 그녀는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아니 익숙하다고 느꼈다.
여경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찰나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세게 끌어 당겼다.
"꺄악. "
여경은 그 손길에 소리를 질렀다.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끌어당긴
남자 때문이였다. 그녀가 돌아섰을때 가장 먼저 들어온건 남자의 땀이 맺힌 이마였다.
하지만 여경이 미처 그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기도 전에, 그녀는 남자의 단단한
팔에 의해 서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서점으로 들어오게 된 여경이 완에게 소리쳤다.
"도,도대체 지금 뭐,뭐하시는 겁니까? "
그러자 완은 쉿- 하고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여경은 낯선 남자의 손가락의 감촉이 입술에 느껴지자 흠칫 놀라는 기색이였다.
하지만 완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경을 끌고 창가로 다가갔다.
"커텐 좀 쳐줘. "
완은 불안한 듯 연신 창 밖을 살펴보며 말했다.
"빨리."
완이 다그치듯 말하자, 여경은 얼떨결에 걷혀져 있던 커텐을 치기 시작했다.
완은 여경이 커텐을 치는 중에도, 바깥을 살피며 몸을 잔뜩 낮추었다.
긴장감, 그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경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아직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한 듯 싶었다. 그래서
여경은 커텐을 치고 난 후에는 - 얼빠진 표정으로 - 완이 하는 행동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완의 모습이 찬찬히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쳤다.
"다,당신! 서,설마 선우완? "
여경이 엄청난 소리로 외치자 완은 성큼성큼 다가와 여경의 입을 막았다.
여경은 완의 행동에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완은 여경을 획 - 하고
잡아당겨서 앉혔다.
여경을 앉힌 완은 여경의 입에서 손은 떼었지만, 여경이 일어서려고 하자 다시
끌어다 앉혔다. 여경은 다시 일어났고 완은 다시 앉혔다.
여경의 시도는 몇번 더 반복 되었다.
하지만 성인 남자에게, 그것도 유난히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를 당해낼 힘이
없는 여경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치듯 말했다.
"이거 당장 놓지 못하겠어요? "
"에이, 진짜. 그만 좀 반항하고 한번만 도와주라. "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요! 당신, 선우가의 막내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선우완 맞죠?"
"오, 나를 아는거야? 이거 영광인데? "
여경의 말에 완의 얼굴에는 약간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여경의
다음 말에 사라지고 말았다.
"당신, 하숙자이라고 알죠? "
"하숙자? "
여경이 삿대질을 하며 다가오자 완은 한걸음 물러서며 되물었다. 여경의 입에서 튀어나
온 이름을 들은 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는 듯 서점
안을 천천히 돌며 곰곰히 생각했다.
"아, 아. 기억나는군. "
"당연히 기억이 나야죠. 당신이 사귀었던 여자잖아요! 하숙자는 제 친구입니다.
근데 당신은!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는 사실을 숙자에게 말도 안하고 떠났어요!
남자가 그래도 되는 겁니까? 숙자는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약혼자와 파혼을 했어요. "
앞뒤를 다 잘라먹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있는 여경이었지만 완은 여경의 말을
대충 알아들은 듯 했다. 하지만 완은 여경의 말에 안색의 변화 하나 없이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 근데 그게 비단 나의 잘못 만은 아닌것 같은데. "
"지,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무신경한 태도로 말하는 그를 보자 여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안한 감정을 터럭 만큼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아무리 자유연애가 만연한 시대라지만,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비단 나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했어. 내가 그 여자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고 해도 이게 나의 잘못인가?
적어도 나는 임자있는 사람을 건들이진 않아. 그것도 결혼할 여자를 건들인 적은 여지껏
단 한번도 없어. 그리고 결정적인건, 그 여자는 내가 다가 오는데도 밀어내지 않았어.
이래도 모두 내 잘못인가? "
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경을 보며 물었다. 여경은 완의 말을 듣고는 당황한 눈치였
지만, 그래도 지지않고 속사포 같이 완을 밀어 붙였다.
"그럼 숙자가 당신에게 먼저 접근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당신은 정말 파렴치한이군요?
혼인 하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한 여자를 망가뜨려 놓다니. 도대체 당신에겐 여자란
어떤 존재인거죠? "
여경은 고개를 치켜 올리며 완에게 대꾸 했다.
당돌하다 못해 기가 센 여자다. 완은 생각했다.
조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수 없는 강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갑자기 여자에게 궁금증이 생긴 완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완이 천천히 다가오자 여경은 흠칫 놀라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완의 눈에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갈색 빛이 도는 여경의 눈은 분명히 그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여경의 표정에는 그에 대한
분노, 불쾌감,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완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참으로 유리구슬 같은 여자다. 완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 웃었다.
얼굴 표정만 보고도 그녀의 감정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그 웃음은 뭐죠? "
여경은 갑작스런 완의 웃음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쁜 듯 완에게 쏘아붙였다.
"글쎄. 의미 없는 웃음이라고 해두지- 미안하지만 아가씨.
내가 좀 바쁜 몸이라서 오늘은 이만 가봐야 겠어. "
"뭐라구요? "
"논쟁은 이쯤해서 그만 하지. 하숙자씨에게 미안하단 말은 전해줘도 좋아. 그럼 이만. "
완은 그렇게 자기가 할말만 하고는 서점을 나갔다.
"허? "
혼자 남겨진 여경은 어이가 없는 지 헛웃음을 쳤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날카롭게 따질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만하자고?
여경은 무언가 분한 눈치였다.
"해화당 서점이라... "
서점 앞을 걸어서 한적한 골목으로 나온 완은 서점을 한번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해화당 서점이라.. 강직하면서도 무서운거 없는 서점 아가씨, 기억해두겠어.
그는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송주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과거의 기억은 아스라히 흩어졌다.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완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송주를 쳐다보았다.
"어, 그게. 그냥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 "
"그렇게 얼빠진 표정이라니, 그대답지 않은데? "
"어? "
완은 계속해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는.. 이유가 안 궁금해? "
"무슨 이유?"
"내가 나여경씨를 선택한 이유 말이야. "
"어. 그래. 말해봐. "
"그건, 여경씨가 여지껏 연애를 못해봤기 때문이야. 자유연애가 만연한 이 시대인데도
말이야. 여경씨는 사랑이 뭔지 알 필요가 있어. 여경씨도 청춘인데
사랑에 대한 열정, 그리고 정열을 느껴봐야 하지 않겠어? "
"뭐야ㅡ 그건? 나름 배려라고 해야 하는거야? 아님 재미? "
송주의 말에 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재미라기에도 그렇고 배려라기에도 그렇네. 어쨌든, 난 여경씨가 사랑이
뭔지 알길 바라. 여경씨에게는 사랑이란게 필요하거든- "
"필요? "
완이 의아스러운듯 송주의 말을 곱씹었다.
".. 연애는 조국해방투쟁에 있어 가장 강력한 혁명 전술이니까"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
"그대가 1년 전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 잖아. "
"아, 그렇지. 오랜만에 들으니까 감회가 새로운데? "
"능청스럽기는. "
눈이 마주치자 둘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완과 송주는
약속이라도 한듯, 술잔을 들어올려 부딪혔다.
"근데 아까 무슨 생각을 했어? "
술을 한모금 마신 완이 송주에게 물었다.
"그런 그대는? "
"뭐.. 몇시간 전에 있었던 황당한 일? 그럼 너는? "
"나? 나는.. 기억.. 아니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옛날 일 좀 떠올려 봤어. "
송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퍼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
"...."
이내 두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서로 다른 생각에 빠진 탓이였다.
완은 술을 한모금 마시더니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송주도 완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두사람의 여름 밤은 별채 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그렇게ㅡ 흘러가고 있었다.
첫댓글 재밌어요. 저도 경성스캔들 진짜 재밌게봤거든요^^
여기 경성스캔들 재밌게 보신 분이 또 계셨네요~ 반갑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ㅎ
재미있어요!!>ㅁ< 비슷한게 조금씩 다르게 나가는;; 아무튼 무지 재미있네요. ㅋㅋ
원래 경성스캔들을 모티브로 따왔기 때문에 전반부는 비슷하게 나가지만 전개는 조금씩 다르게 나갈 예정입니다~ ㅋㅋㅋ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