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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글 로마자 표기법 남북 단일안 합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됨에 따라 서울
퇴계로 주변의 도로표지판에 써있는
‘을지로’ 표기도 ‘Euljiro’로 바뀌었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에 관한 남북한
단일안이 마련됐다.
1992년 6월 16, 17일 이틀간 파리 소재
프랑스표준협회(AFNOR) 회관에서
열린 제5차 기계화를 위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관한 남북한 회의에서
양측은 쌍방제안을 절충시킨 단일 표기
법안에 합의, 1987년 5월 모스크바 1차
회의 이후 5년간에 걸친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
정수웅 공업진흥청 차장과 홍린택 규격
위원회 위원장이 각각 남북한 수석대표
로 참석한 이번 5차 회의에서 양측은
자음의 경우 북한측 안을 ,모음은 한국측
안을 수용하는 절충안에 합의했으며
1992년 6월 17일 오후 국제표준화기구
(ISO)에 단일안을 공식 제출했다.
남북한 단일 로마자 표기법이 합의됨에
따라 국내 지명, 인명 표기 방식이 통일돼
국내외 표기상의 혼란이 해소되게
됐으며 한글 및 어문학 분야에서 남북간
격차를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남북한간의 단일안
에 따르면 한글자음 ‘ㅂ’은 영문 알파벳
‘p’로 결정돼 ‘부산’의 경우 ‘pusan’으로
확정됐으며 ‘ㄱ’은 ‘k’로, ‘이’는 ‘i’로 각각
표기되게 됐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지명
이나 인명의 경우에는 종전 표기를 인정
하는 예외를 두기로 양측은 합의했다.
▶2012년 6·25 종군기자로 활약…
한국 첫 방송기자 문제안 별세
한국 최초의 방송기자 문제안(92) 전(前) 조선일보 체육부장이 17일 별세했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난 문씨는 일본 메이지(明治)대 전문부 문예과를 졸업한 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6일부터 한 달 반 동안 경성중앙방송국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방송기자로 활동했다. 방송사를 그만둔 후에도 언론계에 투신해 1946년 7월 조선통신을 시작으로 경향신문·중앙일보·국제신문·서울신문 등을 거쳤고, 조선일보에서 사회부 차장과 체육부장을 지냈다.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1953년 정전협정 과정을 자세히 보도해 1955년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문현덕 천우인더스트리 대표와 문현경 단국대 교수, 문현주 오브제프랜 소장 등이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B조
대한민국 vs 아르헨티나
(4:1 대한민국 패, 이청용 골)
https://youtu.be/PwTJGfuofhY
▶2005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평양서 면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7일 “미국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에라도 (북핵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과 좀더 협의해 봐야겠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6자회담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고 거부한 적도 없다”면서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보기 때문에 맞서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유효하며,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6·15 통일대축전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과의 단독 면담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정 장관이 전했다. 정 장관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우리 정부가 구상중인 중대 제안에 대해 김 위원장에게 설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년간 중단된 6자회담에 북한이 복귀하느냐, 한다면 언제냐가 최대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은 귀환 후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50분까지 면담했다”고 밝혔다.
남북 관계와 관련, 김 위원장은 8·15 광복절 때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자는 우리측 제안을 수용했고, 특히 8·15에 화상(畵像) 상봉도 해보자고 했다. 그는 8·15 행사에 비중 있는 당국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의 한·미 정상회담 설명에 “회담 결과를 긍정 평가하고 그 이후 미국 태도를 주시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 장관이 다자 안전 보장을 거론하자 “핵문제 해결되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겠다. 다자 안전 보장 일리 있다.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 “적절한 때가 되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좋은 계절에 초청하겠다”고 말했다. 현 정부 고위 당국자가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밖에 남북 장성급회담 개최, 수산회담 개최 등에도 의견을 같이했다. 정부는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회담결과를 분석하고 후속 대책을 협의한다.
▶2004년 브라질, 1억 8000만년 된
가장 오래된 물고기 종(種)발견
브라질 과학자들은 1억8000만년 전부터 지구의 바다에 생존해 온 물고기 한 종을 새로 발견했다고 로이터통신이 17일 보도했다.
이 물고기는 몸 길이가 12~16인치로 상어와 유사하며, 날개 모양의 지느러미와 채찍 같은 긴 꼬리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은 지난 2001년 브라질 남부 해안에서 어부들이 이 물고기 한 마리를 포획한 이후 새로운 종인지 여부를 조사해왔다. 브라질 발리 두 이타자이 대학의 줄레스 소투 연구원은 “이 종의 역사는 1억5000만~1억8000만년이나 된다”며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만큼 오래된 동물이 아직 살아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물고기의 학명은 스페인 과학자 지저스 마탈라나스의 이름을 따 ‘하이드롤라구스 마탈라나시’로 명명됐다.
브라질 해안에서 발견된 새로운 종의 물고기 모습. 브라질 과학자들은 17일 이 사진을 공개하고, 공룡시대인 1억8000만년 전부터 생존해 온 물고기라고 주장했다.
▶1999년 모리스 그린,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로 세계신기록
미국 육상선수 모리스 그린이 1999년 6월 17일 벌어진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도노번 베일리(캐나다)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서 세운 종전기록(9초84)을 0.05초 앞당긴 것이자 1991년 칼 루이스(미국)가 9초90 벽을 허문지 8년만에 이룬 역사적인 기록이었다. 모리스 그린은 1997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아테네세계선수권 100m에서 9초86의 기록으로 도노번 베일리를 누르고 우승, 세계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모리스 그린이 그리스 아테네그랑프리
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며
결승점 테이프를 끊고 있다.
8세때 육상을 시작한 그린은 20대 초반까지는 무명이었다. 고향의 캔자스시티 대학생이던 1995년 4월 텍사스 릴레이 대회서 9초88로 칼 루이스를 누르고, 이어 전미선수권에서는 2위를 차지해 관심을 끌었지만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탈락했다. 그린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예선에서 또 탈락하자 "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 `단거리 사관학교`인 UCLA의 존 스미스 감독 휘하로 들어갔다. 아토 볼든, 존 드러먼드 등 세계 정상급 선수와 연습한 그린은 1997년 전미선수권에 이어 세계선수권마저 제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탄생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육상 동물은 치타이다.
치타의 100미터 주파 기록은 3.22초로 112Km의 속력으로 달리기 때문에 육상동물 중에 가장 빠른 동물이다.
인간에 3배 이상 빠른 셈이다. 하지만 치타는 이러한 속력을 10분 이상 유지할 수 없다.
더 유지했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고 만다.
▶1998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의사당 건물을 점령
▶1997년 국무회의, 러시아와의
`형사사법공조조약안` 의결
▶1996년 ‘패러다임 이론’ 창시한
토마스 쿤 사망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엔지니어인 사무엘 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고 49년 물리학박사를 받았다. 쿤이 과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쯤이다.
쿤은 당시 하버드 총장이었던 코넌트 박사의 권유로 학부생들에게 자연과학개론을 가르치면서 과학의 발전이 ‘단선적이고 누적적’이라는 기존 생각에 반감과 회의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버클리(1956∼64), 프린스턴(1964∼79), MIT(1979∼91) 등을 거치며 과학사를 가르치고 연구했다.
쿤은 과학 발전이 한 시대의 세계관(패러다임)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과학혁명은 바로 한 패러다임 내의 과학이 모순으로 부글부글 끓다가 위기에 닥쳐 뉴턴이나 인슈타인 같은 혁명가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 과학자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 식, 가치, 심지어 믿음이나 습관 같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쿤의 생각은 과학이 누적적 지식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당시 생각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쿤의 저서로는 문제작 ‘과학혁명의 구조’(1962) 이외에 구체적인 과학혁명의 예를 다룬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과 ‘흑체이론과 양자 불연속성’(1978), 과학·철학적 주제를 모은 논문집 ‘주요한 긴장’(1977)이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숙명여대 김명자 교수와 이화여대 조형 교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됐으며, 한국과학사학회는 지난 80년 한림대 송상용 교수 주도로 ‘쿤의 과학사 서술과 인접 과학의 영향’이라는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쿤에게 직접 배운 서울대 김영식 교수는 “쿤은 남의 얘기도 잘 듣지만, 좀처럼 자기 이론을 굽히지 않는 토론쟁이”라고 그를 기억했다. 사회학계에선 성균관대 정창수 교수가 쿤에 관심이 많다.
쿤이 1996년 6월 17일, 73세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자,“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사 과학철학자였다”(MIT의 제드 부발트과학기술사 교수)는 평가를 받았으며 뉴욕타임스는 6월 19일 “그는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 사이에도 상당한 논쟁을 촉발했다”는 조사를 실었다.
▶1994년 미국 미식축구선수 O.J.심슨,
전처 살해혐의로 체포
전처인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남자친구 로널드 골드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수배됐던 미국의 전설적인 미식축구스타 O.J.심슨이 경찰과 대치끝에 1994년 6월 17일 투항, 수감됐다. 심슨은 이날밤 경찰의 추격을 받자 1백여Km를 달아나다 로스엔젤레스 교외의 자택 건물밖에 차를 세우고 권총자살하겠다며 90분간 경찰과 대치하다 결국 투항했다.
O.J.심슨사건은 이후 미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재판이 진행돼 체포 후 474일 만인 1995년 10월 2일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합의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전체 12명중 흑인9명(남자1명, 여자8명)과 백인여성 2명, 멕시코계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 무죄평결 결과에 대해서도 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평결 발표 이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평결에 동의하는 반응은 33%,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은 56%로 나타났다.
▶1994년 제15회 월드컵 미국서 개막
1994년 6월 17일 꿈의 구연 미국 월드컵축구대회가 아시아대표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됐다. 전대회 우승팀인 독일과 볼리비아전을 시작으로 1994년 7월 18일까지 한달 동안 52경기를 소화한 이번 월드컵은 한국이 경기를 갖는 댈라스를 비롯, 시카고,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등 9개 도시에서 펼쳐졌다.
시카고 솔저필드스타디움서 개막전에 앞서 열린 개막식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24개 참가국들의 공연단이 자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였으며 한국은 로스엔젤레스 교민무용단이 고유의 부채춤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한국은 스페인과 2-2 무승부,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독일에 3-2로 패해 2무1패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결승전은 브라질과 이탈리아가 연장까지 갔으나 0-0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로 3-2 승을 한 브라질이 우승했다.
▶1994년 김일성, 카터 전미국대통령과
회담. 남북정상회담에 동의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2호 양주별산
대놀이 예능보유자 고명달씨 별세
▶1989년 헝가리 개혁파의 기수
나지 전총리 복권
▶1986년 해경, 충남 서산 앞바다서
표류중인 중국선박(선원19명)
보호중이라고 발표
▶1983년 교황, 폴란드 방문중
계엄해제 자유노조 부활 요구
▶1982년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포클랜드전쟁 패전 책임을 지고 사임
▶1980년 계엄사, 부정축재
국기문란 혐의로 329명 지명수배
▶1977년 국무회의,
임시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안 가결
▶1972년 美 워터게이트 사건
政街 강타
1972년 6월 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신참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란 사람이 결정적인 제보를 해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지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나서자 닉슨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키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도 해임시키며 자신의 무관함을 강변했다. 그러나 닉슨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고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는 증언 등이 속속 등장하면서 닉슨을 궁지로 몰아갔다.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제출한 녹음 테이프도 일부가 빠진데다가 결정적인 대목까지 지워져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이 대통령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해야 했다. 1974년 8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딥 스로트’는 지금까지도 베일에 쌓여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그레이엄 회장(맨 왼쪽)이
번스타인ㆍ우드워드 기자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닉슨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사건
1972.6.17 대통령 사임까지 몰고 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다
새벽 2시 30분경, 캄캄한 건물 안을 회중전등 불빛이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다. 한껏 죽인 발소리, 낮게 속삭이는 말소리. 뭔가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사무실의 시계 바늘은 무심히 똑딱이며 새벽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뭔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뛰는 소리가 텅 빈 건물에 울려 퍼졌다.
“경찰이다, 손 들어!” 범인들은 그리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고, 다섯 사람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뿐이었다. 흔하디 흔한 건물털이 사건. 하지만 무심한 시계 바늘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동안, 문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씩 드러났다.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도청한다고? 누가 그런 바보짓을 해?"
잡힌 범인들은 무기나 금고털이 도구가 아니라 도청 장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 명 중 세 사람은 쿠바인이었고, 하나는 처음에는 쿠바인으로 알려진 이탈리아계 미국인.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제임스 매코드라는 미국인이었다. 이들이 붙잡힌 곳은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종합빌딩,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곳이었다. 처음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닉슨의 보좌관들은 픽 웃었다고 한다.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닉슨. 1969년의 모습이다.
“뭐 주워들을 게 있다고 민주당 전국위원회를 도청하지? 하려면 선거 캠프를 해야지 말이야.” “그러게. 게다가 저쪽(민주당 후보 맥거번)보다 19퍼센트나 앞서고 있는데 말이지…. 어디서 보냈는지 모르지만, 우리 쪽은 아닌 게 틀림없어.”
하지만 틀림이 있었다. 6월 19일, <워싱턴포스트>는 다섯 명의 침입자 중 미국인인 제임스 매코드는 전직 CIA 요원이며 닉슨 재선 운동본부의 경비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그들의 수첩에서 역시 CIA 출신이며 닉슨을 위해 일했다고 알려진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나갔다. 6월 20일에는 민주당이 닉슨 재선 운동본부를 상대로 수백만 달러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백악관에서는 워터게이트와의 연관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쿠바인들 몇몇이 벌인 하찮은 절도 미수 사건일 뿐이며, 매코드는 조직과 무관하게 사적으로 일을 벌였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당시 FBI는 이 사건을 수사하며 닉슨 재선 운동본부에서 다섯 명의 범인에게 자금이 흘러 들어갔다는 것, 재선 운동본부와 이들이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 등을 밝혀냈으나 공표하지는 않고 있었다. 다만 <워싱턴포스트>만이 그런 사실을 계속 보도하고 있었는데,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들은 말이라면서 사흘이 멀다 하고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이 익명의 제보자는 2005년에 가서야 FBI 간부인 마크 펠트였다고 공개되었다).
닉슨은 <워싱턴포스트>에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CIA를 움직여 FBI의 수사 활동을 막으려고 획책했으나 둘 다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여론은 아직 이 사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1972년 11월, 닉슨은 종전의 예상대로 민주당의 맥거번을 큰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워터게이트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는가 싶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그러나 사건은 정작 닉슨이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되던 전후부터 심각해졌다. <워싱턴포스트> 말고도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리스타임스> 등이 경쟁적으로 워터게이트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법무장관 존 미첼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을 총지휘했다는 것, 도널드 새그레티라는 변호사가 전국을 다니며 닉슨 재선을 위해 불법도청을 비롯한 정치공작을 벌여왔으며 워터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사법부 쪽에서도 닉슨을 몰아붙였다. 다섯 명의 침입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존 시리카 판사는 관련 사실을 털어놓는 대가로 그들의 형량을 줄여 주는 거래를 했고, 그에 따라 충격적인 증언이 잇달았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닉슨은 애초의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뒤집고 “대통령은 까맣게 몰랐으며, 아랫사람들이 제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보좌관 밥 홀드먼과 존 엘리히먼을 해직시키며 사과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달았고, 닉슨은 취임 첫해인 1973년을 온통 워터게이트 문제로 소비해 버렸다. 집무 중의 모든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있음이 알려지면서, 그 테이프를 놓고 1973년 5월부터 상원 주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렸다. 닉슨은 국가 기밀 사항이 있다는 이유로 테이프 공개를 거부했고, 끝내는 전체의 백분의 일에 불과한 40시간 분량만을 공개했다(테이프가 완전히 공개된 것은 1996년이었다). 이를 통해 법무장관 존 미첼,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등이 온갖 도청 활동과 문서 위조, 매수 등의 부정행위와 연관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닉슨이 거액의 탈세를 했다는 사실, 또한 선거 과정에서 걸프 오일을 비롯한 미국의 대기업들의 불법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까지 치달을 즈음인 1974년6월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함께
NATO 회의에 참석한 닉슨(가운데가 닉슨, 왼쪽이 키신저)
벼랑 끝에 몰린 닉슨은 자충수까지 두었다. 1973년 10월에 이 사건을 맡은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전격 해임한 것이다. 직접 해임권자인 법무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며 사임하고, 법무차관까지 사임해 버리자 결국 특검 해임은 법무부 송무실장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언론에서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대서특필한 이 사건으로 닉슨에 대한 민심은 완전히 떠났다. 상원 청문회와 특검을 통해서도 워터게이트가 닉슨이 직접 지시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음은 분명했고, 워터게이트를 넘어 여러 비리 혐의가 드러나 버렸다. 1974년 7월, 하원은 닉슨의 탄핵을 결의했다.
닉슨은 이제 상원에서 탄핵안을 승인하면 자신이 미국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 될 것임을 알았고, 탄핵안 승인이 거의 확정적임도 알았다. 그래서 1974년 8월 8일에 먼저 사임해 버렸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원래의 부통령 애그뉴는 1973년 10월에 닉슨과 연관된 비리 혐의로 사임했다), 포드는 9월에 닉슨을 사면했다. 1972년 6월 17일에 시작된 워터게이트 사건의 대단원이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닉슨은 그 후 언론의 인터뷰에서 “내가 몇 가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밖에 경제 문제나 외교 활동 등 큰 것들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유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남들이 보지 않을 때는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며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지?”라고 부르짖곤 했다고도 한다. 이후 그는 회고록 집필이나 정치자문 등의 활동을 하며 살다가 1994년 4월 22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불안이 운명이었던 사람
리처드 닉슨은 캘리포니아 주 요바린다에서 태어났다. 휘티어 대학을 나와 듀크 대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진주만 습격 후 자원입대해 해군에서 복무했고, 공화당에 입당하여 1946년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하원의원 시절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일하며 본격적인 매카시즘이 불어 닥치기 직전에 대표적인 ‘반공 투사’로 우파의 주목을 받았다. 유명한 앨저 히스의 간첩 활동 폭로도 그가 주도한 것이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50년에 상원의원이 되었고, 1952년에는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가 됨으로써 미국 부통령이 되었다. 매우 순조로운 정치경력이었다.
닉슨은 매우 유능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으며, 늘 성실하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당 간부들에게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그에 못 미쳤다. 늘 뭔가 음울하고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사생활에서도 언제나 뭔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가슴을 터놓고 남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좀처럼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 이미지 때문에 닉슨은 1960년에 ‘쉬운 상대’처럼 보였던 J.F.케네디에게 패배하여 백악관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도 패하자 ‘정계 은퇴’를 입에 올릴 정도로 낙담했으나, 결국 재기하여 1968년, 민주당의 험프리를 누르고 미국 제37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매우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백악관에서 닉슨의 활동은 그가 밝혔듯 ‘큰 것에서는 대체로 성공’이었다. 그는 부통령 시절에 사상 최초로 소련을 방문해 흐루시초프와 회담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미국은 공격적인 세계전략을 포기할 것이며 집단 안전보장과 화해 협력을 위주로 하는 세계질서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중국과 친선 탁구 시합을 기회로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핑퐁외교’를 벌이고, 1972년에 북경을 공식 방문하여 수교를 맺음으로써 동서 데탕트를 본격화했다. 1973년에는 베트남과 파리 협정을 맺어 미국을 악몽과도 같던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건져냈다.
경제에서도 성과가 좋았다. 닉슨은 당선 후 당시 미국경제의 가장 큰 이슈였던 물가와 실업 문제 해결에 착수했고, 대체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케네디와 존슨 정부를 거치며 팽배해진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대신 복지예산을 늘리는 정책도 취했다. 이밖에 공교육 문제와 인권 개선 등에 대해서도 공로가 높았다고 평가된다. 이런 성과 덕분에 그의 인기는 꾸준히 상승했고, 문제의 1972년에는 민주당 후보를 19퍼센트나 앞설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사임을 발표하고 있는 닉슨. 그는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미국을 구해냈지만 자신은 워터게이트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안심을 못하는 닉슨은 그런 여유를 즐기지 못했다. 그는 항상 콤플렉스와 ‘적들의 음모’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 성향은 그의 성장기부터 이루어졌다. 고교 졸업 때 하버드 대학에서 장학금을 제의할 만큼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워낙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휘티어 대학을 갔고, 이는 유복한 집안 출신에 아이비리그 명문대를 나온 다른 정치인들(케네디 같은), 그리고 언론인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낳았다. 당시로서는 아직 미국의 변방에 가깝던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점도 늘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계속 불운했던 이유도 그런 주류 정치인과 언론인의 ‘닉슨 죽이기’ 때문이었다고 믿었던 닉슨은(오늘날 곧잘 사용되는 “언론은 검증 받지 않은 권력이다. 그런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위협한다”는 말은 사실 1969년에 닉슨의 부통령 애그뉴가 했던 말이다) 뭔가 ‘꼼수’를 부림으로써 물밑에서 ‘적들’을 감시하고 공격하려는 시도를 곧잘 했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워터게이트 같은 일을 벌여, 결국 자기 발목을 잡고 말았다는 게 많은 심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워터게이트의 물밑에는?
하지만 닉슨의 ‘망상’이 망상만은 아니었고, 워터게이트는 하나의 음모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폴 존슨은 그것이 1970년대에 들어 비정상적으로 커진 언론권력에 의한 정치권력의 ‘마녀사냥’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워터게이트는 날조였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도청이나 불법정치자금은 오랫동안 미국 정치의 관행이었고, 특히 케네디와 존슨 정부 때 심각했다. 그런데도 닉슨이 희생양이 된 것은 닉슨의 생각처럼 그가 “듣보잡 대학을 나온 촌놈”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닉슨과 워터게이트는 우리에게 책보다 영화로 더 친근한지도 모른다. 왼쪽은 올리버스톤의 <닉슨>, 오른쪽은<닉슨vs프로스트>
한편 대표적인 진보 사상가인 노암 촘스키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닉슨이 ‘미국의 진정한 주인’인 다국적기업의 미움을 산 까닭에 백악관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촘스키에 따르면 닉슨이 1971년에 금-달러 태환을 중지하고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다국적기업이 큰 손실을 입었고, 따라서 ‘하수인’에 불과한 대통령이 자신들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주장이지만, 꼭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는 어차피 불가피했고,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해온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이후 한동안 미국을 사로잡은 권위에 대한 불신(이것이 닉슨보다 더 주변적인 정치인이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했다)이 주류 언론인이나 기업인에게 별로 유리했을 것 같지도 않다.
한편 론 콜로드니와 로버트 게틀린은 <조용한 쿠데타>라는 책에서 닉슨의 국방정책에 불만을 가진 군부가 그를 내몰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관계가 많이 부정확함이 지적되어 곧 잊혀졌다. 이런 음모론을 꼭 귀담아 들을 것은 없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닉슨의 유례없는 부정행위였으며, 그가 사임함으로써 미국은 대통령조차도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는 사회임이 확인되었다”는 우리의 상식에 대해서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1971년 미국-일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970년 부산항과 일본혼슈
시모노세키항을 잇는 부관
카페리호 부산 입항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간을 운항하는 부관(釜關) 카페리호가 1970년 6월 17일 새벽 0시 30분 기시 노부스키 일본 전수상 등 귀빈과 승객 4백3명, 선원 44명 및 자동차 8대를 싣고 부산항 제2부두에 입항했다.
25년 만에 새로 등장하는 부관 카페리호는 3천8백톤급의 호화여객선이며 일본 아카다키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시속 21노트로 부산∼시모노세키간을 7시간에 달렸다. 선장 105m에 선폭은 17.5m, 여객정원은 6백2명으로 귀빈실 2명, 1등 50명, 특2등 1백여명, 2등은 4백50명이다. 이밖에 승용차 60대와 8톤짜리 콘테이너 70개를 적재할 수 있었다.
카페리운항이 두 나라의 우호다리로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나라는 도로교통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맹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제면허가 통하지 않아 승용차의 통관이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임시방편으로 `자동차 임시수입에 따른 통관요령`을 내놓아 부관 카페리에 의해 운송되는 외국인 또는 교포의 승용차는 임시통관시키거나 여권기간동안에 재수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배는 6월 25일 다시 한국측의 관계인사와 보도진 등 500여명을 태우고 시모노세키에 입항해 일본측의 환영을 받았다.
▶1967년 중국, 수소폭탄 실험
▶1960년 곽상훈 국회의장.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권한을 대행
▶1953년 동베를린서 반정부데모 격화
▶1950년 소설가 채만식 사망
1930년대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
1930년대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일제하 식민지 현실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주목받았던 작가 채만식이 1950년 6월 17일 6·25 직전 고향 근처에서 병고로 사망했다. 이날은 그가 세상에 나온 지 꼭 48년째 되던 날이었다.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중퇴한 그는 귀국 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1924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세 길로’라는 작품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했으며, 식민지 하의 왜곡된 사회와 경제질서를 풍자하는 소설들을 주로 썼다. “시대의 허위에 대해 민감했고 또 진지했던” 그는 초기에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끝내 카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대표작으로는 ‘탁류’와 ‘태평천하’ 등이 있으며 ‘치숙’ ‘소망’ ‘패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단편집도 계속 발표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창작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또 기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5개 단체에서 발표한 ‘일제시대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기도 했다.
▶1950년덜레스 미국 국무성 고문 내한
▶1950년 아랍연맹7개국중 5개국
아랍집단안보조약에 조인
▶1950년 신장이식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50년 6월 17일 미국 시카고의 메어리 병원에서 49세의 신장병 여성이 신장이식수술을 받았다. 그때까지 피부와 뼈, 각막, 폐 등을 이식한 예는 있었지만 신장을 이식한 수술은 처음이었다. 신장을 제공한 사람은 환자와 똑같은 혈액형의 동년배 여성으로 수술하기 몇분 전 사망했고,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은 1개월 후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집도는 로욜라 스트레치 의대의 리처드 로라 박사가 담당했다.
▶1947년 팬아메리칸 항공,
최초로 세계일주항로 개설
▶1944년 아이슬란드,
덴마크로부터 독립
▶1944년 일제 미곡강제공출제 실시
▶1943년 독립운동가 이원대 선생 사망
조국 광복을 위해 중국 화북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한 이원대 선생이 1943년 6월 17일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했다.
1911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안병철의 권유로 독립투쟁을 결심,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난징 조선의열단 간부학교에 입교한 후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은 선생은 난징·상해 등지를 내왕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1943년 3월, 산시성 부곡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던 중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 끝에 3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31년 제6대 총독 우원일성 임명
▶1925년 제네바 무기무역국제회의서,
독가스사용금지 조약 조인
▶1925년 제1회 전국중등학교
야구연맹전 개최됨(~6.30)
▶1919년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설치
▶1906년 일간신문 萬歲報 창간
1906년 6월 17일 일간지 만세보(萬歲報)가 창간됐다. 손병희가 재정을 지원하고 오세창이 사장, 이인직이 주필을 맡았다. 훗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된 오세창과 철저한 친일파 이인직의 만남은 물과 기름의 동거였지만 그래도 신문은 제대로 만들었다.
일진회를 강경한 논조로 공격했고, 편집으로는 한자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한자 옆에 한글로 음을 달았다. 특히 신문소설을 처음 연재한 것은 만세보의 자랑 가운데 하나.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와 ‘귀의 성’을 연재한 것이다. 고종도 만세보를 애독해 1000원을 하사할 만큼 인기를 끌었으나 경영난은 어쩔 수 없었다.
약 1년 만인 1907년 6월 29일, 293호로 막을 내렸으나 만세보를 인수한 이인직이 ‘대한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7월 18일부터 간행하면서 철저한 친일지가 됐다.
▶1902년 채만식 출생
▶1902년 독일.프랑스.러시아
3국 공사, 러시아공관에 모여 철도,
광산 등의 이권탈취 모의
▶1901년 청나라, 미국 의정서 조인
▶ 1895년 일본, 대만에 총독부 설치
▶ 1882년 스트라빈스키 출생
▶ 1867년 고종4년, 육전조례 간행
▶ 1862년 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사망
▶ 1818년 프랑스 작곡가 구노 출생
▶ 1789년 제3신분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결성
▶ 1703년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 출생
▶ 1431년 조선, 월식 발생
https://youtu.be/qpf-dKG7wfc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