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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의 노래
아 1:8-17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아 1:9-17 / [사랑의 이중창] (신랑) 그대 내 사랑 그대는 바로의 병거를 이끄는 암말과 같아! 10) 두 볼에 흘러내린 머리칼 아름다워라. 구슬 목걸이로 단장한 그대 목덜미 너무도 고와. 11) 우린 그대에게 줄 금목걸이 만들테야. 은장식 아로새긴 금목걸이. 12) (신부) 나의 임금님 자리에 누워 계실 때 내가 지닌 나르드 향기 온 방에 가득하네. 13) 내 품에 안겨 있는 내 사랑은 한없이 싱그러운 향낭이어라. 14) 엔게디 포도원에 피어 있는 헨나 꽃송이여라. 15) (신랑) 아리따운 그대 너무도 아름다워라 내 사랑. 비둘기 눈동자같이 사랑으로 빛나는 그대 눈동자. 16) (신부) 늠름하네요 아, 너무도 멋져요. 그대, 내 사랑이여 푸른 풀밭은 우리의 침대가 아닌가요. 17) 은은히 향내 나는 송백은 우리 집 들보 든든한 전나무는 서까래라오.
우리는 하나님이 부부에게 주신 본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의 사랑과 연합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에게(8-11) 신랑은 신부에게 “어여쁜 자야”, “내 사랑아”라고 부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준마는 뛰어나게 잘 달리는 말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기품, 아름다움, 고상함을 나타냅니다. 태양에 그을린 가난한 시골 여인이었지만, 신랑은 신부에게 어울리는 보석으로 장식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하나님과 성도로 해석할 때, 이 말씀은 부유한 하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신부인 교회를 은혜와 진리의 보석으로 장식하실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에게(12-14) 이번에는 신부가 자신을 ‘나도’ 향수처럼 좋은 향기를 내뿜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도는 북인도에서 채취하여 만든 좋은 향수입니다. 고벨화는 사람들이 손톱이나 발톱에 물을 들이는 염색재료로 사용된 나무입니다. 많은 사람이 향기로운 냄새 맡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고후 2:14-16).
신랑이 신부에게(15) 신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신랑의 사랑 노래입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사랑받을 만한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신랑의 눈에는 모든 여자 중에 신부만 들어왔습니다. 우리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없는데도,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오늘도 변함없이 사랑을 고백하며 다가오시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풍성하여지길 바랍니다.
신부가 신랑에게(16-17) 신부가 더욱 친밀한 언어로 신랑에게 응답합니다. 신랑에게 들판이 곧 자기들의 침실이고, 백향목과 잣나무는 침실의 들보며 서까래라고 말합니다. 백향목과 잣나무는 모두 향을 내는 건축자재로 기쁜 장소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광활한 침실에 신방을 꾸밉니다. 이처럼 우리 집 침상의 분위기도 사랑하는 사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도록 힘쓰는 것이 유익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방도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남녀 간에 아름다운 사랑을 선물로 주셔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아가서를 통해 부부의 사랑이 회복되고, 무엇보다 자기 백성과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이 회복되기를 기도합시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어주기 위해 자신의 내면이 아닌 바깥을 내다본다면 그것은 자신의 소중한 인생계획을 상실한 것이다. -에픽테토스.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은 분명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인정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내던지고 다른 사람의 기준에 이리저리 흔들린다면 더 이상 기쁜 일일 수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기준과 원칙입니다.
사랑의 언어
아 1:9-2:1 / 김상복 목사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빰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을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아가 1:9-2:1
20년 전에 제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심양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새벽 1시에 택시를 타고 5-6시간을 가게 되었습니다. 같이 간 목사님이나 저나 중국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했고 택시 기사도 한국말을 모르는데다 영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깜깜한 밤에 택시가 갑자기 골목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왜 이 길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차를 어느 집 앞에 세우고는 기사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 사람이 혹시 칼을 가지러갔나….” 그 때 우리는 교회를 짓기 위한 선교헌금을 달러로 많이 가지고 갔었거든요. “그걸 알고 이러나.” 그런데 한참 있더니 시커멓게 생긴 사람을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기사도 얼굴이 얽었는데 같이 온 사람도 얼굴이 흉측해요. 둘이 택시에 타더니 다시 뒷길로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아요. 참 기가 막히더군요. 제 생전에 그날같이 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체력 단련도 안했는데 만일 목사 둘을 어디로 끌고 가면 어떡하겠습니까? 어찌어찌해서 이해하고 보니 밤에 혼자 먼 길을 운전하고 돌아오면 심심하니까 친구를 데리고 간다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못 알아듣는 말을 하니까 답답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국말을 하는 사람에겐 중국말을, 한국말을 하는 사람에겐 한국말을 해야 되겠지요. 미국사람을 붙들고 한국말로 해봐야 못 알아듣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도 모르고 못 알아듣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서로 이해가 안 되고 짜증만 날 것입니다. 부부간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알아듣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못 알아듣는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성장과정과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똑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한다고 다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계발해놓은 각자의 정서, 사고(思考), 가치관, 태도와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내 습관대로만 한다면 나는 편하나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를 잘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 자존감을 더 낮추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그만 폭발해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어떤 사람은 안정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시골출신이 있는가 하면 도시출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고유한 언어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의 영어성경을 보면 아내를 잘 study해서 명예롭게 살라고 했습니다. 약한 그릇인 아내의 장점, 단점, 가치관, 느낌, 생각 등을 살피고 어떤 언어를 써야 아내가 행복할 것인지 study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을 잘 study하고, 부모도 자녀들을 잘 study해서 각 경우에 적절한 언어를 사용해야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많은 언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예뻐요.” 시(詩)나 노래 가사, 문학과 철학, 그리고 그 어떤 종교든 사랑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제일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제일 부족한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서로 잘 알아듣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가슴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합니다. 사랑을 받고 또 주고 싶어 합니다. 사랑할 대상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내의 사랑이 없고 남편의 사랑이 없다면 좋은 집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좋은 옷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랑이 빠진 곳은 황무지와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사랑에 푹 빠져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너무 강해서 사랑의 표현도 적극적으로 합니다. 그동안 제가 관찰한 바로는 남자가 적극적으로 사랑을 하면 여자는 어쩔 수 없더군요. 처음에는 싫다, 어떻다 하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그 푹 빠진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푹 빠진다는 것은 몸이 끓는, 감정적인 것입니다. 스코트 팩이라는 심리학자는 그것을 이성에 대한 인간의 성적 본능의 표출이라고 했습니다. 도로시 테노스 교수는 이런 종류의 사랑은 길어야 2년이라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2년 후부터는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고, 분노를 표현하고, 심한 말로 냉혹하게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결혼 후에 자신에 대해 놀란 적이 있으실 겁니다. 혼자 살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착합니다. 잠자는 것 먹는 것에 대해 간섭하는 사람 없이 살 때는 너무 착했습니다. 충돌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석 달부터 2년 사이에 스스로에 대해 놀랄 일이 일어납니다. 내 속 어디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비판하는 심성이 있었던가! 이 표독한 내 눈길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결혼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머리를 감고 왜 머리카락을 세면대에 남겨놓고 나갑니까? 누구 보고 치우라는 겁니까? 치워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말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그런데 10년이 되었는데도 머리 감고 그냥 나와 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부터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픔을 주고 아픔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참된 사랑은 뜨거운 감정이 아닙니다. 이성적이고 이지적입니다. 생각하고 연구하고 목적을 세우고 노력하고 훈련해야 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사랑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언어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자존감을 세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상처를 주기도 하고 치유를 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미움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언어의 파워는 엄청납니다. 여러분이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한숨 쉴 때가 언제입니까? 비난의 말, 증오의 말, 미움의 말을 들었을 때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서 방황하는 일들이 우리 인생에는 너무 많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붓고 그 결과 나도 유익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인정해주는 언어입니다. 사람을 알아주고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꾸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뜨리고, 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도들 간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랑이다.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내가 너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겠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인정받을 수 없는 인간을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땅에 떨어진 인간을 붙들어 씻어주시고 돌봐주시고 아름답게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모습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가능성이 최고로 나타나도록 만드시는 것이 신앙의 힘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희생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물로 씻고 정결케 하시며 흠과 티와 주름잡힘을 모두 제거해서 볼 품 없던 우리를 볼 품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엡5:25-28). 만약 감정에 사랑을 맡겼다면 우리는 아마도 몇 번은 이혼했을지도 모릅니다. 통계에 의하면 재혼을 할수록 결혼생활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성장해야 장애가 극복되는데, 사람을 인정하고 자기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인정하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지 않고 상대방이 나를 인정해주기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9절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이 여자는 목동입니다. 오빠가 여러 명 있었는데 이 여동생 하나가 무엇이 미운지 광야에서 양을 치게 했습니다. 양을 치다보니 얼굴이 까매졌습니다. 사람들이 까만 얼굴을 보고 처녀가 왜 저렇게 새까마냐고들 하니까 이 여자는 불안하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5절). 본래는 예쁜데 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6절). 사람들이 저렇게 까매서 시집도 못가겠다고 했는지 모르지요. 그런 말을 자꾸 들으니 불안하고 싫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냐 하면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6절) 오빠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검다, 일광에 쬐였다, 흘겨보지 말라, 내 오빠들이 나를 보고 화를 낸다, 그래서 내가 포도원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무슨 언어입니까? 자존감이 떨어지고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는 한 처녀의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합니다. 부모님 때문에, 선생님 때문에, 친구들 때문에, 혹은 사회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가슴은 멍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하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속이 상해 있습니다.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자신감 없는 술람미 여자를 솔로몬이 만났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의 언어를 보십시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9절) “내 사랑아.”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 아내를 보고 “Oh, My Love!" 한다면 모두 기절할거에요. 여자들은 이 한 마디에 다 녹아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한 마디를 들은 지가 너무 오래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날 사랑해요?” 하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사랑하니까 결혼했지.” “그런데 왜 15년 동안 그렇다는 말이 없었어요?” “내 마음이 변했으면 일러줬겠지.”
솔로몬은 그 여자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습니다. “너는 바로왕의 무기를 끌고 다니는 병거의 준마다.” 병거는 수컷들이 끄는데, 여기에서 준마는 여러 수컷 중의 암컷을 말합니다. 수컷들이 암컷 한 마리를 보고 야단이 난 것입니다. 마치 요즘 TV의 병영 프로그램 중에 수많은 병사들 앞에 여배우 한명이 나타났을 때와 같은 광경일 것입니다. 함성을 지르고 야단이 나지요. 당신이야말로 군인들 속의 여배우 같다는 말이겠지요.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한 여자에게 “내 사랑하는 여인이여, 당신이야 말로 많은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한 여자 같아요”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통하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누구나 들으면 알아듣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당신 친구들은 이러저러 한데 당신은 왜 이래요?” 하는 말은 서로 못 알아듣습니다. 도움도 안 되는 말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말해주어야 합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10,11절). 이것은 예루살렘 여자들의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술람미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을 인정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해 말합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12-14). 솔로몬의 인격을 칭찬한 것입니다. 나와 같이 책상에 앉았을 때 보니 당신의 인격 속에서 참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향수는 사람을 끌기 위해 쓰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당신은 너무나 훌륭하고 인품은 너무도 대단하다는 말로 남자의 인격을 올려주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칭찬해주었고 여자는 남자의 인격을 칭찬해주었습니다. 인정해주는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서로 사랑이 안생기면 돌멩이입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기대해서도 안 되겠지요. 이 말을 들은 솔로몬은 다시 말합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절). 비둘기는 조용하고 깨끗하다는 표현입니다. 차분하고 정숙한 모습, 깨끗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는 외적인 것을, 이번에는 내적인 성품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장점을 찾아 칭찬하고 사람을 인정해주는 언어가 사랑의 언어요, 그 언어는 누구나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비판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언어는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깨고 사람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말을 들은 이 여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자가 드디어 무엇인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2:1).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아까는 햇볕에 타서 얼굴이 까맣고, 오빠들이 싫어해서 목동으로 만들었으나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부족하고 열등감이 있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불안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로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말해주고 그의 외적, 내적 장점을 칭찬해주었더니 드디어 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숯덩이인 줄 알았는데 샤론의 수선화로구나. 골짜기의 백합화였구나” 하면서 그 속에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얻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내적인 자심감이 생기고 자존심이 살아난 사람들의 모습은 걸음걸이도, 말하는 것도, 서 있는 태도도 다릅니다. 부끄러워서 자신 없어서 마지못해 서 있는 한 사람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인정해주는 언어를 사용하면 그 언어는 누구나 다 알아듣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격려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예전에 “Ministry of Encouragement"(격려의 사역)이라는 어느 목사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격려가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나왔습니다. 칭찬해주면 고래조차 물속에서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말 가운데 ‘기가 죽었다’는 표현이 있지요. 요즘 남자들이 기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기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여보, 단지 사업에 실패한 것이지 당신은 실패한 것이 아니에요. 나에게는 당신은 성공입니다. 당신과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실패를 했지만 절대 실패자는 아닙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집을 내놓고 저기 단칸방에 살아도 당신은 또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는 일어날 것입니다.” 반면 “맨날 그러더니 당신 꼴이 뭐예요?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마저 날리고 이제 우리는 어디 가서 살라는 거예요?”라고 한다면 그 상황에 맞는 언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아내의 격려의 언어에 남편은 엄청난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 믿는 남편이면 “하나님, 이런 여자를 나에게 아내로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할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는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을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언어입니다.
어느 한 여성이 대학 때 소설을 써서 응모를 했는데 낙선을 했어요. 너무 낙심이 되어 글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이 세 명을 낳아 기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책상 위에 올려놓은 글을 남편이 우연히 보았습니다. “당신 참 글재주 있네. 당신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처음 알았네. 당신 앞으로 글 좀 써야겠어. 반드시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지, 정말 놀랐어.”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다시 글을 쓰게 되었고 결국 훌륭한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격려는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폭발하게 만들어줍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며 장점을 격려해주면 그것이 폭발해서 그 아이의 최고가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거기서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친절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실수를 했을 때 “사람이 실수할 수 있지. 앞으로 또 그렇게 하면 안 되겠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줄로 믿어.” 책망일지라도 친절한 말로 할 때는 마음에 회개를 하게 되고 반발하지 않게 됩니다. 똑같은 말도 억양만 조금 바꾸면 전혀 다른 말이 되지 않습니까? 불안한 사람이 안정감을 느끼고 열등감에 떨어진 사람이 자존감을 세우고 자신감을 가져서 술람미 여자처럼 되게 세우는 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언어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다 망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까요? 사랑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절대 강요하지 않습니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배우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부모처럼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부모고 당신은 어린이니까 이렇게 하시오.” 어른을 아이 취급 하니까 상대방은 기분이 나빠요. 어린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먹어라, 세수해라, 방 치워라” 합니다. 그러나 48살 남자보고 그래서 되겠습니까? 언어는 시기에 따라, 상대에 따라 바뀌어야 됩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자식에게 하듯이 하고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면 친구처럼 하고 장성해서 결혼하고 남편과 아내가 생기면 어른에게처럼 말해야 됩니다. 남자들이 제일 속상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아이취급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내들은 자녀들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근 25년 동안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하도 연습했기 때문에 남편이 들어와도 이래라 저래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겸손하게 말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생 이 땅에서 살아야 됩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부모님과 형제들과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고 피어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표현을 써야 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를 잘 계발해서 상대방이 알아듣는 언어를 사용해야 됩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는 더 조심해서 그 사람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고 치유 받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가 사랑의 언어를 잘 계발함으로써 남은 일생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를 향한 마음
아 1:9-17 / 조영식 목사, 김포한신교회
여름에 강열했던 폭염도 가을 문턱 앞에서는 기세를 꺾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의 군대가 한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점령군 대장이 마을 사람들에게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남자들은 모조리 잡아가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모두 풀어줄 것이니 마을을 떠나라! 떠날 때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한가지씩만은 가지고 가도 좋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각종 보석을 챙겨 급히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허약한 몸이면서도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챙겨 나왔습니다. 검문하던 군인이 이상하게 여겨 보따리를 헤쳐 보니 남자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검문하던 군인이 대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장은 여인에게 “이건 누구인가?” 묻자, 여인이 “제 남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장이 “왜 명령을 어기는가? 보물을 가져가라 했거늘, 어찌 사람을 메고 나가는가?”라고 하자, 여인이 “제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제 남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적군의 장수는 여인의 지혜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되어 “남편을 데리고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습니다. 탈무드에 담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입니다. 오늘 아가서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
아가서에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가 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첫 번째로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라고 합니다(9절). 이 표현에 대하여 혹자는 바로는 애굽 왕인데, 애굽은 세상을 의미하고, 준마는 속도가 빠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기질을 가지고, 세상의 풍습에 빠르게 따라가는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표현은 사랑하는 대상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한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먼저는 9절을 시작하면서 “내 사랑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당시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왕이 타는 말로서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것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가 된 우리들을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라고 합니다(10절). 뺨은 여인에게서 사랑하는 감정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가지런하게 땋은 머리털은 질서있는 헌신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목은 순종을 의미하며, 순종치 않는 사람에 대하여 목이 곧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에 구슬꿰미가 있는 아름다운 목이니, 순종하는 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가 된 우리들에게 빰에 스며있는 사랑과 땋은 머리털에 있는 조화로운 헌신과 아름다운 목에 담겨 있는 순종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라고 합니다(11절). 주님이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드시는 것은 우리의 목에 구슬꿰미를 달아주시기 위함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은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친히 만들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한 구슬꿰미로 만들어준 사랑의 은혜를 받을 때 우리들은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금 사슬에 은을 박는 것은 정교하여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사랑에 시간이 필요한 것은 쉽게 얻는 기쁨은 빨리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어떤 일이든 쉽게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쉽게 얻은 것은 오래 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힘겹게 얻은 것이 끝끝내 남아 훌륭한 스승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하는 삶(12-14절).
이제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누리는 기쁨입니다. 첫 번째로 함께하는 삶은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라고 합니다(12절). 왕이 되신 주님과 먹고 마시며 침상에서까지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향기가 나는 삶입니다. 항상 하는 말씀이지만 우리 자신에게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향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스며들었던 향기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함께하는 삶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라고 합니다(13절). 몰약은 방부제이면서 악취를 제거해주고 해충을 막아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몰약을 넣어 품속에 간직하며 지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몰약처럼 품 가운데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들이 몰약처럼 부패하지 아니하고, 죄악의 냄새가 나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주님이 품 가운데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함께하는 삶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합니다(14절). 엔게디는 광야에서 다윗이 피신했던 곳이고, ‘고벨화’는 유대 지방에서 어린 아이들의 손톱에 물들이는 데에 사용했던 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손톱에 물들이는 꽃처럼 그분의 몸속에 새기시고 항상 기억하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손톱에 스며져 있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함께하는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조울증이라고 합니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안 좋을 때는 감정의 맨 밑바닥 막장까지 내려가 버리는 것이 조울증입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조울증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과 꾸준한 사랑, 늘 한결같은 사랑, 오래 가는 사랑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3.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15-17절).
이제 사랑하는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첫 번째 관계 맺음은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라고 합니다(15절).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눈의 대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둘기의 눈은 소식을 전하는 대상을 잘 분별하여 전달하는 눈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영적인 분별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관계 맺음은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라고 합니다(16절). 여기서는 사랑받는 여인이 왕을 향한 고백입니다. 여인은 왕을 향하여 ‘화창하며 푸르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향한 관계가 어둠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있으며, 세상에 물들지 아니한 영적인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관계 맺음은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라고 합니다(17절). 이것도 여인이 왕을 향한 고백으로 들보는 집을 받치는 기둥이며 서까래는 지붕 판을 만드는 받침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 인생의 기둥이 되시며,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백향목과 잣나무의 공통적인 특징은 향기가 나서 벌레들이 틈을 타지 못하고,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어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백향목과 잣나무가 하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가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받아 성전을 짓는데 귀한 재목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백향목과 잣나무처럼 하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갈 때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핍박 가운데 던져지고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요한의 눈을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계시록의 본론은 ‘이리로 올라오라’로 시작됩니다(계4:1). 주님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분열과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분열의 문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영적인 눈을 높이 들어 올리셔서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창세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주 신문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삶은 감자를 앞에 놓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부인이 감자와 함께 설탕을 가져왔는데, 남편은 고추장을 찾았던 것입니다. 남편 왈,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고추장에 찍어 먹어.” 부인 왈, “감자를 어떻게 고추장에 찍어먹어요? 그 집안 참 웃기는 집안이네!” 집안을 들먹이는 부인의 말에 남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결국 싸움이 커져 집안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이혼까지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상담 전문가에게 찾아온 이 부부가 진지하게 묻더랍니다. “선생님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습니까, 고추장에 찍어먹습니까?” 선생님 왈, “저는요, 마요네즈에 찍어먹는데요.” 웃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자신 안에 갇혀서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백향목이나 잣나무처럼 하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갈 때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장 귀한 존재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 앞에 헌신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향기가 스며들어 나타나게 하옵시고, 부패하지 아니하며, 주님의 손톱에 스며들듯 사랑의 한 몸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분별하는 삶을 살게 하옵시며, 항상 영적인 밝음과 푸르름을 유지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 올라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