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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터지와 영화의 행복한 만남
12월,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 또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극장은 하나의 낯선 세계가 되고, 숨죽이고 바라보는 관객들은 비좁은 극장에 옹색하게 끼어앉은 영화 관객이 아니라 호그와트를 엿보는 눈이 되어,
미들 어스를 조망하는 눈이 되어, 텍스트 밖으로 튀어나온 환상의 성찬을 즐기게 될 것이다.
2002년 12월, 작년에 이어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이 1년만에 후속작을 내걸고 또다시 개봉한다. 그 이름하여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그리고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일단 둘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모두 반 세기의 세월차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난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팬터지의 아이들이라는 것. 영화라는 무한의 영상적
상상력과, 팬터지라는 무한의 텍스트적 상상력이 만난 행복한 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법의 티켓을 손에 쥐자. 팬터지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줄
영화관의 개봉관과 좌석 번호와 시간이 인쇄된 한 장의 티켓을 느긋하게 손에 들고, 혹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책 한 권 팔에 끼고 어둠 속에 들어서자. 그럼 시작되는 것이다.
자, 어서 오십시오, 환상 극장으로.
1980년대 팬터지 영화들에 대한 향수
굳이 CG 기술이 발달한 1990년도 후기나 2000년대를 들지 않아도
팬터지 영화의 모험자들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말하자면 『오즈의
마법사』라던가 『윌리 웡카와 초컬릿 공장』 같은 것들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도에도 팬터지 팬이 즐길 만한 팬터지 장르의
영화들 ― 거의 대부분이 팬터지 텍스트를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 이 있었고, 지금도 부담없이 긴 겨울밤을 지샐 친구로 부족함이 없다.
비록 수수한 화면에 고전적인 기법으로 가득하지만, 훌륭한 환상의
동반자인 80년대 팬터지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가
찾아오기 전에 한번쯤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 개인적인 추천작을 몇 꼽아본다.
『네버 엔딩 스토리』
『네버 엔딩 스토리』(1984년, 감독 볼프강 페테르센)는 거장 미하엘 엔데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원작의 방대한 스토리를 한 번에 살릴 수가 없어 3편으로 쪼개어 제작하면서 유감스럽게도 점점 더 원작과 동떨어져 갔다.
그러나 제일 처음에 제작된 『네버 엔딩 스토리』
1편은 지금 보아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바스티안이라는 소년이 난폭한 아이들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들어간 이상한 서점에서 어떤 책을
집어들었지. 그 책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 뱀으로 장식이 되었고, 속 종이는 두 가지 색
잉크로 인쇄가 되어 있더래. 그런데 그 책의 등장인물들은 신비하게도 바스티안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어. 바스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책을 훔쳐내고는, 학교 구석에 몰래 숨어서 읽기 시작했어"라는 이
이상한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지? 영화는 초반부터 꼼꼼하게 원작 소설을 따라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상아탑에 산다는 영원한 소녀인 여왕, 진주빛 반짝이는 비늘로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행운의 용 팔코, 바위 거인들, 절망의 늪, 문지기 스핑크스, 그리고
'무'에서 세계를 구해내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는 검은 눈의 용맹한 소년 아트레이유까지 원작 소설의 아름다움이 스크린 가득 한껏 살아있다.
CG도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 연출도 없지만, 여러 가지 동화적
장치들과 세상을 집어삼키는 '무'의 은유는 지금도 마음을 울린다. 비록 원작 소설 후반부에 바스티안이 불행한 영웅이 되어버리는 부분이
잘려나가 그만큼의 묵직하고 완결된 주제의식이 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세 사람의 사랑스럽고 용감한 어린 주인공들의 모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지 않겠는가.
『래비린스』
마찬가지로 소녀가 이상한 세계에서 모험을 겪는
이야기라면 『래비린스』(1986년, 감독 짐 핸슨)가 있다.
"사라는 아직 젖먹이인 이복동생을 돌보는 것에
싫증난 나머지, 고블린들의 주문을 외우며 동생을
데려가버리라고 소원을 빌었대. 그러나 정말로 고블린의 왕이 나타나 어린 동생과 사라져버리자,
사라는 동생을 찾기 위해 미궁을 여행해 고블린
성으로 향하는 모험을 시작했다지."
마치 꿈꾸는 듯한 화면이 인상적인 영화. 신비한
아름다움의 소녀 시절 제니퍼 코넬리가 주인공 사라로, 그리고 놀랍게도 데이빗 보위가 고블린의 왕 자레드로 나와 화려한 분장과 노래를 선보인다. 미궁이라는 것은 흔히 그렇듯,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통과의례적인 시련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서
아이는 애정과 추억의 소중함을 깨닫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
그런 결말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오래간다. 특히나 매력적인 인물들과 노래, 환상적인 화면이 함께 한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을 수밖에!
『레전드』
『레전드』(1986년, 감독 리들리 스캇)도 어둠의
왕이 등장하는 소년소녀 모험담으로 한번쯤 이야기됨직한 작품. 자그마치 15년 전의 앳되고 어린
팬터지 버전 톰 크루즈를 볼 수 있다.
"어둠의 시대가 물러간 후, 어둠의 왕은 땅 속 깊이 숨어서 다시 이 세상에 나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대. 하지만 이 땅은 선한 유니콘의 힘이 보호하고 있었지. 그 유니콘은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소년 잭이 지키고 있었고, 그동안은
아무리 어둠의 왕이라도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어.
어느날 잭의 연인인 릴리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유니콘을 보고 싶다고 잭에게 부탁했어. 그러나 릴리가 유니콘과 만나는 순간 어둠의 왕이 보낸 악령들이 습격했고 유니콘의 뿔을 잘라가버렸지. 그것으로 어둠의 왕은 힘을 되찾고
어두운 시대가 찾아왔대."
선과 악의 극명한 대립, 그리고 어둠의 유혹에 약한 소녀라, 꽤나 노골적인 상징과 스토리 라인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백색으로 빛나는 유니콘이라던가 작은 요정들, 저절로 춤추는 매혹적인 검은 드레스 등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강력하고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친절하리만큼 단순한 스토리와 확실한 선악 구분 덕에
부차적인 것은 신경쓸 필요도 없이 드워프와 요정, 악령들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동화 세계가 마치 어린 시절 잠 못 이루던 밤에 듣던 이야기책 속 이미지처럼 더욱 확고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결말은? 사랑이다. 사춘기를 빠져나온 소년소녀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세계 또한 그들의 순수한 사랑으로 지켜진다. 굳이 말하자면 유니콘의 뿔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아름답고 선한 우화인 셈이지만 신경쓰지 마라. 이것은 어차피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만큼 아는
어른들을 위한 순수의 동화니까.
『프린세스 브라이드』
조금 이색적인 작품으로는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년, 감독 로브 라이너)를 꼽을 수 있겠다.
각본가이기도 한 윌리엄 골드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팬터지. 『레전드』와 마찬가지로 동화의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이 영화는 유머와 모험, 활극으로 가득찬 유쾌한 소품이다.
할아버지가 감기에 걸린 소년에게 이야기를 읽어주며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가 이미 엎치락뒤치락하는 요란한 동화 속으로 보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작은 덫이다.
"아름답고 도도한 소녀 버터컵은 '하인'이라고 부르는 일꾼 웨슬리를 사랑하고 있었어. 하지만 웨슬리는 그만 전쟁터에서 죽어버리고 슬픔에 빠진 버터컵은 훔퍼딩크 왕자의 구혼에 못
이겨 왕자와 결혼하기로 해버렸대. 하지만 결혼 직전에 버터컵은 이웃나라의 음모로 세 남자에게 납치되고 말았어. 그런 버터컵을 한 복면의 남자가 구해주었고, 그 자는 사실 죽지 않고 해적이 되어버린 웨슬리였던 거야."
만약 『슈렉』의 분위기에 가장 가까운 영화가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로맨스가 있고, 음모가 있고, 기발한 유머와 결투와 뜻밖의 사건,
그리고 해피 엔딩이 있다. 『레전드』가 소년소녀들의 우화적 사랑이라면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사랑의 과정 그 자체가 파란만장한 역경으로 가득한 젊은 남녀의 연애담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교훈? 없다.
그러나 해피 엔딩을 위해 태어난 듯한 영화 속 인물들의 재치와 파란으로 가득찬 모험을 유쾌하게 웃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레이디 호크』
좀 더 진중하고 무거운 로맨스, 마법의 신비로 가득한 영화라면 『레이디 호크』(1985년, 감독 리처드 도너)가 있겠다. 중세의 냄새를 지닌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해 은유적으로 진득하게 에둘러 표현해낸다.
"쥐라는 별명을 지닌 좀도둑 소년 필립은 아퀼라
주교의 감옥을 겨우 빠져나가 도망치던 중에 기사
나바르를 만나게 되지. 나바르는 원래 아퀼라 주교의 경호대장이었지만 아름다운 이사보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흠모하던 아퀼라 주교의 질투어린
저주를 받았던 거야. 그 저주는 낮에는 이사보가
매로 변하고 밤에는 나바르가 늑대로 변하는 것이었어. 나바르와 이사보는 서로 변함없이 사랑했지만, 저주 때문에 만나기는 커녕 한 마디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지. 그들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 낮이 없는 밤, 밤이 없는 낮에 두 사람이 함께 주교 앞에
서는 것 뿐이었어."
룻거 하우저의 과묵한 기사 나바르, 그리고 녹색 눈이 아찔하도록 매혹적인 미셸 파이퍼의 청순한 이사보. 그들은 상대역이 없는 ― 있어봐야 매 혹은 늑대인 ― 사랑을 잘도 표현해낸다. 항상 곁에 있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모순 속에서도 그들은 변함없는 신뢰와 애정을 상대에게 품고, 소년 필립은 그것을 서로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루어질 길 없는 사랑은 필립의 도움을 받아 기적을
맞게 된다.
CG 대신에 교차편집으로 이사보와 나바르가 매와 늑대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것이 또 그래픽과는 달리 은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은은한 멋이 있다. 매와 여인과 달은 같은 것이고, 늑대와 남자와 태양은 또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적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달과 태양이 서로 만나는 일식에 가능했던 것이다. 중세 기사도 문학 풍의 단순하고 질박한 스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매력과 압도하는 듯한 아름다운 화면은 사랑의 저주보다는 사랑의 마법을 더욱 믿게 해준다.
책갈피와 스크린의 모험
90년대 이후로도 팬터지 영화는 『카멜롯의 전설』, 『멀린』, 『네버 엔딩 스토리 3』에서부터 『후크』, 그리고 『아발론』과 『파이널 환타지』를 거쳐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나 팬터지 영화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80년대에 비해 획기적으로 발전한 CG 기술 덕에 팬터지 영화는 날개를 달게 됐고, 상상만 할 수 있던 이미지, 혹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미지까지도 자유롭게 스크린 위에 펼쳐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80년대이건, 한 세기를 건너뛴 2000년도이건 결국 가장 중요한
것, 팬터지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 즉 상상력의 힘만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도
반 세기 전에 씌여진 『반지의 제왕』에 환호하는 이유다.
상상의 지평이 열려있는 한, 책갈피에서 튀어나온 이 이상하고 신비로운 세계의 이야기들은 또다른 영토인 스크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갈 것이다.
김유정 :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인지
공학 석사 과정 휴학중. 2000년 제 1회 황금드래곤 문학상에서 팬터지 장편소설 『영혼의 물고기』로 대상 수상. 사이암(Psyam)이라는
닉네임으로 하이텔 시리얼(go serial)과 개인 홈페이지(http://psyam.zio.to/)에서 팬터지 단편소설들과 팬터지 장편소설 『하이어리데스 ― 황혼의 나라』를 집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