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2일 (월) 맑음.
> chosun.com : [태평로] 삼각지 '국수 한 그릇'
열흘 전쯤 지방선거 후 폭풍과 월드컵 열기에 가린 채 스쳐 지나간 신문기사가 있었다. 경기도 하남의 어느 도시락가게에 갓 스물 젊은이가 찾아와 흰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였다.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봉투엔 12만원이 들어있었다.
청년이 4년 전까지 인근 중학교에 다닐 땐 학교에 급식소가 없어 많은 학생들이 이 가게에서 2000원짜리 도시락을 배달 받아먹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 값을 내지 못했다가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갚으러 왔다고 했다. 주인 내외가 한사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봉투를 거두지 않았다.
청년 못지 않게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도시락가게 부부의 말이었다. '그 학교엔 가난한 아이가 많아 못 받은 도시락 값이 한해 500만원을 넘었지요.''여덟평 가게를 하는 처지로 떼인 돈이 적다 할 수 없겠지만 부부는 당연하다는 듯 회상했다. 외려 '아이가 4년 동안 도시락 값을 가슴에 두고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우동 한 그릇'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인까지 사로잡은 일본 동화다. 해마다 섣달 그믐밤 늦게 우동집에 찾아와 한 그릇만 시키는 어머니와 두 아들을 위해 주인은 면을 더 담아주고 가격표도 낮춰 써놓는다. 세 모자는 주인의 티내지 않는 배려에 삶의 용기를 얻는다. 10여년 뒤 그 어머니와 훌륭하게 장성한 두 아들이 찾아와 우동 세 그릇을 시키자 우동집은 눈물바다가 된다.
찾아보면 동화보다 진한 실화가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 '옛집'은 탁자 넷 놓인 허름한 국숫집이다. 할머니가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뭉근하게 우려낸 멸칫국물에 국수를 말아낸다. 10년 넘게 값을 2000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 더 준다. 연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사내는 15년 전 사기를 당해 재산을 들어먹고 아내까지 떠나버렸다. 용산 역 앞을 배회하던 그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한끼를 구걸했다. 음식점마다 쫓겨나기를 거듭하면서 독이 올랐다. 휘발유를 뿌려 불질러 버리겠다고 맘 먹었다. 할머니네 국숫집까지 가게 된 사내는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먹자 할머니가 그릇을 빼앗았다. 그러더니 국수와 국물을 한가득 다시 내줬다.
두 그릇치를 퍼 넣은 그는 냅다 도망쳤다. 할머니가 쫓아 나오면서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냥 가, 뛰지 마. 다쳐!'그 한 마디에 사내는 세상에 품은 증오를 버렸다. 파라과이로 이민 가서 꽤 큰 장사를 벌인다고 했다.
시인 함민복은 가난하던 시절 어느 설렁탕집 이야기를 '눈물은 왜 짠가'에 설명한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 없어진 어머니를 친척집에 모셔다 드릴 때 어머니는 아들을 설렁탕집으로 끌었다.
'어머니는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 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도시락가게 부부, 국숫집 할머니, 설렁탕집 아저씨 이야기엔 '인간'이 있다.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안다. 그래서 연민을 품고 배려할 줄 안다. 그러나 그 선의를 대놓고 표시하지 않는다. 국숫집 연탄불처럼 뭉근한 사랑이다. 세상 아직 살 만하지 않은가.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 2006.06.12 20:42 50'
> 産業現場에 報恩의 눈물.
내가 중앙청에서 근무할 당시의 이야기이다.
1977년 늦봄으로 기억된다.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를 모시고 창원에 새로 조성된 창원공업단지내의 방위산업체를 시찰 격려하는 출장 길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당시 만하여도 창원의 중화학 공업단지는 크게 기반조성공사만 되어있었고 입주업체는 그리 많지가 않았던 초기로서 정부에서 입주업체에 많은 금융세제상의 혜택과 우선권을 부여하여 입주를 권장하고있을 때였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한국의 산업은 소비재 산업으로는 국가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한국도 주한미군의 철수라는 엄청난 군사적 균형이 깨질 때를 감안한다면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는 중화학공업의 육성 없이는 힘들다고 판단하여 대기업을 중심으로 현대, 삼성, 대우, 효성 등의 많은 기업들에게 방산 육성종목을 지정하여 국군장비현대화에도 박차를 가하고있던 시점이라 기업들의 고충과 현장의 사정을 정리하여 정부의 대책을 보강하려는 목적의 출장이었다.
당시 나의 기억으로는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국방장관, 방산국장, ADD 소장, 상공장관, 상역차관보, 과기처 장관, 청와대 경제2수석, 총리 비서실장, 행정조정실장과 관계비서관 등이 동행하였다.
우리 일행은 전용기로 김해에 착륙하여 승용차 편으로 창원 공업단지내의 현장사무소를 방문하여 소장으로부터 단지 입주현황과 조성계획 등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현대중공업(현 : 두산 중공업)에서 공장 건설현장을 시찰하고 오찬을 그곳 입주업체 중 방문예정업체 대표와 지방기관장들과 구내식당에서 오찬을 마치었다.
오후에도 통일중공업(발칸포 제작 및 병력수송 장갑장비 제작), 대우중공업(105m砲 및 경기관총), 효성중공업(중전기)을 시찰하는 가운데 가장 정밀도가 높은 방위산업의 주요 부품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하면서 업체 선별과정에서 국방부와 상공부 관계관들이 추천한 규모가 창원 공단 내에서는 가장 작은 업체를 찾아 나섰다.
이 곳은 우리군의 숙원사업중의 하나인 포탄의 뇌관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그 어느 사업보다 정밀도가 높아야 되고 규모에 비해 생산단가가 엄청 고가여서 풍산에서 제작하는 포탄의 뇌관을 그간 수입에만 의존하던 것을 일거에 해결한 중요 산업체인 것이었다.
우리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임시로 물리고 준비한 회의실에서 비좁게 착석을 하고 설립자이고 뇌관을 개발한 사장으로부터 회사 현황과 사업계획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단상의 차-트를 지켜 보고있었다.
사장의 일성이 터져 나오는 데에는 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무엇이 준비가 덜되어서 그러는 줄 처음은 그렇게 알고 기다릴 뿐이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안 것은 그가 너무나 감격하여 어깨를 흔들어 가면서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흐느껴서 울고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그가 지금 울고있는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제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앞자리에 앉아있는 국방. 상공장관도 묵묵히 탁자를 바라보고 사장이 마음의 동요를 진정하고 평상심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하의 침묵과 단상의 흐느낌이 한 동안 이어지다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사장은 우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닦아내면서 본인의 보이고싶지 않은 모습을 보인데 대하여 깊은 사과의 말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60에 가까운 초로의 젊지도 늙지도 않은 설립자는 평상심으로 돌아와서 오늘의 이 자리에 국무총리와 관계국무위원들을 모시고 영광되게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을 보고 드리게 된데 대하여는 자기의 일생이 일밖에 모르고 일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영광된 자리가 있어지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옛 생각이 본인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전제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본인은 경상도 시골의 산촌마을에 여러 형제 중 가운데 아이로 태어났으나 워낙 집안이 가난하고 농사처도 없고 하여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지내는데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모님께 한 입이라도 줄여 배를 주리는 형제들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상이라 싶어 보통학교를 중퇴한 몸으로 무작정 상경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새벽에 읍내로 나와 천신만고 끝에 기차를 무임승차하여 서울역에는 겁이 나서 내릴 수가 없고 하여 서울과 가까운 영등포역에서 줄행랑을 쳤다. 그 당시에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역사 밖으로 뛰쳐나와 보니 도회지의 풍경이 산골과는 전혀 다르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막막하여 며칠을 영등포 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니 부천 쪽으로 내려가면 공장지대가 있고 그곳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것 같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부천가는 길을 물어 급기야 부천에 도착하여보니 조그마한 주물공장, 자전거 수리하는 곳, 대장간 등 시골에서는 보지 못했던 그런 가계들이 길옆에 연달아 있었다.
몇몇 공장과 가계에 들려 구직을 희망하였으나 그것이 쉽게 말과 같이는 되지는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 배운 것이 모자란다 등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는 조그마한 주물 공장인데 조그마한 주물들을 찍어내어 이를 다듬어 가공을 하는 곳으로 큰 기술이나 체력이 그렇게 많이 소요되는 것 같지는 않아 그 공장 주인에게 하루 세끼 밥만 먹게 하여 주면 성의껏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사정을 하였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주인어른이 “이놈, 너 지금 한 약속이 참이렸다. 정말 밥만 먹으면 된다고 했지!” 하고는 지금부터 이곳에서 너의 잠자리와 먹는 것은 해결하여 줄 것이니 일을 열심히 배우라고 하여 상경 수주만에 나름대로의 안식처를 찾은 셈이 되었다.
그곳 주물공장은 시계의 외형을 찍어 만들어 납품하는 공장으로 상당히 정밀도가 유지되어야 하고 까다로운 품질검사를 거쳐야 납품이 되곤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10~20대를 보내면서 어느덧 해방의 기쁨도 만끽하고 청춘을 불태우고 한 가족처럼 지내고있었으나, 주인께서는 우리가 처음 한 약속 이외에 별 다른 말씀이 없이 나이가 들어도 용돈 한 잎 주지 않고 날이 가면 갈수록 기술력이 뒤진다, 제품에 하자가 많다, 그 어느 다른 유급종업원보다 혹독한 훈련과 나무람이 급기야는 본인으로 하여금 초심은 온데 간데 없고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처음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밥 세끼 먹는 것으로 모든 것을 바쳐 충성키로 하였다고 하여도 나이도 성인이고 상당한 기술력으로 공헌 바가 얼마인데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가 언젠가는 여기에서 익힌 기술과 자본가를 영입하여 새로운 공장을 만들어 지금까지 당한 수모와 멸시를 꼭 되돌려 주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주인께서 나를 불러 조용히 하시는 말씀이 “이제 너도 성인이 다되었다. 결혼을 하여 일가를 이루고 이 공장을 맡아주기 바란다.” “나의 아들들은 모두가 그들이 원하는 일을 따라 집을 떠났다.‘ ”그러니 그간의 너에게 혹독하게 대한 것도 너에게 이 공장을 영원히 맡기기 위해서였으니 그리 알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하시는 것이었다.
본인이 맡아서 공장을 운영할 때에는 그런 대로 규모도 커지고 시계의 주물뿐 아니고 부속품으로 조금씩 발전한 것이 방위산업과 관련된 포탄의 뇌관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이다.
30년 가까운 고된 훈련과 인간미 없어 보이는 냉철함이 참뜻은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훌륭한 은사임을 알았을 적에는 그 어른은 이미 세상에서 고인이 되고 난 다음이었다.
본인은 무식하고 오직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생이 계셔서 오늘의 이 영광된 자리를 함께 하셨다면 얼마나 흐뭇해 하셨겠습니까. 그런 뜻에서 조금 전에 제가 제 스스로 저의 지난날 은사의 강인한 훈련을 미쳐 짐작하지 못하고 원수로 값음을 하려고 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가슴에 뭉클하며 솥아 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결례를 한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국무총리 이하 전원 모두가 숙연하여 사장의 현황보고를 듣고 난 연후에 국무총리께서 선도하여 힘찬 박수로 답하고 국가와 방위산업발전에 크게 공헌하고있는 사장과 전 직원에게 높은 치하와 금일봉을 하사 격려를 하고 상경하였다.
나는 공직 재직 중에 많은 현장을 다니면서 기업의 성공사례들을 지켜보았고, 농촌의 한. 수해를 둘러보면서 농민들의 애환과 끝없는 연구와 묘종 하나하나를 친자식 같이 대하는 정이 담겼기에 그런 대로 우리 농촌이 아직도 경쟁력을 잃지 않고 품목에 따라서는 세계시장으로 그 안목을 넓히고 있다. 이 모두가 각자의 맡은 분야에서의 인내심과 연구를 게을리 한다면 무엇하나 바르게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선생 밑에 바른 학생이 있게 마련이다.
참새가 어찌 대붕의 높은 뜻을 알려마는 모름지기 젊은이들이 가끔은 대해 같은 선배들의 마음씀씀이를 잘못 인식하고 그것이 자기 인생에 큰 저해 요인인양 곡해는 경우가 있으나 가끔은 뒤집어서 한번쯤은 역지사지로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속담에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얻어먹는다‘ 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날의 뇌관을 제작하는 공장의 社主를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