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팀(6)]
일본 장애인해방운동을 돌아보며
남병준|장애활동가 세미나팀 팀원
장애활동가 세미나팀의 마지막 연재 글은 일본의 장애인운동에 대한 내용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최초 장애활동가 세미나팀을 구상하고 제안했을 당시 우리 손에는 일본책 몇 권밖에 없었다. 그중 두 권을 가지고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두 개의 세미나팀을 더 조직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30명의 동지와 장애인운동의 기본적 원칙을 공유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장애인해방운동의 역사와 내용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문제제기와 영감을 불어넣었다.
일본의 운동사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일본의 사회체제가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법률이 일본의 것을 베끼는데서 시작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비슷한 사회 환경에서 생기는 문제들과 그 대응방식은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 운동진영을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본 사례의 연구는 필수적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의 장애인운동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그들의 치열한 문제제기와 행동에는 심오한 철학적 깊이와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있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자면, 일본의 역사와 현실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문가들과 일부 단체들이 선진자본국의 자립생활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고 도식화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모델을 자립생활운동의 교과서처럼 만들어놓고서는 정작, 그 역사와 시대와 사회 환경적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
장애인운동 이전의 역사는 일본 역시 다른 나라와 별 차이도 없고 이렇다 할 기록도 없다. 단, 건국설화에까지 여성신이 먼저 남성신을 유혹한 벌로 장애아가 태어나서 그 아이를 강에 버리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성차별과 장애인차별의식이 민중 속에 강하게 존재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구빈법으로 대표되듯이 유럽에서는 인도주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구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활성화되었고, 일본에서도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극히 일부의 자선가에 의한 학교와 시설 만들기 등 ‘구제’운동이 있었으나, 전쟁준비가 진행되면서 겨우 확산되던 구제의 움직임조차 후퇴하고, 제2차 대전 패배의 위기 속에서는 장애인 폐기가 공공연히 이야기되기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는 나치 히틀러가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장애아 살해를 추진하고, 유대인과 함께 다수의 장애인을 가스실로 보냈던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을 학살하고 가장 탄압하던 국가들에서 장애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하겠다.
1970년대 일본의 푸른잔디회가 ‘우리 뇌성마비자들은 원래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며 비장애인문명을 부정했던 것처럼, 1980년대 독일의 크뤼펠 운동의 ‘우리는 장애인이 아니라 크뤼펠(병신)이다’라는 선언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장애인은 타자(他者)일 뿐이며, 통합(integration)이니 정상화니 하는 소리도 장애인의 고유성 혹은 단독성을 뺏는 것일 뿐이라는 인식이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패전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과 치열한 계급투쟁 속에서 장애인운동도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1947년 일본맹인회연합의 결성을 시작으로 일본농아연맹, 지체부자유자협회 등의 당사자단체가 차례로 결성 혹은 재건되고, 일본신체장애인단체연합회(일신련)라는 연합체를 결성하여 나름의 요구도 내걸고 하지만, 장애인운동이라고 보기에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단체의 성향이 너무 강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장애아 부모단체들도 유형별로 다양하게 결성되었다.
1967년에는 전국장애인문제연구회가 결성되어 청원운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나가게 된다. 이 단체는 일본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던 한계로 대중운동을 정치운동의 하위에 놓거나 분리시키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장애인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사회주의 이행과정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혹은 장애인들의 요구가 자본주의의 근간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요구를 과격한 행동이라며 억누르는가 하면, ‘정치문제는 공산당에게 맡기라’는 관료주의적 통제가 그것이다.
장 애인운동이 폭발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당시의 일본사회는 고도경제성장과 치열한 계급투쟁의 시기였다. 노동운동과 함께 재일조선인․중국인민의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부락해방운동 등 피차별 민중운동이 고양되면서 장애인운동도 직접적으로 고무되었다. 일본사회에서는 부락차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피차별 부락민들은 이미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고 투쟁해왔고, 이러한 투쟁들은 당시 일본 좌익운동진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장애인운동을 촉발시킨 주요한 사건은 아라키재판투쟁과 후츄우요육센터투쟁, 그리고 푸른잔디회의 활약 등이다.
아라키재판투쟁이란, 운전면허 수험거부를 당한 중증장애인 아라키씨가 계속 무면허운전을 하자 검찰이 기소를 했고, 이에 맞서 아라키씨가 당당하게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촉발된 재판투쟁이다. 이 투쟁에 대해 기존의 장애인단체는 물론 ‘권리로서의 요구’를 주장했던 전국장애인문제연구회까지도 무모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지원을 거부했다. 그러나 투쟁은 점차 확산되고 새로운 운동의 주체들을 만들어내었다.
후츄우(府中)요육센터투쟁은 대규모 장애인수용시설인 도쿄 도립 후츄우요육센터에서 벌어진 투쟁이다. 재소생이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2~3년 뒤 시설 측에서 오히려 시설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이전하려고 하자 재소생들이 이전반대를 외치며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1년 반에 걸친 도청 앞 천막농성에도 불구하고 이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패배한 후 남겨진 중증장애인들이 무작정 농성을 계속하여 최초로 활동보조비를 쟁취하고, 이후 활동보조인제도의 모태가 되기에 이른다.
푸른잔디회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연재글에 소개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그들의 활동만을 언급하겠다.
1970년 모친에 의해 장애아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여성단체 시민단체 등에서 모친에 대한 감형탄원운동이 일어나자, 푸른잔디회는 감형탄원운동을 규탄하고 나서며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후 영화 ‘사요나라CP' 상영운동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 조직을 만들고, 1973년에는 전국푸른잔디회 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결성 직후 몇 년간은 푸른잔디회 운동의 최전성기이며, 그 중에서도 우생보호법 개악저지 투쟁과 1977년의 버스점거투쟁은 그들 투쟁의 치열함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또 재가장애인 방문과 비장애인 조직화 등 일상 활동에도 뛰어났음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장애인에 대한 부당해고, 취직차별, 입학차별, 취학거부 등의 사안에 맞서 새롭게 성장하던 장애인해방운동진영은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 힘들이 모여 1975년 전국장애인해방운동연락회의가 건설되고 양호학교의무화저지투쟁 등 전국적 사안에 대응하였다.
이 토록 활발하게 성장하던 일본장애인운동이 어쩌다 쇠퇴하게 되었을까? 사실 일본의 장애인운동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그들이 실패했던 원인이다. 푸른잔디회의 섬뜩한 문제제기보다 우리가 더욱 유념해야 할 것은 그토록 치열한 운동이 스스로 수명을 재촉했던 과정이다.
신좌익운동 세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성장했던 장애인운동이었던지라, 정치조직들의 분파주의와 같은 부정적 영향도 그대로 받게 되었다. 1971년 혁말파에 의해 중핵파 두 명이 학살되는 믿기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의 좌익운동은 극단적 내부갈등으로 치달으면서 건강성을 상실해간다. 장애인운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장애인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핵파가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대중운동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 했던 것이다.
정반대의 원인도 작용했다. 푸른잔디회는 오래가지 않아 “비장애인 및 다른 장애인과의 연대가 뇌성마비자의 단결을 약화시킨다”며 전국장애인해방운동연락회의에서 탈퇴를 하게 된다. 지도자가 죽고 나서부터 그들의 독특한 사상은 오히려 자신들을 가로막는 족쇄가 된 것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고, 조각난 기록과 한참 지난 후의 회고로 살펴보고, 나름대로 상황을 연상하면서 공부했던 일본의 장애인운동이지만, 우리를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었다.
일본에서 대중운동으로서 장애인운동은 전체 사회변혁운동, 특히 좌익세력에 고무 받아 촉발되었고, 중증장애인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면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그들은 장애인의 해방이 사회변혁과 떨어질 수 없음을 정확히 인식했고, 사회변혁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들은 자신의 운동을 장애인해방운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본의 장애인운동은 다른 대중운동처럼 정치조직들의 천박한 분파주의에 휘둘리고, 내용성 없는 과격함에 휘둘리고, 또 유치한 당사자주의에 휘둘리면서, 새로운 운동의 내용적 실천적 전망을 만들지 못한 채 쇠퇴해갔다. 20년, 30년 단체의 내용과 우두머리는 그대로이며, 대중운동이란 개념조차 없어지고 있다.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비슷한 부분도 많고 다른 부분도 많다. 우리의 좌익은 아직 충분히 장애인운동에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의 대중운동은 정파운동보다 강한 힘과 건강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천박한 당사자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장애인당사자가 운동의 중심에 서고 있다. 우리의 실천은 치열하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망은 아직 불투명하다. 그래서 학습하고 또 조직하고 또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