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온천, 한하운의 금강산 온천
서 호 련
으스스한 날씨엔 온천장에 한번 갔다 오면 보약 한제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지난 설 무렵 우리 내외는 오랜만에 이곳 산동온천을 찾았다. 산동온천은 남원과 전라남도 구례의 경계지역에 있는, 우리 집에서 차로 3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다. 지리산 서쪽 노고단 밑 산수유 마을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온천장이다.
지리산 온천은 무엇보다도 온천장 널따란 정원에 놓인 기기묘묘하고 거대한 바윗돌들이 걸작이다. 그보다 유명한 것은 온천수가 게르마늄이 함유된 약천수라는 점이다. 이곳은 수백 년 전부터 신비한 약수가 솟아났던 유명한 약수터이고, 이곳에 와서 병을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프랑스 피레네산맥이 가까운 루르드에 기적의 샘물이 있어 이 약수를 마시고 이 물로 목욕을 한 사람들은 기적같이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리용대학의 한 교수가 그 물을 분석한 결과 그 안에 게르마늄이 함유 되었다는 것이다.
고농도 산소를 함유한 게르마늄은 체내에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인터페론을 증가시켜 항암과 암 치료에 특효하고 혈액중의 노폐물과 콜레스톨을 배출시켜 피를 깨끗 하게 하여 피로회복과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정력증강에도 좋다는 것이고 게르마늄 물을 마시거나 목욕함으로서 간암 폐암등 각종 암 및 당뇨병 고혈압 아토피등 각종 피부병에 특효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산동의 약수는 게르마늄의 산소활성화 작용으로 6개월을 보관해도 물이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지리산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병이 완치되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직접 들은 적은 없어도 이 산동약수를 떠다가 1-2개월 집 욕실에 놓아두어도 변질이 되거나 파란 이끼 같은 것이 끼지 아니하였다. 좋은 물만 마셔도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던 우리도 물 값도 비싸지 아니하고 주문만 하면 다음날 택배로 페트병 박스를 배달해 주기 때문에 몇 개월째 그곳 물을 마시는 중이다.
온천하면 단연 백두산 온천이다. 중국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92년 늦여름에 백두산을 찾은 적이 있었다. 천지 아래쪽 산기슭에서 온천수가 그대로 분출하여 계곡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곳엔 유황냄새가 진동했고, 적갈색 침전물이 물줄기를 따라 널리 깔려 있었다. 거기에서는 뜨겁게 흐르는 물속에 달걀을 삶아 팔고 있었다. 노천물의 온도가 80-90도나 되니 그대로 삶아지는 것이다. 그 아래쪽에 온천장이 있어 들어갔다. 지붕은 슬레이트로 덮여 있었고, 그 안은 시멘트 블록 벽으로 만들어 논 미꾸라지 양식장 같은 탕에 물을 가두어 놓은 원시적인 온천탕이었지만 유황성분이 풍부해서 특히 피부병에 특효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수온이 높아서 계곡의 찬물을 섞어 온도를 맞추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처럼 높은 온도의 온천이 나오지 아니하기 때문에 부러운 마음으로 몸을 담그고 나왔다. 나오면서 ‘야, 나도 백두산 온천에서 목욕하고 나왔다’고 큰소리로 외친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뜨거운 지리산온천탕 안에서 눈을 감고 이곳저곳 온천장엘 갔던 일을 회상하는 중 어젯밤에 읽었던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나의 슬픈 반생기’의 여운이 여전히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번 금강산 온정리 온천에 가서 요양을 하였다고 했다.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서, 1932년 보통학교 졸업과 동시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해 수의축산을 공부했다.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25세 때인 1943년 북경대학 농학과를 마치고 북경대학원에서 몇 년간 농축학을 연구하다가 귀국하여 1944년 함경남도 도청에서 공무원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간에 심한 나병을 앓으면서 초인적인 투병을 하고 있었다.
이리농림학교는 함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에서 유독 그만이 합격했다고 한다. 그는 3학년 때부터 헤세. 발잨. 지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가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기 전 해인 1931년 5학년 봄부터였다. 몸이 무겁고 붓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한 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했지만 그것이 나병 발병의 시초였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리농림학교 5학년 졸업반이던 1936년 봄, 마침내 경성제대 부속병원은 그에게 나병환자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당시로서는 부러울 것이 없는 그에게 나병이라는 선고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후에 그 당시의 심경을 ‘만사는 무지개가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다.’고 그의 시 ‘무지개’에서 읊었다.
나병 확정 진단을 받고 난 뒤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신계사 근처의 여관에 방을 하나 얻고는 날마다 온정리의 온천에 다니며 온천욕으로 병을 치료해 보려 했던 것이다. 금강산 요양과 치료로 병세는 호전되었다. 18세 미소년이었던 하운에게는 R이라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누이동생의 친구였다. 그녀는 하운이 한마디 말도 없이 잠적하자 여름방학 때 금강산 신계사로 찾아갔다. 학교에 잘 다니고 있던 남자친구가 느닷없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니 당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며칠 후 하운은 집선봉 기슭 우거진 숲가를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마침내 자신이 나병에 걸렸음을 고백했다. 천형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잊어달라고 했다. R은 하운의 말을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꽃가지의 잎사귀를 뜯어서 물에 띄워 보냈다. 비감에 젖은 하운의 말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R이 말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저는 슬퍼져요. 저는 하운 씨를 일생의 남편으로서 언약한 이상 하운 씨가 불운에 처했다고 버리고 가는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닙니다.”
하운은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성계고등학교로 진학했다. R은 하운을 따라 일본에 갔고 일본에 들어가서도 돌아다니며 약을 구해 주었다. 하지만 이국에서의 불규칙적인 생활은 병의 재발을 부추겨 3학년 때 급히 귀국하였다. 하운은 다시 금강산 온정리에 들어가 몇 달 온천욕으로 정양한 뒤 이번에는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북경대학에 입학해 비로소 시(詩)에 눈을 떴다. 하운의 중국생활은 학업과 투병이 아니라 술과 문학의 나날이었다. 심신이 피폐해지자 병세가 다시 심해져 고국으로 돌아 왔다.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온천욕으로 몸을 추스른 하운은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 공무원이 되어 도내 장진군으로, 다시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했다. 이때가 1945년, 또다시 병이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함흥 본가로 가서 치료하나 효과를 못 보았다. 이때 부모가 몹쓸 병에 시달리는 장남이 안쓰러워 태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운을 쓰게 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남은 생을 문학을 위해 바치기로 하고 시작에 몰두했단다.
1946년 하운은 함흥학생 데모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나병환자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하운의 남동생이 김일성 암살을 모의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가 거사직전에 체포되었다. 이때 R도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음으로 6‧25발발 이전에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하운은 말했다.
(1948년 하운은 공산치하를 피하여 단독 월남하여 문둥병환자로서의 유랑생활을 하면서 보리피리를 썼고, 월북 작가 이병철을 만나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시 <전라도 가는 길-소록도로 가는 길>외 12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보리피리
봄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 산하(畿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전라도길
천안삼거리를 지나도 /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 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때 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일러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이시는 6.25 동란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 시인의 12편의 작품 중 하나로서 이 시의 부제는 ‘소록도 가는 길’이다. 1949년 5월 이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정음사에서 발간되었는데, 그가 나병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북에 두고 온 R이란 여인이 한센병 환자인 자신을 사랑해 준 그 사랑의 힘으로 절망하지 않았다는 한하운. 그는 죽는 날까지 전라도 길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살아간 시인이다. 1975년 부평부 십정동 자택에서 지병인 간경화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지리산 온천장을 나오면서도 금강산에서 온천욕을 하면서 자신의 병을 나으려고 몸부림쳤던 한하운을 생각하니 가슴에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의 일을 어떻게 알랴. 2008년 나는 은퇴기념으로 교회의 형제들과 함께 금강산엘 갔었다. 깨끗이 잘 지어 놓은 그곳 온천장에서 온천욕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곳이 한하운이 몸을 담갔던 그 유명한 온정리 온천장이었다. 그때 한하운의 슬픈 반생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때도 온정리 온천에서 오열을 했을 것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온정리 온천은 신라시대에 발견되었고 조선왕조실록(세조11)에도 당시의 왕족이나 관리들이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오래된 온천이다.
* <그리운 한하운> 서 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한하운시인을 좋아했는데 ,글을 읽으며 그분이 그리워졌습니다. 온천탕에도 가고 싶네요. 건강하세요. 박석무 올림.
* 서 주교님!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서 60년의 세월이 흘렀
습니다. 그분의 이력을 모두 잊고 있었는데, 상세한 내용을 다시 확인 gkf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2년 1월 25일 박 환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