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깜깜한 밤이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어느 산골짜기 마을. 까무룩 졸던 중에 깨어 옷깃을 여몄던 것을 보면, 쌀쌀한 늦가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살았던 집을 근거로 추적해보면 일고여덟 살쯤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마을에는 어떤 이야기가 돌았다.
“영화를 보여주러 사람들이 외지에서 오니까, 미영이네 앞 마당으로 가면 된대.”
나와 동갑인 미영이네는 큰마을의 도로변에 인접한 꼭대기 집이었다. 아이 걸음으로 오르내리기에는 약간 버거운 비탈길에 위치한 집이었다.
미영이네 너른 마당에는 큼지막한 흰 천이 걸려 있었다. 마당에는 벌써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앉아 있었다. 예수에 관한 영화를 틀어줄 것이라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서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영화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어른들 틈에 끼어 않았다. 언제부터 졸았는지 모르겠다. 관중들의 침울한 분위기가 잠든 나를 깨웠다. 추웠다.
모진 고문을 당해 피범벅이 되신 가시 면류관의 예수께서 스크린에 영사되고 있었다. 흐흐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확 달아났다. 충격적인 영상이 골수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주하는 가족을 따라서 서울 사람이 되었다.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교회 앞에 살았지만, 교회에 가지 않았다. 잊힌 분이었기 때문이다.
2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고등학생이었다. 매일같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무기력한 나날들 속에서, 학생들은 ‘공부나’ 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집에서 들은 정치사회적인 소식들을 학교로 가져와 나누기에 바빴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지역 문제 때문에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가 뉴스에서 본 이야기를 재탕하는 수준이었다.
“도대체 지금 이 시국에 예수님은 뭐하고 계시는 건가요?”
미션스쿨이라서 1주일에 1시간씩 성경 공부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성경 시간에 선교부장인 친구가 목사께 질문했다. 당돌한 질문이 내 머리를 한 대 꽝 내리쳤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예수님은 이런 시국에 개입할 수 있는 분이구나. 신문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며칠 후, 나는 시청 광장에 나갔다. 대학생들 시위대 사이에 앉아 중간고사를 치르기 위해 시험공부를 했다.
교정에서 나무 구슬로 엮은 작은 십자가를 주웠다. 학교 근처 프란치스코 회관에 있던 성바오로서원에 가끔 들렀고, 그러다 그 옆 성당에도 들어가 보았다. 산골의 공소와는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거룩함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자랐기 때문이었겠지만.
그해 연말께 친구가 말했다. “얘, 우리 같이 명동성당 자정미사에 가자!” 종교가 없는 아이였다. 실행하지 못한 채 나의 소망으로만 남은 것은 이 친구가 사찰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3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을 맡으며 조금씩 민주적 진보를 일구고 있었다. 친구들의 시집들 중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 ‘서울의 예수’를 보았다.
4
직장생활을 하던 중 인생의 방향이 총체적으로 뒤바뀌는 시간을 겪게 되었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든 몸은 아팠고, 정신은 심약했다. 이 몸을 낳아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고칠 수 있는 병의원에 당신 딸을 데리고 가는 일뿐. 마음까지 보듬어주지는 못했다. 그때 신부들께서 마음을 가슴으로 다독여주셨다. 천주교 신자인 대학 시절의 선생님께서 새벽 별 같은 말씀을 아픈 마음에 불어넣으셨다.
5
작년 여름 무렵, 외할머니의 1주기를 맞아 어머니와 산소에 다녀올 때였다. 라디오에서 방송 미사가 들렸다. 불자인 어머니가 방송 미사를 듣다가 말씀하셨다.
“포도주는 성혈이고, 밀가루는 성체야.”
초등학교 입학하시기 전에 교리 교육을 받았는데, 외워야 할 것들을 외우지 않아서, 천주교 신자가 되지 못했다고 하셨다.
“네 외할머니께서 불자이시니…. 그래서 중단했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엄마조차도 타인이 되고 만다. 엄마와 함께 있어도, 엄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저 문장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 마음을 엄마도 모르는 때가 많으므로 신은 예수를 보내셨다. 예수님은 내가 당신을 알든 모르든 늘 ’나‘와 함께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글 김선래 미카엘라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의 문화교양팀장을 끝으로 기자 생활을 접었다. 대학 출판부에서 학술서를 만들던 중 기자 때의 인연으로 성바오로수도회 황인수 신부를 알게 되어, 예수회 서명원 S.J. 신부의 일을 돕게 되었다. 지금 서명원 신부의 연구원으로 일한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 5월호 <경향잡지>가 발행되기도 전에 원고료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자가 발간된 후 원고료를 지급하는데, 이런 경우는 <경향잡지>가 유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고료는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접한 흑산도의 공소,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 개축 모금 운동 등에 기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