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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 Ⅱ』
3. 고려 후기의 한시
차우인견증시운(次友人見贈詩韻)
임춘(林椿)
十載崎嶇面撲埃 얼굴은 먼저지투성이 10년 간 기구한 신세
長遭造物小兒猜 조물주 애녀석이 나를 늘 시기했네.
問津路遠槎難到 나룻길은 멀어 뗏목으로 이르기 어렵고
燒藥功遲鼎不開 선약(仙藥)은 언제 익으리, 솥을 상기 못 열었네.
科第未消羅隱恨 과거는 아직도 나은(羅隱)의 한(恨)을 없애지 못했고
離騷空寄屈平哀 이소(離騷)에 헛되이 굴원(屈原)의 설움을 부쳤것다.
襄陽自是無知己 양양(襄陽)이 제 워낙 지기(知己)가 없는 게지
明主何曾棄不才 명주(明主)가 언제 일찍이 재주 없다 버리셨는가.
―『西河先生文集(서하선생문집)』
세상을 조롱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던 임춘(林椿, 1149년?∼1182년?)은 시를 창작할 때 용사(用事)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옛것을 따르면서 수사의 묘미를 살렸다.
임춘(林椿)은 용사문학(用事文學)을 본격적으로 시도, 이 방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成功)했다. 중국의 문학 및 역사의 많은 부분을 원용(援用), 우리 문학의 제재로 삼으면서 이른바 ‘부착지흔(斧鑿之痕)’이 없는 글을 만들고자 각고(刻苦)의 노력(努力)을 기울였던 것이다.
⎯윤용식, 『서하 임춘문학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2, p. 183.
용사문학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임춘은 고려 정중부(鄭仲夫)의 무신집권기에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조통(趙通)·황보 항(皇甫沆)·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 일곱 문인이 결성한 시회(詩會)인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핵심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임춘이 고려문학사에서 일정 부분 선구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서거정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드러난다.
고려 광종과 현종 이후에 문사가 무리지어 배출되어 부(詞賦)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등의 문체로 글을 지었다. 그 글의 문체가 모두 화려하고 섬세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점은 후세 사람들이 미칠 바가 못되었다. 다만 문사(文辭)·의론(議論) 등에 대해서는 논의할 만한 점이 많다. (---중략--) 고려 광종 때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하여 사부(詞賦)로써 인재를 선발했다. 예종(睿宗)은 문장과 시를 좋아하여 매일 문사들을 불러 놓고 한쪽에서 시문을 읊고 다른 쪽에서 화답하였다. 그 후 인종과 명종 때도 시문을 짓고 읊는 풍치를 숭상하였다. 충렬왕도 시문에 능한 신하들과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으며 읊어 『용루집(龍樓集)』을 엮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부(詞賦)를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서 아름다운 문구를 지어내기에 힘썼다. 이를테면 문열공 박인량, 문성공 김연, 문열공 김부식, 간의 정지상, 대간 이인로, 문순공 이규보, 내한 김극기, 간의 김군수, 문안공 유승단, 정숙공 김인경, 보궐 진화, 상상 임춘, 문청공 최자, 영헌공 김지대, 문정공 김구 등이 남보다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高麗光顯以後, 文士輩出, 詞賦四六, 穠纖富麗, 非後人所及, 但文辭議論, 多有可議者. (---中略--) 高麗光宗始設科, 用詞賦, 睿宗喜文雅, 日會文士唱和, 繼而仁明亦尙儒雅, 忠烈與詞臣唱酬, 有龍樓集, 有是俗尙詞賦務爲抽對, 如朴文烈寅亮, 金文成緣, 金文烈富軾, 鄭諫議知常, 李大諫仁老, 李文順奎報, 金內翰克己, 金諫議君綏, 兪 文安升旦, 金貞肅仁鏡, 陣補闕澕, 林上庠椿, 崔文淸滋, 金英憲之岱, 金文貞坵, 尤其傑然者也.
⎯『東人詩話 下(동인시화 하』
칠언율시인 「차우인견증시운(次友人見贈詩韻)」에 나온 용사는 나은(羅隱: 당나라 말기의 시인으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함)과 이소(離騷: 굴원이 지은 초사 한편, 이(離)는 만남, 소(騷)는 근심이니 근심을 만나 지은 글이란 뜻), 굴평(屈平: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을 말함. 평은 그의 자이다), 양양(襄陽: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 양양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임), 명주(明主: 당나라 현종,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였으나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안록산의 난을 만나 피난 가기도 한 황제) 등이다. 「차우인견증시운(次友人見贈詩韻)」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던 임춘의 시풍을 엿볼 수 있다.
무신란(武臣亂)을 겪은 이후 문인들은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던 귀족적 문풍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려는 기풍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했던 임춘은 정중부의 난에 온 가문이 화를 입었으나 임춘만 겨우 화를 면했다. 자신의 불우하였던 생애를 즉물적 기법으로 구사하여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냈던 임춘은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했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공방전」·「국순전」 같은 가전체 작품을 창작했던 그의 시는 산문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그는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구성되어 있고, 수사적으로 미감(美感)을 느낄 수 있는 변려문(駢儷文)을 많이 남겼으나, 한유(韓愈, 768년~824년)가 주장했던 고문운동에 뜻을 같이 하여 뛰어난 당시(唐詩)도 창작했다.
임춘이 죽은 뒤 이인로에 의해 유고집 『서하선생집』 6권이 편찬되었다. 최해(崔瀣,1287년∼1340년)가 비점(批點)을 찍고, 조운흘(趙云仡, 1332년∼1404년)이 편집한 시선집인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과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이 편찬한 『동문선』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고원역(高原驛)
김극기
百歲浮生逼五旬 덧없는 백 세 인생 어느덧 오십 년이 흘러
奇區世路少通津 기구한 세상길에 통하는 나루 적구나.
三年去國成何事 삼 년 동안 국도(國都)를 떠나 무슨 일을 이루었나
萬里歸家只此身 만 리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다만 이 한 몸뿐이로세.
林鳥有情啼向客 숲속의 새는 정답게 나그네를 향해 지저귀는구나
野花無語笑留人 들꽃은 말없이 웃으며 나의 발길을 붙드네.
詩魔觸處來相惱 시마(詩魔)가 가는 곳마다 따라 와 성화대니
不待窮愁已苦辛 곤궁한 시름 말고도 벌써 괴로운 일이로세.
―『동문선』, 권13
「고원역(高原驛)」은 나그네로 떠돌던 시인이 지금의 함경남도 고원군에 있던 역원인 고원역에서 묵으며 지은 칠언율시이다. 김극기(金克己, 출생 미상∼사망 미상)는 북방(北方)에서 낮은 벼슬을 했다. 제1∼4구에서는 오십의 나이가 들도록 기구한 삶을 살아온 시인은 세상사를 원망한다. 3년 동안 국도(國都)를 떠나 변방을 떠돌았지만 이룬 일은 아무것도 없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고 다만 시인 혼자뿐이었다. 제5·6구는 대구로서 숲속의 새와 들꽃을 의인화하여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무도 시인을 반겨주지 않지만, 그를 보고 정답게 지저귀는 숲속의 새, 말없이 웃으며 시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들꽃과 대화를 나누며 시인은 현실의 고뇌를 풀어내려고 한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초라한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 또한 곤궁한 시름과 더불어 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고려후기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던 시인인 김극기의 시가와 산문 등을 수록한 시문집인 『김거사집(金居士集)』은 135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으나 일실(逸失)되었다. 유승단(俞升旦, 1168년∼1232년)은 「김거사집서(金居士集序)」에서 김극기를. “한림원에 있었던 김선생은 당대에 시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그가 바로 이와 같은 인물이니, 진인들 중에서도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翰苑金先生, 以詩名于時, 其類是歟, 眞人中鸞鳳也)”(『동문선』권83. 「서(序)」)라고 평하면서, 그가 세력가들에게 빌붙지 않고 고고하게 지낸 것을 칭찬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김극기의 문집은 135권 또는 15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동문선(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다수의 시가 실려 있다.
숙향촌(宿鄕村)
― 향촌에서 묵다
김극기
雲行四五里 구름 길로 4,5리 걸어가다가
漸下蒼山根 차츰 푸른 산 아래로 내려가는데
烏鳶忽驚起 까마귀와 솔개 문득 놀라 날아오르자
始見桑柘村 비로소 뽕나무 선 마을이 보이네.
村婦理蓬鬢 시골 아낙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다가
出開林下門 숲 아래 사립문을 열어주네.
靑苔滿古巷 푸른 이끼는 오래된 길에 가득하고
綠稻侵頹垣 푸른 벼는 무너진 담장 위를 넘어드네.
茅簷坐未久 초가 처마 아래 앉은 지 오래지 않아
落日低瓊盆 지는 해가 금쟁반에 나직하네.
伐薪忽照夜 섶나무 베어 홀연 밤을 밝히고
魚蟹腥盤飱 생선과 게 비린 음식을 저녁밥상에 올리네.
耕夫各入室 농부들 각기 방 안에 들어가자
四壁農談喧 사방이 농사 이야기로 시끌벅적해지네.
勃磎作魚貫 떠드는 소리가 물고기 꿰듯 이어지고
咿喔紛鳥言 웃음소리는 새소리처럼 어지럽네.
我時耿不寐 나는 시름으로 잠 이루지 못하고
欹枕臨西軒 서쪽 난간에 나가 베개 베고 누웠네.
露冷螢火濕 찬 이슬에 반딧불이 젖고
寒螀噪空園 때늦은 귀뚜라미 우는 소리 빈 동산에 시끄럽네.
悲吟臥待曙 괴로이 읊조리며 새벽을 기다리니
碧海含朝暾 푸른 바다는 아침 해를 머금어 붉네.
―『동문선(東文選)』 권(卷)4
김극기는 용만(龍灣: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는 등 잠시 벼슬한 적이 있으나 불우하게 지내면서, 농민과 가까운 위치에서 농민들의 모습과 농촌 생활을 관념적인 수법이 아닌 사실적인 수법으로 농민생활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묘사해 농민시의 개척자가 되었다. 시적화자가 공간적 배경인 ‘뽕나무 선 마을’에 가서 하룻밤을 묵으며 인정이 넘치는 농가의 정경과 온화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농민들의 모습을 농민과 시적화자의 대비적 구조로 하여 묘사한「숙향촌(宿鄕村)」은 오언고시(五言古詩)로, 『동문선』 권4에 실려 있다.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詩想)을 전개하고 있는「숙향촌」에서 시적화자는 구름길을 4,5리 걷다가, 푸른 산 아래로 차츰 내려가서, 까마귀·솔개가 놀라 날아오르는 데서 비로소 뽕나무 선 마을이 보인다고 하는 것으로 서두를 삼았다. 섶나무 베어 방을 밝히고, 생선과 게 비린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농민들이 농사 이야기로 시끌벅적해지고, 웃음소리는 새소리처럼 어지럽다. 시적화자는 잠을 이루지 못해, 밖으로 나가 서쪽 난간에 나가 베개 베고 누웠다가 밤을 지샌다고 하였다. 이튿날이면 떠나야 하는 시적화자는 고독감을 느꼈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깊은 고민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극암(戟岩)
-창바위
오세재
北嶺巉巉石 북쪽 산마루 우뚝 솟은 저 바위를
邦人號戟巖 사람들은 모두 창바위라 부른다네.
迥摏乘鶴晉 학을 탄 왕자 진(晉)을 들이받을 듯이 솟았고
高刺上天咸 하늘에 오르는 무함(巫咸)을 찌를 듯이 높다네.
揉柄電爲火 자루를 다듬는데는 번개가 불이 되고
洗鋒霜是監 창끝을 씻는데는 서리가 소금이 되네.
何當作兵器 어느 때 이를 병기(兵器)로 만들어서
敗楚亦亡凡 초(楚)나라도 패하게 하고, 또 범(凡)나라도 망하게 할까.
-『동문선(東文選)』, 권(卷)9,「오언율시(五言律詩)」,
한시를 짓기가 매우 힘든 ‘강(强)’ 자(字)에 딸린 운(韻)인 강운(强韻)을 응구첩대(應口輒對)한 「극암(戟岩)」은 경기도 개성(開城) 북쪽 31리에 있는 날카로운 창처럼 생긴 삐쭉한 바위인 창바위(戟巖)를 소재로 하여 쓴 시다. “자루를 다듬는데는 번개가 불이 되고(揉柄電爲火)”의 구절에서 ‘다듬다’와 ‘불’을 연결시켜 시상을 전개시키고, “창끝을 씻는데는 서리가 소금이 되네(洗鋒霜是監)”의 구절에서 ‘씻는다’와 ‘소금(鹽)’을 연결시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한편「극암(戟岩)」에는 용사(用事)가 적절하게 구사되어 있다. ‘진(晉)’은 주(周) 영왕(靈王)의 태자로 피리를 잘 불었으며,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가 있다. 그리고 ‘무함(巫咸)’ 무당으로서 신인(神人)의 경지인 신무(神巫)에 오른 사람이다.『열자(列子)』「황제(黃帝)」에 “제(齊)나라에서 정(鄭)나라로 거처를 옮겨 온 신무 계함이 인간의 사생ㆍ존망ㆍ화복ㆍ수요 등의 운명을 마치 귀신처럼 잘 알아맞혔다(有神巫自齊來處於鄭, 命曰季咸, 知人死生 存亡 禍福 壽夭, 期以歲 月 旬 日 如神).”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해 ‘무함(巫咸)’을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때에 신무(神巫)인 계함(季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극암(戟岩)」을 들은 몽골 사신이 탄복하여 마지 않았다는 기록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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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양(濮陽) 오세재 덕전(吳世才德全)은 시를 굳세고 격이 높게 지었다. 그가 지은 시가 인구에 회자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강운(强韻)을 달아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듯한 시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가 북산(北山)에 올라 극암(戟巖)을 시제(詩題)로 해서 시를 지으려고 할 때 사람을 시켜서 운자를 내게 했다. 그 사람은 일부러 시를 짓기 어려운 운자(韻字)를 냈다. 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북쪽 산마루 우뚝 솟은 저 바위를 ---(중략)---초(楚)나라도 패하게 하고, 또 범(凡)나라도 망하게 할까.] 그 뒤에 북국(몽골)사신이 왔다. 그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 시를 듣고 여러 번 칭찬하고 감탄해, “이 사람이 생존해 있는가? 지금 무슨 관직에 있는가? 혹시 만나 볼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듣고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지금 제고학사(制誥學士)의 직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하였다. 그들이 권변(權變)에 어두웠음이 이와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吳德全爲詩, 遒邁勁俊, 其詩之膾炙人口者, 不爲不多, 然未見能押強韻, 儼若天成者, 及於北山欲題戟巖, 則使人占韻, 其人故以險韻占之, 先生題曰, 北嶺巉巉石, 邦人號戟巖, 迥摏乘鶴晉, 高刺上天咸, 揉柄電爲火, 洗鋒霜是監, 何當作兵器, 敗楚亦亡凡, 其後有北朝使, 能詩人也, 聞此詩, 再三歎美, 問是人在否, 令作何官, 儻可見之耶, 我國人茫然無以對, 予聞之曰, 何不道今方爲制誥學士之任耶, 其昧權如此, 可歎哉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全集)』, 권(卷) 21, 「설서(說序)」, ‘오덕전의 극암시 끝에 발함(吳德全戟巖詩跋尾)’
당시 고려의 문인들이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의 시문집인 『동파집(東坡集)』에 매료되어 고려의 문단에서는 소식(蘇軾)의 시문풍이 유행하고 있었으나 오세재는 두보와 한유의 시문체(詩文體)를 본받는 등 당나라의 시문풍(詩文風)에 경도되어 현실비판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오학린(吳學麟)의 손자로 형제인 오세공(吳世功)·오세문(吳世文)과 함께 모두 한림학사로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집안이 몰락하여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이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도 이어 갈 수 없을(托錐之地, 簞瓢不繼)”(이인로, 『파한집』) 정도로 궁색하게 되었던 오세재는 명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등용되지는 못했다.
병목(病目)
―병든 눈
오세재
老與病相隨 늙음과 질병이 같이 따르니
窮年一布衣 해가 다하도록 포의(布衣)의 신세가 되도다.
玄花多掩映 검은 꽃은 밝음을 가리기 일쑤이고
紫石少光輝 눈동자에는 영롱한 빛이 적어졌노라.
怯照燈前字 등불에 비친 글자 보기 겁나고
羞承雪後暉 눈(雪) 온 뒤에 빛을 대하기 부끄럽도다.
後看金牓罷 기다렸다 과거 발표 보고 난 뒤에
閉目學忘機 눈 감고 들어앉아 세상 일 잊으리라.
―이인로(李仁老), 『파한집(破閑集)』
이인로(李仁老)ㆍ오세재(吳世才)ㆍ임춘(林春)ㆍ조통(趙通)ㆍ황보항(黃甫沆)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등이 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노자·장자의 무위(無爲) 사상을 숭상해서 죽림에 모여 청담(淸談)을 나누던 일곱 선비와 산도(山濤)·왕융(王戎)·유영(劉伶)·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嵇康)·상수(向秀) 등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사모하여 술과 시를 즐기던 일곱 사람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한 사람이었던 오세재(吳世才, 1133년∼1187년)는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시와 술로 그 자신의 처지를 위로했다. 그는 유학 경전에 능통했고 시문(詩文)은 한유(韓愈)·두보(杜甫)의 문체를 본받았으며 이규보와 가깝게 교유했다.
그[오세재]의 시문학(詩文學)이 당시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던 동파(東坡)의 시문풍(時文風)보다도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그것에 경도(傾倒)되었던 사실에서 그의 문학이 복고주의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통하여 부조리한 시대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시대의식을 충실히 반영하였다고 하겠다.
―박성규, 『고려후기 사대부문학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3, p. 42.
관직에 나가기를 끊임없이 추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한탄을 읊고 있는 「병목(病目)」에서 오세재는 그의 딱한 처지를 묘사하고 있다. 눈 병이 나서 제대로 볼 수 없으니, 글자나 빛을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은 신체의 병이면서 또한 정신의 병이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17)라고 진단을 내린 조동일은, 외가인 경주에 머물면서 가난에 시달리던 오세재가 죽자,「오선생덕전애사(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애통한 마음을 나타낸 이규보가 오세재와 같은 길을 되풀이하여 걷고자 한 것은 아니다(조동일, 앞의 책, p.18)라고 말했다. 이인로가 작품활동을 하던 고려 사회는 무신(武臣)들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의민(李義旼)이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앉아서 일을 의논하다가 의견이 충돌하여, 주먹을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네가 어떤 공이 있어 지위가 나보다 높으냐?”라고 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중서성[掖垣]에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있고, 추밀원(樞密院)에는 손석(孫碩)과 김영존(金永存)이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문인은 시를 지어서 조소했다.
吾畏李與杜 나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무섭더라
屹然眞宰輔 그 당당한 모습이 진짜 재상 같거든.
黃閣三四年 중서성[黃閣]에 앉은지 서너 해에
拳風一萬古 주먹 바람은 만 번은 더 불었네.
後義旼與景升坐省, 議事相失, 奮拳擊柱曰, 爾有何功, 位在吾上, 時人語曰, 掖垣李·杜, 密院孫·金, 或作詩, 嘲之曰,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고려사(高麗史)』, 권128, 「열전」41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 동안 무인들이 정권을 잡고 고려 사회를 뒤흔들었다.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이인로는 삭발하고 중이 되어 피신하였다가 관계(官界)로 입문하여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고려사』 「열전」)라는 평을 받았던 이인로는 관계에서는 영달하지는 못했다.
야보(野步)
―들판을 거닐며
이인로
十里煙村際碧蕪 십 리 연기 낀 마을은 푸른 들에 닿았는데
獨遊仍佩紫微壺 혼자 노닐다 이내 자미의 술병(紫微壺)을 찼네.
雲拖雨脚斜陽外 구름이 사양 밖으로 빗발을 끌어내어
掩却前山半有無 앞 산을 가리워 놓으니 반쯤 보일 듯 말 듯하네.
郭外人家路盡蕪 성 밖의 인가 늘어선 거리에 모두 풀이 났는데
隔林啼鳥勸提壺 숲 너머 우는 새는 술병 들어 권하네.
未成數句前山暮 몇 귀의 시를 이룩하기 전에 앞산이 저무니
老覺詩情澁欲無 시정(詩情)이 무디어 없어지려 하는 걸 늙어서야 알겠네.
―『동문선(東文選)』, 권20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용사(用事)를 소중하게 여겼던” 이인로(李仁老, 1152년∼1220년)는 “용사를 얼마나 능란하게 구사하는가는 글 쓰는 사람이 능력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척도라고 생각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21).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년~427년)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소식(蘇軾)이 본떠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를 창작했다. 이인로는 소식(蘇軾)의 전례를 따라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를 창작했다. 칠언절구의 한시인 「야보(野步)」에서도 “혼자 노닐다 이내 자미의 술병을 찼네(獨遊仍佩紫微壺).”라는 구절에서 ‘ 자미의 술병(紫微壺)’이라는 용사가 구사되었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 803년~852년)은 자(子)는 목지(牧之)이고, 호는 번천(樊川)이다. 두목지(杜牧之)를 두자미(杜紫微)라고 하는데, 그의 시에 술병을 가지고 논다(携壺)라는 말이 있다. 이인로는 고전적인 표현의 전례를 따르면서 고전적인 규범과 가치를 재현하면서 시를 창작할 때 가장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특히 용사(用事)를 많이 구사했던 것이다. 「야보(野步)」는 저녁때 서쪽으로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시적화자가 들판을 거닐며 시상을 전개시켜 간다. 구름이 사양 밖으로 빗발을 끌어내고(拖雨脚斜陽外), 성 밖의 인가 늘어선 거리에 모두 풀이 났는데(郭外人家路盡蕪)도 시적화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시적화자는 시정(詩情)이 무디어 없어지려 하는 걸 늙어서야 알게 되었다(老覺詩情澁欲無). 노년기에 들어선 이인로가 바라보는 세상은 매우 어지러웠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인로시(仁老詩)’라고 일컬어질 만큼 시(詩)로 당대를 주름잡았던 그 자신은 늙어서 시도 질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다.
산거(山居)
이인로
春去花猶在 봄은 지나갔으나, 꽃은 여전히 피어 있고
天晴谷自陰 날이 개었는데 골짜기는 스스로 그늘지네.
杜鵑啼白晝 두견새가 대낮에 울어대니
始覺卜幽深 비로소 내 사는 곳이 깊은 골임을 알겠네.
―『동문선(東文選)』, 권19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하고” 탈속의 경지를 “한정의 경지, 신선의 경지, 자연의 세계를 통하여 이루었던”(장홍재, 「이인로」, 황패강 외 공편, 『한국문학작가론』1, 집문당, 2000, p.97) 이인로의 문학세계는 「산거(山居)」에 잘 나타나 있다. ‘유거(幽居)’라는 제명으로도 알려져 있는 「산거」는 ‘거(去)-재(在)’, ’청(晴)―음(陰)‘, ’백주(白晝)-유심(幽深)’ 등의 대조적인 어휘를 구사해 산골짜기에 유거(幽居)하는 마음을 묘사하고 있는 오언절구이다. 「소상팔경(瀟湘八景)」과 함께 이인로(李仁老)의 대표작인 「산거」는 자연에 은거하고 싶어하는 시적화자의 담담한 서정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시벽(詩癖)
이규보
年已涉縱心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位亦登台司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
始可放雕篆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胡爲不能辭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
朝吟類蜻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暮嘯如鳶鴟 저녁에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
無奈有魔者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夙夜潛相隨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네.
一着不暫捨 한번 몸에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使我至於斯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
日日剝心肝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어
汁出幾篇詩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고 있네.
滋膏與脂液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不復留膚肌 살조차 남아 있지 않네 .
骨立苦吟哦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此狀良可嗤 이 모습 참으로 가소롭구나.
亦無驚人語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足爲千載貽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
撫掌自大笑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 웃음 그치고 다시 읊조려 보네.
生死必由是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此病醫難醫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 『동국이상국집』
시로 쓴 시론(詩論)이라고 볼 수 있는 「시벽(詩癖)」에서 이규보는 시 창작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벽(詩癖)은 시 창작을 좋아하는 몸에 박힌 좋지 않은 버릇이고, 시마(詩魔)는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마력을 말한다. 이규보의 ‘시벽(詩癖)’이 잘 드러나 있는 시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位亦登台司)”에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문명을 떨치고 있는 시적화자는 시 창작하는 일을 그만두어도 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고,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에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朝吟類蜻蟀, 暮嘯如鳶鴟)”에서 한시도 그치지 않는 시 창작 활동을 비유하고 있다. “한번 몸에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에서 시적 화자는 창작에 대한 집착이 일상화 되어서 시 창작하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마음을 깍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고 있네(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시 창작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조차 남아 있지 않네(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에서 시 창작의 괴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규보의 「시벽」에 대해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슨 완벽한 표현을 하고자 해서 고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를 쓰기 어렵다는 것은 나타내야 할 바를 살리고 시의 마땅한 구실을 온전하게 하는 데 스스로의 자세가 미흡함을 아울러 지적한 말이다. 충격적인 진술로 자기 각성의 진토를 거듭 나타내면서 시 쓰는 행위를 즐거우면서도 저주스럽다고 했다. 시를 그만둘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시 짓는 것이 고치기 어려운 버릇이라고 나무라고, 시마(詩魔)에 매여서 벗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면서 겪는 두려움과 시련을 말하고자 했던 데 더욱 주목해야 할 국면이 있다. 그래서 '시마를 쫓는 글(驅詩魔文)'이라는 말로 제목의 서두를 삼은 아주 기발한 글을 내놓았다. 시를 쓰게 하는 마귀인 시마는 죄상을 따져서 물리쳐야 한다고 하고, 그 죄상을 다섯 가지로 열거했다. 첫째로,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고 했다. 물(物)에서 흥을 느끼니 들뜰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둘째로, 시는 숨은 비밀을 캐낸다고 했다. 물에서 그 본질을 캐내고자 하니 그런 비난을 들을 만하다는 말이다. 셋째로, 시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 들떠서 비밀을 캐내면서 그 짓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이다. 넷째로, 시는 비판을 한다고 했다. 물의 올바른 상태를 따지자니 잘못된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섯째로 시는 상심을 하게 한다고 했다. 시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p.46∼47.
귀뚜라미, 올빼미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는 「시벽」은 이규보가 창작한 5언 배율(五言排律)의 한시로 문인으로서 자신의 명망을 높였던 그가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시 창작을 그만둘 수 없는 데서 오는 심적 부담감을 솔직하고 반성적인 어조로 묘사한 작품이다. 시 창작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병’으로, 시 창작을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시마(詩魔)’라는 반어적 표현을 통해 시 창작을 좋아하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 다시 읊조려 보네(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라며 자족(自足)하는 정도일 뿐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것은 아니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윤수(李允綏)를 아버지로 김씨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의종 22년(1168년) 태어난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는 자(字)는 춘경(春卿)이고, 처음 이름은 인저(仁氐)였다. 황려(黃驢: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이규보의 아버지는 개경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하였다고는 하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그는 개경에 살면서 황려에 약간의 토지를 갖고 있었던 듯 하다. 황려가 이규보의 본관을 말하는 것인지, 그가 태어난 곳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동국이상국집』 연보에 황려 사람이라고 씌어져 있는 것을 근거로, 대체로 그가 태어난 곳을 황려로 본다. 아무튼 황려에는 그의 집안 사람들인 이씨 일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호장(戶長), 교위(校尉) 같은 향직(鄕職) 노릇을 했고, 농토도 갖고 있었다. 호장, 교위 등은 지방 토착 세력을 대표하는 층이었다.
12세 되던 해, 이규보는 문헌공도(文憲公徒)에 적을 두고, 성명재(誠明齋)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성명재의 하과(夏課 : 여름철에 사찰을 빌려 행한 과거시험준비를 위한 학습) 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문인들로부터 장래가 촉망된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는 문장을 한 번 읽으면 바로 기억하고 시와 문장을 짓더라도 옛사람들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어 있는 과거시험의 글은 하찮은 소인배들이나 배우는 글로 멸시하였다. 이규보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하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술을 좋아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을 보면 ‘ 시의 즐거움’과 함께 ‘술의 즐거움’이 항상 따라 다녔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과거시험의 글을 하찮게 여기던 그가 과거 시험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인들에 의해 귀족정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신분 질서를 형성하는 역사의 갈림김에서 그가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길뿐이었다. 음보로 그가 벼슬길에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24세에 부모를 여의고 천마산(天摩山)에서 지내던 이규보는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스스로 지었다. 다음해에 그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그 다음해에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었다.
이규보의 나이가 30세가 되던 해 유력한 선배들이 그를 벼슬아치자리에 추천했으나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그 무렵 그는 고향인 황려로 돌아갈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망남가음(望南家吟)」 등 농촌과 농민에 소재를 둔 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어느덧 이규보의 나이도 32세가 되었다. 사방으로 떠도는 사이 10여 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간 것이다. 최충헌이 그의 집에서 여러 문인들을 불러 꽃을 완상하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이인로․이담지․함순 같은 문인들이 불려갔는데, 이규보도 끼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최충헌의 환심을 샀다. 이것이 그가 최충헌 일문을 드나들게 된 시초였다. 그후 이규보는 최충헌(崔忠獻 , 1149년~1219년), 최이(崔怡) 부자에게 적극 협조하여, 마침내 최충헌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벼슬자리에 대한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규보가 40세 되던 무렵 최충헌은 새로 모정(茅亭)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이름난 시인을 불러 모아 「모정기(茅亭記)」를 짓도록 했다. 이때 이규보의 작품이 1등으로 뽑혀 모정에 걸리게 되어, 최충헌의 눈에 들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겨우 직한림(直翰林)이란 낮은 벼슬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강종 2년(1213년), 이규보가 46세 되던 해 그는 최이(崔怡, 1166년~ 1249년)에 이끌려 최충헌의 집으로 갔다. 이규보는 46세의 막바지에 겨우 7품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후 그는 위도로 귀양을 가는 등 굴곡이 있었으나, 계속 벼슬자리가 올라가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라는 최고 높은 벼슬자리에 이르렀다. 이규보는 고종 28년(1241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 53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동국이상국집』은 시ㆍ부ㆍ 서(序)ㆍ발(跋)ㆍ명(銘)ㆍ잠(箴)ㆍ설(說)ㆍ논(論)ㆍ문답(門答)ㆍ전(傳) 등 여러 유형의 문학 양식으로 씌어져 있다. 그 가운데 전집 권20에 수록된 「국선생전(麴先生傳)」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은 가전체 문학(假傳體文學)이다. 가전체문학은 설화에서 한걸음 나아가 우화적(寓話的) 수법과 의인화(擬人化) 수법으로 쓴 전기체(傳記體) 문학 형태이다. 다시 말해, 가전체문학은 의인화의 수법을 쓰고 있으므로 전기가 갖고 있는 경험적 성격과 허구적 성격을 갖는 점은 실제의 전기와 다름이 없다. 술, 돈, 지팡이, 대나무, 거북이 등 사물을 의인화 하여 『사기(史記』의 열전 형식을 흉내낸 글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문학으로 순수한 개인 창작물이다. 이 가전체 문학은 소설의 성격을 내포한 것으로, 설화와 소설의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 「국선생전」은 술을 의인화(擬人化) 하여 술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은, 군자(君子)의 처신을 경계한 작품이고, 「청강사자현부전」은 신령스러운 동물이라는 거북을 의인화 하여 작아서 알기 어려운 것을 미리 살펴 방비하는 데에는 성인도 간혹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여 매사에 삼갈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과 「노극청전(盧克淸傳)」은 이규보가 지은 실전(實傳) 작품으로 앞의 작품은 이규보 자신의 전기로 청빈한 생활, 소탈하고 구애받지 않는 성격, 우주를 좁게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은 도연명(陶淵明)을 방불케 한다고 스스로 평하고 있는 것이고, 뒤의 작품은 노극청이란 사람의 이익을 탐내지 않는, 맑고 깨끗한 일화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백운소설(白雲小說)』은 홍만종(洪萬宗)이 편찬한 『시화총림(詩話叢林)』에 28편이 수록되어 전하는 것으로 시화(詩話) 및 잡기(雜記)를 모은 패관문학작품집이다. 소설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사실은 소설이 아니다. 단순히 하잘것없는 이야기 즉 조그마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쓴 것 같다.
망남가음(望南家吟)
-남쪽집을 바라보고 짓다
이규보
南家富東家貧 남쪽 집은 부유하고 동쪽 집은 가난한데
南家歌舞東家哭남쪽 집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나 동쪽 집에선 곡하는 소리만 애절하네.
歌舞何最樂 노래하며 춤추는 것이 어찌 저리도 즐거운가
貧客盈當酒萬斛 손님이 집에 가득하고 술도 풍성하네.
哭聲何最悲 우는 소리가 어찌 저리도 슬픈가
寒廚七日無烟綠 찬 기운 감도는 부엌에는 이레 동안 연기 한 오라기 안 오르네.
東家之子望南家 동쪽 집 아이가 남쪽 집을 바라보니
大嚼一聲如裂竹 고기 씹는 소리 마치 대나무 쪼개는 소리 같네.
君不見石將軍日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擁紅粧醉金谷 석장군이 날마다 미인을 끼고 금곡에서 취해 지냈건만
不若首山餓夫淸名千古獨 수양산의 굶어죽은 이들의 이름 천고에 빛남과 같지 못한 것을.
이규보의 「망남가음(望南家吟)」은 남쪽집과 동쪽집을 대조하여 부유함과 가난함의 현격한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부유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가난하게 살아,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망남가음(望南家吟)」에서 용사가 구사된 “석장군이 날마다 미인을 끼고 금곡에서 취해 지냈건만(擁紅粧醉金谷)”은 중국 진(晉)나라에서 첫째가는 부자인 석숭(石崇)의 옛일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서 많은 손님을 초청하여 술잔치를 베풀었는데, 기생들이 손님들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지 않으면 기생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세설신어(世說新語)』, 「태치(汰侈)」). 무신정권 아래의 사회적 모순을 격심한 빈부차를 통해 나타낸, 사회고발적인 작품이다. 지식인으로서의 이규보의 태도가 분명히 표현된 작품이다. 이러한 민중적 시각의 작품에 대해 김진영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치자(治者)의 위치에 있을 때에 남달리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농민(農民)의 소중(所重)함을 강조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한국한문학사상(韓國漢文學史上) 이규보(李奎報) 이전시대(以前時代)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민중적(民衆的) 시각(視覺)의 작품들이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결과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출신가계(出身家系)부터가 민중적(民衆的) 기반(基盤)을 가졌던 그는 민생(民生)과 국력(國力)이 직결(直結)된다는 신념(信念)에 따라 백성들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이면 국령(國令)조차도 비판(批判)하고 나섰음을 볼 수 있다.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p.203∼204.
비록 이규보가 적극적으로 무신정권(武臣政權) 아래로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여 신진관료층(新進官僚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문학적 재능을 무신정권을 찬양하는데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이규보는 “유사(儒士)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치국택민(治國澤民)에 두고 스스로 실천(實踐)에 옮긴 인물(김진영, 앞의 책, p.202)이었다.
하일즉사(夏日卽事)
-여름날
이규보
輕衫小簟臥風欞 홑적삼에 대자리를 깔고 바람 스며드는 마루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에 꿈이 깨었네.
密葉翳花春後在 빽빽한 잎이 꽃을 가려 봄이 지나도 남아 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서 햇살이 새어나와 빗속에서도 밝구나.
”형식론을 배격하고 창조적인 생각과 경험을 중시하던 시인이었던“ 이규보는 ”용사(用事)보다는 새로운 찾상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다“(윤용식· 손종흠, 『한국한문고전강독』,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pp.65∼66). 칠언절구(七言絶句) 2수로, 『동국이상국집』 권2에 수록되어 있는 「하일즉사(夏日卽事)」는 초여름의 정경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2수 가운데, 『동문선』 권20에는 ‘하일(夏日)’이라는 제목으로 둘째 수만 실려 있다. 대단히 기교가 뛰어난 시로 시인의 서정을 묘사하기 위해 객관물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파격이 주는 멋과 기교성이 잘 어울려 애송되는 한시이다.
위의 시[하일즉사(夏日卽事)]는 여름날의 권태로움과 한가로움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그속에 숨겨서 표현한 작품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청 마루에 홑적삼으로 누워 낮잠을 자는데 꾀꼬리가 울어서 잠을 깨운다. 봄은 이미 갔는데,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 늦게 핀 꽃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늦게 핀 꽃처럼 자신은 세상에 크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빛나는 꽃송이 같다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짧게 비치는 여우 햇살과 같다.
-윤용식· 손종흠, 『한국한문고전강독』,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p.66.
서거정이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이규보의 「하일즉사」에 대하여 “깨끗하고 산뜻하며 빼어나고 훌륭하며, 한가하고 그윽한 맛이 있다(淸新幻妙, 閑遠有味).”고 하였고,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讀之爽然).”라고 평가했다.
요화백로(蓼花白鷺)
-여뀌꽃 핀 언덕에 흰 해오라비
이규보
前灘富魚蝦 앞 여울에 물고기와 새우가 풍부하여
有意劈波入 백로는 물을 가르고 들어가려 하네.
見人忽驚起 사람을 보자 홀연히 놀라 일어나
蓼岸還飛集 여뀌꽃 언덕으로 날아 돌아와 앉네.
翹頸待人歸 목을 빼고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細雨毛衣濕 가랑비에 깃털이 다 젖는구나.
心猶在灘魚 마음은 아직도 여울의 물고기에 있는데
人道忘機立 사람들은 백로가 기심(機心)을 잊고 서 있다고 말하네.
이규보는 대상의 특징이나 생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읊은 시인 영물시(詠物詩)를 잘 지었다. 이규보는 오언율시인 「요화백로(蓼花白鷺)」에서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실제 마음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흰 해오라비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 고결한 척하며 무신(武臣)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 벼슬을 하고 싶어하는 지식인을 풍자하고 있는 풍자시이다. 「요화백로」에서 ‘기심(機心)은 ‘의도적인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
사리화(沙里花)
이제현
黃雀何方來去飛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一年農事不曾知 한해 농사는 어찌 되든 아랑곳하지 않고,
鰥翁獨自耕耘了 늙은 홀아비 혼자 밭갈고 김매었는데
耗盡田中禾黍爲 밭의 벼와 기장을 다 먹어 버리다니.
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는 「사리화(沙里花)」는 작자 미상의 민요를 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이 7언 절구의 한시(漢詩)로 옮겨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었다.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참새가 백성들이 애써 지은 곡식을 쪼아 먹는 것에 빗대어 풍자한 작품으로 현실 비판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사리화(沙里花)」는 가혹한 수탈로 인한 농민의 피폐한 삶을 그린 작품으로 당시의 고려 민중들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고려 가요를 한시(漢詩)로 옮겨 놓은 것을 소악부(小樂府)라고 하는데 이제현이 민요와 고려가요(속요)를 7연 4행의 연작시 형식으로 한시로 옮긴 11편이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 있고, 민사평(閔思平)이 한시로 옮긴 6편이 『급암선생시고(及庵先生詩藁)』에 실려 있다. ‘악부(樂府)’란 중국의 한대(漢代)에 음악을 관장하던 관부(官府)의 이름으로, 거기서 불려지던 노래의 가사인 시가(詩歌)를 악부(樂府)라 하였다. 한 구(句)가 5자나 7자로 이루어진 악부에 비해 한시가(漢詩歌)의 절구체(絶句體)을 지키고 있는 악부를, 작은 시(小詩)의 형태라는 뜻으로 소악부라 한다. 본래의 우리말 가사가 전해지는 것으로는 「처용가」·「정석가」· 「정과정곡」·「정읍사」·「쌍화점」 등이 있으며 본래의 우리말 가사가 전해지지 않고, 그 내용만 전해지는 것으로는 「장암(長巖)」·「거사련(居士戀)」 「제위보(濟危寶)」· 「오관산(五冠山) 」·「사리화(沙里花)」·「월정화」·「후전진작(後殿眞勺)」· 「안동자청(安東紫靑)」 등이 있다.
산중설야(山中雪夜)
―산 속 눈 내린 밤에
이제현
紙被生寒佛燈暗 종이 이불에 한기가 들고 불등은 어두운데
沙彌一夜不鳴鐘 사미승은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네.
應嗔宿客開門早 자던 손님이 일찍 문 열고 나갔다고 응당 성내겠지만
要看庵前雪壓松 암자 앞의 눈에 눌린 소나무를 보려했을 뿐이네.
―『익재집(益齋集)』, 권(卷)3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이루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 관풍기속, 현실고발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이병혁, 「이제현」, 황패강 외 공편, 『한국문학작가론』, 1, 집문당, 2000, p.209) 시를 쓴 것으로 평가받는 이제현의 「산중설야(山中雪夜)」는 일자(一字) 일구(一句)도 소홀함이 없이 정밀(精密)하게 다듬어 인구에 회자된 시로, 눈 오는 밤 산속 절의 설경(雪景)과 소박한 흥취(興趣)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칠언절구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최해가 이제현의 시권(詩卷)을 모두 먹칠해 지우고 단지 「산중설야(山中雪夜)」만을 남겨 놓았다. 이제현은 대단히 탄복하고 그 시를 지음(知音)으로 여겼다고 하나 이는 모두 과장된 이야기다. 이제현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다. 「화오서곡(和烏棲曲)」과 「민지(澠池)」 등과 같은 고시(古詩)는 모두 옛 시에 가깝고 여러 율시들도 맑고 크다(人言, 崔猊山悉抹益齋詩卷, 只留 “紙被生寒佛燈暗, 沙彌一夜不鳴鐘, 應嗔宿客開門早, 要見庭前雪壓松.” 益齋大服, 以爲知音, 此皆過辭也, 益齋詩好者甚多, 如和烏棲曲及澠池等古詩, 俱逼古, 諸律亦洪亮.).”라고 평했다. 이병혁은 「산중설야」를 "설경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연상하게 하는 효과가 의재언외(意在言外)요, 언진미부진(言盡味不盡)의 경지이다."(이병혁, 「이제현」, 황패강 외 공편, 앞의 책, p.205)라고 평했다. 기구(起句)에서 겨울밤의 적막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고, 승구(承句)에서 사미승이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다. 전구(轉句)에서 손님은 눈 내린 산사의 절경을 보고자 절문을 열었다. 결구(結句)에서 암자 앞의 소나무에 쌓인 설경이 펼쳐놓았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대강의 뜻만 이해해서는 문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눈내리는 밤에 종이 이불을 덮고 자느라 종을 치러 나가고 싶지 않은 사미승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한기가 들다'(촉각), '어두운데'(시각) 등의 이미지와 '암자 앞의 눈에 눌린 소나무'의 시각 이미지를 통해 눈 내리는 밤의 산속 풍경을 공묘(工妙)하게 묘사한 「산중설야」는 뜻이 말 밖에 있어(意在言外), 말이 끝나도 여운이 남아있는(言可盡而味不盡) 흥취를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봉사입금(奉使入金)
-사신을 받들고 금나라에 가다
진화
西華己簫索 서쪽 중화(남송)는 이미 시들고
北塞尙昏夢 북쪽 변방은 아직 혼몽하다네.
坐待文明旦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더니
天東日欲紅 하늘 동쪽에서 해가 붉어지려하네.
―『보한집(補閑集)』
진화(陳澕, 생몰연대 미상)가 고려 신종(神宗, 재위 1197년~1204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금(金)나라에 가서 지은 시라서 시제(詩題)를, 「봉사입금(奉使入金)」이라 한 것이다. ‘어둠'과 '밝음'의 색채를 대조하여 대구법과 은유법을 구사하면서 시상(詩想)을 전개해 나간 「봉사입금(奉使入金)」은 진화의 시 창작 역량이 이규보에 필적한다는 평가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대적인 자각과 민족적 긍지가 고려 후기문학을 새롭게 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했던 것”(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27)으로 평가받는 「봉사입금」은 진취적이고 논리적인 5언절구의 한시이다. 중원을 지배하며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던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망해 화남 지방으로 밀려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고, 중원을 지배하게 된 금나라는 미개한 상태라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신정권이 고려를 지배하던 시기에 사신으로 금나라에 들어가서 국제 정세와 역사의 변동을 생각한 진화는 고려왕조가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줄 것을 기원하고 있다.
고종 2년(1215년)에 최충헌이 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혜문(惠文)을 불러 함께 관기시(觀碁詩) 40여 운(韻)을 짓게 한 다음, 한림승지(翰林承旨) 금의(琴儀)로 하여금 이를 고열(考閱)하게 하였다. 이규보가 수석이었고 진화가 차석이었다(『고려사』 권96 열전9).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정언(李正言) 진한림(陳翰林) 쌍운주필(雙韻走筆)"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정언은 이규보이고, 진한림은 진화이다. 진화는 시 40여 수가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에 실려 있고, 『매호유고(梅湖遺稿)』라는 문집이 남아있다.
부벽루(浮碧樓)
이색
昨過永明寺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텅 빈 성엔 조각달 떠 있고
石老雲千秋 오랜 바위 위에는 천 년 구름 흐르네.
麟馬去不返 기린마는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天孫何處遊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돌계단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을 부노라니
山靑江自流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네.
―『목은집』
「부벽루」는 이색(李穡, 1328년~1396년)이 고구려의 옛 서울이 있었던 평양성을 지나다가 부벽루에서 고구려의 영화롭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느낀 심회를 읊은 5언 율시의 한시이다. 이 시의 주제어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이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인 기린마와 천제의 손자, 즉 동명왕인 천손(天孫)이다. 이규보가 『동명왕편(東明王篇)』을 통해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은 자주국가임을 표출했듯이 이색도 천손(天孫: 동명왕)의 묘사를 통해 고려가 오랜 역사를 지낸 자주국가임을 강조함으로써 원나라의 압제하에 놓여 있는 고려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색은 「부벽루」에서 시상(詩想)을 전개할 때에 먼저 경치를 묘사하고 난 후 시적 화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읊는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전개 방식을 취해 유한한 인간사와 영원한 자연을 대비하여 지난 역사의 회고와 고려 국운(國運) 회복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춘흥(春興)
정몽주
春雨細不滴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 밤중에 가냘픈 소리 들리누나
雪盡南溪漲 눈 녹아 앞 시냇물 불어나리니
草芽多少生 풀싹이 얼마간 돋아나겠구나
―『포은집(圃隱集)』 권2
시의 창작에 있어서 당시(唐詩)의 풍격과 송시(宋詩)의 풍격을 고루 구사하고 있다고 평을 듣는 정몽주(鄭夢周, 1337년∼1392년)는 오언절구 「춘흥(春興)」에서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봄날의 감흥을 노래하고 있다. 기구(起句)의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春雨細不滴)”와 승구(承句)의 “밤중에 가냘픈 소리 들리누나(夜中微有聲)’는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전구(轉句)의 ”눈 녹아 앞 시냇물 불어날 테니(雪盡南溪漲)”와 결구(結句)의 “풀싹이 얼마간 돋아나겠구나(草芽多少生)”에서는 봄비로 눈이 녹아내려 앞 시냇물이 불어난 후 푸른 잎들이 돋아나는 정경을 상상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정몽주가 상상을 통해 「춘흥」의 시상을 확대시키고 있는 시 창작 방식은 당풍적(唐風的)인 성격이 구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승사(題僧舍)
―절집에 쓰다
이숭인
山北山南細路分 산 아래 위로 오솔길이 나 있고
松花含雨落繽粉 송홧가루 비 머금어 어지러이 날리네.
道人汲井歸茅舍 스님 우물에서 물 길어 암자로 돌아가고
一帶靑烟染白雲 한 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 , 권(卷) 3
이숭인(李崇仁, 1349년∼1392년)의 「제승사(題僧舍)」는 산속에서 도를 닦는 스님의 깨끗함을 읊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산 아래 위로 오솔길이 나 있는 곳에 자리잡은 암자를 둘러싼 자연으로 세속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송홧가루가 비를 머금어 어지러이 날리는데 스님 한 분이 골짜기 샘물을 길어간다. 스님이 차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니 푸른 연기(靑烟)가 일어나 흰 구름(白雲)을 물들이고 있다. ‘푸른 연기(靑烟)’와 ‘흰 구름(白雲)’의 대비를 통해 깊은 산속 암자의 한가로운 모습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도은 이숭인이 고려 말에 있던 여러 학사 가운데 가장 후진으로 문예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다. 하루는 옛 그림 족자를 벽에 걸었는데 그 위에 절구 한 수를 써넣었다. ‘산 아래 위로 오솔길이 나 있고 송홧가루 비 머금어 어지러이 날리네. 스님 우물에서 물 길어 암자로 돌아가고 한 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목은 이색이 이 시를 보고 당풍(唐風)에 가깝다고 하는 바람에 명성이 마침내 이루어졌다(李陶隱崇仁在麗末諸學士中, 最後進, 文譽未著. 一日揭古畫障于壁, 書一絶其上曰, 山北山南細路分, 松花含雨落紛紛. 道人汲水歸茅舍, 一帶靑煙染白雲. 牧隱見之以爲逼唐, 聲名遂盛).“라고 평했다고 썼다.
오호도(鳴呼島)
이숭인
嗚呼島在東溟中 오호도는 동쪽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滄波渺然一點碧 넓은 바다의 푸른 물결이 아득하여 한 점으로 푸르러라.
夫何使我雙涕零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두 줄기 눈물을 흐르게 하나
祗爲哀此田橫客 전횡의 협객들을 슬퍼하기 때문이라.
田橫氣槩橫素秋 전횡의 기개는 가을날 서릿발같이 뻗쳐 있고
義士歸心實五百 그를 따르던 의사들은 실로 오백 명이라.
咸陽隆準眞天人 함양의 뛰어난 인물인 유방은 참으로 하늘이 낸 사람
手注天潢洗秦虐 손으로 은하수를 부어 진나라의 학정을 씻었더라.
橫何爲哉不歸來 전횡은 어이해서 귀의하려 하지 않고
怨血自汚蓮花鍔 원한의 피가 스스로 보검을 더렵혔네.
客雖聞之將奈何 전횡이 죽었단 소식 들었지만 협객들은 어찌하리
飛鳥依依無處托 나는 새떼 빙빙 돌며 의탁할 곳이 없네.
寧從地下共追隨 차라리 땅밑에 따라가 함께 따라갈지언정
軀命如絲安足惜 실날 같은 목숨 어찌 아낄 것이 있겠는가.
同將一刎寄孤嶼 다함께 장차 한 번 목을 베어 외로운 섬에 놔두니,
山哀浦思日色薄 산도 애도하고 포구도 슬퍼하여 햇빛도 빛을 잃었네.
嗚呼千秋與萬古 슬프다, 천추만고에
此心苑結誰能識 마음에 맺힌 원한 그 누가 알겠는가.
不爲轟霆有所洩 세상을 울리는 우뢰가 되어 그 한을 풀지 못한다면
定作長虹射天赤 무지개가 되어서라도 붉은 하늘을 찌르리라.
君不見古今多少輕薄兒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예나 지금의 수많은 경박한 소인들이
朝爲同袍暮仇敵 아침에는 한 이불을 덮고자면서도 저녁에는 원수가 되는 것을.
⎯『陶隱集(도은집)』, 卷(권) 1, 五七言古詩(오칠언고시)
“격렬하고 강개하며 조문과 위로의 뜻이 모두 더할 나위 없다. 5백 명이 지각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 감격하여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방의 시에 그와 짝 할 만한 것이 드물다(慷慨激烈, 弔慰兩盡, 五百人有知, 能不感泣於冥冥, 東方之詩, 鮮有其儷).”(김종직, 『청구풍아』)라는 평을 들은 「오호도(鳴呼島)」는 지조를 지켜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간 제(齊)나라 전횡(田橫)과 그 빈객(賓客)들의 의기(義氣)를 추모하여 지은 칠언고시이다.
전횡(田橫, ?~기원전 202년)은 형 전영(田榮)·종형 전담(田儋)과 함께 고향 적현(狄縣, 지금의 중국 산동성 고청현 동남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전담은 자립해 제(齊)나라 왕이 되었으나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에게 포위된 위나라 왕 위구(魏咎)를 구원하러 출정했다가 패하고 살해당했다. 그 뒤 전횡은 유방(劉邦)이 천하를 놓고 항우(項羽)와 다투고 있을 때, 자립해 제(齊)나라 왕이 되었다. 전횡과 그의 빈객들의 자결에 대한 고사(古事)는 『사기열전(史記列傳)』, 권94, 「전담열전(田儋列傳)」 제34에 실려 있다. 이숭인의 「오호도」는 전횡(田橫)과 그 빈객(賓客)들의 의기(義氣)를 추모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고려왕조 말기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넌지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구사된 용사 가운데 ’함양융준(咸陽隆準)‘은 함양의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으로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을 지칭하는 것이고, ’세진학(洗秦虐)‘은 진나라의 학정을 깨끗이 씼어냈다는 뜻으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는 세운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화악(蓮花鍔)’은 고대의 이름난 보검(寶劍)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면서 빈객에게 자신의 머리를 들고 사신을 따라 말을 달려 고제에게 아뢰도록 했다.
고제(高帝)가 말했다.
“아, 이유가 있었구나! 평민에서 일어나 삼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아니한가!”
고제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전횡의 빈객 둘을 도위(都尉)로 임명하고, 군졸 2천 명을 선발하여 왕의 예를 갖추어 전횡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 장례가 끝나자, 두 빈객들은 무덤 옆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스스로 목을 베고 거꾸로 처박혀 전횡의 뒤를 따라 죽었다. 고제는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전횡의 빈객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고제는 또 나머지 5백 명이 여전히 바다 가운데의 섬에 있다고 들어 사신을 보내 불러오게 했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들 역시 모두 자살하였다. 이로써 전횡의 형제가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遂自剄,令客奉其頭, 從使者馳奏之高帝, 高帝曰, 嗟乎, 有以也夫, 起自布衣,兄弟三人更王,豈不賢乎哉, 為之流涕,而拜其二客為都尉, 發卒二千人,以王者禮葬田橫. 旣葬,二客穿其冢旁孔,皆自剄,下從之, 高帝聞之,乃大驚,大田橫之客皆賢, 吾聞其餘尚五百人在海中,使使召之, 至則聞田橫死,亦皆自殺, 於是乃知田橫兄弟能得士也.
⎯『史記列傳(사기열전)』, 卷(권)94, 「田儋列傳(전담열전)」 제34
『사기』 「전담열전」을 그 원전 텍스트로 하여 전횡 고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숭인의 「오호도(鳴呼島)」와 정도전의 「오호도(鳴呼島)」가 있다.
이숭인(李崇仁, 1349년∼1392년)은 도학적인 문학관을 가졌던 문인이자, 학자이다. 호가 도은(陶隱)인 그는 공민왕 9년(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년~1396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시라는 것은 억지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의 효용을 교화 위주에 두었다. 문사(文士)로서 나라의 안과 밖에 이름을 떨쳤던 그의 문학관은 조선의 변계량, 권근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친명파(親明派)로서 정치적 격변기에 친원파(親元派)에 의해 배척되어 자주 유배 길에 올랐다. 그러나 친명파인 정몽주가 피살된 후 정몽주파로 몰려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숭인의 죽음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목은이 도은이 지은 「오호도(鳴呼島)」라는 시를 보고 매우 칭찬했다. 며칠 뒤 삼봉 역시 「오호도」를 지어 목은을 찾아가 말했다.
”우연히 옛사람의 시고 중에서 이 시를 얻었습니다.“
목은이 이를 보고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작품이고 잘 지었다, 그러나 그대들도 이 정도의 시는 충분히 지을지라도 도은의 시 같이 수준 높은 시는 많이 짓기 어려울 것이다.“
뒷날 삼봉이 나라의 권세를 쥐었을 때 목은은 여러 번 위기에 빠졌다가 겨우 죽음을 면했고, 도은은 끝내 화를 당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오호도」가 빌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一日牧隱見陶隱鳴呼島詩, 極口稱譽, 間數日三峰亦作嗚呼島詩, 謁牧老曰, 偶得此詩於古人詩藁中, 牧隱曰, 此眞佳作, 然君輩亦裕爲之, 至如陶隱詩不多得也, 後三峰當國, 牧隱屢遭顚躓, 僅免其死, 陶隱終蹈其禍, 論者以謂, 未必非嗚呼島詩爲之崇也.
⎯『東人詩話上(동인시화 상)』
이숭인은 「오호도」가 빌미가 되어 정도전의 심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사만 놓고 보더라도 이숭인의 「오호도」가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이숭인의 저서로는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도은집(陶隱集)』 서문에 의하면 그가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난부인(嬾婦引)
-게으른 아낙의 노래
홍간(洪侃)
雲窓霧閤秋夜長 구름 창과 안개 문에 가을밤은 길고 긴데
流蘇寶帳芙蓉香 술 달린 비단 장막에 부용이 향기롭네.
吳歌楚舞樂未央 오나라 노래와 초나라 춤의 즐거움은 다하지 않아
玉釵半醉留金張 옥비녀 꽂은 여인 반쯤 취해 귀공자 붙잡네.
堂上銀缸虹萬丈 당 위의 은등잔에는 무지개 만발이요
堂前畵燭淚千行 당 앞의 촛불은 천 갈래 눈물짓네.
珠翠輝光不夜城 주취의 빛나는 불빛은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月娥羞澁低西廂 달은 부끄러워 서쪽 행랑으로 기우네.
誰得知貧家嬾婦無襦衣 누가 가난한 집 게으른 여자의 저고리가 없는 줄을 알리오,
紡績未成秋雁歸 길쌈도 마치기 전에 가을기러기 돌아오네.
夜深燈暗無奈何 밤이 깊고 등불은 어두우니 어찌 할 수 없어
一寸願分東璧輝 동쪽 벽의 밝은 불빛 한 치를 나눠 주기 바라네.
⎯『동문선(東文選)』, 권6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부잣집 사람들의 사치와 대비시켜 사실적으로 현실을 비판한 작품인 「난부인(嬾婦引)」은 칠언고시로 『홍애유고(洪涯遺稿)』, 『동문선(東文選)』 권6에 실려 있다. 이 작품에서 구사된 용사 가운데 ‘오가초무(吳歌楚舞)’는 오나라의 노래와 초나라의 춤이라는 뜻으로 이 작품에서는 부잣집 여인들이 흥청거리며 노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김장(金張)’은 한나라 귀족으로 후손들도 모두 귀족이 되었던 김일선과 장안세를 가리키는 것이고, ‘유김장留金張)’은 옥비녀 꽂은 여인들이 귀공자들을 놀다 가라고 붙잡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동벽휘(東壁輝)’에 대한 고사는 다음과 같다.
제(齊)나라 여인 서오는 제나라 동쪽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부인이다. 이웃에 사는 이오 부인의 무리와 함께 모여 등불을 밝히고 길쌈을 하였다. 서오가 가장 가난하여 등불을 밝히지 못한 날이 여러 번 있었다.
이오가 그 무리에게 말했다.
"서오는 자주 등불을 밝히지 못하니 밤에 같이 길쌈을 할 수 없다고 말합시다."
서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가난하여 등불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일찍 일어나 나왔다가 항상 뒤에 일을 마치고 맨 나중에 나가면서 물을 뿌리고 비로 쓸고, 자리를 깔아 길쌈하러 오는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또 스스로 밝지 않은 곳에서 함께 했고, 항상 아랫자리에 앉았는데, 모두 제가 가난하여 등불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방안에서 사람 하나 더 있다 해도 등불이 어두워지지 않으며 사람 하나 빠진다 해도 등불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어찌 동쪽 벽을 비추는 빛을 아까워하여 가난한 제가 슬픔을 겪도록 하십니까? 제가 하는 일에 멀리서라도 등불을 나누어 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또 여러분들이 항상 저에게 혜택을 베푸신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오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밤에는 다시 함께 길쌈을 하게 되었다. 끝내 뒷말이 없었다.
齊女徐吾者, 齊東海上貧婦人也, 與鄰婦李吾之屬會燭, 相從夜績, 徐吾最貧, 而燭數不屬, 李吾謂其屬曰, 徐吾燭數不屬, 請無與夜也, 徐吾曰, 是何言與, 妾以貧燭不屬之故, 起常早息常後, 灑埽陳席, 以待來者, 自與蔽薄, 坐常處下, 凡爲貧燭不屬故也, 夫一室之中, 益一人, 燭不爲暗, 損一人, 燭不爲明, 何愛東壁之餘光, 不使貧妾得蒙見哀之, 恩長爲妾役之事, 使諸君常有惠施於妾, 不亦可乎, 李吾莫能應, 遂復與夜, 終無後言.
⎯『열녀전(列女傳)』, 권6, 변통(辯通) 제녀서오(齊女徐吾).
“구름창과 안개문에 가을밤은 길고 긴데, 술 달린 비단 장막에 부용이 향기롭네(雲窓霧閤秋夜長, 流蘇寶帳芙蓉香)”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아가는 부잣집 여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다가, “누가 가난한 집 게으른 여인의 저고리가 없는 줄을 알리오, 길쌈도 마치기 전에 가을기러기 돌아오네(誰得知貧家雅婦無襦衣, 紡績未成秋雁歸)”라 하여 가난한 집 여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대비적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난한 집 여인들은 밤이 깊어도 등불 하나 켤 수 없다고 묘사하면서 그것과 대비하여 흥청거리며 살아가는 이웃의 부잣집 여인들의 정경을 묘사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민병수는 “고체(古體)에서 애용하는 고사(故事)의 사용도 최대한으로 억제하면서 청려(淸麗)한 홍간(洪侃)의 시작(詩作)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장편(長篇)으로 완성한 작품이다.”(민병수,『한국한시대강(韓國漢詩大綱)』,1, 태학사, 2013, p.452)라고 평했다.
홍간(洪侃, ?~1304년)은 고려(高麗) 원종(元宗) 7년(1266년) 과거에 급제한 뒤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지제고(知制誥)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