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이신(명치유신)은 바쿠마츠15년(1853~1867)과 곧바로 일어난 보신전쟁(1868.1~1869.6)속에서 서국 번벌정권이 무가정권을 무너뜨리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근대화(당시 제국주의 문명의 표준이었고 오늘날 지금 이순간에도 그렇게 크게 달라질것 없는 5가지 표준:종교적으로는 포교와 신앙의 자유,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 수립과 의회민주제 확립,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도입,사회적으로는 신분제철폐와 개인의 해방,문화적으로는 전통의 타파와 새로운 모더니즘의 추구)를 달성했다는 것인바,그뒤로 한짓은 서양제국주의자들을 원숭이처럼 본따서 아시아와 대륙으로 식민지쟁탈전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서양제국주의자들(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벨기에,모두다 도둑놈,강도놈의 새끼들)과는 다른 왜구 고유의 더 악랄하고 지저분한 특수성이 있는바,이것이 바로 더럽고,야비하고,천박하고,코미디같은 천황제하에서 소위말하는 명치유신과 근대화가 진행됐다는 것이다.내식으로 보면 명치유신은 서국세력이 700년만에(서국은 크게 보면 겐페이전쟁과 세키가와라전쟁으로 두번에 걸쳐서 동국에게 패배함)겐페이 전쟁때 단노우라에서 억울하게 빠져죽은 81대천황 안토쿠(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외손자)의 원한을 갚는 복수전을 동국막부정권에게 한것으로 보며,나아가서 동국무사를 대신해서 서국무사들(그중에서도 사쓰마,죠슈,히젠,도사)이 관료로 변신하여 천황을 전면에 얼굴마담으로 (물론 초기 천황관료정권하에서 무츠히토나 히로히토가 단순히 얼굴마담 역활만 했다고는 보지 않으며,바보 요시히토는 몰라도 무츠히토나 히로히토는 정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특히 히로히토의 경우는 중일전쟁및 태평양전쟁에 직접 개입한 전쟁범죄자라고 나는 본다.) 앞세우고 무가시대의 충군애국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로 만들어 일본백성들을 우민화하고 ,또 바보취급하면서,말을 듣지않는 반정부인사와 민중들은 폭압적으로 탄압하면서,서국 번벌들의 파당적인 이익을 추구한 정치난동으로 규정짓고 싶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지금 이 순간의 일본 현대정치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싶다.
서국번벌이 동국막부에 복수하는 역사적과정은 드라마나 일본역사개론 책에도 잘 요약되어 있는데,이를 내식대로 일본사 연표만을 책상앞에 두고서 정리해 보겠다.
1853년 페리내항(흑선=쿠로후네 내항=이때부터를 왜구들의 근대가 시작.참고로 짱게들은 1842년 아편전쟁부터를 근대의 기점으로 보고,됴션은 1876년 병자수교부터를 됴션근대의 기점으로 본다.)에서부터 일본조야(조정과 막부와 각번모두)는 개국파와 존왕양이파로 크게 대별하여 사상투쟁과 무력투쟁을 전개하는바,1858년 개국파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 대옥후(이때 하시모토 사나이와 요시다쇼인이 처형됨) 1860년 이이나오스케가 사쿠라다문밖에서 미토,사쓰마의 사무라이 18명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막부는 로중 안도 노부마사 중심으로 공가의 이와쿠라 도모미와 발을 맞춰 공무합체운동을 추진하게 되는바,공무합체는 막부가 먼저 요청해서 고메이 천황이 주저주저하는 것을 책사 도모미가 적극 주장하여 고메이를 설득시켜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가즈노미야공주와의 혼인이 성사된다.도모미가 공무합체에 나선 이유는 공무합체로서 천황공가도 막부정치에 관여할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서 도모미가 밀어붙인 것으로 그후 정국 전개는 도모미의 판단이 들어 맞았으나 정작 도모미는 막부와 한통속이라는 오해와 누명을 쓰고 존왕양이 급진파 공경및 급진파 존왕양이 무사들의 탄핵(대표주자로 료마의 친구인 도사출신의 다케치 한페이타를 들수 있는데,다케치 한페이타는 도모미를 멀리 유배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NHK드라마 <료마전>에서도 딱히 토모미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한페이타가 급진파 양이구게를 만나 급진적인 양이주장을 하는 것을 볼수 있다.당시 교토에는 한페이타 말고도 죠슈의 마키 이즈미,사쓰마의 아리마 신시치,지쿠젠의 히라노 구니오니등이 급진파양이구게등과 서로 연합하여 교토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을 받고 1862년 8월 자신의 고향으로 칩거 명령이 내려진다.
그런데 공무합체운동은 도모미의 실각과 노부마사의 사카시타문밖 사건으로 노부마사가 부상을 입음으로서 힘을 잃어 가고,정국은 급속도로 존왕양이파가 득세하여 고메이 천황자신까지도 부담을 느낄정도가 되었으며,고메이는 나카가와노미야를 시켜 정국반전을 꾀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1863년 8.18정변으로 죠슈한의 사무라이들은 사쓰마와 아이즈한의 사무라이들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나고 급진파 공경들 역시나 죠슈한과 함께 쫓겨나 죠슈한에 자신들의 신변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사쓰마와 아이즈한에 의해 죠슈로 쫓겨난 죠슈한 사무라이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그 일부 교토에서 활약하고 있던 급진파 양이 지사들이 쿄토를 방화하고 폭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는데,이 계획이 바로 신선조에 의해서 탄로나고 죠슈급진파 양이지사들은 일망타진되어 대부분이 신선조 대원에 의해서 살해되고 만다. (이 이야기는 1864년 6월에 일어난 이케다야사건으로 왜구들 드라마 단골 내용임) 이때 가츠라 고고로(후에 기도 다카요시)는 이케다야로 가는 도중에 신선조 습격소식을 듣고 지붕을 타고 도망쳐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케다야 사건을 들은 죠슈본토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은 무관하며 자신들의 영주의 무죄를 밝힌다는 교토발진론이 일어나 마스다 우에몬노스케 가로를 비롯 마키 이즈미,구사카 겐즈이등이 주동이 되어 (이때 다카스키 신사쿠와 기도 다카요시는 교토발진론이 너무 모험주의적이고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반대했다고 전해진다)1864년 7월 19일 기어코 <금문의 변>을 일으키는 바,결국은 또다시 사츠마와 아이즈의 무력에 패퇴하고,이때 구사카 겐즈이와 마키이즈미는 교토탈출을 포기하고 자결하게 되며,다카스키 신사쿠는 한의 명령에 따라 참가하지 못하고 구금상태에 있었으며,기도 다카요시는 교토탈출을 포기하고 교토인근 유곽(?)에 숨어 있다가 9개월만에 교토탈출에 성공하여 죠슈본토로가 다카스키와 상봉하게 된다.*기도는 효고현 모 암자에 숨어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1864년 7월 19일의 금문사건에서 죠슈한 군대가 천황이 사는 궁궐을 향해 발포했다는 이유로 막부는 조정의 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어 죠슈한 정벌에 착수하게 되는바,이것이 제 1차 죠슈정벌(1864.7~12)로서 죠슈한은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순순히 항복하게 된다.또 죠슈한은 막번정치에서 반막부 존왕양이파가 물러나고 친막부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이때 다카스키 신사쿠는 죠슈번내에서 존왕양이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탄압이 진행되자 자신의 고향 하기에서 도망쳐 야마구치로 탈출한다.야마구치로 탈출해서 기병대를 장악하고 있는 군감 야마카타 아리토모에게 죠슈한내의 친막부 보수파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쿠테타계획을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여 실망하고 큐슈로 건너간다.큐슈에서 사가한이나 후쿠오카한의 지원과 협조를 얻으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그러나 죠슈한의 교토발진(침공)을 지휘한 3가로의 할복과(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으로 할복하게됨) 4참모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죠슈한의 번정세와 분위기는 일변하여 반막부분위기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역사대와 친막부파에 쫓겨 다니던 유격대원 80명으로 다카스키 신사쿠는 조슈한 내에서 반막부 쿠테타를 일으켜(이때 야마카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기병대도 반막부로 돌아서서 다카스키에게 협조하였다고 한다)죠슈한 내에서의 보수파 친막부정권을 타도하고 반막부의 신정권을 수립하게 된다.(1865년 1월 ~3월)참고로 다카스키 신사쿠가 막부타도 쿠테타의 기치를 처음 올린것은 1864년 11월 하기의 공산사에서이다.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이 이끌던 역사대 30명을 이끌고 맨먼저 다카스키 거사에 참여하였으며,이토 히로부미는 평생을 두고 이것이 자신의 생애중 가장 자랑스러운 행동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2015년 NHK대하 【꽃타오르다】에서도 이 장면이 확실히 나오는 것을 이 타이가를 NHK실시간 방송으로 시청하면서 우연히 보았다.2015년 대하에서 코라 켄고가 다카스키 신사쿠역을 하고 있더군요.2015년 대하를 다 본건 아니고,TV채널을 돌리다가 NHK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대하드라마를 방송중이기에 일본어청해는 서툴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사건 내용을 방영하기에 생방송 실시간으로 그냥 봤다.보니까 이토가 수십명의 역사대 대원을 이끌고 나타나고,곧 이어서 마에바라 잇세이가 수명의 대원을 이끌고 나타나던데,마에바라 잇세이가 이끌었던 부대 이름은 모르겠다.
이때부터 죠슈한은 토막의 기치를 높이 들고 모든 번중에서 가장 먼저 토막파의 기수로 앞장서게 된다.이전까지는 죠슈한은 존왕양이나 반막부정도의 저항에 머물렀으나 쿠테타 성공후 죠슈한은 명확히,그리고 철저히 토막의 입장을 취한다.나는 1865년초의 다카스키 쿠테타의 성공이 명치유신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보며 역사가나 역사평자들도 대체로 명치유신을 3~4년 앞당긴 걸로 그렇게 보고 있다.이 쿠테타 당시 기도 다카요시는 교토에서 아직도 탈출하지 못하고 교토인근의 유곽(?시바료타로의 『막말의 암살자들』이라는 책의 가츠라 고고로편에 잘 나와 있는데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그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먹음:효고현 모 암자에 숨어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에 숨어 있다가 5월(?)인가에 탈출에 성공하여 죠슈로 돌아와 쿠테타에 성공한 다카스키 죠슈한정치의 용담역(정치,외교자문역)을 맡아 활약하게 된다.
여기서 쉬어가는,그러나 아주 아주 중요한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겠다.
다카스키 신사쿠가 기병대를 창설한것이 1863년 6월 7,8일인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근대식 군대로서,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에서도 병사를 뽑아서 훈련 시켰는바(사무라이반,농민반)
이는 료마의 해원대가 일본의 해군의 전신(맹아)으로 비유되듯이
일본육군의 전신(맹아)으로 비견될수가 있으며,이 기병대가 있음으로서
다카스키신사쿠는 쿠테타에 성공할수도 있었고, 다음 단락에서 전개할
제2차 죠슈정벌에서도 승리할수 있었고, 나아가서는,무진전쟁,서남전쟁에까지
그 승리의 원동력이랄까 그 정신적 발판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이 기병대의 사민평등정신을 불러 일으켜, 죠슈한을 일본 최초로 근대식
군대로 개조 시킨자가 바로 NHK 대하드라마 제15번째(1977년 방영)주인공으로서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고,소위 말하는 야스쿠니 신사(처음 출발은
1869년 동경 초혼사로 시작하여 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개명함)를 기획한 자이며
지금도 야스쿠니신사 제1도리이를 지나자 마자 딱 버티고 서있는 동상의 주인공인
오무라 마스지로(1824~1869)라는 자이다.이자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자 역시 죠슈한출신의 불만 사무라이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것만 말해둔다.
한편 신사쿠가 쿠테타에 성공하여 번의 실권을 장악하고 토막의 기치를 내걸자 도쿠가와 막부와 죠슈한 사이에서는 재차 긴장이 고조되면서 막부는 죠슈한에게 죠슈한영주의 에도출두와 영지 삭감명령을 내렸으나 죠슈한이 이를 무시하고 응하지 않자 재차 출병하게 되는바,이것이 1866년 6월에서 8월 사이에 일어난 제2차 죠슈 정벌이다.이 제2차 죠슈정벌은 우수한 무기와 잘 훈련된 죠슈한의 승리로 끝나는데 다카스키는 해군총독으로 큐슈의 오쿠라한에 상륙한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바 NHK대하드라마 <료마전>에도 료마가 지원군으로 출전하여 고쿠라성 함락에 참가하여 승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나는 과연 료마가 이 전투에 참여했는지 의심스럽다.아니 모르겠다.
그런데 제2차 죠슈정벌에서 죠슈한이 승리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1866년 1월 22일에 있었던 삿초동맹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삿초동맹전에 이미 죠슈한은 막부의 눈을 피해 사츠마가 수입한 무기를 밀반입(료마가 도와줌)할수 있었으며,이는 료마가 <나가사키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주)가 운영하던 '글로버 상회'(일본어: グラバー商會 )로부터 미니에 총(일본어: ミニエー銃 ) 4,300정, 게벨 총(일본어: ゲベール銃 ) 3,000정을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에의 매입(밀반입) 알선에 성공했다.>는 것이다.(위키백과자료 인용)그리고 죠슈한은 이 서양 신식무기로 기병대 농민군을 근대식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시킬수 있었던 것이다.이처럼 료마와 그의 동향 친구 나카오카 신타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삿초동맹은 성공적인 결실을 맺고, 한편 이 삿초동맹으로 사츠마는 제 2차 죠슈정벌의 막부연합군에 가담하지 않고 오불관언 함에따라 막부군은 전력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되었던 것이다.삿초동맹의 과정과 내막은 아주 유명한 내용이고 드라마 <료마전>이나 사카모토 료마의 위키백과 자료에도 잘 묘사되어 있으니 생략하고 싶다.그런데 최근에 우연히 구로다 기요타카를 인터넷 검색하다가 희안한 내용을 읽게 되었는데,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구로다 기요타카)는 게이오 3년인 1866년의 삿쵸동맹 때에는 맹약전에 사츠마의 사자의 자격으로 쵸슈로가 동맹을 설득하고,오사카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츠라 고고로의 대면을 실현시킨후,다시 죠슈 번에 사자로 갔다>는 내용인데,이 내용은 바로 료마가 했던 그 길이 아닌가?
(주)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1838-1911)
그는 Jardine Matheson & Co라는 상사의 직원이었습니다. Jardine Matheson & Co는 19세기 극동아시아 최대의 상회로서 아편전쟁으로 때돈을 벌었고 사업은 인도, 홍콩, 보르네오, 싱가포르, 상하이, 광둥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대 국제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1858년 녹차 무역을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다양한 종류의 '불법무역'을 활성화시킵니다. 외국과의 무역을 막부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밀무역은 당연히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무기류의 불법판매(밀무역)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사쓰마나 쵸슈에 많은 무기를 이런식으로 판매했습니다.
그의 적극적인 밀무역(즉, 무기 공급)은 사쓰마나 쵸슈의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맺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이 덕분에 그는 유신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과 대부분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자회사의 선박을 이용해 1863년 쵸슈의 젊은 유력자 5명(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에 한명)을 비밀리에 영국으로 보내고 1865년에는 사쓰마의 젊은이 15명을 영국으로 보냅니다. 당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불법이었고 사형에도 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로 쵸슈와 사쓰마에 상당한 특혜를 주었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이후 일본은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철기선 군함을 들여오는 사업권을 그에게 주면서 호의를 되갚습니다.그 후 글로버는 계속 일본에 머물면서 미쓰비시, 기린(KIRIN)맥주 공장 등의 설립에 깊숙히 관여합니다.
제2차 죠슈정벌은 1866년 7월 20일 제 14대 쇼군 이에모치의 사망으로 이에모치쇼군 후견직에 있었던 요시노부의 명에 따라 죠슈정벌은 중지되고 9월 2일 양측(막부측:가츠가이슈,죠슈측:히로사와 사네오미)은 휴전조약을 맺고 막부군은 병력을 철수하게 된다. 이후 정국전개는 삿초는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겠다는 토막운동을 더 노골화 시키는 바,이 삿초의 막부무력타도의 계획을 일단 멈추게 한것이 바로 료마의 <대정봉환>의 계책이 된다.그런데 대정봉환이 있은 10월 14일 전날에 이미 삿초는 요시노부가 대정봉환하지 않으면 요시노부를 무력으로라도 타도해도 좋다는 명치천황의 토막의 밀칙을 받아 놓고 있었다.료마의 대정봉환의 계책을 설마 요시노부가 받아들일까 반신반의 했던 삿초로서는 요시노부가 이를 실제로 받아 들이자 멍하니 뻥진 상태에서 요시노부를 압박하는 최후의 카드를 내미는데,이것이 바로 1867년 12월 8일부터 밤을새고 다음날 새벽에 결정된 <왕정복고 대호령> 쿠테타가 되는 것이다.
1867년 12월 8일부터 9일에 걸쳐서 교토 어전 고교소회의에 나카가와노미야(8.18정변을 주도한자),니조 나리유키,이와쿠라 도모미등의 공가와 아리스가와소치노미야 다루히토친왕,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친왕,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친왕등의 황족과 시마즈 다다요시(사쓰마번주)야마우치 요도(도사 전번주)마쓰다이라 슌가쿠(에치젠번주)도쿠가와 요시카츠(오와리번주)아사노 나가코토(아키번주)등이 밤새도록 입씨름하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신정부인사안과 요시노부의 <사관납지>인바,1867년 12월 9일 (양력으로는 1868년 1월 3일)이와쿠라 도모미는 입궐하여 메이지 신정부인사와 요시노부의 처분을 구하는 <왕정복고 대호령>안을 명치천황에게 아뢴다.그런데 왕정복고 대호령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신정부인사안을 둘러싸고 마쓰다이라슌가쿠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논쟁을 벌인다.최종적으로 아리스가와소치노미야를 총재로 야마시나 노미야 아키라친왕,산죠 사네토미,마쓰다이라 슌가쿠(요시나가),야마우치 요도(토요시게),도쿠가와 요시카츠를 의정으로,하세가와 산미와 이와쿠라 도모미와 하시모토 사네야나를 산요로하는 신정부가 최초로 수립되었다.한편 요시노부의 처분에 대해서도 요도와 슌카쿠가 이견을 내자 이와쿠라가 최후에 요도와 슌카쿠를 논파하여 사관납지(요시노부의 관위와 영지를 반납하라)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슌카쿠와 요시카츠가 사자로 요시노부에게 파견되어 신정부의 결정을 요시노부에게 통고하였다.요시노부는 처음에는 이에 순응하는 듯 했으나 ,사츠마의 에도에서의 폭거와 난동(사츠마는 노골적으로 요시노부를 자극하려고,즉,요시노부야,겁쟁이처럼 잠자코 있지만 말고 우리 누가 이기나 한번, 한판 무력으로 붙자는 식으로 요시노부를 자극하려고 에도에서 살인 방화 난동을 노골적으로 일삼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868년 1월 2일 사츠마정벌을 명분으로 사실상은 교토점령을 목적으로 도바, 후시미 전투를 일으킨다.
도바,후시미 전투로 곧바로 <보신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는바,<보신전쟁>은 이하에서 년표로 정리하겠습니다.대충 <바쿠마츠 15년사>의 약사로는 조악하지만 제 나름대로는,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개운하게 잘 정리된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멈춰도 좋을 것 같네요.보신전쟁은 신식무기와 사민평등의 정신으로 무장한 근대식 일본 농민군대가 좌막을 고수하는 각 번의 사무라이집단(이건 정말 말이 사무라이지 근대식 군대 개념으로 보면 군대도 아니고 오합지졸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아마 제5대 도쿠가와 쓰나요시 이후의 사무라이는 무사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샐러리맨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에도말기에 이르면 사무라이 중에는 어떻게 할복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많았다고 전해진다.)을 개박살 낸 전쟁이라고 규정할수 있으며,그 기원은 이미 다카스키 신사쿠의 기병대와 제2차 죠슈정벌의 승리에서 그 맹아와 조짐이 있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1877년의 서남전쟁으로 700년 무가정권의 사무라이세상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1878년 5월에 있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은 라스트 사무라이들의 마지막 한풀이,최후의 발악이라고 보면 되겠다.
에피소드 하나:1867년 12월 8,9일의 <왕정복고 대호령>이 입씨름으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자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바로 서남전쟁의 주모자)가 <단도 한자루면 끝날 일인데>하고 말했다고 전해짐.
PS:명치유신 전후사(1853~1889)는 3단계로 정리가 가능한데,
제1단계는 바쿠마츠 15년사(1853~1867)
제2단계는 양력으로 1868년 1월3일에 있은 「왕정복고 대호령」에서부터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까지(11년)
제3단계는 오쿠보도시미치 내무경을 이어받은 쥐새끼같은 도적놈 이토히로부미 취임부터 1889년 제국헌법 제정까지(11년)
**쥐새끼같은 도적놈이라는 말은 안중근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떠나기전 남긴 시속에 나오는 한구절임(강개일거혜 필도서적)
**강개일거혜 필도서적:비분강개한 마음으로 한번 거사에 나섰으니 반드시 쥐새끼같은 도적놈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리겠다.
대한인,안중근(1879~1910)
하얼빈가(하얼빈의 노래)
장부처세혜 축지당기 (장부가 세상에 태어남에 마땅히 뜻은 기걸차야 할지니)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시대를 만들기도 한다)
북풍기냉혜 아혈즉열 (북풍은 점점 차가워 오지만 도리어 나의 피는 뜨거워진다)
강개일거혜 필도서적 (비분강개해 일어났으니 반드시 쥐새끼같은 도적을 잡으리라)
범아동포혜 무망공업 (모든 우리 동포들이여 내가 세운 공업을 부디 잊지 말지어다)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이 3단계를 제대로 알아야지 왜구들의 명치유신을 제대로 파악할수 있으며,이러한 3단계의 과정에서 왜곡된 힘의 논리가 이후의 청일전쟁,러일전쟁,한일합방,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관철되어 가는지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볼수 있읍니다.그리되면 이 왜구들의 명치유신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 현대정치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어떠한 균열과 암영을 드리우고 있는지 까지도 명확히 인식할수 있을 것입니다.진정 노파심에 재삼재사 강조하고 싶은데,명치유신 역사와 문제는 150년전의 흘러간,그냥 재미로 읽고 넘어갈 옛날 역사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특히 NHK대하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을때 겐페이시대나,전국시대는 그냥 재미로 보고 지나간 옛이야기로 흘러 보낼수도 있지만,명치전후시대를 다루는 NHK대하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으실때는 바짝 긴장하면서 대사 하나하나에,장면 하나하나에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써서 주목하며 보고,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신전쟁 년표정리
아래 보신전쟁 년표정리는 KISARA님의<Under the Violet Moon>블로그에서 <펌>한 년표에다가,제가 대괄호로 보충설명하는 글입니다.참고로 아래 KISARA님의 년표날짜는 모두 양력날짜로 표시되어 있으니,혼동이나 착오,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제가 [ ]안에서 보충설명한 글에서도 따로 음력이라고 표시 안했으면, 모두 양력날짜이니 그리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보충설명하는 글속에서 겸양문이나 경어체 문장으로 안쓰여 있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KISARA님의 년표정리가 있었기에 제가 쉽게 보충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밝혀두면서,다시한번 KISARA님의 보신전쟁 년표정리에 감사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읽어 보시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년표정리에 들어가기전 한마디 하고 들어가고 싶습니다.보신전쟁으로 전사한 신정부군의 전사자가 7751명인데,이들을 위로하고 제사지내기 위해서 기획되어 1869년 건립된 것이 동경초혼사로,이 동경초혼사를 기획한자가 바로 오무라 마스지로라는 자이고,이 동경초혼사가 1879년 개명하여 야스쿠니신사가 된다.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태평양전쟁 1급전범까지 합사되어 있으며,그 숫자는 외국인 포함 246만명이 넘으며,야스쿠니신사의 기본정신이랄까,야비한점은 이들 죽은자들이 모두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모셔졌다는 것이다.즉 일본천황에 대한 충성여부가 야스쿠니신사 합사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따라서 보신전쟁당시 반정부군인 아이즈군등 구막부군의 전사자들은 야스쿠니신사에 배제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요,웃기는 짬뽕이고,꼭 이점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1996년 야마구치현의 하기시장이 후쿠시마현의 와카마츠시장을 방문해서 보신전쟁후의 130년만의 화해악수를 청했을때,와카마츠시장이 <아이즈번은 무츠로 흐르게 하면서 아이즈번의 죽은병사들의 시체는 그대로 방치한 메이지 신정부의 방식이 유감이다>고 하면서 화해의 악수를 끝내 거부했다고 한다.
1868년 01월 27일 도바(鳥羽)・후시미(伏見) 전투에서 구 막부군 패배
→ 1868년 01월 29일 요도센료마쯔(淀千両松) 전투에서 구 막부군 대패, 오사카 성으로 후퇴. 이 와중에 신선조의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源三郎), 야마자키 스스무(山崎蒸) 등이 전사.
[이노우에 겐자부로는 요도센료마쯔 전투에서 죽었고,야마자키 스스무와 미마와리구미의 수장이었던 사사키 다다사부로는 1.30일에 있었던 하시모토 전투에서 사망함.이 요도센료마쯔 전투에서 신정부군은 금기를 앞세우고 요도성을 향해서 전진해 왔는데, 이를 보고 막부군은 기겁을 하게 되었다.여기서 금기란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국화꽃을 새긴 깃발을 말하는데,이 금기에 도전하는 것은 천황에 대한 적,즉 조적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이 금기는 책사 도모미와 꾀보 오쿠보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이 둘의 합작품으로 봐야되며,이 금기역시 조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조작됐든 어쨌든 전쟁에서 싸워 이기면 그만인데,당시 구막부군은 신정부군을 싸워 이길만한 능력부족이라는 말밖에는 할말이 없다.이 금기는 이후 구막부군의 사기저하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
→ 1868년 01월 3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오사카 성을 탈출해 에도로 도주. 이후 칸에이지(寛永寺)에서 근신. 구 막부군은 에도로 퇴각.
[요시노부는 당시 로쥬 이타쿠라 가쓰시게와 사카이 다다토시,교토수호이자 아이즈번주인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구와나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아키와 함께 밤에 오사카성을 탈출,오사카만에 정박중인 막부군함 가이요마루를 타고 에도로 도망침]
→ 신정부,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을 대총독으로 삼아 정동군(征東軍)을 조직, 에도로 진군.
[다루히토친왕은 <왕정복고 대호령>으로 신정부에서 총재가 된 연고로 당연히 신정부군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며,실제 전쟁수행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무라 마스지로가 중심이 되어 행해졌다. 신정부군은 막부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도카이도,도산도,호쿠리쿠도 세방향으로 공격루트를 정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무라 마스지로가 주축이 되어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정동군 대총독부를 에도에 두고 대총독외에 대총독 참모로 죠슈측에서는 오무라 마스지로가 참모겸 군무관 판사,사쓰마측에서 가이에다 노부요시가 임명되고, 정동군 대총독부 참모겸 총대장(육군대장직-이 직위가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논쟁으로 정치적패배를 겪고 사이고의 정계은퇴후 죠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승계된다.만일 오무라 마스지로가 1869년에 불만 죠슈번사에 의해 암살되지 않았다면 이 육군대장직은 당연히 오무라 마스지로로 승계되었을 걸로 저는 판단한다.)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임명되며, 대총독부 총군감에는 사가출신의 에토 신페이가 임명된다.다시 호쿠에쓰총독은 타카쿠라 나가치사,오우총독은 쿠죠 미치타카가 임명된다.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신정부는 교토에 두고서 전황보고에 따라 이와쿠라 도모미와 산죠 사네토미,오쿠보 도시미치,기도다카요시,히로사와 사네오미가 메이지 천황의 에도동행 날짜를 저울질 하면서 전황에따라 정치적 결정을 하게 된다.전쟁은 정치의 연속으로 항상 전쟁수행의 정치적 결정은 교토의 신정부가 주관하게되며,군사적 결정은 에도 대총독부가 결정하게 된다고 보면 되겠다.여담이지만 정치적 결정과 군사적 결정이 서로 상충을 이룰때 어느쪽 파워가 더 세냐고 한다면, 당연히 에도대총독부 보다는 교토 신정부쪽이 최종 전쟁결정권자 파워권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1868.1.21음력날짜로 신정부는 서양6개국(영,프,네,미,독,러)에게 국외중립을 지켜줄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는데 이 서한의 요지는 구미각국에게 천황이 일본국의 원수이며,구막부가 구미 열강과 기존에 맺은 조약은 그대로 승계한다고 하면서 이번 보신전쟁의 내전에서 구막부측에게 무기판매및 대여금지를 요구하며 중립에 서줄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바,서양각국은 이를 수용해 음력 1.25 정식으로 <국외중립론>이 선포된다.그런데 이 <국외중립론>은 이하에서 보게될 하코다테전쟁을 앞두고 기도 다카요시가 앞장서서 요코하마에서 서양6개국의 공사들을 만나 음력 1868.11.28일 <국외중립론>은 철폐되는바,철폐의 목적은 서양으로부터 신정부를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받고,하코다테의 에조공화국의 에노모토 다케아키,오토리 케이스케 세력을 반란군의 위치로 격하시켜 구막부 최후의 저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 1868년 03월 24일 신선조, 코후진무대(甲府鎮撫隊, 혹은 코요진무대甲陽鎮撫隊)로 명명하고 코후로 출발. 오키타는 도중에 에도로 귀환.
[여기서 오키타는 신선조 1번대 조장 오키타 소지를 말하는데 오키타 소지는 이후 1868년 음력 5.30 지병인 폐결핵으로 에도에서 사망함]
**참고로 신선조의 조직체계는 아래와 같다.
참조:신센구미(新撰組) 조직도
국장(局長): 콘도 이사미(近藤勇)
부장(副長): 히지카타 토시죠(土方歳三)
총장(總長): 야마나미 케이스케
참모(参謀): 이토 카시타로(伊東甲子太郎)
일번대조장(一番隊組長): 오키타 소지(沖田総司)
이번대조장(二番隊組長): 나가쿠라 신파치(永倉新八)
삼번대조장(三番隊組長): 사이토 하지메(斎藤一)
사번대조장(四番隊組長): 마츠바라 츄지(松原忠司)
오번대조장(五番隊組長): 다케다 간류사이(武田観柳斎)
육번대조장(六番隊組長): 이노우에 겐사부로(井上源三郎)
칠번대조장(七番隊組長): 다니 산쥬로(谷三十郎)
팔번대조장(八番隊組長): 토도 헤이스케(藤堂平助)
구번대조장(九番隊組長): 스즈키 미카사부로(鈴木三樹三郎)
십번대조장(十番隊組長): 하라다 사노스케(原田左之助)
→ 1868년 03월 29일 코후진무대, 신정부군에게 패배(코슈 카츠누마甲州勝沼 전투). 나가쿠라 신파치(永倉新八), 하라다 사노스케(原田佐之助), 신선조 이탈.
[이 둘이는 신선조를 이탈하여 따로 <정병대>라는 부대를 만들어서 신정부군과 싸우다가 음력날짜로 1868.4.15에 <우쓰노미야전투>에 히지카타 토시조의 탈주군에 합류하여 함께 싸우다가 하라다 사노스케는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정병대에서 탈퇴해 홀로 에도로 돌아가 버린다]
→ 1868년 04월 01일 신정부군, 구 막부보병대(충봉대衝鋒隊) 격파.
[이 전투가 무슨 전투인지는 저 하나님도 모르겠음.아시는분 있으면 댓글 부탁합니다.!!^^전투지역이 명시 안되어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죠??]
→ 1868년 04월 05일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막부육군총재 카츠 카이슈(勝海舟)의 회담.
[이 회담에서 신정부군의 에도성 무혈입성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목숨구명이 집중적으로 주의제로 논의됨.]
→ 곤도, 막부 보병을 모집하여 나가레야마(流山)에 주둔. 직후 신정부군에게 포위되어 자진 투항.
[신선조국장 곤도이사미는 나가레야마에서 신정부군에게 포위되어 할복하려고 했으나 토시조의 설득으로 신정부군에게 투항하여 도쿠가와 막신 오쿠보 야마토인양 행세를 하였는데,기실 곤도 이사미는 코슈 카츠누마전투전에 이미 오쿠보 쓰요시로 개명 했다가 지금은 오쿠보 야마토 행세를 하며,살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에도의 이타바시에 설치된 <도산도진무총독부>에서 심문 받을때,이타바시에 주둔한 사쓰마번 병사중에 신선조대사이자 어릉위사,옛고대사당을 이끈 이토 카시타로의 멤버이기도 했던 카노 미치노스케라는 자가 오쿠보 야마토는 바로 신선조국장 곤도 이사미와 동일 인물이라고 증언함에따라 그 정체가 탄로나 사형선고를 받고 1868.4.25(양력5.1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곤도 이사미의 처형과 관련해서 제가 <신선조>전문가도 아니고,오타쿠는 더더욱 아니지만,사족을 달고 싶다.곤도가 만일 막부신하라는 것으로 인정받았다면 이는 신정부군의 적군이 되므로 이는 전쟁포로가 되어서 당시의 <만국공법>에 비추어 정당한 포로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곤도가 신선조 수괴인 이상 이는 유신지사를 악랄하게 탄압한 국가반란조직의 수괴(요즈음의 조폭두목을 연상하시면 되겠다)가 되므로 이는 전쟁포로가 아니게 되어서 꼼짝없이 사형을 당할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주지하다시피 미마와리구미는 막부에 속하는 공식 교토수호 치안조직이었지만 신센구미는 아이즈번에 속하는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교토수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가 거느리는 사설치안조직이라고 불러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것이다.물론 신선조 역시 위로는 천황을 받들고,옆으로는 막부를 수호하며 아래로는 교토의 질서를 지킨다는 그들의 명분은 가상하지만 역사현장(보신전쟁)의 실제 상황에 닥쳐서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인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귀중한 사례라고 보겠다.제가 곤도 이사미의 처형과 관련해서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당시 히지카타 토시조가 곤도를 구명하기 위해서 카츠 카이슈에게 곤도가 막부신하라는 것을 증언해주는 탄원서를 도산도 진무총독 앞으로 써주기를 부탁받고 카츠 카이슈는 오히려 곤도는 막부신하가 아니라고 증언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바,이에 대해서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사실인지 모르겠다.제가 본 연속드라마<신선조 혈풍록>에서는 제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토시조를 교토수호인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곤도이사미와 히지카타 토시조를 정식 막부신하로 인정하는 임명장인가를 주는 것을 본 것 같은데,이것이 당시 신정부군으로부터 인정 못받았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정말 곤도 이사미의 죽음은 조금 애석하고 안타까운 바가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며,당시 에도시민 역시나 곤도의 처형에 대해서 분통해 하고,애석해하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제가 <신선조>팬도 아닌데,괜히 센티멘탈해져서 주절이 주절이 몇자 보충한다는 것이 두서없이 길어졌네요!!]
→ 1868년 05월 03(음력4.11)일 신정부군, 에도성에 무혈 입성. 요시노부는 미토(水戸)로 출발. 불만을 품은 구 막부군이 속속 에도를 탈출. 히지카타,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합류.
[신정부군이 에도에 무혈입성한 배경에는 당시 주일 영국공사 팍스의 강한 입김이 작용했는바,팍스공사는 당시 요코하마에서의 자신들의 자국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에도에서의 무력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견을 신정부요인과 요로에 강력히 피력하였다 ]
→ 1868년 05월 04일 구막부 육군은 둘로 나뉘어 닛코(日光)로 진군.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秋月登之助)가 지휘하는 선봉군 제 1대는 시모츠마(下妻)로, 히지카타가 지휘하는 제 2대는 시모다테(下館)로 진군. 후발 별동대는 오오토리가 지휘.
→ 1868년 05월 08일 오오토리군, 오야마(小山) 근처에서 신정부군과 전투, 패퇴시킴.
→ 1868년 05월 10일 아키즈키 대, 히지카타 대와 재합류.
→ 1868년 05월 11일 우츠노미야(宇都宮) 전투 발발. 히지카타, 우츠노미야 성 함락.
[아와해전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구막부 해군의 신정부 해군에 대한 싱거운 승리 이래로, 처음으로 구막부 육군이 신정부 육군을 이겨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승리의 달콤함을 맛본 전투임]
→ 1868년 05월 15일 신정부군, 우츠노미야 재공격. 히지카타와 아키즈키는 부상으로 이마이치(今市)에 호송되었다가 아이즈(会津) 이동. 직후 우츠노미야 함락. 구 막부군, 닛코・이치카와 방면으로 퇴각.
[아키즈키는 아이즈로 가서 아이즈전쟁에 합류하며,NHK대하 <야에의 벚꽃>에서는 키타무라 유키야라는 배우가 이 아키즈키역을 맡았음.한편 히지카타는 아이즈로 가서 신선조 3번대 조장 사이토 하지메와 조우함]
→ 1868년 05월 17일 곤도 이사미 참수.[앞에서 자세히 설명했음]
→ 1868년 05월 24일 이치카와(市川)・후나바시(船橋) 전투 발발, 구 막부군(철병대撒兵隊) 패배.
[5.3에도성 개성후 이에 불만을 품은 구막부 장병들 중에는 에도를 탈출하는 자가 속출했는데,그 대표주자로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가이요마루 해군을 이끌고 다테야마로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치가와로,후쿠다 미치나오는 철병대(삿페이대)를 이끌고 기사라즈로 퇴각한다.에도성을 구막부군은 신정부에 내준뒤로 이치가와 후나바시전투와 고이전투.우에노전쟁등을 벌이지만 결국 이 세번의 패배로 구막부의 에도탈환은 좌절되고 간토지방은 완전히 신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음력으로 1868.4.14(양력으로는 5.6) 교토에서 메이지 신정부는 아이즈정벌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오우진무총독 쿠죠 미치타카를 통해서 아이즈번에 며칠 상관으로 아이즈에게도 정식항복을 요구하는 문서가 통고됐을 걸로 보임.+아이즈전쟁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아이즈 말고도 쇼나이번(지금의 야마카타현 츠루오카시)을 조적으로 지목하고,오우지방의 보신전쟁을 벌였는바,아이즈와 쇼나이번은 메이지의 조적의 당사자들이므로 오우에쓰열번 31번의 동맹에는 가담하지 않고 따로 아이즈와 쇼나이 둘이서만 아이즈-쇼나이동맹을 맺었다.그리고 아이즈가 항복하고(양력1868.11.6)그 다음날인 11.7일 쇼나이가 항복함에 따라 도호쿠에서의 보신전쟁은 종결됐다고 본다. 결국 오우지방의 보신전쟁의 시작은 아이즈와 쇼나이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는데,그 두 당사자인 아-쇼도 저항하고 이 지방의 맏형격인 센다이와 요네자와가 아-쇼편을 듬에 따라 시작한 전쟁이라고 봐야겠죠.뿐만 아니라 아이즈와 쇼나이의 편을 들어 메이지 신정부에 반기를 든 에치고의 나카오카번에 대한 항복 통고도 대략 이 시점으로 추측되며 그 이유는 나카오카 가로 가와이 쓰구노스케와 신정부의 군감 이와무라 다카토시와의 오지야 담판(나카오카 침공중지와 아이즈의 사면 요구)이 음력으로 1868.5.2(양력으로 6.21) 있는 걸로 보아 교토신정부는 아이즈방면과 쇼나이방면과 에치고방면으로 동시에 군대파병을 1868.5월 초에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자료상 오우진무총독은 쿠죠 미치타카이고 호쿠리쿠(호쿠에쓰)진무총독은 타카쿠라 나가치사이고 쿠죠의 참모로는 세라슈조,이타카키 다이스케 ,,,타카쿠라의 참모로는 야마카타 아리토모와 쿠로다 키요타카가 나오네요]
→ 1868년 06월 09일 오우진무총독(奥羽鎮撫総督) 쿠죠 미치타카(九条道孝)의 참모로 오슈(奥州) 등지에게 아이즈 침공을 독촉하던 세라 슈조(世良修蔵)가 암살됨으로써 북부는 신정부에 대한 항거 쪽으로 일거에 기움.
[이하 내용이 소위 <야에의 벚꽃>의 주무대인 <아이즈 전쟁>인바,이에 대해서 사전 예비설명을 조금 하렵니다.신정부는 요시노부와 함께 조적처분(도바 후시미 전투후 아이즈번은 1868.1.10음력날짜로 조적 2등급 처분을 받음)을 받은 아이즈번을 정복하기 위해서 오우진무총독이었던 쿠죠 미치타카 일행을 센다이에 파견한데 이어 우에노전쟁을 종결시키자 마자 본격적으로 신지휘부와 지원병력을 늘려서 아이즈를 비롯한 동북지방과 에치고를 비롯한 호쿠에쓰(북월)지역에 대한 토벌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그러나 아이즈번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희망하는 센다이번과 요네자와번에 대한 죠슈출신의 강경파참모 세라 슈조의 오만방자한 언사(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의 참수와 아이즈의 거성인 와카마츠성을 무조건 개성하지 않으면 아이즈의 항복사죄로 볼수 없다)에 불만을 품고 1868.음력 윤4.19일 후쿠시마에서 센다이번사들이 세라슈조를 살해하고 만다.이 세라슈조의 살해시점에서 부터를 신정부의 동북지방 공략의 본격적인 시발시점으로 보기도 한다.그리고 곧이어 음력 5.3 센다이번 시로이시에서 오우지방 번들은 오우열번동맹을 결성하여 신정부군과 대치하게된다. 이 오우열번 동맹에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나카오카번등 호쿠에쓰 제번등이 음력 5.6일 합류하면서 에치고를 비롯한 동북지방 31개번은 오우에쓰열번동맹을 결성하고 신정부에 저항하게 된다]
→ 1868년 06월 10일 구 막부군, 시라카와(白川) 성 점령.
[신정부군의 오우에쓰 침공 루트는 세갈래인바 하나는 닛꼬구치를 통해서 아이즈 와카마츠로 진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라카와구치를 통해서 니혼마츠로 진격하는 것이며, 마지막 세번째루트는 에치고구치를 통해서 나카오카로 진격하는 것이었다.신정부군의 최종목표는 아이즈를 정복하는 것인바, 아이즈의 양입술과 같은 지역이 바로 니이카타,나카오카와 니혼마츠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듯 하며, 기실 아이즈가 신정부에게 최종 패배하게 되는 이유 역시나 니이카타,나카오카와 니혼마츠가 신정부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더하나 보충설명한다면 죠슈의 아이즈에대한 원한이 더해져서 삿초로는 최종공격 목적지가 아이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죠슈는 제가 앞서의 메이지 이신 바쿠마츠 15년 약사에서도 기술하였듯이 바쿠마츠 15년사 과정에서 8.18정변,이케다야사건,금문의변,제1차죠슈정벌등으로 아이즈에게 당한 보복을 기어코 이번 아이즈전쟁으로 되갚아주겠다는 복수전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고 봐야 할것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죠슈=야마구치현과 아이즈=후쿠시마현의 지역감정의 응어리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 1868년 06월 11일 신정부군, 이마이치 공략 개시. 이후 10월 8일 와카마츠 성하 돌입까지 닛코구치(日光口) 전투는 계속됨.
[와카마츠성은 아이즈의 거성으로 와카마츠성은 일반적인 공식명칭의 성이름이고 아이즈인들은 와카마츠성을 츠루가(두루미)성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이 츠루가성은 일본의 모든 성중에서 유일하게 혼마루의 지붕이 붉은 기와로 되어 있다고 함]
→ 1868년 06월 20일 신정부군 시라카와 성 탈환. 이후 9월까지 구 막부군은 시라카와 탈환을 계속 시도하였으나 끝끝내 실패(시라카와구치白河口 전투).
[시라카와구치가 뚫림에 따라 니혼마츠성까지 신정부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 1868년 06월 22일 센다이를 맹주, 요네자와(米沢)를 준맹주로 하는 총 31개 번에 의한 오슈・우슈・엣슈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 성립.
[앞에서 이미 설명했고요,6.22일은 양력이고 음력날짜로는 1868.5.6]
→ 1868년 07월 04일(음력 5.15)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창의대(彰義隊)를 공격. 하루만에 괴멸시킴(우에노 전쟁上野戦争).
[오무라 마스지로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제가 앞서 메이신 이신 바쿠마츠 15년사에서
잠깐 언급했던 인물이고요,이자가 사이고 다카모리와 더불어 보신전쟁에서 신정부군의 모든 작전을 기획한자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며,이 우에노 전쟁에서 커다란 전력손실없이 구막부군을 무너뜨림에따라 신정부군은 간토지방을 확실히 손아귀에 넣을수 있었고,남은 전력과 무기를 오우에쓰정벌에 사용할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실어나를 배가 부족하고 없었다는 것이 신정부의 전쟁수행의 유일한 애로라면 애로라고 봐야 할것이다.우에노전쟁과 관련해서 여담 몇마디 한다면 오무라가 쇼기타이(창의대)에 대한 우에노에서의 방어진지 진형을 마치고,이 전쟁은 오후 5시면 끝날거라고 예측했는데,실지로 전투가 오후 5시경 종결되었다고 하며,또한 쇼기타이의 퇴각경로는 어느방향이 될거라고도 예측했는데,실지로 오무라가 예측한 방향대로 쇼기타이가 퇴각했다고 한다.이번 저의 이 보신전쟁관련 게시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보신전쟁의 각전투의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어서 조금 심심하고 미진하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이부분은 인터넷검색으로 확인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또한 저역시 그때 그때마다 한번씩 궁금해서 확인해 볼뿐,또 확인한 그 순간에만 전투상황을 조금 기억할뿐,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다 까먹어 버립니다.그리고 현재 인터넷상 <아이즈전쟁>과 관련해서는 전투정리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는 것도 보신전쟁 전투사항을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애로라면 애로라고 말할수 있을것 같습니다.더 한마디 덧붙인다면 보신전쟁 전투시 신정부군과 구막부군이 사용한 무기체계 역시나 기술이 되어야 하는데 이부분이 전부 빠져 있다는 것 역시 저 역시나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현재 인터넷상 양진영이 사용한 무기종류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할수는 있으나 제가 무기사와 관련해서는 전혀 문외한인지라 과연 이 무기들의 성능은 어떠하고 이 무기들이 실제 전투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로 이 무기체계와 관련한 부분도 본 게시글에서 전부 제외하였음을 널리 양지하시고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음력.1868.6.13일 교토신정부는 우에노전쟁 승리후 이 군대를 어디로 지원출병 시킬것인가를 두고 논쟁끝에 기도 다카요시의 의견이 관철되어 호쿠에쓰로 출병시키기로 최종결정한다.이 결정은 그 후의 보신전쟁의 결과를 두고 봤을 때 잘한 결정으로 드러나는바,기실 오우에쓰열번동맹은 니이카타항에서 무기탄약조달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제압하는 것이 신정부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니이카타를 제압함으로서 쇼나이방면및 아가노강을 통하는 아이즈방면으로의 루트를 신정부군이 장악할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구막부군측도 아이즈와 요네자와번이 연합하여 니이카타항의 방어와 경비를 주력하고 있었다.나카오카와 니이카타에서는 신정부군과 나카오카를 비롯 구 막부군이 음력 5.2(양력으로 6.21일부터)나카오카성이 함락되는 음력7.29(양력으로 9.17일까지)석달동안 서로의 승패를 가늠할수 없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게 된다.아마 이 싸움에서 신정부군이 패했다면 보신전쟁의 결과랄까 전쟁판도가 어떻게 변했을지 가끔씩 저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그리고 이 에치고가 신정부군의 손아귀에 들어옴에 따라 신정부군은 안심하고 오우(도호쿠)공략,더 명시적으로는 아이즈 공격에 주력할수 있게 된다.오우지방(오슈=현재의 후쿠시마,미야기,이와테,아오모리:우슈=야마카타,아키타현을 지칭함)에 대한 신정부의 지원출병은 음력으로 1868.7.20일 결정되지만, 나카오카전투상황이 신정부군에게 워낙 심각하게 돌아가므로,현지에서의 병력 증파요청에 접한 신정부로서는 나카오카에서 더 이상의 신정부군의 패배는 관군사기에도 영향이 있다고 보고, 우슈에 파견예정이었던 제번병력중의 일부를 나카오카로 증파시킬수 밖에 없었다.참고로 신정부의 나카오카의 공격주력은 기존에 죠슈가 주로 전담하고 있었다.이 추가 병력 증파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정부군은 음력1868.7.29일 나카오카성을 함락하고 다음날인 음력1868.8.1일 니이카타항을 점령함에 따라 호쿠에쓰지역에서의 전쟁을 종결짓고 오우지방(도호쿠지방)에로의 전쟁에 주력하게 된다.]
→ 1868년 08월 29일 동맹의 새 맹주, 린노우지노미야 코우켄 법친왕(輪王寺宮公現法親王, 훗날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北白川宮能久親王)이 열번회의에 출석. 북부정권(北部政権) 성립. [얼굴마담이 필요해서 황족중에서 한명을 내세움]
→ 1868년 09월 15일(음력.7.27) 니혼마츠(二本松) 전투 발발. 신정부군, 니혼마츠 성을 함락한 후 와카마츠로 진군. 신정부군, 나가오카(長岡) 성(양력.9.17) 및 요네자와번의 니이가타(新潟) 함락(양력.9.18)(호쿠에츠 전쟁北越戦争).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니혼마츠,나카오카,니이카타가 신정부 수중에 들어감에 따라 아이즈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리게 되며 신정부군은 모든 전력을 아이즈에 쏟게되고 또 아이즈는 아이즈대로 아이즈다마시(혼)를 내세우며 강렬히 저항함에 따라 <아이즈의 비극>이 생겨나게 됨.이는 2007년 TV아사히<백호대>나 ,2013년 방영된 TV도쿄<백호대>나 모두 드라마 단골메뉴이며 NHK대하<야에의 벚꽃>에서도 생생하게 그려진걸로 알고있음.아이즈전쟁에서 유일하게 가로 사이고 타노모 만이 아이즈전쟁 개시전부터 무조건 항복을 주창했으나 젊은 가신들의 주전론에 밀려서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로부터 사랑의,정많은,자비의 팽당하고 2진으로 물러남.]
→ 1868년 09월 16일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구 막부함대를 이끌고 에도를 탈출. 북부정부의 구원 요청을 무시함.
[에노모토는 이미 음력4.11(양력5.3)에도성이 신정부군에 들어가자 1차 에도만 탈출을 감행한바 있고,음력8.19일(양력9.16일)은 2차탈출이 된다. 주함 가이요마루와 부속군함 7척을 이끌고 시나가와만에서 센다이항으로 들어간 것을 에노모토의 제2차 에도 탈출로 보며, 에노모토는 센다이에서 구막부군대를 싣고 1868.11.25일 하코다테를 향한 세번째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 1868년 10월 06일 보나리 고개(母成峠) 전투 발발. 구 막부군 대패. 히지카타는 쇼나이(庄内)로 원군을 요청하러 떠났으나 실패하고 센다이로 곧바로 이전.
[아이즈전쟁의 첫개시는 보나리고개 전투인데 이 보나리고개가 뚫림에 따라 신정부군은 와카마츠 성하마을로 들어올수 있게 된 것이다.이 보나리고개전투후 성하마을(죠카마치)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쥬라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신정부군이 이 쥬라쿠다리를 건너기전에 아이즈군이 이 다리를 먼저 파괴했으면 신정부군의 츠루가성 공격을 조금 지연시킬수 있었는데,아이즈로서는 초반전투에서 뼈아픈 전술적 실기를 하였다고 봐야된다.이 보나리 고개전투와 앞서의 시라카와 전투까지는 히지카타 토시조도 아픈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함]
→ 1868년 10월 08일 신정부군, 아이즈 와카마츠(若松)의 성하(城下)까지 돌입. 이후 아이즈번은 와카마츠 성에서 농성전에 들어감. 이때 사이토 하지메를 비롯한 신선조 대사 13명이 센다이 이전을 거부하고 아이즈에 잔류.
[와카마츠성,아이즈인들이 즐겨불렀다는 츠루가성에 3000명이 피신하여 무려 1달동안 신정부군의 포격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바,여기서 바로 야에의 잔다르크전설이 나오게 된다.야에는 아이즈의 포병사범이었던 오빠 야마모토 카쿠마의 일찍부터 교육으로 소총,장총, 할것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룰줄 알았으며.오빠 카쿠마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의 포로가 되어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즈전쟁에서 야에는 오빠대신으로 포병부대와 소총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됨. NHK대하<야에의 벚꽃>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아쉽게도 보지 못했음+신선조 3번대 조장인 사이토 하지메를 비롯한 신선조대사의 츠루가성에서의 활약 역시 궁금하네요.]
→ 10월 중순부터 열번동맹에 참가한 번들이 속속 신정부군에게 항복하기 시작함.
[음력날짜로 나카오카7.29,니이카타8.1.
요네자와9.4,센다이9.15,아이즈가 마지막으로 음력날짜로 9.22일(양력으로는 11.6일) 항복하게 됨]
→ 센다이로 퇴각한 구 막부군의 잔병, 에노모토와 합류.
[앞에서 이미 잠깐 설명했지만 히지카타 토시조는 아이즈에 잠깐 머무르기는 했으나,이는 우쓰노미야전투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이 컸으며,토시조는 아픈몸을 이끌고 시라카와성 탈환전투와 보나리고개 전투까지 참가하고 , 쇼나이번으로 가서 아이즈 지원병력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토시조는 아이즈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곧바로 센다이로 가서 에노모토,오토리와 합류함]
→ 1868년 11월 06일 아이즈번, 신정부군에게 항복.
[마츠다이라 가타모리가 번민의 희생을 더이상 두고볼수 없어(+앞에서 보았다시피 자신들을 양입술처럼 보호해 주었던 니,나,니가 신정부의 수중에 떨어져 나가고,뿐만 아니라 신정부가 처음부터 아이즈항복을 요구했을때 맏형님처럼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오우에쓰동맹의 맹주 센다이와 준맹주 요네자와마저 항복한 마당에 아이즈로서는 더 버틸힘이, 의지할 힘이 사라졌다고 봐야겠죠)무조건 항복결심하고 항복백기를 성 혼마루에 걸고 아이즈전쟁을 지휘한 도사출신의 신정부군 총독참모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항복함.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는 이후 돗토리현으로 유폐가 신정부로부터 결정되고,10년 유폐후, 1880년 유폐에서 풀려나며, 음력 1893.12.5 도쿄 메구로 자택에서 폐렴으로 향년 59세로 사망함.가독은 장남 마츠다이라 가타하루에 의해서 승계되어,1869년 판적봉환시에 도나미번(혼슈 최북단 시모키타반도 3만석)을 하사받았으나,실지 석고는 7천석도 안되는 척박한 땅이었다고 하며 ,이 하사받은 도나미번 조차도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다시 신정부에게 빼앗기고, 이 도나미번은 히로사키현으로 개명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아오모리현으로 편입됨.아오모리에서는 히로사키성이 아주 빼어나게 예쁜 성으로 유명함.]
→ 1868년 11월 07일 열번동맹 최후의 번인 쇼나이번이 항복. 열번동맹은 완전히 와해됨.
[이로써 신정부는 동북지방을 완전히 평정함]
**이하는 하코다테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함.
→ 1868년 11월 25일 히지카타, 에노모토・오오토리 등 구 막부군과 함께 가이요마루(開陽丸)로 센다이를 출항.
→ 1868년 12월 03일 카이요마루에 승선한 구 막부육군, 에조치(蝦夷地=홋카이도) 와시노키(鷲ノ木)에 상륙.
→ 1868년 12월 08일 하코다테(函館) 및 고료카쿠(五稜郭) 점령. 마쯔마에(松前) 번주 노리히로(徳広)에게 협력을 요청하나 묵살당함. 마쯔마에 공략 결정.
→ 1868년 12월 10일 히지카타, 70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마쯔마에로 진군.
→ 1868년 12월 18일 히지카타군, 마쯔마에성 함락. 이후 24일부터 패주한 마쯔마에 번병을 추격하여 오오타키(大瀧) 및 에사시(江差)로 진군.
→ 1868년 12월 28일 에사시로 진군한 히지카타군을 원호하기 위해 출항했던 카이요마루 좌초.
→ 1868년 12월 29일 히지카타, 저항선을 돌파해 에사시에 입성. 카이요마루, 히지카타와 에노모토가 지켜보는 가운데 침몰.
→ 1869년 01월 04일 에조치 평정 완료.
→ 1869년 01월 27일 에노모토, 각국 영사를 초빙하여 에조치평정축하회를 개최. 에조공화국(蝦夷共和国=하코다테 정권函館政権) 출범. 히지카타, 선거에서 육군부사령관(陸軍奉行並)으로 선출됨.
→ 4월경, 신정부군, 에조치를 향해 진군.
[신정부는 미국으로 부터 양도받은 제철군함과 제번으로 부터 차출된 군함으로 함대를 편성하여 음력날짜로1869.3.9 시나가와를 떠나 하코다테를 향하여 출항하게 됨.하코다테를 향하던 도중 중간기착지인 미야코만에서 음력3.25(양력5.6) 에노모토군함의 기습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고 아오모리에서 대기중이던 관군을 승선시켜 음력4.6(양력5.20)하코다테해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무사히 오토베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이후 하코다테 지상전을 구막부군과 벌이게 된다]
→ 1869년 05월 06일 구 막부군, 미야코만(宮古湾)에 기항한 스톤월 탈취 작전(미야코만 해전/아보르다쥐 보딩)에 실패.
→ 1869년 05월 20일 신정부군 함대, 하코다테 해전에서 구 막부함대를 격파. 신정부군, 오토베(乙部)에 상륙 개시, 마쯔마에 성 탈환. 후타마타구치(二股口)를 공격(제 1차 후타마타구치 전투). 히지카타군, 16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방어 성공.
→ 1869년 06월 03일 신정부군, 에사시에 상륙, 후타마타구치를 재공격(제 2차 후타마타구치 전투).
→ 1869년 06월 04일 히지카타군, 재방어 성공. 그러나 오오토리군이 키코나이(木古内)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정부군이 진군하자 히지카타군은 고립을 피해 퇴각.
→ 1869년 06월 20일 신정부군, 하코다테 총공격 개시. 신선조가 수비하던 벤텐요새(弁天台場)가 포위되자 신정부군함 아사히(朝陽)가 격침된 틈을 노려 히지카타 출진, 잇폰기 관문(一本木関門) 근처에서 격전 중 전사.
→ 1869년 06월 27일 에조공화국 수뇌부, 신정부군에게 항복. 하코다테 정권 멸망. 보신전쟁 종결.
<보충>바쿠마츠(1853~1867)와 메이지이신(1868~1878) 주요사건 년표정리:
[출처]http://www.hiten.net/jagdtiger/wordpress/
바쿠마츠(幕末) ・ 메이지(明治) 연표(年表):맨끝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항만 저 하나님이 추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