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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적 휴머니즘과 시적수필이 융합 된 관조의 세계
<이주리 수필세계)
<㥁泉> 라 병 훈
1. 머릿말
이주리의 <고통과의 하이파이브>,<아름다운 이별>,<천지가 꽃이다>, <망해사>,<촛불>을 읽었다. 수필 감상은 자기고백을 통한 성찰과 체험문학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작가의 체험을 들춰내며 글 몸속으로 풍덩 빠져야만 그 체험의 의미 찾기를 통한 작가의 인식세계를 유추 해 내는 일이 가능 할 일이다. 다행히도 다섯 작품 글 곳곳에 독자가 찾아 읽을 몫을 여유롭게 남겨 둔 덕택으로 그 사유 공간을 부분적이나마 더듬어 낼 수 있었다. 배려에 감사드린다. 개성 강한 다양한 소재가 한결같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절제 된 언어로 각 소재에 대한 작가의 진솔한 독백이 용해되어 있는 이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음은 평자의 입장에서 값진 경험이라 아니 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이주리 작가의 뼈 속까지 흐르는 휴머니즘의 발원지는 어디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굳이 수필쓰기의 요체인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서정시가 주로 사물을 통한 체험의 순수한 미적 형상화라면 수필은 자신이 살아 온 체험을 통한 고백과 성찰이어야 할 것이다. 이 두 줄기 체험의 도도한 강물이 하나로 합류되어 안식의 나래를 펴는 그 어느 바닷가 모래섬이 바로 이주리 휴머니즘의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배 맞아 도망간 무책임한 남편을
시퍼런 자존심으로 보내고
서른여덟에 아이 둘 남겨진 경숙이
그녀의 가슴은 쭉 짜면 뚝뚝 떨어질만큼
온통 수분을 머금었다
<중략>
그녀는 태풍과 한바탕 싸움을 끝내고
당당히 태풍의 사과를 받아냈으며
비로소 바람에 날개를 달아 행복한 항해를 시작했다.
후회와 회한이 더글더글 열린 시간의 장화에 발이 찔리지도 않았다
비로소 거대한 태풍의 눈이 감겼다
-이주리 <태풍> 중에서 -
남편 없이도 약한 여자가 아니라 태풍이라는 아픔에 맞서 굴하지 아니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내고 있는 이 세상의 강하디 강한 어미들인 경숙에게 바치는 봉헌시를 인용 해 본다. 그렇다. 모래섬에서 홀로 두 자식을 키워내야 했을 힘들고 가난했던 젊은 날의 고독은 어미가 감당해야 했을 절절한 체험의 강물이요 눈물바다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오로지 가슴의 말로만 봉인된 채 오랜 세월 긴 속울음과 침묵의 사리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울음과 침묵은 오늘날 이주리 작가를 표상하는 시와 수필 문학의 모태가 되어 인간애를 추구하는 모성적 휴머니즘을 더욱 더 키워나가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이주리가 추구 해 온 모성적 휴머니즘과 시적수필이 융합된 관조의 세계는 이 다섯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개성적인 무늬와 색상으로 도드라져 보이므로 이를 토대로 작품론을 구성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가 독자를 배려하여 남겨 둔 체험적 고백이라는 사유의 공간으로 들어가 다음과 같이 ”사색과 통찰“이라는 두 개의 큰 물줄기를 더듬어 봄으로써 이주리 작품세계를 부분적이나마 경험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미당가의 3대 시 혈맥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자화상”에서 외조부께서 토로했던 고통으로서의 “바람”과 맥을 같이하여 자신 인생의 팔 할을 “이별”로 표상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문학세계를 통해 공감 할 수 있는 이 “이별”은 “나눔과 공생”이라는 휴머니즘과 융합되어 사색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독자들이 반기며 역설적인“아름다운 이별”로 복기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시문학계에선 그런 휴머니즘적인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내지 않되 묵묵히 자기만의 문학세계를 구축 해 나아가는 이단아적인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휴머니스트이자 이별시인”이 우리시대의 수필작가로서 쏟아냈을 자기 고백적 체험이 수필이라는 건조한 프리즘을 통해 어떠한 사유의 색깔과 무늬로 굴절되고 파문되어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 그 문학적 사색에 동참 해 볼일이다. <고통과의 하이파이브>,<아름다운 이별>,<천지가 꽃이다>,가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시적수필이라는 멋스러운 문학적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모름지기 시가 체험에서 우러난 시어와 시어들이 머리에서 언어로 결합되어 몸에서 언어로 춤추게 하는 장르라 한다면, 수필은 문단과 문단의 조합으로 사유할 가치 있는 인생론적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 내야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수필의 조건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시적 요소가 풍미되어 있는 수필이야 말로 독자의 교감신경의 끈을 흔들어 대기에 충분하여 맛있게 읽히는 수필의 반열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 그가 시에서와는 달리 자기를 충분히 들어내는 고백적 담론을 수필이라는 하나의 품격 있는 문학밥상에 과연 어떻게 시적인 양념요소를 가미하며 풍미스럽게 담아 낼 수 있을지 그 문학적 통찰을 경험 해 볼일이다. <망해사> <촛불>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2. 모성적 휴머니즘으로 표백된 사색과 응시
<고통과 하이파이브>는 진솔한 자기 고백적 직장체험을 통해 그물코처럼 얽힌 청년실업의 사회 문제를 다룬다. “나눔과 공생”이라는 고통분담을 통해 해결하고자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사회인식의 외침이 돋보인다. 작품을 통해 공감인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수필은 이미 수필이 아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수필의 “사회문제 참여”라는 공감 인식과 참신한 소재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뇌와 사색과 응시가 그의 분신일 휴머니즘과 융합되어 있는 점이다. 어찌 보면 모성적 휴머니스트인 작가의 숙명적인 시선이요 성찰이기도 할 것이요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이주리 수필이 주는 자기다운 문학적 개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인한 전지, 마음껏 햇빛 속에 가지를 펼치지 못하고, 마음속에 온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네모반듯한 기준만 있는
정원사에게 싹둑싹둑 삭발당한 목련....저 획일적인 동그란 틀,틀,틀 <중략> 얼마나 안으로 안으로 몸부림 쳤으면
저리 몽글몽글 사리를 달고 있을까 ? -이 주리 <고통과 하이파이브> 중에서 -
직장 화단에서 우연히 발견 된 정원사에게 삭발당한 하얀 목련꽃과의 조우는 수필가의 예리한 관조와 사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의 인간애적인 시선은 획일적인 사회구조의 틀 속에서 오로지 삶을 위해 감내하며 살아 온 자신의 고통을 더듬을 여유도 없이 이내 실직자와 일용근로자들의 고통스러움의 산물인 사리들을 먼저 어루만지려 한다. 수필작가로서 자기 속의 진실 된 자기 초월을 통해 “나눔과 공생”의 철학적 미학으로 자기감정을 여과없이 승화시키려 하고 있다. 작가가 허수경의 시 “공터의 사랑”을 인용하고 있듯이 “영혼은 까맣게 탈진했어도 저녘 어스름에 상처를 딛고 핀 환한 꽃”으로서의 하얀 목련이자 자아이기를 소망하며 이 세상 청년실업자들의 그 몽글몽글한 사리들을 애증으로 쓰다듬으며 담대하게 외치는 저 하이파이브를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자문 해 볼일이다. “품격 있는 성찰 수필”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애타정신은 서두에서 언급한 오랜 세월 긴 속울음과 침묵의 사리를 간직하고 있기에 가능할 일이다. 수필이 모름지기 자기만의 개성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문학이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자기 고백적 사유를 통해 아름다운 사회참여라는 인생론적 가치도 더불어 승화시켜 낼 수 있다면 멋진 수필 쓰기에 성공 할 수 있지 않을까?
<고통과의 하이파이브> 가 청년실업문제를 통해 본 사회적 고뇌를 어루만지는 고백성사였다면 <아름다운 이별>은 인간적 고뇌일 수밖에 없는 헤어짐의 문제를 아름다움이라는 역설적 관조로 글속에 녹여내는 소재의 형상화 재치가 돋보인다. 무릇 수필이 붓 가는대로 자유롭게 쓴 것처럼 써야 할 일이지만, 글 속에 자기감정을 절제하면서 체험적인 고백사를 진솔하게 여과 없이 문학적으로 풀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글쓰기를 떠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오늘날 작가가 수필문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소위 “읽히는 수필”을 쓴다는데 있다. 그 열쇠는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진솔한 자기 고백” 글쓰기라는 타고 난 재치와 기교에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에서처럼 문장 속에 개인적 사유와 철학을 진솔하게 녹여 낼 수만 있다면 수필의 전형인 “고백문학”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 할 것이다.
거칠고 마른 손,한평생의 행한 궤적이 한사람의 역사처럼 고스란히 어려 있는 손, 손의 표정이 얼굴의 표정보다 기억
속에 더 오래 각인 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주리 <아름다운 이별> 중에서 -
작가는 자신 인생의 팔 할이 “이별”임을 고백하고 있음은 이미 적었다. 흔들 의자위에 올려 져 있던 거칠고 마른 어머니의 손을 통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별에 대한 회한을 통해 그라시안의 말처럼 “태어난 모든 것은 기약조차 없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별에 대한 체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내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안고 있는 사내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준비되지 않은 운명적 헤어짐은 결국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는 관념을 알면서 ”이별의 역설적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작가 자신이 겪어야 했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편한 이별의 모습 또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아픈 감정을 원색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면이 없지 않으나 시와는 달리 수필을 대하는 작가의 자기다운 개성을 꽃피우는 일이기에 자연스럽다.
꽂은 시간과 이별한다. 미처 준비되지 않았다고 떼를 쓴 적이 없다. 그저 묵묵히 꽃을 피우고 순순히 계절과 이별하는
꽃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름다운 이별은 그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물주고 벌레 잡아주고 가꾸는
자신의 마음자리에서 꽃 피듯 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이주리 <아름다운 이별> 중에서 -
이처럼 운명적인 또는 비운명적인 이별이든 헤어짐은 가슴 아픈 일임에도 작가는 역설적인 미학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꽃과 시간과의 이별을 통해 아름다운 이별의 진리를 비로소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작가 60인생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는 <이별>의 체험에 대한 사색과 통찰이 있기에 가능할 일이다.
<천지가 꽃이다 > 역시 <아름다운 이별>일 수도 있는 ”죽음의 미학“을 ”시간의 순리“라는 철학적 인식으로 밥상 차려 내놓고 있는 따스한 명상수필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이 갖는 자유분방함이 반전을 도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독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그들의 다양한 느낌표의 나눔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생의 지혜를 깨우쳐 가는 상호 공감의 장을 할애하여 글속에 남겨두려고 애쓴 흔적이 역역하다. 독자를 위해 차려진 작가의 배려 된 그 공간은 지리산 산수유 꽃 천지인 환장할 어느 봄날로 안내 한다.
주체 할 수 없이 자지러지게 환한 이 봄날 천지가 노란색으로 환한 봄날 난 왜 ”죽음“을 떠 올리는가 ?
-이주리 <천지가 꽃이다> 중에서 -
작가가 체험한 이 환장할 봄날의 교태는 황당하게도 ”죽음“이라는 철학적 문제에 촉수를 들이대고 만다.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사색과 응시가 날카롭다. 황석영 소설 속 간접경험을 통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1405호 사형수를 통해 <아름다운 이별>에 대해 감화를 받으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오직 유예 받은 시간만이 진실이며 따라서 생은 단순한 점과 선들의 줄지은 보행만 있을 뿐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독자와 나누고 싶어한다. 면접시험에서 떨어진 딸의 고통을 쓰다듬으며 <고통과의 하이파이브>를 외치는 모정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애증으로 쓰다듬는 문학이 곧 수필임을 독자들은 느꼈으리라.
3. 시적 수필로 담아 낸 인생철학의 고백성사
<망해사>를 통해 전형적인 시적요소가 가미된 아름다운 수필의 맛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인생철학을 함께 담아 낸 고백이기에 멋스럽기까지 하다. 망해사 사찰 앞 천년 고목이 된 느티나무를 통해 오로지 마음속으로만 삭히고 인내해야 했을 고통의 세월의 흔적인 사리 고드름과 누각의 천년 침묵의 종은 곧 작가 자신의 투영이며 <고통과 하이파이브>에서 만났던 하얀 목련의 몽글몽글한 ”사리“와 도라지 꽃 속에 ”봉인된 가슴의 말“로 환치되어 시어적인 감정의 더미를 이룬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통해 공감 했듯이 이주리의 수필은 사물과 장소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자기감정의 적절한 절제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넘어 시적요소를 통해 미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할 일이다. 특히 인생 삶의 한계와 운명론을 다룸에 있어 체험과 이미지 구성의 절묘한 배합을 통해 자기만의 개성적인 수필영역을 구축해 가고 있다. 수필문학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다. 말하자면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정적 수필과 사유적 수필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필력의 발현이 그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문장의 기교면에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시적 요소를 가미시킬 수 있는 수필 쓰기가 이주리 작가의 진면목을 대변 해 주는 문학적 재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년, 만년 침묵 끝에 득음하던 날
그 가여운 응시도
욕정의 오래 참음도
풍경도 없는 네 귀퉁이 처마에 곱게 묻고
허공에 매단 비문도 없는 무덤하나
망해사에 두고 올거라네
-이주리 <망해사> 중에서 -
작가는 <망해사>라는 시를 통해 수필형식에서는 이끌어 낼 수 없었던 망해사의 절절한 아픔이자 자신의 아픔이라는 자기감정의 시선을 억제하며 드러내 보이고 있다. 수필을 통해 독자와 공감할 ”사유“를 서정적 이미지로 그려내고 시적요소를 풍미시킨 시리도록 아름다운 수필이다. 망해사의 아픔은 <고통과의 하이파이브>를 하는 아픔 일게다. 즉, 서두에서 짚어 본 ”가슴의 말로만 봉인된 채 오랜 세월 긴 속울음과 침묵의 사리“로부터 돋아난 작가 자신의 인고의 아픔으로 환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감정을 순수하게 미화시킬 수 있다면 맛있는 수필로 요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수필에서의 ”자기감정“의 억제 또는 꼬리를 어디쯤에서 잘라 내 버려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서정적 수필이 대세인 현실에서 사유적 수필이 그 영역을 구축 해 나가는데 있어서 지향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작가의 눈에 비친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워 밝히는 숭고한 희생의 이미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감수해야 할 예정된 ”내면의 에너지로서의 희생“이다. 이쯤에서도 작가의 인식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독자라면 소재에 대한 사색과 응시가 궤변적으로 들릴 수 있다.
나도 너처럼 뼈까지 타버린 어둠의 가슴에 갇혀 깜빡이며 사위하고 있다
-이주리 <촛불> 중에서 -
촛불처럼 사위어 가는 홀로 껌뻑거리는 자화상. 그 저변에는 융합되어야 빛을 발하는 모든 불의 속성과는 달리 유독 혼자 타기를 원하는 촛불은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아름다운 이별>같은 사리가 돋아나는 인고의 삶이 농축 된 고백성사로 인해 독자는 비로소 그 궤변이 이해가 가고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이처럼 이주리 시적수필은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슬픔“을 지닌 인생고백의 미학적 서사시로 조용히 다가와 우리를 다독이는 휴머니티로 호흡을 같이하려 한다.
나는 상처받은 채, 존재가치를 무시당한 채 오직 홀로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적당히 둥그려져서 융합되는 삶의
방식을 혐오한다. 불꽃처럼 처절히 홀로 타고 싶다. -이주리 <촛불> 중에서 -
홀로 앉은 식탁 위 소주잔에 비친 독백과 회한은 촛불처럼 희생보다는 내면의 에너지로 홀로 버텨온 삶의 궤적들을 어루만지며 다만 조용히 다독여지고 있었다. 이 다섯 편의 순전한 자기체험의 고백사를 풀어 놓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불꽃처럼 처절히 홀로 타야만 하는 자신을 애증으로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아포리즘 처럼 ”촛불은 다만 위쪽을 향해 흐르는 모래시계임“을 각인하면서...”
4. 맺음말
체험을 통한 사색과 철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멋스러운 수필은 어떤 모습이어 할까? 나아가 아름다움이 있되 천박하지 않고 우리의 귓가에 진실만을 나지막하게 고백하고 속삭임 할 수 있는 진정한 수필의 모습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주리 작가가 진중하게 묻고 있는 질문의 요체였다. 결론적으로 이 다섯 작품의 사색 공간을 두 갈래로 나누어 거닐어 본 결과 건조한 수필이라는 프리즘 효과의 기대치 만족은 물론 촉촉한 고백적 담론으로서의 시적인 수필의 멋스러움에 대해 평자로서 만족한다.
구체적으로 휴머니즘으로 표백된 사색과 응시를 접할 수 있었고, 시적 수필로 담아 낸 인생철학의 고백성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이주리 수필의 작품론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 할 수 있겠다. 본 수필 작품들을 대하는 독자들의 문학적 촉수는 어디쯤에 닿아 있을까? 그것은 온전한 독자 자신의 몫이다. 수필은 독자의 참여로 말미암아 완성된다고 한다. 추론컨대 독자들은 작가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사유의 공간에 들어 자유롭게 헤엄치며 지금까지 본 작품론에서 언급했던 사색과 통찰에 덧댈 수 있는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내시기를 기대한다. 끝.
첫댓글 글은 독자의 참여로 완성된다는 귀결에 적극 동의 합니다.
작가의 강한 이미지에서 오는 약함의 이별로 입니다.
결국은 약할 때 강함을 가지는 우리들의 어머니
모든이를 지키고자 하는 중보적인 깊은 사랑이 스며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