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이자 조폭 간부. 독특한 컨셉의 '생활 누아르' <우아한 세계>가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재림 감독과 송강호가 아이디어부터 함께 공유해 만들어낸 그 세계의 마지막 촬영현장에 다녀왔다.
11월 12일 일요일 오후. 서울 청계천 9가 사거리의 한 공사 중인 건물 옥상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다. 11층 높이의 보기만 해도 아찔한 좁은 공간에서 대체 무얼 하는 걸까? 아직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한 건물의 11층까지 계단을 돌고 돌아 올라가니, 영화촬영이 한창이다.
이곳은 송강호와 <연애의 목적>으로 주목받은 한재림 감독이 의기투합한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촬영현장이다. 극중 인구라는 사내를 연기하는 송강호는 이 건물 꼭대기 층에서 공사장 소장(정인기)을 협박하고 있는 참이다. 근데 이것 참 분위기 묘하다. 송강호가 맡은 인구는 분명 조폭 중간 간부인데 어쩐지 현장 소장한테 한참 밀리는 느낌이다. 소장의 여유 있는 대사가 이어지더니 송강호가 갑자기 소장의 멱살을 낚아챈다. 그리고 소장을 계속 밀어붙이더니 허리를 꺾어 11층 아래로 떨어뜨릴 것 같은 자세로 멈춘다. 카메라가 모습을 충분히 담을 때까지 그 불편한 자세로 꼼짝 않고 서 있던 두 배우는 한재림 감독의 '컷!'소리가 나자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여러 차례 위치를 바꿔 같은 장면을 반복한 후에야 이 묘한 분위기의 아슬아슬한 협박 장면이 완성됐다.
<우아한 세계>는 주인공 인구를 비롯해 대부분 등장인물의 직업이 조폭이지만, 여느 조폭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비장미가 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구잡이 코미디는 더더욱 아니다. 인구는 조폭 중간 간부이자 동시에 대한민국의 보통 가장이다. 그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은 주먹질하고 폼 잡는 폭력배들의 공간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택한 직장일 뿐이다. 폭력배로 일하며 차근차근 살아와 중간 간부까지 된 인구에겐 아내와 유학중인 아들, 그리고 딸 하나가 있다. 그런데 요즘 사춘기에 접어든 딸이 이상하다. 남다른 아빠의 직업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인구를 아빠로 인정치 않으려 한다. 인구는 조직폭력배 간부로서 보다 좋은 아빠로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 길이 그리 순탄치 만은 않다. <우아한 세계>엔 ‘좋은 아빠’와 ‘조폭 간부’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득하다.
이런 점에서 이날 촬영은 영화의 성격을 매우 잘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다. 인구는 잔뜩 열이 올라 공사장에 오지만, 막상 와보니 엘리베이터가 없다. 한껏 폼 잡고 부하들을 거느린 채 왔건만 이 난감한 현실 앞에 인구는 씩씩거리며 11층을 계단으로 올라간다. 옥상에선 소장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또 한 번 당한다. 인구의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모습과 아이러니한 상황은 바로 <우아한 세계>가 반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그다지 우아하지 못한 현실의 자화상인 셈이다.
한재림 감독은 "이게 바로 현실”이라고 못 박는다. 실제 조직폭력배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을 들어봤다는 그는, 현실은 지금까지의 영화에서 다룬 조직폭력배들의 비장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송강호 역시 한 감독의 이 같은 아이디어에 공감했다. 송강호는 “<연애의 목적>을 무척 인상 깊게 봤는데, 지난해 11월 한재림 감독의 아이디어를 듣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다"며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함께했다고 말한다. 이 외에 인구의 아내 역으로 '미시 탤런트'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박지영이, 인구의 절친한 친구이자 상대편 조직 간부로는 오달수가 출연한다. 5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며 만들어낸 <우아한 세계>는 내년 1월께 그 아이러니하고도 우아한 자태를 드러낼 예정이다.
사진 김병준 |